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세대를 위한 세계사 편지 - 역사 교과서를 찢어버려라
임지현 지음 / 휴머니스트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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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책도 마찬가지지만, 역사에 관한 책을 읽기 전엔 항상 버릇처럼 제목을 한참 들여다 본다. 누군가 어떤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이야기의 목적과 방법에 따라 전혀 다른 이야기가 전개되듯이 역사도 마찬가지다. 세계사의 이야기를 시작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면 어떤 목적으로 무슨 이야기를 할 것인지 먼저 확인해야 한다. 대략 갈 길을 짐작하고 거리와 방향을 알고 출발하는 것은 그렇지 않은 것과 많은 차이가 난다.

임지현의 책이라면 일단 방향과 목적이 보이는 듯하다. 뻔한 이야기라는 뜻이 아니라 어떤 방식으로 그리고 어떤 내용으로 그곳에 이르기 할 것인지 궁금해진다. 표지에는 이미 ‘새로운 세대를 위한’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고 ‘만들어진 역사, 국사와 세계사 교과서를 찢어버려라’는 도발적인 문구가 눈길을 끈다. 다소 자극적이긴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니 놀랄 것은 없다. 다만 얼마나 설득력 있는 이야기와 정교한 논리로 독자들을 설득할 수 있을 것인가의 문제일 뿐.

이 책은 저자의 딸에게 보내는 형식의 역사 이야기를 역사 속 인물들에게 보내는 형식으로 각색한 것이다. 말하자면, 임지현의 『세계사 편지』는 자와할랄 네루의 『세계사 편력』의 형식을 빌려 온 것이다. 형식이야 어찌됐든 책의 내용과 깊이가 누구에게나 읽힐 만큼 훌륭하다.

어떤 사람들의 자유는 다른 사람들의 노동과 희생을 먹고 자란다. - 임지현, 『세계사 편지』, 머리말

비교역사문화연구소를 만들어 본질적인 역사인식에 문제를 제기하고 만들어진 역사로서의 민족주의와 국사의 해체를 주장해 온 임지현은 이 책을 통해서도 세계사를 관통하는 편협한 역사인식에 반기를 든다. 19명의 문제적 인물을 등장시켜 말을 건네는 역사학자의 마음을 헤하려 볼 수 있는 책이다. 그들에게 편지를 쓰는 형식이기 때문에 일방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전한다. 하지만 이것은 객관적인 사실들을 토대로 사건을 재해석하면서 독자들을 설득하는 것과 다름없다. 청자를 누구로 상정하든 중요한 것은 역사적 사실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접근 방식이다.

『오리엔탈리즘』의 에드워드 사이드, 『예수살렘의 아이히만』의 저자 한나 아렌트는 물론 김일성과 박정희 그리고 공자에 이르기까지 세계사의 결정적 장면에서 잊지 못할 인물들을 선정했다. 그 면면을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저자의 역사적 관점과 이 책의 의미를 짐작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간단한 인물에 대한 소개와 그 뒤로 이어지는 저자의 편지는 독자에게 새로운 즐거움과 독특한 방식의 역사 이야기를 전해준다.

형식은 내용을 규정한다. 이러한 편지 형식은 일단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인간적인 면모를 드러내는 장점이 있다. 화석화된 인간이 아니라 지극히 인간적이고 평범한 사람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이야기를 풀어낸다. 물론 주된 내용은 독자들을 위해 객관적인 사실을 토대로 한 역사적 사건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접근 방법이다. 저자 특유의 관점이겠으나 비판적이고 노골적인 방식으로 역사의 흐름을 바꿔 놓았을 만한 일들을 회고한다. 일관된 방식으로 역사적 인물들의 잘못을 꾸짖거나 현재의 관점으로 아쉬움을 드러내는 방식은 아니다.

저자는 해박한 세계 역사에 대한 지식과 명료한 해석 능력을 갖추고 있다. 비교 연구가 가능하려면 민족주의와 국가주의에서 벗어난 새로운 관점이 필요하다. 그것은 이 책을 통해 그리고 저자가 써 내려간 편지의 행간을 통해 독자들이 찾아야 할 것이다. 각각의 인물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독자들은 제 3자의 관점을 취하게 된다. 독자에게 직접 서술하는 방식이 아니라 특정한 독자를 염두에 둔 글이기 때문에 책을 읽는 독자들은 다른 사람의 편지를 훔쳐 보는 느낌으로 조금 더 객관적 관점을 갖게 된다.

지나 간 역사에 대한 평가는 사람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 옳고 그름을 따질 수 있는 문제도 아니고 가정법으로 역사를 바라볼 수도 없다. 그것은 그저 현재의 관점으로 지나 간 시간을 돌아보는 하나의 방법에 불과할 지도 모른다. 다양한 방법으로 과거를 재구성하다 보면 새로운 사실이 보이고 숨겨진 진실이 드러나기 마련이다. ‘지금-여기’에 서 있는 우리들의 삶이 결국 과거의 연장선이고 미래의 거울이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세계사를 더듬어 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다.

그래서 저자는 이제 대학생이 되어 버린 딸 ‘희주’에게 역사 공부를 하지 말라고 충고하면서 책을 맺는다. 나도 ‘내’가 서 있는 곳을 파헤쳐 본 후 과거를 돌아봐야겠다. 현재를 알지 못하고 내가 서 있는 곳의 뿌리와 근본을 알지 못한 채 역사를 공부한다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으랴. 지금, 바로 여기를 똑 바로 알지 못할 바에야 역사를 공부하지 말라는 역설적인 책 『세계사 편지』는 그래서 더욱 정밀한 역사 공부의 출발로 삼아야 할 것 같다.

너와 상관도 없는 먼 과거를 파헤치기보다는 우선 ‘네가 서 있는 곳을 파헤쳐라.’ 공식적 역사를 부정하고 밑으로부터 살아 있는 역사를 갈구했던 맨발의 스웨덴 역사가 스벤 린드크비스트의 주장이다. 그러니 지금까지처럼 ‘역사 공부’ 하지 말거라. - 임지현, 『세계사 편지』, 희주에게, 38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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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의 심리학 -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우울증에 관한 심리 치유 보고서
수 앳킨슨 지음, 김상문 옮김 / 소울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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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또 하루가 저물어 간다. 하늘의 빛이 사라지고 어둠이 당도하기 전의 ‘푸른 시간’은 산책과 명상에 가장 어울리는 시간이다. 하루를 마감하고 나를 돌아보며 내 삶을 성찰하기 좋은.

대다수의 사람들은 살면서 상당한 즐거움을 경험한다. 그러나 모든 것을 고려해 보았을 때 삶은 고통이다. 인생의 경험이 부족하거나 어리석은 자들만이 반대로 상상한다. - 조지 오웰

본질적으로 삶이 고통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우리는 조금 더 겸손해질까? 조지 오웰의 말에 공감한다고 해서 경험이 풍부하고 똑똑하다는 말은 아니다. 별 어려움 없이 살아왔거나 오로지 행복해지고 싶은 욕망으로 가득한 사람이 아니라면 인생은 고통스럽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그 고통은 객관화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자신이 짊어진 삶의 무게와 고통에 대해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기도 하고 이를 악물고 참아내기도 하지만 ‘우울증’이라고 하는 병에 걸리기도 한다. 똑같은 불행에 대해서도 사람들은 다르게 반응한다. 동일한 삶의 무게를 느낀다면 세상 사람들은 불행지수도 같겠지만 행복만큼이나 불행의 모습과 형태는 제각각이다. 그것이 어떤 증상으로 나타나느냐에 따라 우울증의 모습도 제각각이다. 다리가 부러지고 피부에 상처가 난 것처럼 마음이 다치고 죽음만큼의 고통을 느끼는데도 사람들은 ‘우울증’에 대해 간과하기 쉽다. 정신병에 대해 사회적 시선과 선입견 때문이다. 그러나 정도의 차이일 뿐 사람들은 한 번씩 지독하게 우울한 시간과 대면하게 된다.

실제 우울증에 걸려 오랫동안 고통 받았던 사람의 이야기는 의사나 상담가의 조언과 충고보다 실질적이고 더 큰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게 된다. 수 앳킨슨은 자신이 겪은 우울증에 대한 이야기를 솔직하고도 진지하게 털어놓는다. 『우울의 심리학』은 바로 이러한 우울증 치료에 관한 치료과정을 밝힌 보고서이다.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우울증에 대한 편견을 벗어버리고 저자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심각한 질병으로서 ‘우울증’에 대한 이야기를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지독한 슬픔과 고통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바로 자신의 이야기처럼 공감할 수 있는 부분들이 많다. 그것이 심각한 증상으로 이어지느냐 아니냐의 차이일 뿐 저자의 이야기는 매일매일 우리 주변에서 겪게 되는 마음의 불행에 관한 보고서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지속 시간과 깊이의 차이일 뿐 사람들은 매일매일 조금씩 불행과 행복 사이를 오고간다. 밝고 긍정적인 사람이라고 해서 스트레스나 불안 그리고 우울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모든 사람이 경험하게 되는 일이라면 지나친 해석일까? 우울증이 얼마나 심각하고 고통스런 질병인지 최근에 자살로 생을 마감한 박용하, 최진실, 이은주 등을 보면 알 수 있다. 자살은 가장 확실하게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는 방법이지만 가장 어리석은 해결방법이기도 하다. 슬픔과 고통을 이겨내는 방법은 사람마다 제각각이겠지만 ‘우울증’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암벽등반’에 비유한 저자의 이야기는 우리가 귀담아 들어야 할 만하다.


우울증의 원인은 각종 스트레스가 아닐까? 프로이트의 말대로 현실원칙과 쾌락원칙 사이의 간극 때문이거나 욕망의 좌절, 극단적 슬픔 등 다양한 원인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우울증의 원인을 알고 잘 대처하는 것도 중요하고 현실생활에서 건강하고 즐겁게 살아가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이 책은 이미 우울증에 걸린 사람들을 위한 책이기 때문에 원인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환자들에게만 유용하다는 뜻은 아니다. 우리 주변에 우울증에 걸린 사람은 의외로 많다. 스스로 드러내지 않거나 숨기려고 하는 경우가 많아서 그렇지 의외로 흔한 질병에 속하는 것이 우울증이다. 감기를 치료하듯이 약 몇 번 먹고 낫는 병이 아니기 때문에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고 굳은 의지와 노력이 수반되어야 완쾌될 수 있는 질병이다. 저자는 바로 이 ‘방법론’에 집중하고 있다. 우울증에서 벗어나기 위한 매우 실질적이고 직접적인 행동 처방을 단계별로 제시하고 있다. 이론적 접근이나 추상적인 개념 설명 보다 실질적인 도움을 받고 싶은 사람에게 적합한 책이다. 환자는 물론 가족과 친구들에게도 큰 도움을 줄 수 있는 책이다.

벌컥벌컥 화를 내는 것은 쉬운 일이다. 누구나 벌컥벌컥 화를 낼 수 있다. 하지만 화를 낼 만한 사람에게 적절한 시간에 적절한 목적을 가지고 적절한 방법으로 화를 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모든 사람이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 아리스토텔레스

이 책에는 우울증과 무관하게 살아가면서 부딪치게 되는 장면들을 다시 돌아보게 하는 말들이 각 장마다 제시되어 있고 본문에도 인용되어 있다. 특히, ‘화’에 대한 이야기에 공감이 간다. 화를 다스리지 못해 화병이 나기도 하고 우울증으로 발전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슬픔과 또 다른 ‘화’에 대해 여러 가지 생각을 해 보았다. 왜 우리는 조그만 일에만 화를 내냐고 물었던 김수영 시인의 말이 떠오른 이유도 개인적 ‘화’가 아니라 사회적 ‘화’를 잘 다스릴 필요도 있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어떤 화든 ‘적절한’ 대상과 목적과 방법을 찾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닌 것 같다.

사람들이 단순히 화를 다스리지 못해서 울화병에 걸린다고 하는데 이 말은 우울증과 화병이 겹친 상태를 말하는 것으로 심각한 경우 죽음에 이르게 하는 병이다. 사람은 외로워서 죽을 수도 있는 나약한 존재이다. 심약한 상태에 빠지는 것은 순간이다. 외향적이고 긍정적인 성격이라고 해서 안심할 수 없다. 우울증은 누구에게나 소리 없이 찾아 올 수 있는 무서운 질병이다. 자각증상이 있지만 심각성을 알기 어렵고 겉으로 드러내지 않기 때문에 정말 심각한 상태에 이르러 타의에 의해 병원에 가는 병이 우울증이다. 주변 사람들의 따뜻한 관심과 사랑이 이 병을 치유해 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저자가 암벽등반에 비유했듯이 힘겹고 두렵지만 스스로 극복하려는 의지는 약물치료보다 우선시된다. 화학 성분의 약품이나 지극한 정성과 사랑만으로 부족하다. 우울증이라는 진단을 받기 전이라도 나 자신의 상태를 점검하고 주변 사람들의 마음을 조금은 읽어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한 『우울의 심리학』은 한번 쯤 자기 점검을 위한 책으로 읽어도 좋을 것 같다.

슬플 때, 사람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들의 처지에 대해서 눈물을 보일 뿐이다. 그러나 화가 났을 때에는 뭔가를 변화시키려고 한다. - 말콤 엑스

우울증에 대한 지나친 두려움도 좋지 않다. 적절한 화는 개인의 발전과 사회의 변화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기도 하다. 인종차별에 맞서 흑인들의 권리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던 말콤 엑스의 말대로 뭔가를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화를 낼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화는 가난하고 슬프고 나쁜 사람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우리는 누구나 화를 내고 산다. 그 화를 겉으로 드러내는지 안으로 삼키는지의 문제일 뿐이다. 참는다고 착하고 긍정적인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적절한 표현과 생활의 변화가 우울증을 미리 예방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인지도 모른다. 저자가 제시하는 암벽등반의 비법을 천천히 따라가다 보면 우울증 환자뿐만 아니라 경계에 서 있는 사람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할 수 있다. 그 깊은 슬픔에서 벗어나기 위한 노력은 누구에게나 중요하며 때때로 생명을 건 힘겨운 싸움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자. 그리고 힘찬 응원의 박수를 보내며, 암벽 등반은 혼자가 아니라 함께 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세상에는 행복하고 부유한 범죄자와 슬프고 가난한데 정직한 사람들이 있다. 선한 사람에게도 나쁜 일들이 생기기 마련이다. 왜 신이 이러한 것을 허락하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 수 앳킨슨, <우울의 심리학>, 28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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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씨 2011-07-21 2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 좀 우울해서 우울증 극복방법을 뒤적거리고 있었는데...
저도 책은 많이 읽지만 아직 소양이 부족한가 봅니다. 이렇게 찾아다니는 걸 보면 말입니다.
맞는 말이네요. 스스로 극복하지 않는 이상 우울증은 계속 뒤를 따라다닐거에요.
잘보고 갑니다.

sceptic 2011-11-16 23:07   좋아요 0 | URL
이겨내시기 바랍니다...세상이 우울한 고로...
 
예상 표절 - 문학과 예술의 전통적 연대기를 전복하여 무한히 확장된 독서의 세계로 빠져들다 패러독스 3
피에르 바야르 지음, 백선희 옮김 / 여름언덕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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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는 말이 모든 표절에 대해 면죄부를 주는 것은 아니다. 새롭다는 것은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을 창조한다는 순수한 의미뿐만 아니라 기존의 것을 변형하거나 재구성하는 것을 포함하는 넓은 의미의 새로움을 포함한다. 특허와 실용신안으로 새로움에 대한 권리를 부여하는 것에 비해 예술품에 대한 권리는 모호하기만 하다. ‘표절’에 대한 논란은 예나 지금이나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지만 분명한 기준과 잣대가 모호하다. 비슷한 것과 그대로 인용한 것의 차이는 보는 사람의 시각과 관점에 따라 다르게 판단될 수밖에 없다.

예술 작품에서 표절은 앞선 시대의 작품을 베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거꾸로 미래의 누군가를 표절한다는 것이 가능한가? 상식적으로 웃어버릴 수 있는 이야기에 대해 진지하게 논의하는 사람이 있다.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이라는 책으로 기발하고 탁월한 견해로 찬사를 받았던 프랑스의 인문학자 피에르 바야르가 이번에는 『예상 표절』이라는 책을 내 놓았다. 피에르는 ‘예상 표절’이라는 낯선 개념을 통해 상식을 뒤집는다. ‘읽지 않는 책’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미래의 어떤 작품을 표절할 수 있다는 발상은 장난스런 발상처럼 들린다. 하지만 이 책은 넌센스 퀴즈를 위한 혹은 사소한 발상의 전환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가령, 볼테르의 셜록홈즈의 모험담을 표절했다거나 모파상이 프루스트를 표절했다고 주장은 구체적인 작품들의 장면을 인용한다. 우연의 일치라고 생각할 수 있는 작품의 선후 관계를 전복적으로 바라보는 작가의 견해는 진지하고 구체적이다. 전통 표절과 구별되는 예상 표절은 쌍방 표절이라는 개념까지 도입하고 있다. 이러한 개념은 단순히 시간의 선후 관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시대를 앞서간 작품에 대한 경외감은 아닐까? 작가의 의도와 무관하게 당대의 흐름과 기법 혹은 연속적인 문학사의 흐름에서 벗어나 독특함에 대한 상찬으로 볼 수는 없을까?

미래를 예측하고 상상하는 능력을 갖춘 작가만이 ‘예상 표절’의 흐름에 동참할 수 있다면 존경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하다. 전통적인 의미의 표절이 비곤한 상상력과 부도덕함의 상징이라면 예상 표절은 오히려 창조적 상상력과 미래 지향적인 작가 정신에 대한 넉넉한 평가를 받아 마땅한 것은 아닐까 싶다. 시대의 흐름을 읽어낼 수 있는 능력은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작가는 그런 의미에서 예상 표절이라는 기발한 개념으로 문학사의 흐름을 입체적으로 조망하고 있다.

미래를 가능한 한 정확하게 묘사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시간의 복잡한 굴곡에 주의를 기울이는 사려 깊은 문학 교육의 으뜸 역할 가운데 하나여야 할 것이다. - 피에르 바야르, <예상 표절>, 190쪽

이 책이 가지는 의미는 단순히 ‘표절’ 자체에 대한 낯선 해석이 아니라 연대기적 서술에 의존하고 있는 문학사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평가에 있다. 입체적이고 낯설게 바라볼 수 있다면 문학사는 단순히 작가와 작품의 시대적 흐름이나 영향관계를 직선적인 흐름으로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신선한 방법에 의해 재구성될 수도 있음을 시사하는 것은 아닐까 싶다. 문학사는 단순한 문학의 역사가 아니라 하나의 작품이 태어나고 독자에게 전달되고 소비되는 과정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다. 피에르 바야르의 숨은 의도는 바로 이러한 전복적 책읽기 - 문학사에 입체적 구성에 대한 시도는 아니었을까?

한 권의 책이 말을 거는 행복한 소수가 될 이 특혜 받은 수신인들을 언급하면서 스탕달은 시간의 한계를 뛰어넘고 동시대인들이 이해하지 못했던 것을 높이 평가할 줄 아는 독자들을 염두에 두었다. 그렇게 그는 한 작가가 다른 시대들과 더불어 생각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 자기 시간의 제약으로부터 해방될 줄 아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암시하고 있었다. - 피에르 바야르, <예상 표절>, 193쪽

스탕달을 통해 전달하고 싶었던 저자의 목소리가 생생하다. ‘스탕달은 시간의 한계를 뛰어넘고 동시대인들이 이해하지 못했던 것을 높이 평가할 줄 아는 독자들을 염두에 두었다’는 말은 바로 예상 표절에 대한 저자의 찬탄을 나타내는 말이 아닌가. ‘한 작가가 다른 시대들’ 즉 미래의 어느 시대에 탄생할 작품에 대해 생각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 ‘시간의 제약’을 벗어났다는 것은 한 작가와 작품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며 새로운 평가를 위한 기준이 될 법하다.

작가와 작품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게 나타난다. 문학뿐만 아니라 인접 예술 분야나 철학과 역사와의 관계 속에서 입체적으로 그 의미를 살펴야 한다. 피에르의 ‘예상 표절’은 이러한 의미에서 새로운 기준과 방법론을 제시하고 있는 재미있는 발상을 엿볼 수 있는 책이다. 또 다시 어떤 책을 통해 독자들에게 새로움을 전해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피에르 바야르는 계속해서 주목할 만한 작가가 되었다. 그의 책도 미래의 누군가를 ‘예상 표절’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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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개는 무엇을 보았나 - 참을 수 없이 궁금한 마음의 미스터리
말콤 글래드웰 지음, 김태훈 옮김 / 김영사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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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발상의 전환. 참 쉬운 것 같지만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일도 아니고 그렇게 쉽게 길러지는 능력도 아니다. 자유롭고 개방적인 사고는 훈련과 노력만으로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다. 다양한 시각과 폭넓은 사유가 필요하지만 꾸준한 독서와 명상, 넉넉하고 여유 있는 마음과 즐겁고 유쾌한 생각들이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지금 벌어지는 현상에 대한 정확한 분석과 이해가 필요하고 무엇보다도 내일을 꿰뚫어볼 수 있는 통찰력이 필요하다.

반성과 성찰의 시간은 과거에 대한 미련이나 현재의 불만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좀 더 나은 미래를 위한 투자이며 삶의 방향과 목적을 새롭게 설정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기도 한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세상은 바보처럼 굴러가기도 하지만 정교한 틀과 빈틈없는 이해관계로 얽혀있기도 하다. 사람들은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이해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동일한 사건에 대해서도 사람들의 생각이 서로 다르고 원인과 결과에 대한 평가도 제각각이다. 그 다양한 견해와 관점이 어디에서 출발했는지 자세히 살펴보자. 말콤 글래드웰은 이 작은 생각의 차이에 대해 명확하고 분석적인 사고를 요구한다.

『아웃라이어』를 읽고 『블링크』를 읽은 다음 말콤 글래드웰의 근작 『그 개는 무엇을 보았나』를 보면서 말콤 글래드웰이 왜 팔리는 작가인가를 다시 확인했다. 비즈니스와 경제에 관한 수많은 책들 가운데 저자의 책들이 빛을 발하는 것은 발상의 전환 때문이다. 자기계발과 경제경영에 가장 근접한 분야를 이야기하지만 접근 방식은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자신의 상품 가치를 높이고 경쟁에서 이기는 방법을 설명하기 위해 치열하고 냉정하게 살아가는 방법을 제시하거나 자신을 채찍질하는 비법을 전수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잘못된 생각에 대해 두런두런 이야기한다.

저자의 목소리는 높고 강하지 않다. 편안하게 들어줄 수 있을 정도만 흥분하고 자신있게 설득할 수 있을 만큼만 주장한다.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저자의 탁월한 능력은 정확하고 방대한 자료조사와 사실에 근거한 주장 때문이라는 1차적인 이유 이외에도 다양한 사례와 미처 생각해 보지 못한 방식으로 접근하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기준과 관점으로 세상을 재단한다. 하지만 타인에 대한 관심과 호기심에서 출발해서 자신의 생각과 왜, 어떻게 다른지 고민해보면 답은 어렵지 않게 구해질지도 모른다. 개를 사로잡는 달인의 몸짓을 통해 그가 개의 어떤 생각과 몸짓을 읽어내는지 궁금한 게 아니라 거꾸로 개가 도대체 무엇을 보았는지 궁금해 하는 태도가 바로 저자의 가장 큰 장점이다.

외골수, 선구자, 마이너 천재들부터 이론과 예측의 그리고 진단, 인격과 성격과 지성에 대한 이야기를 묶은 이 책은 하나의 주제를 향해 정교하게 써내려간 단행본이 아니라 여기 저기 발표한 글들을 묶어 놓은 책이다. 다소 산만하고 일관성이 떨어진다는 약점을 지니고 있지만 다양하고 색다른 느낌의 글들을 색다르게 엮어 읽는 맛이 있다.

어떤 의미에서 행복은 우리가 얼마나 인간의 무한한 다양성에 맞는 방향으로 나아갔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이 말은 때로 우리가 익숙한 것을 즐기는 데서 행복을 찾는다는 사실을 잊게 맞든다. - 말콤 글래드웰, <그 개는 무엇을 보았나>, 86쪽

저자가 이 책을 통해 말하고 싶은 것은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없지만 사람들이 근본적으로 품고 있는 타인의 생각에 대한 의문이다. 왜 나와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는가에서 시작해서 저 사람은 어떻게 저런 생각을 할 수 있는가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알고 싶은 인간의 충동과 본능 속에 숨겨진 비밀은 무궁무진하다. 단순히 심리학이나 생물학적 본능으로 확인할 수 없는 수많은 원인들을 생각해 보는 것이 저자가 우리에게 던진 질문은 아닐까 싶다.

사람은 누구나 행복을 위해 사는 것인지도 모른다. 인간의 그 무한한 다양성에 대한 존중과 그 존중에 걸맞는 이해와 적응의 문제를 생각해 보자. 발상의 전환, 네모난 틀을 깨는 사고, 패러다임의 이동 등 어떤 이름으로 표현하든 중요한 것은 우리의 삶이 조금 달라질 수도 있고 조금 더 행복해질 수도 있다는 자각!

사람들은 오늘도 비슷한 어제를 살고 있을 것이다. 아마 내일도 오늘과 비슷하리라. 내가 왜 이렇게 살고 있는지 또는 내가 그렇게 하고 싶은 것인지에 대한 작은 고민에서 새로운 삶은 시작된다. 변화 가능성에 대한 의심이 아니라 실천하고 부딪치고 또 다시 도전하며 새로움에 대한 갈증을 채워야 한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고정관념의 틀을 가지고 있는가. 그 틀을 벗어나는 데서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 이 책은 저자의 의도와 무관하게 아니 말콤 글래드웰의 다른 책들과 함께 늘 새롭고 신선한 삶의 태도를 요구하는 것 같다. 『블랙 스완』의 저자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의 이야기에서 언급한 것처럼 동일한 패턴이나 예측 불가능성은 어쩌면 한 이불을 덮고 다른 꿈을 꾸는 남녀의 모습과 같다.

우리의 삶이 그러하다. 동일하게 그리고 비슷하게 전개되고 있는 듯 하지만 상상할 수 없는 다양성과 구체적 변화 속에 놓여 있다. 다만 그것들은 어쩌면 모두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삶의 불가해함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불안해하고 믿을 수 없을 만큼 조용하게 견디고 있는 것이리라. 누구나 알고 있는 것 같은 그 차이들 속에 숨겨진 비밀의 문을 찾아내는 것이 저자의 보이지 않는 속삭임은 아닐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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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몽
황석영 지음 / 창비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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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부를 결정하는 건 스피드?

1994년 10월 21일 아침 7시 40분경에 성수대교가 무너져 내리고 교각만 남은 장면을 TV에서 처음 봤을 때 황당함. 이듬해 1995년 6월 29일 붕괴된 삼풍 백화점의 처참함. 곧이어 1997년 IMF로 상징되는 한국 경제의 몰락.

우리는 혼란스런 근현대사에서 한강의 기적이라는 말로 치장된 눈부신 경제발전을 이루어왔다. 하지만 밥은 먹고 살자는 생존을 넘어서 경주마처럼 돈벌레로 살아온 것은 아닌가 싶은 깊은 반성의 시간을 가진 적이 없다. 해방과 6.25로 이어지는 치열한 생존 경쟁 조건에서 살아남기 위해 다른 사람을 밟고 일어서야했으며 무엇보다도 삶의 목표와 철학적 성찰이 없었다. 거창한 이념이나 궁극적인 지향점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소박하게 내 아이들과 우리들의 미래는 이래야 한다는 공동체의 가치관이나 삶의 질에 관심을 갖지 않고 살아온 것이다. 물질적으로 풍요롭고 경제적으로 윤택해지는 것이 곧바로 대한민국의 번영과 발전이라고 볼 수는 없다. 필요조건이지만 충분조건은 아닌 것이다.

이렇게 혼란스럽고 급변하는 상황에서 친일파가 그대로 우리 사회의 기득권이 되고 각종 이권을 선점하며 권력과 명예를 거머쥐는 뼈아픈 현대사가 전개된다. 시작부터 잘못 꿰어진 단추를 바로 잡으려니 이제는 엄두가 나지 않는 것이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지 60년이 넘었지만 이제는 그 정통성마저 부정하는 시도가 공공연하게 벌어지고 악취를 풍기는 수구 보수 세력은 철지난 이념 논쟁으로 공공연하게 온 국민을 협박한다. 21세기에 벌어지는 부끄러운 대한민국의 현실을 돌아보면 한숨이 절로 나온다.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역사에서 아무런 교훈도 얻지 못하는 것이 가장 어리석은 인간이라는 어느 역사가의 말대로 우리는 시행착오를 반복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금방 잊어버리고 또 다시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이제 발전의 속도와 차이가 아니라 발전의 방향과 질적인 면을 살펴야 할 때이다. 무한 경쟁 시대에서 살아남는 일이 중요했고 동족상잔의 비극을 통해 이념의 허망감을 확인했음에도 불구하고 본질적인 우리들의 모습이 크게 달라졌다고 보기 어렵다. 씨줄과 날줄처럼 정교하게 얽혀있는 우리의 삶은 시간과 공간의 축을 따라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넘나들며 자연스럽게 현상에 대한 원인을 찾고 결과를 예상하기도 한다. 역사가 그러하듯이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다. ‘지금-여기’의 삶은 오래된 미래일 뿐이다. 그래서 뒤를 돌아보는 일은 추억을 더듬는 감상적인 행위가 아니라 현재와 미래를 조망하는 가장 기본적인 성찰이다.


숨가쁜 근대화의 파노라마, 그 빛과 그림자

황석영의 『강남몽』은 자본주의 상징인 백화점이 대한민국 강남 한복판에서 붕괴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유래를 찾아 볼 수 없는 일이 연이어 벌어졌다. 성수대교가 무너진 다음 해에 백화점이 무너졌다. 천박한 자본주의와 부패 사슬로 얽힌 건설업이 빚어낸 참극이었다. 이 소설은 백화점에 콘크리트 더미에 깔린 유한 마담 박선녀의 삶을 추적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일제시대 일본군의 첩자 노릇을 하던 김진의 삶도 파란만장하다. 부동산과 강남 개발에 편승하여 투기 자본의 형성 과정을 보여주는 심남수까지 보태지면 대한민국의 현재를 보여주는 대표적 개인이라고 할 만하다. 거기에 조직폭력의 보스로 등장하는 홍양태가 가세한다.

정치와 경제는 분리될 수 없으며 더구나 우리의 삶은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제 2의 이인국 박사 같은 ‘김진’은 신산스런 근현대사의 상처이자 아픔이다. 선악의 기준으로 김진과 박선녀, 심남수와 홍양태를 손가락질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상황 논리로 그들에게 면죄부를 주자는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사회가 견뎌온 세월에 대한 아픈 성찰의 시간을 갖자는 것이다. 첫 단추가 잘못 끼워진 옷은 처음부터 다시 채워야 한다. 하지만 역사를 어찌 그리 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겠는가 하는 질문이 남는다.

한 편의 소설이 시대에 물음을 던지고 과거의 시간과 미래에 대한 전망을 가능하게 할 수도 있다. 거시적인 안목에서 우리 근현대사를 성찰하는 무거운 소설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황석영의 『강남몽』은 최소한 우리 시대의 아이콘이 되어버린 ‘강남’이라는 신화에 대한 근원을 파헤치고 있다. 재미있는 이야기 한 편이 어떻게 우리에게 전달되느냐의 문제는 소설의 기본이다. 인터넷 연재라는 새로운 생산과 수용방식으로 독자와 만났던 소설이기 때문에 그 의미가 남다르다. 이제는 보편적인 방법이 되었기 때문에 특별히 색다르게 바라볼 필요도 없지만 전통적인 방식에서 벗어나 독자들의 흥미와 요구에 부흥하고 창작 과정에서 어떤 식으로든 독자들의 반응을 살폈을 작가의 속내를 상상해 본다.

가볍고 흥미진진한 단막극처럼 각 장의 주인공을 내세운 점이나 요정과 지하경제, 폭력세계 등 자극적인 요소들의 사적 전개 과정을 그린 점 등은 독자들의 호기심에 충분히 부흥했다는 면에서 성공적이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히 근대화 과정에서 펼쳐진 발전의 이면이 아니라 소설적 재미를 위한 양념일 수도 있다. 이 소설의 궁극적인 목적이 우리 사회의 아픈 성장과정을 그린 대한민국의 성장소설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누구나 겪는 ‘성장통’이라고 치부하기엔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너무 많다. 아니 어쩌면 가장 큰 문제는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가장 큰 문제일 수도 있다. 우리 사회가 나아갈 공동체의 가치와 대한민국이 만들어가야 할 문화에 대한 반성은 지난 시간을 통한 지금 이 시대에 대한 반성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우리 소설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를 이제는 트위터에서 종종 만난다. 얼마 전에 트위터를 시작한 작가에게 박수를 보내는 이유는 시대의 흐름을 쫓기 때문이 아니라 형식과 틀을 벗어나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관심과 책임의식 때문이다. 함께 더불어 호흡하고 울고 웃는 작가야 말로 이 시대가 원하는 젊음이 아닌가. 나이를 무색케 하는 작가의 자유분방함과 열정이 독자에게 그대로 전해지는 『강남몽』을 이번 휴가에 챙겨야 할 배낭 속 필수품으로 권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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