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현
김인숙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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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문학에 대한 성찰은 우리들의 삶을 객관화하기 위한 욕망일지도 모른다. 도대체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무엇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 것인지 알고 싶다면 이 시대의 소설을 읽어보자. 주목할 만한 신인들과 기성 작가들의 소설들이 조화를 이루며 풍요로운 읽을 거리를 제공한다면 독자들의 입장에서는 더할 나위 없는 즐거움이다.

  김이설의 『아무도 말하지 않는 것들』은 여덟 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그로테스크한 표지의 얼굴이 우리들의 자화상이 아닐까 싶다. 소설이 어떤 사이와 간격에 대한 충실한 보고서라면 김이설의 단편들은 여성과 남성, 개인과 가족, 모성과 부성 사이를 가로지른다. 극단적인 모습은 사람들이 외면한다. 현실이 아름답지 않지만 굳이 들여다보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김이설은 두 손으로 뺨을 잡고 똑바로 들여다보도록 강요한다. 바로 당신이 살아가는 이 사회의 모습 혹은 타자의 현실이 어떠한지 확인하지 않으면 가만히 두지 않겠다는 듯이 완고하다.

  좋은 글은 불편하고 좋은 음악은 가슴이 아프다. 그렇다면 김이설의 글은 좋은 글이다. 편안하고 푹신한 소파가 아니라 조금 딱딱하고 울퉁불퉁한 의자같다. 하지만 안락한 소파에 앉아 잠을 청하기보다 불편한 의자에 앉아 비오는 창밖을 내다보는 게 좋은 사람에게 권하고 싶은 소설이다. ‘열세살’의 노숙인 소녀, ‘엄마들’의 대리모를 위시해서 ‘하루’의 위선적인 주인공에 이르기까지 김이설은 언제나 부딪칠 수 있거나 낯선 여자들을 골고루 보여준다. 물론 이 여자들의 공통점은 불편함이다. ‘엄마들’의 부족할 것 없는 여자가 대리모에게 밤늦게 찾아와 술이 취한 채 쏟아놓는 넋두리에 대해 작가는 “상대의 반응을 고려하지 않는 고백은 처연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김이설의 소설은 처연하지 않고 낯설고 아프다.

  버려진 아이는 영원히 극복할 수 없는 상처를 안고 살아야 한다. ‘순애보’의 불편한 관계 또한 관계 너머의 관계를 보여준다. 그래서 “보이는 것이 전부다 아니라고, 관계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라고, 꿈은 환상일 뿐이라고, 불쌍한 건 오히려 너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단념은 빠를수록 좋다는 것을 나는 경험으로 알고 있지 않은가.”라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다. 잠언투의 이야기가 때로는 소설 읽기를 방해하지만 나는 누구의 소설에서도 일반화가 가능한 문장들에 밑줄이 간다. 맥락이 다를 뿐, 어쩌면 우리는 똑같은 말을 반복하면서 관계를 맺고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불안한 싱글 연극배우의 비루한 일상과 꿈 없는 미래를 보여주는 ‘막’은 “세상은 늘 두 가지였다. 있거나 없거나. 그건 예쁜가 안 예쁜가, 정상이냐 비정상이냐로 구분되었고 결국 승자와 패자로 나뉘게 했다.”는 말로 삶의 단면을 보여준다. 어떤 자리에서 우리는 자유로울 수 있을까. 올가미처럼 옭죄는 현실 혹은 답답한 미래에서 시들어가는 것은 아닌지.

김이설의 소설은 불편하지만 간과할 수 없는 여자들을 끊임없이 나열한다. 앞으로 그 여자들의 어떤 측면을 보여줄지 혹은 그 여자들의 관계와 남성의 이야기를 어떻게 담아낼 것인지 기다려진다. 새로움이 항상 미덕이 될 수는 없으나 그녀만의 새로운 영역은 무엇일지 조금 더 읽어봐야겠다. 나는 기꺼이 그녀의 소설을 읽을 준비가 되어 있다. 그에 비해 박솔뫼의 장편소설 『을』은 독특한 감수성과 분위기를 지닌 장편 소설이다. 제1회 자음과모음 신인문학상 수상작인 이 소설은 사람과 사람의 관계망을 집합체로 보여준다. 하나의 존재는 또 다른 존재에 의해서만 설명될 수 있을 것 같은 사람들이 있다. 제 홀로 서 있는 것조차 불편한 존재들이 있는 법이다.

  을과 민주. “이민주는 방을 떠남으로 더 이상 ‘민주’일 수 없었다.”는 문장은 민주보다 비어있어 채울 수 있는 공간인 방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된다. 사람과 관계로 시작한 듯하지만 호텔방에 대한 공간이 먼저 다가온다. 익숙한 소설적 구성과 배치가 아니라 잠시 머물다 떠나는 의미의 호텔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의 일회적 혹은 단편적 관계를 오히려 전면적, 복합적 관계로 이끌어 낼 수 있는 공간을 보여주고 싶었던 건 아닐까.

을은 풀리지 않는 기호와 오래된 신호 같은 것을 사랑했다. 그렇다고 그것으로 어떤 비밀을 밝혀내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을은 그것을 따라가는 과정, 풀어내는 과정에 매혹되었을 뿐이다. - P. 21

  밑줄이 남아 있는 문장은 그대로 소설에 대한 인상이 되고 인물에 대한 평가가 된다. 이 소설은 낯설고 신선하다. 그것은 을이 따라가는 과정 때문이 아니라 을이 관계 맺는 방식 때문이 아닐까 싶다. 기호와 오래된 신호 같은 것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따라가는 과정에 매혹되는 것이 독자들이 할 일처럼 여겨진다. 깊은 갈등도 흥미진진한 사건도 없다. 빛바랜 사진처럼 탈색된 이미지와 지루한 웅얼거림이 반복된다. 하지만 나는 그 조용한 웅얼거림에 귀 기울였다. 그래서,

민주의 사려 갚음은 한 사람을 향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향한 공평한 것이었다. 그 말을 달리 하자면 민주의 무관심은 지극히 공평했다. 하지만 민주는 대개 늘 사려 깊었고 주변의 사람들은 민주의 사려 깊음이 무관심으로 바뀌는 과정을 잘 알아채지 못했다. 물론 무관심이 사려 깊음으로 녹아드는 과정도 말이다. 그것이 민주의 예의 바름이었다. - P. 38

와 같은 문장을 읽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열정이 사라진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도대체 어떤 모습인가. 민주처럼 무관심을 공평하게 나누어주며 스스로를 위로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예의바름의 위악을 즐기고 있는 건 아닌가 말이다. 소설 속의 인물들은 결국 현실 속의 나와 타자 그리고 세계와의 관계를 묻는 일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나의 정체성도 너에 대한 사랑도 세상에 욕망도 완성되는 순간 사라진다. 아니 영원히 완성되지 못한 채 부끄러워진다. 그것이 관계에 대한 쾌락이 아닌가. 정여울은 작품해설에서

인간은 관계의 쾌락을 즐길 때 그 쾌락이 둘 사이의 배타적인 것이기를 바란다. 그러나 쾌락은 언제나 흐르는 것이며 절대로 멈추지 않는 것이 쾌락의 본질이기에, 그리하여 고정된 시공간에 가둘 수 없는 것이기에, 그리하여 누구도 소유할 수 없는 것임을 우리는 또한 알고 있다. - P. 220

라고 일침을 가한다. 쾌락의 본질은 소유할 수 없다 사실을 부정하려는 많은 사람들에 대한 안타까운 연민이 이 소설을 읽는 또 하나의 즐거움이다. 그러나 시간을 조금만 건너뛰면 인간이라는 존재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세상을 살았다. 가련한 인간 『소현』은 머나먼 이국땅에서 인간이 아니었다. 조선의 세자로 살아간 그의 한숨과 삶의 결을 따라가는 김인숙의 미려한 문체는 김훈의 그것을 넘어선다. 지나치게 섬세하고 화려해서 지루할 지경이다.

  실존했던 한 인간을 따라가는 일이 소설가에게는 어떤 고통이나 운명이었을까. 자신의 한 순간을 과거의 누군가에게 완전히 몰입하는 것은 즐거운 고통이었을 것이다. 왕이 되지 못한 세자. 그의 한과 눈물 그리고 한 인간으로서 겪어야했던 고뇌와 회한을 보여주는 것이 이 소설의 목적이었다면 독자들에게는 충분히 전달되고도 남음이 있다. 만상과 막금, 흔과 석경이라는 흥미있는 인물들이 등장하지만 결국 ‘소현’으로 귀결되는 작가의 관심은 굴욕의 역사도 아니고 동방의 작은 나라의 비루함도 아니다. 한 인간에 대한 연민이며 운명에 대한 안타까움이다.

정복자의 세상, 정복자의 세월이었다. 세자가 문득 어금니를 물고 생각했다. 부국하고, 강병하리라. 조선이 그리하리라. 그리되기를 위하여 내가 기다리고 또 기다리리라. 절대로 그 기다림을 멈추지 않으리라. 그리하여 나의 모든 죄가 백성의 이름으로 사하여지리라. 아무것도, 결코 아무것도 잊지 않으리라. - 김인숙, <소현>, 316쪽

  한 군데 밑줄 치고 책장을 덮으니 띠지와 일치한다. 울분에 찬 소현의 독백은 시대를 건너 작가의 상상력으로 부활한다. 독자들도 물론 김인숙의 소설을 ‘결코 아무것도 잊지 않으리라.’


100426-035~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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