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 법을 만나다 - 예술의 자유와 법의 구속을 말한다
박홍규 지음 / 이다미디어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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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법과 예술은 삶의 갈등이라는 동일 현상을 함께 다루고, 위대한 예술 작품은 법이 지향해야 할 인권의 신장을 지향한다. 그런 예술이 우리에게 없는 것은 예술가들의 사고와 경험 및 시야가 좁기 때문이고, 사회 전반의 지적 수준과 폭, 법치가 후진성을 띠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인권의식이 낮은 탓이다. - P. 44

  우리 사회에서 예술가는 정치가나 법률가의 역할과 활동범위보다 좁다. 이렇게 단정적으로 말하는 것은 예술가들에 대한 비난과 냉소를 넘어 모욕에 가깝다. 자유롭게 사유하고 활동할 수 없는 사회적 상황과 역사적 맥락을 탓하기 이전에 기존 질서에 온몸으로 저항하는 몸짓이 부족했다는 점을 반성해야 할 것이다. 언제나 그렇듯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다. 하지만 누구나 할 수 생각과 아무나 할 수 있는 행동을 하는 것은 예술이 아니다.

  적어도 예술은 네모난 틀에서 벗어나 규범과 기존 질서에 의문을 던지고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미적 성취를 이뤄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인간이 본능적으로 미의식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하지만 순수한 미적 감동은 오로지 자연과의 조화로움에서 기인한다. 순응적 질서와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이끌어 내는 안일한 역할은 조금만 노력하면 누구나 도달할 수 있는 경지가 아닐까. 기술이 아닌 예술은 모방이 아닌 창조여야 하며 새로운 질서와 낯선 아름다움을 만들어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사람이 살아가는 사회는 완고한 질서와 규범이 자리 잡고 있으며 예외적인 일탈 행동과 틀에서 벗어난 생각을 좀체로 용납하지 않는다. 마치 학교교육처럼. 하지만 예술가는 바로 이런 틀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무질서한 세계에 새로운 질서를 부여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따라서 법과 예술은 상충될 수밖에 없는 운명에 놓여 있는 것이다. 박홍규의 『예술, 법을 만나다』는 화해할 수 없는 둘의 관계를 조망하는 책이다.

  『예술, 정치를 만나다』에서 예술가도 사회를 떠나 살 수 없는 정치적 인간임을 확인한 저자가 이번에는 전공인 법과 예술의 관계를 파헤친다. 평소 폭넓은 인문학적 사유를 바탕으로 하나의 주제를 꼼꼼하게 짚어나가는 저자 특유의 솜씨를 확인할 수 있는 책이다. 이 책은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예술과 법의 충돌을 이야기한다. 자유분방해야 하는 예술과 빈틈과 오차를 허용하지 않을 것 같은 법은 한 이불을 덮을 수 없다. 법과 예술의 행복한 만남은 애당초 불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책의 목적은 예술과 법의 조화로움을 추구한다. 두 세계는 불행하게 만났고 지금도 여전히 서로의 영역에 대한 이해 부족과 자신의 영역에 대한 고집으로 불편한 관계일 수밖에 없다. 이 불편한 공존을 위해 무엇이 필요한 것인지 독자들은 이 책을 통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저자가 가진 예술에 대한 깊은 이해와 인문학에 대한 해박한 지식은 이 책을 단순히 예술과 법의 충돌과 화해에 그치지 않고 즐거운 예술사, 폭넚은 인문학의 성찬으로 만들고 있다.

  프롤로그에서 정의의 여신상과 법의 정의를 일갈하고 1, 2장에서 법과 예술의 행복한 그리고 불행한 만남을 역설한다. 이후에는 영화 속에 나타난 법의 모습을 살펴본다. 인권과 영화, 재판 영화는 물론 현실에서 법으로 금지된 영화에 이르기까지 현실의 법과 영화 속의 법을 함께 돌아본다. 그리고 호메로스에서 괴테, 19세기, 20세기 문학과 법을 살펴본다. 음과 법, 미술과 법은 물론이다. 이렇게 크게 영화, 문학, 음악, 미술과 법의 관계를 고찰하는 동안 독자들은 자연스럽게 예술이 인간을 떠나 존재하기 힘들 듯이 인간과 가장 멀고도 가까운 법 또한 예술과 뗄 수 없는 관계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결국 인간이 법의 테두리 안에서 사는 존재이고 예술은 그 인간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법은 예술의 영원한 주제이면서 인간의 존재 양상을 살피는 도구가 된다. 현실적으로 억압의 도구가 되고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며 예술가들의 상상력을 제한하는 부정적 역할을 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인간과 법의 관계를 살피고 억압과 구속의 고리를 끊고 어두운 이면을 드러낼 수 있는 것 또한 예술의 중요한 역할이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한없이 자유로운 사회를 꿈꾼 예술가가 없듯이 법과 질서를 통해서만 행복한 사회가 이루어질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준다. 조화와 균형은 기준에 따라 전혀 다른 모습으로 우리를 재단한다. 그것이 예술이든 법이든 마찬가지일 것이다. 예술은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유희 본능에서 출발한다. 일차원적인 욕망을 통제하고 질서를 부여하는 법은 그 무분별하고 이기적인 욕망을 제한한다. 그래서 어쩌면 서로 다른 얼굴을 한 두 세계가 공존할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듯이 두 세계는 끊임없이 서로를 욕망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자유와 구속의 화려한 이중주, 위험한 줄타기가 바로 예술과 법이 만날 수 있는 자리가 아닐까 싶다.

법학이란 기본적으로 어떤 다툼에 어떤 법을 적용하는 기술에 불과하다. 말자면 컴퓨터의 키보드 같은 것이다. 그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그 기술을 사용하기 전에 가져야 될 가치 판단의 능력이다. 그런데 그 판단 능력은 법학이라는 기술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법이 다루는 여러 현상에 대한 공부로부터 얻어질 수 있다, - P. 168

그래서 저자는 법을 이렇게 말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대단한 권력을 가진 법률가들에게 던지는 통렬한 자기 반성의 촉구가 아닐 수 없다. 기술자가 아니라 인간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는 존엄을 가지려면 법학 지식이 아니라 그 법이 다루는 인간과 현상에 대한 깊은 고뇌와 폭넓은 지식으로부터 출발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대한민국의 만연한 법치(?)의 정신을 진정한 법의 역할과 권리로 착각할 지도 모른다.

 “모든 규칙, 모든 규범은 죽음을 낳는다.”(앙소르) - P. 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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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화 가족
천명관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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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구 [食口] 한집에서 함께 살면서 끼니를 같이하는 사람.

가족 [家族]
1 부부와 같이 혼인으로 맺어지거나, 부모·자식과 같이 혈연으로 이루어지는 집단. 또는 그 구성원. ≒처노(妻孥) .
2 <법률> 동일한 호적 내에 있는 친족.

  가족이 친족으로 이루어진 폐쇄적 집단이라면 식구는 끼니를 함께하는 열린 개념의 공동체를 의미한다. 피는 물보다 진하는 말은 생면부지라도 부모와 자식의 관계가 확인되는 순간 모든 관계의 룰을 넘어서는 것이 한국적 전통의 가족이다. 살을 부대끼며 한 지붕 아래서 함께 살아가는 가족이 곧 식구이고, 식구가 곧 가족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에겐 식구가 곧 가족인지도 모르겠다.

  사회학적으로 모계사회에서 부계사회로 일부다처에서 일부일처로 변화한 것은 권력의 문제로 볼 수 있다. 아직도 지구상에는 모계사회나 일처다부제가 존재하기도 하지만 문명국가의 가족제도는 대체로 일부일처를 기본으로 하고 있다. 박현욱은 <아내가 결혼했다>에서 현대사회의 일부일처제에 대해 재치 있게 의문을 던졌다. 앞으로 가족의 개념이 어떤 형태로 달라지고 그 의미가 어떻게 달라질지 모르겠지만 21세기가 되어도 한국적 개념의 가족은 견고한 형태로 유지되고 있다. 아니 어쩌면 불안한 사회일수록 경쟁적 관계의 사회질서가 강화될수록 가족의 유대는 더욱 공고해질지도 모른다.

  독일의 사회학자 퇴니스가 분류했듯이 가족은 자발적이고 의도적인 목적이 개입된 집단이 아닌 공동사회에 해당한다. 이해관계를 떠나 오로지 혈연관계로 이어져 분리될 수 없는 관계로 치부되는 것이 한국적 개념의 가족이다. 따라서 입양, 재혼, 혼외정사 등에 의해 새롭게 결합된 가족의 경우 한국인의 정서로는 온전한 가족으로 받아들이기 힘들다. 천명관은 이런 예민한 문제로부터 『고령화 가족』을 온전한 가족으로 만들어냈다.

  사십대 후반의 화자인 나는 관객을 배신했다는 평가를 받은, 철저하게 망해버린 영화를 만든 실패한 영화감독이다. 스튜어디스 출신 아내와 이혼하고 신용불량자가 되어 칠순이 넘은 어머니에게 돌아가지만 오십대 초반의 전과자 백수 형이 먼저 방 하나를 차지하고 있다.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시면서 남긴 보상금으로 마련한 연립주택에 이혼하고 중학교에 다니는 딸을 데리고 돌아온 여동생이 결합하면서 다섯 식구가 완성된다. 뒤늦게 다시 모인 형제들은 서로의 상처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하지만 전처 자식인 형과 어머니의 불륜으로 얻은 여동생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과정이 이 소설의 중심축을 이루는 것은 아니다. 소설은 제각각 말할 수 없는 상처와 신산스런 고통을 맛본 가족들이 다시 모이고 흩어지는 과정을 통해 가족의 의미를 묻기 전에 ‘밥벌이의 지겨움’에 대해 이야기한다.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가족이 우리에게 어떤 존재인지 확인하는 과정을 통해 작가가 보여주려 한 것은 그저 통속적이고 특별할 것 없는 우리들의 삶의 단면이 아닐까.

하지만 인생은 영화가 끝난 이후에도 멈추지 않고 계속되는 법이다. 지루한 일상과 수많은 시행착오, 어리석은 욕망과 부주의한 선택……인생은 단지 구십 분의 플롯을 멋지게 꾸미는 일이 아니라 곳곳에 널려 있는 함정을 피해 평생 동안 도망다녀야 하는 일이리라. 애초부터 불가능했던 해피엔딩을 꿈꾸면서 말이다. - P. 45
 
  죽는 순간까지 우리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기대하는 것처럼 우리 삶의 해피엔딩을 꿈꾼다. 그것을 희망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꿈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인생은 영화와 다르다. 작가는 그것이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지루한 일상, 수많은 시행착오, 어리석은 욕망과 부주의한 선택을 이 소설의 곳곳에 배치한다.

  찌질한 인간의 향연이라고 할 만한 인생 막장 드라마와 같은 소설을 읽는 내내 공감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바로 가족이라는 이름의 중심에 선 어머니 때문이었는지 모르겠다. 어머니의 존재는 이 소설에서 ‘밥’으로 대변된다. 먹이는 일에 목숨을 거는 듯한 모습에서 우리는 평범한 어머니를 읽게된다. 가족으로 묶일 수도 없는 3남매의 연결고리가 되어 한 가족을 이끌고 살아온 어머니를 통해 형제들은 각기 또다시 세상 속으로 나아간다. 마치 생의 출발과 종착역 같은 어머니의 모습은 이 소설에서도 여전히 따뜻함의 원천이 된다.

  더불어 『고래』에서 보여주었던 거침없는 상상력과 영화 스토리 같은 사건 전개 걸쭉한 입담과 구라 솜씨는 소설의 흡입력으로 작용한다.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다는 인생에 대해 우리는 다시 한 번 곰곰이 생각해볼 기회를 갖게 된다. 삶의 의미와 가족에 대해.

나는 언제나 목표가 앞에 있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그 이외의 모든 것은 다 과정이고 임시라고 여겼고 나의 진짜 삶은 언제나 미래에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 결과 나에게 남은 것은 부서진 희망의 흔적뿐이었다. - P. 286쪽

  생의 마지막 순간에 얻지도 못하고 말 깨달음은 아닐까. 항상 미래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이 모든 순간과 과정이 바로 우리들의 인생이라는 사실을 언제쯤 인정하게 될지 모르겠다. 부서진 희망의 흔적뿐인 삶이 아니라 즐겁고 행복하게 순간을 즐길 수 있는 인생을 위해 다시 한 번 주변을 돌아볼 일이다. 가족을 넘어 우리 모두의 행복한 삶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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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레인보우의 관심사는 저출산, 고령화, 인플레이션, 은퇴, 연금. 모두 연관되어 있습니다.
    from 낚시질은 이제 그만!!! 레인보우의 보험 뽀개기 2010-05-20 13:50 
    레인보우의 관심사는 저출산과 그리고 고령화입니다. 저출산의 문제와 고령화의 문제는 어떤것이 먼저라고 할 것없이 밀접한 연관성이 있고 해결방안이 필요한 상황입니다. 그렇다면 오늘의 포스팅을 저출산과 고령화로 설정하고 왜 저출산과 고령화가 레인보우의 관심사인지는 부족한 글솜씨로 소개를 해드리겠습니다.유 저출산/고령화 문제는 저 개인적인 문제를 떠나서 사회적으로 어떤 문제를 야기할까요? 먼저 저출산으로 인한 문제를 살펴보겠습니다. 인구재앙은 이미 소리없이..
 
 
 
가장 왼쪽에서 가장 아래쪽까지 - B급 좌파 김규항이 말하는 진보와 영성
김규항.지승호 지음 / 알마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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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낡은 이념의 좌표는 더 이상 우리에게 필요 없다. 왼쪽이든 오른쪽이든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사람답게 살자는데, 모두 함께 행복하자는 데 무슨 설명이 필요한가. 그러나 우리들의 상식은 서로 조금씩 다르고 행복의 기준도 다르다. 그래서 불편한 진실을 외면하고 나와 가족만을 생각하며 살아남기 위한 경쟁에 목숨을 건다. 일견 당연한 이야기로 들리겠지만 삶의 기준과 목표에 따라 우리들의 이야기는 조금 달라질 수 있다.

  사람들은 들을 이야기가 아니라 듣고 싶은 이야기만 듣는다. 김규항의 글을 읽으면서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꿈같은 이야기에 위안을 얻을까 아니면 비현실적인 이상주의자의 이야기로 들을까. 내가 김규항의 글을 읽는 것은 운동화 끈을 다시 묶듯 풀어진 마음을 다잡기 위해서이다. 혼자 걷다 보면 때로는 힘들고 지칠 때가 많다. 더불어함께 걷는 것 같지만 주위를 돌아보면 홀로 사막을 걷는 느낌일 때가 있다. 일면식도 없는 김규항의 말을 듣다보면 어느새 위안을 받게 된다. 정색을 하고 자신의 길을 힘차게 걷고 있는 것 같은 그의 신념이 때때로 부럽고 변함없는 그의 목소리가 가끔 그립다. 그래서 『가장 왼쪽에서 가장 아래쪽까지』를 읽는다.

  전문 인터뷰어 지승호와 인터뷰이 김규항을 보고 자연스럽게 읽게 된 책이다. 스스로 B급 좌파로 칭하는 김규항이 말하는 이 시대의 진보와 영성에 관한 이야기를 듣다보면 우리들의 현실을 전혀 다른 관점에서 보게 된다. 말하자면 나는 김규항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면서 그대로 실천에 옮기지 못하는 부끄러움을 갖고 있는 셈이다. 그것은 우리가 사는 세상이 어떤 곳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지극히 평범한 생각에서 출발한다. 그 출발점이 다르기 때문에 과정도 다르고 결과에 대한 평가와 만족도 다르다. 부끄러움의 기준도 다르고 욕망하는 것도 다르다. 세상에는 참 다양한 사람들이 살아가지만 사람들의 욕망은 크게 다르지 않다. 그것은 이 사회에서 자신의 행복과 타인의 삶을 함께 생각하는 욕망이 아니기 때문이다. 끝이 없는 물질적 욕망, 타인과의 무한 경쟁을 부추기는 자본주의 혹은 신자유주의의 견고한 질서에도 균열이 시작된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이대로 얼마나 우리가 더 버틸 수 있을까.

  인간의 소유욕에 대해 김규항은 권정생 선생님의 말씀을 비려와 “권선생께서 ‘32평짜리 아파트를 마련하는 숙제 때문에 사람들이 바보가 된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어요. 그분은 어떤 사상이나 신념을 실천하기 위해 금욕 생활을 한 게 아닙니다. 욕망이 달랐던 거죠. 다른 욕망을 가진 사람들이 있고, 평범한 사람들 안에도 그런 편린들이 있어요. 세상이 강요하는 욕망을 열심히 좇다가도 순간순간 허무감에 빠지는 건 실은 그런 편린들 때문입니다. 물론 대개는 더욱 욕망을 좇아서 허무를 극복하려 들지만요.”라고 말한다. 우리가 바라는 것, 원하는 삶은 네모난 틀에 담기듯 비슷하다. 그러나 현실은 비참하다. 열여덟 살 아이들의 꿈이 공무원이라니! 날마다 두근거리고 재미있는 일을 꿈꾸며 내일을 향해 달려야 할 아이들의 꿈은 어른들의 꿈을 고스란히 반영한다. 길들여진 아이들과 길들이고 있는 어른들에게 삶은 치열한 경쟁이며 살아남기 위한 전쟁이고 소박한 가족의 울타리 안에서 멈춰버리는 난쟁이의 꿈이다.

  우리 사회에 대한 통렬한 비판과 페미니즘, 2008년의 ‘촛불’과 2009년의 ‘추모’ 등 김규항은 우리들 삶의 갈피들을 읽어내며 구체적인 부분에서 거시적인 담론까지 종횡무진 솔직하고 거침없는 이야기를 쏟아낸다. 인터뷰어 지승호의 인터뷰이에 대한 꼼꼼하고 성실한 준비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이야기들이다. 인터뷰이의 글을 통해 작은 생각 하나, 생각의 단초 하나 놓치지 않고 깊고 넓게 들여다본다. 지승호의 질문을 따라가다보면 자연스럽게 김규항의 시작과 현재를 알게 되고 생각의 흐름을 들여다보게 된다.

  예민한 문제인 ‘예수’에 대한 이야기 또한 흥미롭다. 『예수전』을 통해 이미 기독교와 예수의 본질에 대해 깊이 천착했던 김규항의 영성은 미국까지 날아가 헌금을 강요하고 전직 두 대통령이 지옥에 갔을 것이라고 호언장담하는 김홍도 목사의 믿음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 예수를 바라보는 관점이 다르고 예수의 말을 해석하는 방법이 다르니 당연히 믿음도 다르다.

지승호 : 백만장자들한테 ‘만족하느냐?’라고 묻자 가장 많이 나온 대답이 ‘딱 두배만 더 있으면      좋겠다’고 대답했대요.
김규항 : 그들은 영원히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어요.


  부자와 낙타 이야기를 해석하는 방법은 제각각이다. 아니 그런 이야기에 신경 쓰거나 귀 기울이는 사람은 없다. 부자가 나쁘다는 이야기도 아니다. 만족할 줄 모르는 인간의 욕망, 부자가 되는 방법과 그 출발선, 부자의 기준과 부자가 되려는 목적 따위에 대한 성찰이 없다는 게 문제가 아닐까.

  과연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성찰은 불피요한 것일까. 김규항은 내일을 위한 진보와 미래세대의 교육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한다. 『고래가 그랬어』를 발행한 이유가 아이들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에서 출발했다는 말에 공감한다. 키워지는 대로 길러지고 말하는 대로 믿고 시키는 대로 공부하는 것 같지만 아이들은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이다. 다만 어른들의 잘못된 생각이 심어지고 나밖에 모르는 이기심으로 가득 채워지지만 않는다면.

어떤 사람으로 키우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높은 가격을 가진 사람으로 키우는가가 교육의 목표가 되었어요. 실은 교육이라는 게 사라진 거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사람을 키우는 게 아니라 상품으로 키우는 거죠. 그걸 교육이라고 부르면서 대한민국의 모든 부모들이 올인합니다. - P. 292

  이 말에 나는 ‘아니다’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부모가 있을까? 아이들에게 제시하는 직업, 미래, 꿈에 대해 진지하게 돌아보자. 우리는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기 위해 오늘을 살아가는지 함께 고민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어느 영화의 대사처럼 ‘사람은 못 되도 괴물은 되지 말아야’ 하는 게 아닐까. 김규항의 생각과 삶의 방식에 동의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별로 다를 것도 없는 오십보 백보의 싸움은 되지 않도록 나 스스로부터 진지하게 반성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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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현
김인숙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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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문학에 대한 성찰은 우리들의 삶을 객관화하기 위한 욕망일지도 모른다. 도대체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무엇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 것인지 알고 싶다면 이 시대의 소설을 읽어보자. 주목할 만한 신인들과 기성 작가들의 소설들이 조화를 이루며 풍요로운 읽을 거리를 제공한다면 독자들의 입장에서는 더할 나위 없는 즐거움이다.

  김이설의 『아무도 말하지 않는 것들』은 여덟 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그로테스크한 표지의 얼굴이 우리들의 자화상이 아닐까 싶다. 소설이 어떤 사이와 간격에 대한 충실한 보고서라면 김이설의 단편들은 여성과 남성, 개인과 가족, 모성과 부성 사이를 가로지른다. 극단적인 모습은 사람들이 외면한다. 현실이 아름답지 않지만 굳이 들여다보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김이설은 두 손으로 뺨을 잡고 똑바로 들여다보도록 강요한다. 바로 당신이 살아가는 이 사회의 모습 혹은 타자의 현실이 어떠한지 확인하지 않으면 가만히 두지 않겠다는 듯이 완고하다.

  좋은 글은 불편하고 좋은 음악은 가슴이 아프다. 그렇다면 김이설의 글은 좋은 글이다. 편안하고 푹신한 소파가 아니라 조금 딱딱하고 울퉁불퉁한 의자같다. 하지만 안락한 소파에 앉아 잠을 청하기보다 불편한 의자에 앉아 비오는 창밖을 내다보는 게 좋은 사람에게 권하고 싶은 소설이다. ‘열세살’의 노숙인 소녀, ‘엄마들’의 대리모를 위시해서 ‘하루’의 위선적인 주인공에 이르기까지 김이설은 언제나 부딪칠 수 있거나 낯선 여자들을 골고루 보여준다. 물론 이 여자들의 공통점은 불편함이다. ‘엄마들’의 부족할 것 없는 여자가 대리모에게 밤늦게 찾아와 술이 취한 채 쏟아놓는 넋두리에 대해 작가는 “상대의 반응을 고려하지 않는 고백은 처연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김이설의 소설은 처연하지 않고 낯설고 아프다.

  버려진 아이는 영원히 극복할 수 없는 상처를 안고 살아야 한다. ‘순애보’의 불편한 관계 또한 관계 너머의 관계를 보여준다. 그래서 “보이는 것이 전부다 아니라고, 관계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라고, 꿈은 환상일 뿐이라고, 불쌍한 건 오히려 너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단념은 빠를수록 좋다는 것을 나는 경험으로 알고 있지 않은가.”라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다. 잠언투의 이야기가 때로는 소설 읽기를 방해하지만 나는 누구의 소설에서도 일반화가 가능한 문장들에 밑줄이 간다. 맥락이 다를 뿐, 어쩌면 우리는 똑같은 말을 반복하면서 관계를 맺고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불안한 싱글 연극배우의 비루한 일상과 꿈 없는 미래를 보여주는 ‘막’은 “세상은 늘 두 가지였다. 있거나 없거나. 그건 예쁜가 안 예쁜가, 정상이냐 비정상이냐로 구분되었고 결국 승자와 패자로 나뉘게 했다.”는 말로 삶의 단면을 보여준다. 어떤 자리에서 우리는 자유로울 수 있을까. 올가미처럼 옭죄는 현실 혹은 답답한 미래에서 시들어가는 것은 아닌지.

김이설의 소설은 불편하지만 간과할 수 없는 여자들을 끊임없이 나열한다. 앞으로 그 여자들의 어떤 측면을 보여줄지 혹은 그 여자들의 관계와 남성의 이야기를 어떻게 담아낼 것인지 기다려진다. 새로움이 항상 미덕이 될 수는 없으나 그녀만의 새로운 영역은 무엇일지 조금 더 읽어봐야겠다. 나는 기꺼이 그녀의 소설을 읽을 준비가 되어 있다. 그에 비해 박솔뫼의 장편소설 『을』은 독특한 감수성과 분위기를 지닌 장편 소설이다. 제1회 자음과모음 신인문학상 수상작인 이 소설은 사람과 사람의 관계망을 집합체로 보여준다. 하나의 존재는 또 다른 존재에 의해서만 설명될 수 있을 것 같은 사람들이 있다. 제 홀로 서 있는 것조차 불편한 존재들이 있는 법이다.

  을과 민주. “이민주는 방을 떠남으로 더 이상 ‘민주’일 수 없었다.”는 문장은 민주보다 비어있어 채울 수 있는 공간인 방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된다. 사람과 관계로 시작한 듯하지만 호텔방에 대한 공간이 먼저 다가온다. 익숙한 소설적 구성과 배치가 아니라 잠시 머물다 떠나는 의미의 호텔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의 일회적 혹은 단편적 관계를 오히려 전면적, 복합적 관계로 이끌어 낼 수 있는 공간을 보여주고 싶었던 건 아닐까.

을은 풀리지 않는 기호와 오래된 신호 같은 것을 사랑했다. 그렇다고 그것으로 어떤 비밀을 밝혀내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을은 그것을 따라가는 과정, 풀어내는 과정에 매혹되었을 뿐이다. - P. 21

  밑줄이 남아 있는 문장은 그대로 소설에 대한 인상이 되고 인물에 대한 평가가 된다. 이 소설은 낯설고 신선하다. 그것은 을이 따라가는 과정 때문이 아니라 을이 관계 맺는 방식 때문이 아닐까 싶다. 기호와 오래된 신호 같은 것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따라가는 과정에 매혹되는 것이 독자들이 할 일처럼 여겨진다. 깊은 갈등도 흥미진진한 사건도 없다. 빛바랜 사진처럼 탈색된 이미지와 지루한 웅얼거림이 반복된다. 하지만 나는 그 조용한 웅얼거림에 귀 기울였다. 그래서,

민주의 사려 갚음은 한 사람을 향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향한 공평한 것이었다. 그 말을 달리 하자면 민주의 무관심은 지극히 공평했다. 하지만 민주는 대개 늘 사려 깊었고 주변의 사람들은 민주의 사려 깊음이 무관심으로 바뀌는 과정을 잘 알아채지 못했다. 물론 무관심이 사려 깊음으로 녹아드는 과정도 말이다. 그것이 민주의 예의 바름이었다. - P. 38

와 같은 문장을 읽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열정이 사라진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도대체 어떤 모습인가. 민주처럼 무관심을 공평하게 나누어주며 스스로를 위로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예의바름의 위악을 즐기고 있는 건 아닌가 말이다. 소설 속의 인물들은 결국 현실 속의 나와 타자 그리고 세계와의 관계를 묻는 일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나의 정체성도 너에 대한 사랑도 세상에 욕망도 완성되는 순간 사라진다. 아니 영원히 완성되지 못한 채 부끄러워진다. 그것이 관계에 대한 쾌락이 아닌가. 정여울은 작품해설에서

인간은 관계의 쾌락을 즐길 때 그 쾌락이 둘 사이의 배타적인 것이기를 바란다. 그러나 쾌락은 언제나 흐르는 것이며 절대로 멈추지 않는 것이 쾌락의 본질이기에, 그리하여 고정된 시공간에 가둘 수 없는 것이기에, 그리하여 누구도 소유할 수 없는 것임을 우리는 또한 알고 있다. - P. 220

라고 일침을 가한다. 쾌락의 본질은 소유할 수 없다 사실을 부정하려는 많은 사람들에 대한 안타까운 연민이 이 소설을 읽는 또 하나의 즐거움이다. 그러나 시간을 조금만 건너뛰면 인간이라는 존재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세상을 살았다. 가련한 인간 『소현』은 머나먼 이국땅에서 인간이 아니었다. 조선의 세자로 살아간 그의 한숨과 삶의 결을 따라가는 김인숙의 미려한 문체는 김훈의 그것을 넘어선다. 지나치게 섬세하고 화려해서 지루할 지경이다.

  실존했던 한 인간을 따라가는 일이 소설가에게는 어떤 고통이나 운명이었을까. 자신의 한 순간을 과거의 누군가에게 완전히 몰입하는 것은 즐거운 고통이었을 것이다. 왕이 되지 못한 세자. 그의 한과 눈물 그리고 한 인간으로서 겪어야했던 고뇌와 회한을 보여주는 것이 이 소설의 목적이었다면 독자들에게는 충분히 전달되고도 남음이 있다. 만상과 막금, 흔과 석경이라는 흥미있는 인물들이 등장하지만 결국 ‘소현’으로 귀결되는 작가의 관심은 굴욕의 역사도 아니고 동방의 작은 나라의 비루함도 아니다. 한 인간에 대한 연민이며 운명에 대한 안타까움이다.

정복자의 세상, 정복자의 세월이었다. 세자가 문득 어금니를 물고 생각했다. 부국하고, 강병하리라. 조선이 그리하리라. 그리되기를 위하여 내가 기다리고 또 기다리리라. 절대로 그 기다림을 멈추지 않으리라. 그리하여 나의 모든 죄가 백성의 이름으로 사하여지리라. 아무것도, 결코 아무것도 잊지 않으리라. - 김인숙, <소현>, 316쪽

  한 군데 밑줄 치고 책장을 덮으니 띠지와 일치한다. 울분에 찬 소현의 독백은 시대를 건너 작가의 상상력으로 부활한다. 독자들도 물론 김인숙의 소설을 ‘결코 아무것도 잊지 않으리라.’


100426-035~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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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순간의 역사 한홍구의 현대사 특강 2
한홍구 지음 / 한겨레출판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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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년에 우리는 두 명의 전직 대통령을 보냈다. 21세기의 시작은 20세기 초반의 흐름만큼이나 격동기를 거치고 있는 느낌이다. 바보 노무현은 대통령 당선만큼이나 극적인 모습으로 세상을 떠났다. 2004년 대통령 탄핵이라는 초유의 사태를 거쳐 이명박 정권의 등장, 노무현의 자살과 뒤이은 김대중의 죽음으로 우리는 두 명의 전직 대통령을 한꺼번에 보냈다. 노무현은 황혼녘의 부엉이가 되어 날아간 것이 아니라 새벽녘에 부엉이 바위에서 자살했다. 그리고 천신만고 끝에 쌓아올린 민주주의의 기틀이 무너지는 모습을 우리는 비명 소리 한번 지르지 못하고 목격하고 있다. 용산참사를 필두로 일련의 사태들은 ‘설마’를 현실로 만들고 있다. 지금 이 순간의 역사는 빠른 속도로 뒷걸음치며 과거를 또 다른 미래로 만들어가는 중이다.

  한홍구의 『대한민국史 1~4』, 『특강』에 이은 『지금 이 순간의 역사』는 대한민국의 근현대사에 대한 뼈아픈 성찰이며 진실에 접근하기 위한 필수적인 프리즘이다. 역사는 어차피 역사가의 주관적 해석에 불과한 것일지 모르지만, 객관적 사실의 흐름을 연속선상에서 이해하는 것은 현실을 이해하기 위한 필수적인 과정이다. 이 책은 ‘지금-여기’에 서 있는 우리의 모습을 알기 위해 필요한 조감도라고 볼 수 있다.

루쉰이 한 얘기처럼 어디에고 처음부터 길이 나 있는 법은 없다. 그것을 알면서도 다들 새 시대의 첫발을 떼는 것을 주저하고 있다. 한 30여 년 역사를 공부하고 나니 남는 생각은 한 번도 역사에서 길이 복잡한 적이 없었다는 점이다. 우리의 생각이 복잡했을 뿐이다. - P. 7

  ‘바뀐 것과 바뀌지 않은 것’이라는 머리글에서 한홍구가 술회한 것처럼 역사에서 길이 복잡한 적이 없었다. 다만 우리의 생각만 복잡했을 뿐이다. 보다 많은 사람들이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그 길을 가면 된다. 길이 없다면 만들면 된다. 완고한 현실에 순응하자고 하면 기득권에 편입하기 위한 소수의 행복과 권력을 쟁취하기 위한 피비린내 나는 무한 경쟁 속에 모든 사람이 부나방처럼 달려들 수밖에 없다. 행복은 그곳에 있지 않다는 것은『꽃들에게 희망을』 같은 책을 통해 아이들도 알고 있지만 그것이 현실이 되는 일은 왜 어려운 것일까?

  자본과 권력 - 무소불위의 힘을 가진 욕망의 블랙홀. 그것이 다수의 행복과 더불어 함께 잘 살 수 있는 길을 가로막고 독점하는 있는 소수를 위해 남용되는 역사의 한 복판에 서 있는 우리는 도대체 어디에서 길을 찾아야 하는 것인가. 가장 손 쉬운 방법 중에 하나는 바로 역사를 돌아보는 일이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왔고 또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는 것만큼 현명한 방법을 찾지 못할 것이다. 과거의 시행착오를 통해 현재의 문제를 개선하는 일이 문명을 이룩한 인간 역사의 역할과 기능이다. 머나먼 선사시대의 이야기가 아니라 불과 몇 십 년 전의 이야기가 반복되는 현실은 얼마나 참혹한가. 그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한다면 눈 뜬 장님의 시대를 건너갈 수밖에 없다.
 
  현실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은 계급과 계층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문제는 자신의 계급적 이익에 반하는 생각과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다. 자신이 속한 계층적 문제의식을 공유하지 못한 채 흑백 논리의 이분법적 사고와 극단적 지역주의에 기반한 투표 행위가 어떤 결과를 초래하고 있는지 우리는 온몸으로 경험하고 있다. 그것은 보수와 진보의 대결이 아니라 민주와 반민주의 대립이며 역사의 발전과 퇴행의 갈등일 뿐이다. 누구를 위한 혹은 무엇을 위한 정책과 제도인가를 놓고 사람들은 늘 똑 같은 기준을 제시한다. 그런데 그것을 바라보는 관점은 왜 다른가?

한국이 얼마나 민주화되었느냐고 묻는다면, 노무현 같은 사람이 대통령이 될 만큼 민주화되었다고 얘기할 수 있다. 한국이 얼마나 민주화되지 않았냐고 묻는다면, 노무현 같은 대통령이 벼랑에서 뛰어내려야 할 만큼 민주화되지 않았다고 얘기해야 한다. - P. 9

  용산참사와 노무현 전 대통령 자살을 통해 확인된 공인된 국가 권력의 횡포를 통해 우리는 무엇을 배웠나. 어떤 경찰, 검사, 기자, 정치인이 되라고 가르칠 수 있을까? 우리는 아이들에게 ‘정의롭게’ 살라고 가르치고 있나? 이 책의 저자 한홍구는 울분에 찬 목소리로 이렇게 외친다.

우리 역사에서 지난 600년 동안 부모들이 비겁한 교훈을 가르쳐왔다는 겁니다. 조선시대 내내 권력에 도전하면 모난 돌이 정 맞고, 귀양 가고, 멸문지화를 당했고, 독립운동하면 3대가 개고생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다 보니 아무도 젊은이들에게 정의롭게 살라고 가르치지 못하는 사회가 되었다는 거죠. - P. 269

  1960년 4. 19와 1980년 5. 18에 대해 아는 세대와 모르는 세대가 있다. 1991년을 기점으로 학생운동은 사라졌다. 시민사회가 그 역할을 대신할 정도로 민주주의가 완성된 것으로 우리는 착각한 것일까? 이 책은 5. 18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1987년 6월로 이어진 현대사의 흐름과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으로 이어지는 전직 대통령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과정은 바로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과정이기 때문에 역사라기 보다 철지난 잡지나 빛바랜 신문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하지만 그 기분이 너무 우울하다는 데 문제가 있다.

  대한민국처럼 다이나믹한 정치적 사회적 변화를 겪는 국가는 세계사에서도 찾기 힘들다. 신산스런 역사의 한 복판에서 피를 흘린 사람들은 힘없는 서민들이었고 평범한 이웃들이었다. 이념과 사상을 떠나 사소한 일상과 행복을 누리고 싶은 사람들, 작은 소망과 꿈을 키우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현실은 너무 가혹하다.

개천에서 용이 나는 세상, 환경이 아무리 어렵고 척박해도 꿈꾸고 노력하면 지500년을 버틴 조선 왕조도 19세기 들어 '세도정치'라는 극단적인 닫힌 체제로 굳어졌을 때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망해버렸습니다. 지렁이도 용이 되는 세상이 진정으로 사람 살 만한 세상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 P. 269

상식과 이성이 통용되고 합리와 논리가 사회의 원칙이라고 말할 수 있는 대한민국의 역사는 언제쯤 쓸 수 있을까. 끝없는 경쟁을 피할 수 없는 사회가 될수록, 승자 독식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이 나날이 가혹해질수록,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이 될수록 ‘지금 이 순간의 역사’는 암울하고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래도 내일은 조금 더 나은 세상이 될 것이라고 위안을 삼고 이렇게 사는 것이 올바른 길이라고 제시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네 꿈이 무엇이냐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 조금만 노력하면 된다고 말할 수 있을까? 공정한 룰과 게임의 법칙을 통해 자유와 평등, 사랑과 평화, 나눔과 배려를 가르칠 수 있을까? 우리의 역사는 지금 어디로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심각하게 생각해 보아야 한다. 최소한 다음 세대에게 올바른 길은 제시해 주어야 하지 않는가. 옳고 그름과 선악의 가치 판단은 아니더라도 삶의 목표와 방법에 대해 고민할 수 있는 시간은 마련해 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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