대설주의보
윤대녕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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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설주의보  - 최승호

해일처럼 굽이치는 백색의 산,
제설차 한 대 올 리 없는
깊은 백색의 골짜기를 메우며
굵은 눈발은 휘몰아치고,
쪼그마한 숯덩이만한 게 짧은 날개를 파닥이며……
굴뚝새가 눈보라 속으로 날아간다.

길 잃은 등산객들 있을 듯
외딴 두메마을 길 끊어놓을 듯
은하수가 펑펑 쏟아져 날아오듯 덤벼드는 눈,
다투어 몰려오는 힘찬 눈보라의 군단,
눈보라가 내리는 백색의 계엄령.

쪼그마한 숯덩이만한 게 짧은 날개를 파닥이며……
날아온다 꺼칠한 굴뚝새가
서둘러 뒷간에 몸을 감춘다.
그 어디에 부리부리한 솔개라도 도사리고 있다는 것일까.
길 잃고 굶주리는 산짐승들 있을 듯
눈더미의 무게로 소나무 가지들이 부러질 듯
다투어 몰려오는 힘찬 눈보라의 군단,
때죽나무와 때 끓이는 외딴집 굴뚝에
해일처럼 굽이치는 백색의 산과 골짜기에
눈보라가 내리는 백색의 계엄령.


  시대를 대표하는 문학을 돌아보면 아득한 느낌이 든다. 1980년대 폭압적 정치현실과 사회적 혼란을 드러내는 작품들이 많다. 최승호의 「대설주의보」는 한 발짝 떨어진 자리에서 우회적으로 ‘백색 계엄령’을 선포했다. 곽재구의 ‘은행나무’, 이성부의 ‘벼’ 같은 시와 함께 최승호의 ‘대설주의보’는 한 시대를 상징하는 시가 되었다.

  윤대녕의 신작 소설집 『대설주의보』의 제목은 곧바로 최승호를 연상시켰다. 윤대녕은 작가의 말에서 최승호에게 제목을 허락받았다는 내용을 적고 있어 연상작용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했다. 하지만 시와 소설의 내용은 무관하다. 곽재구의 ‘사평역에서’를 읽고 임철우가 ‘사평역’이라는 소설을 쓴 것과는 거리가 좀 있다. 제목이 같다고 해서 상징적 의미가 동일하지는 않다. 다만 대설주의보라는 말이 주는 눈의 중량감, 백색의 공포와 혼란 등의 이미지는 윤대녕의 소설에서도 그대로 차용된다.

  일곱 편의 단편이 묶인 이번 소설집은 『제비꽃』 이후 그를 기다린 많은 독자들에게 단비처럼 충분하게 갈증을 풀어준다. 책장을 덮는 순간 다음 책을 기다리게 하는 작가를 가졌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윤대녕의 소설은 늘상 변함없는 것처럼 읽히지만 조금씩 변하고 있다. 『은어낚시통신』으로 80년대 소설의 문을 닫았던 그는 이제 아이러니하게도 80년대를 대표하는 시와 동일한 제목인 『대설주의보』로 2010년대의 문을 열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느 평론가의 말대로 ‘존재의 시원’을 끊임없이 탐구하는 일에 지친 것이 아니라 또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작업을 줄기차게 해 나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싶다. 평단과 독자들에게 호평을 받으며 꾸준히 자기 세계를 구축해가는 행복한(?) 작가 윤대녕의 앞으로도 계속 기다릴 필요가 있다. 

  『제비꽃』이 출간됐을 때 예스 24 독자와의 대담에서 그를 만났던 기억이 새롭다. 이대 후문 북카페에서 어느 독자가 ‘소설이 되지 않는 이야기를 소설로 쓴다’는 이야기를 했다. 내가 쓴 리뷰였음을 작가는 기억하고 있을지 모르겠다. 두 시간 이상 이어진 대담으로 가까이서 본 그의 모습은 소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작가의 소설 속 주인공들을 만나고 있다는 생각은 나만의 착각이겠지만 즐거운 추억이다.

  이 책에 수록된 일곱 편의 소설들은 단편이면서 장편으로 읽힌다. 유사한 인물들 혹은 비슷한 사건들이 중첩되는 것은 아니지만 개인적 상황, 마음의 갈피들이 끊어진 듯 보이지 않게 이어져 있는 것 같다. ‘보리’는 ‘정희’를 연상시키고, ‘수연’이는 ‘은주’를 떠올리게 한다. ‘해란’이가 ‘연미’고, ‘혜경’이 울산 화장품점 아가씨로 보인다. 이렇게 주인공들이 선명하면서도 중첩되는 것은 이 소설집이 단순한 단편 모음이 아니라 유기적인 구조물로 보이게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보통 한 작가의 소설집을 읽다보면 파편화된 단편들이 뒤섞여 인상적인 한 두 편을 제외하고는 기억조차 희미해진다. 그런데 『대설주의보』는 한 편 한 편이 선명하게 각인된다. 그렇게 윤대녕의 문체와 감각이 오롯이 전달되는 것은 개인적인 취향 뿐만 아니라 그의 소설이 가진 진정성의 힘은 아닐까? 결국 인간이 벗어날 수 없는 일상에 대한 환멸 속에서 길어 올리는 필연적 구멍 같은 것은 아닐까? 현실에서 모든 우연을 필연으로 만들어 버리는 힘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극복할 수 없는 간극 때문인지도 모른다. 메울 수 없는 그곳에 대한 미련과 그만큼의 거리를 유지하려는 간절함이 팽팽한 긴장을 만들고 그 긴장의 끈을 조율하는 솜씨는 윤대녕 소설의 가장 큰 매력이다.

늘 그리워하지는 않아도 언젠가 서로를 다시 찾게 되고 그때마다 헤어지는 것조차 무의미한 관계가 있다. - ‘대설주의보’, 101쪽

  표지를 벗겨내고 소설을 읽다가 처음 밑줄 그은 문장이다. 나중에 표지 카피로 썼음을 확인하고 편집자를 떠올려 보았다. 윤대녕이 말하는 그 관계는 말해지는 순간 그것이 아닌 관계가 될 수 있다. 하지만 현실에서 우리가 맺는 수많은 관계 속에 그 말의 진실이 숨어 있다. 확언할 수 없는 미래, 불투명한 현재, 아득한 과거 속에서 서로 상처 받는 인간 군상의 모습들을 객관적 거리에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한 개인의 내면의 문제로 몰아가는 작가의 태도는 오히려 절실함에서 독자들을 압도한다. 비현실적 인물들을 보는 거리감이 아니라 나사가 하나씩 빠져버린 사람들의 무감함이 오히려 우리를 돌아보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한 번 확인한다. 상처는 대개 스스로 받는다는 사실을.

“뭐 꼭 또래를 사귀라는 법은 없지. 하지만 모쪼록 상처에 대비하거라. 상처라는건 대개 스스로 받는거니까.” - ‘대설주의보’, 136쪽

  가끔 윤대녕의 소설을 읽다가 현실 속의 나를 객관적으로 보게 된다. 아니 내 주변 사람들을, 그들과의 관계를 돌아본다. 그래서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 문장에 혹은 관계의 잔인함에 머리 숙여 사죄드린다. 서로를, 자신을 속이며 살아가는 우리를 위하여!

도대체 우리는 무슨 일을 하며 나이를 먹어가고 또 사람들과 어떤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것일까. 사는 게 모두 어리석고 잔인한 속임수라는 생각이 들었다. - 윤대녕, ‘도비도에서 생긴 일’, 234쪽

  거대한 서사도, 기막힌 사건도, 처음 듣는 이야기도, 특별한 인물도, 가고 싶은 배경도, 자극적인 표현도, 없다, 윤대녕의 소설에는. 하지만 여전히 그의 소설이 매력적인 이유는 평론가 신형철의 말대로 “시를 엿보는 소설도 있지만 시를 통과한 소설도 있다는 것을, 남자와 여자는 완전히 만날 수도 완전히 헤어질 수도 없다는 것을 나는 그의 소설에서 배웠다.”

세상 모든 이들이 저기 언덕 너머에 숨어 있는 달리아 밭처럼 뜨거운 마음으로 생을 살아가기를 바라며, 삼가 두 손 모음. - 윤대녕, ‘여름, 여행’, 276쪽

오늘도 삼가 두 손을 모으고 하루의 생을 마감한다.


100407-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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