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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순간의 역사 ㅣ 한홍구의 현대사 특강 2
한홍구 지음 / 한겨레출판 / 2010년 3월
평점 :
2009년에 우리는 두 명의 전직 대통령을 보냈다. 21세기의 시작은 20세기 초반의 흐름만큼이나 격동기를 거치고 있는 느낌이다. 바보 노무현은 대통령 당선만큼이나 극적인 모습으로 세상을 떠났다. 2004년 대통령 탄핵이라는 초유의 사태를 거쳐 이명박 정권의 등장, 노무현의 자살과 뒤이은 김대중의 죽음으로 우리는 두 명의 전직 대통령을 한꺼번에 보냈다. 노무현은 황혼녘의 부엉이가 되어 날아간 것이 아니라 새벽녘에 부엉이 바위에서 자살했다. 그리고 천신만고 끝에 쌓아올린 민주주의의 기틀이 무너지는 모습을 우리는 비명 소리 한번 지르지 못하고 목격하고 있다. 용산참사를 필두로 일련의 사태들은 ‘설마’를 현실로 만들고 있다. 지금 이 순간의 역사는 빠른 속도로 뒷걸음치며 과거를 또 다른 미래로 만들어가는 중이다.
한홍구의 『대한민국史 1~4』, 『특강』에 이은 『지금 이 순간의 역사』는 대한민국의 근현대사에 대한 뼈아픈 성찰이며 진실에 접근하기 위한 필수적인 프리즘이다. 역사는 어차피 역사가의 주관적 해석에 불과한 것일지 모르지만, 객관적 사실의 흐름을 연속선상에서 이해하는 것은 현실을 이해하기 위한 필수적인 과정이다. 이 책은 ‘지금-여기’에 서 있는 우리의 모습을 알기 위해 필요한 조감도라고 볼 수 있다.
루쉰이 한 얘기처럼 어디에고 처음부터 길이 나 있는 법은 없다. 그것을 알면서도 다들 새 시대의 첫발을 떼는 것을 주저하고 있다. 한 30여 년 역사를 공부하고 나니 남는 생각은 한 번도 역사에서 길이 복잡한 적이 없었다는 점이다. 우리의 생각이 복잡했을 뿐이다. - P. 7
‘바뀐 것과 바뀌지 않은 것’이라는 머리글에서 한홍구가 술회한 것처럼 역사에서 길이 복잡한 적이 없었다. 다만 우리의 생각만 복잡했을 뿐이다. 보다 많은 사람들이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그 길을 가면 된다. 길이 없다면 만들면 된다. 완고한 현실에 순응하자고 하면 기득권에 편입하기 위한 소수의 행복과 권력을 쟁취하기 위한 피비린내 나는 무한 경쟁 속에 모든 사람이 부나방처럼 달려들 수밖에 없다. 행복은 그곳에 있지 않다는 것은『꽃들에게 희망을』 같은 책을 통해 아이들도 알고 있지만 그것이 현실이 되는 일은 왜 어려운 것일까?
자본과 권력 - 무소불위의 힘을 가진 욕망의 블랙홀. 그것이 다수의 행복과 더불어 함께 잘 살 수 있는 길을 가로막고 독점하는 있는 소수를 위해 남용되는 역사의 한 복판에 서 있는 우리는 도대체 어디에서 길을 찾아야 하는 것인가. 가장 손 쉬운 방법 중에 하나는 바로 역사를 돌아보는 일이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왔고 또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는 것만큼 현명한 방법을 찾지 못할 것이다. 과거의 시행착오를 통해 현재의 문제를 개선하는 일이 문명을 이룩한 인간 역사의 역할과 기능이다. 머나먼 선사시대의 이야기가 아니라 불과 몇 십 년 전의 이야기가 반복되는 현실은 얼마나 참혹한가. 그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한다면 눈 뜬 장님의 시대를 건너갈 수밖에 없다.
현실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은 계급과 계층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문제는 자신의 계급적 이익에 반하는 생각과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다. 자신이 속한 계층적 문제의식을 공유하지 못한 채 흑백 논리의 이분법적 사고와 극단적 지역주의에 기반한 투표 행위가 어떤 결과를 초래하고 있는지 우리는 온몸으로 경험하고 있다. 그것은 보수와 진보의 대결이 아니라 민주와 반민주의 대립이며 역사의 발전과 퇴행의 갈등일 뿐이다. 누구를 위한 혹은 무엇을 위한 정책과 제도인가를 놓고 사람들은 늘 똑 같은 기준을 제시한다. 그런데 그것을 바라보는 관점은 왜 다른가?
한국이 얼마나 민주화되었느냐고 묻는다면, 노무현 같은 사람이 대통령이 될 만큼 민주화되었다고 얘기할 수 있다. 한국이 얼마나 민주화되지 않았냐고 묻는다면, 노무현 같은 대통령이 벼랑에서 뛰어내려야 할 만큼 민주화되지 않았다고 얘기해야 한다. - P. 9
용산참사와 노무현 전 대통령 자살을 통해 확인된 공인된 국가 권력의 횡포를 통해 우리는 무엇을 배웠나. 어떤 경찰, 검사, 기자, 정치인이 되라고 가르칠 수 있을까? 우리는 아이들에게 ‘정의롭게’ 살라고 가르치고 있나? 이 책의 저자 한홍구는 울분에 찬 목소리로 이렇게 외친다.
우리 역사에서 지난 600년 동안 부모들이 비겁한 교훈을 가르쳐왔다는 겁니다. 조선시대 내내 권력에 도전하면 모난 돌이 정 맞고, 귀양 가고, 멸문지화를 당했고, 독립운동하면 3대가 개고생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다 보니 아무도 젊은이들에게 정의롭게 살라고 가르치지 못하는 사회가 되었다는 거죠. - P. 269
1960년 4. 19와 1980년 5. 18에 대해 아는 세대와 모르는 세대가 있다. 1991년을 기점으로 학생운동은 사라졌다. 시민사회가 그 역할을 대신할 정도로 민주주의가 완성된 것으로 우리는 착각한 것일까? 이 책은 5. 18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1987년 6월로 이어진 현대사의 흐름과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으로 이어지는 전직 대통령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과정은 바로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과정이기 때문에 역사라기 보다 철지난 잡지나 빛바랜 신문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하지만 그 기분이 너무 우울하다는 데 문제가 있다.
대한민국처럼 다이나믹한 정치적 사회적 변화를 겪는 국가는 세계사에서도 찾기 힘들다. 신산스런 역사의 한 복판에서 피를 흘린 사람들은 힘없는 서민들이었고 평범한 이웃들이었다. 이념과 사상을 떠나 사소한 일상과 행복을 누리고 싶은 사람들, 작은 소망과 꿈을 키우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현실은 너무 가혹하다.
개천에서 용이 나는 세상, 환경이 아무리 어렵고 척박해도 꿈꾸고 노력하면 지500년을 버틴 조선 왕조도 19세기 들어 '세도정치'라는 극단적인 닫힌 체제로 굳어졌을 때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망해버렸습니다. 지렁이도 용이 되는 세상이 진정으로 사람 살 만한 세상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 P. 269
상식과 이성이 통용되고 합리와 논리가 사회의 원칙이라고 말할 수 있는 대한민국의 역사는 언제쯤 쓸 수 있을까. 끝없는 경쟁을 피할 수 없는 사회가 될수록, 승자 독식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이 나날이 가혹해질수록,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이 될수록 ‘지금 이 순간의 역사’는 암울하고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래도 내일은 조금 더 나은 세상이 될 것이라고 위안을 삼고 이렇게 사는 것이 올바른 길이라고 제시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네 꿈이 무엇이냐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 조금만 노력하면 된다고 말할 수 있을까? 공정한 룰과 게임의 법칙을 통해 자유와 평등, 사랑과 평화, 나눔과 배려를 가르칠 수 있을까? 우리의 역사는 지금 어디로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심각하게 생각해 보아야 한다. 최소한 다음 세대에게 올바른 길은 제시해 주어야 하지 않는가. 옳고 그름과 선악의 가치 판단은 아니더라도 삶의 목표와 방법에 대해 고민할 수 있는 시간은 마련해 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100418-0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