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지 국가 비타 악티바 : 개념사 22
정원오 지음 / 책세상 / 2010년 11월
평점 :
품절


포퓰리즘(Populism)은 일반 대중의 인기에 영합하는 정치 행태를 일컫는 말로 현실 정치에서 상대당이나 정적(政敵)을 비난할 때 사용된다. 미국의 민주당과 공화당에 대항하기 위한 정당으로 1891년에 창당된 파퓰리스트 정당(Populist Party), 즉 인민당(People's Party)에서 그 어원을 찾을 수 있다. 이에 반하여 소수의 지배 집단이 통치하는 엘리트주의(Elitism)가 있다.

플라톤은 철인 정치 사상을 내세워 철학자가 국가를 지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물론 기원전에 주장했던 철학자의 말이지만 정치 엘리트주의는 여전히 유효한 현상이다. 높은 학력과 고도의 전문성을 갖춘 사람이 권력을 잡으면 국민들을 잘 살게 해주고 행복하게 만들어 줄 거라고 믿는 순진한 생각은 여전히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과연 그런가? 기본적인 ‘상식’과 ‘합리적 이성’을 갖춘 사람이면 중요한 정책 결정과 국가의 목표를 결정하는 데 부족함이 없다. 실무적인 일이나 행정적인 절차는 전문성을 갖춘 공무원에게 맡기면 될 일이다. 국가의 중요한 정책이나 방향을 결정하는 일은 그리스의 직접 민주정치 방식으로도 가능하다. 정치는 국민을 위한 철저한 봉사 행위여야 한다. 정치 행위로 인해 어떠한 권력과 금전적 혜택도 얻을 수 없도록 하는 장치가 마련되어야 한다.

최근에 다시 불거지고 있는 ‘무상급식’ 논란을 살펴보면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을 읽어낼 수 있다. 오세훈 서울 시장은 서울시 의회의 무상급식 조례 통과에 대해 “복지의 탈을 쓴 망국적 포퓰리즘 정책을 거부한다.”고 말했다. ‘복지’와 ‘포퓰리즘’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밝혀두지 않으면 서울 시장의 말을 찬성도 비판도 할 수 없다. 우선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포퓰리즘은 대중에 영합하는 행위로 복잡하고 다양한 측면에서 국가의 시스템을 고려하지 않고 우선 당장 대중들의 입맛에 맞는 정책을 제시하고 그 인기를 통해 정권을 창출하거나 유지하기 위한 행태를 말한다. 2011년 서울시 예산 20.6조원 중 700억원이 없어 무상급식을 못하겠다고 버티는 것이 아니다. 이 예산 중에 각종 토건형 개발, 시설사업 예산이 줄잡아 10조원이 넘는다. 이런 상황에서 무상급식이 단순히 망국적 포퓰리즘이라고 볼 수 있을까?

사회 수당 제도가 증장한 배경에는 빈곤 여부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부정적 낙인 효과, 소위 스티그마 문제를 제거하려는 목적이 있다. 성장기의 환경은 매우 중요하며, 정신적으로 미성숙 상태에 있는 아동이 낙인을 의식할 경우 정상적인 아동 발달에 매우 부정적인 영향이 미칠 수 있으므로, 아동을 지원하는 제도에서는 세심한 배려가 필요하다. 가난한 아동과 부유한 아동을 구분하지 않고 아동 수당을 보편적으로 제공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최근 우리나라에서 논란이 된 학교 무료급식 문제도 이러한 측면과 직접 관련되어 있다. 가정 형편이 어려운 아동에게 한정해 학교 급식을 무료로 제공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는 반면, 빈부에 상관없이 모든 아동에게 무료 급식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그런데 부유한 가정의 아동에게까지 무료로 급식을 제공하는 것은 재원 낭비라는 주장은 하나만 생각하고 둘은 고려하지 못하는 근시안적인 것일 수 있다. 가난한 가정의 아동을 배려하는 진정한 복지는 수혜 당사자가 도움을 받는다는 느낌 없이 당연한 권리로서 복지를 향유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 P. 82

이렇게 긴 인용문은 정원오의 『복지 국가』에서 발췌한 내용이다. ‘복지’에 대한 개념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고 어떤 사회를 지향할 것인지 결정하는 일이 선행되어야 이러한 무상급식 논란을 정치적 대립이 아닌 사회적 논쟁으로 이끌어 갈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복지 국가의 개념을 설명하고 복지국가의 기원을 영국과 스웨덴에서 찾아 설명한다. 공공부조, 사회보험, 사회수당, 사회복지 서비스의 차이를 이해하면 무상급식에 대한 생각도 조금 바뀌게 되지 않을까 싶다. 신자유주의 시장 경제 이후 영국 노동당도 ‘제3의 길’을 걷고 있지만 복지가 단순히 게으른 가난뱅이를 양산하고 일할 의욕을 저하시키며 공정한 경쟁의 이익을 부당하게 뺏어 간다는 잘못된 생각은 바로 잡아야 한다.

복지 국가는 현재 위기의 상태에 놓여 있으며 변화의 시기를 겪고 있다. 향후 급격한 고령화 사회를 맞이하는 대한민국도 다양한 제도를 마련해 놓고 있지만 전체 예산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너무 적고, 기준이 엄격해 사실상 복지 후진국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양날의 칼처럼 위험해 보이는 ‘복지’를 국민의 ‘행복’과 ‘평등’ 그리고 지속가능한 ‘발전’이라는 측면에서 다양하게 접근해야 할 때이다. 미래 사회에 대한 국민적 합의를 주장하는 정치인들이 언제 국민의 뜻을 물어 정책을 입안하고 집행하기를 기대하겠는가. 또, 국민들은 언제 나와 내 가족의 이익만이 아니라 이웃까지 배려하는 마음으로 ‘복지 국가’의 미래를 생각하며 투표를 하겠는가. 서로 생각이 다른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상에서 무엇이 옳고 그른가의 기준이 아니라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이 더 빠를지도 모르겠다.

일요일 저녁, 오세훈 시장이 이 책을 들고 조용히 사색에 잠겼으면 좋겠다.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왜 ‘무상급식’을 반대하는지 다시 한 번 곰곰이 생각해 볼 일이다. 땅 좀 그만 파고 밥 좀 먹자!


101205-10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장하준 지음, 김희정.안세민 옮김 / 부키 / 2010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또 하루 멀어져 간다. 내뿜은 담배연기처럼. 작기만 한 내 기억 속엔 무얼 채워 살고 있는지.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의 시작 부분이다. 앞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오늘 하루를 충실하게 살았다는 생각을 하며 고개를 들면 어느덧 창밖에는 어둠이 당도해 있다. 사람들은 자신의 위치에서 항상 최선을 선택하며 가장 합리적으로 판단하고 성실하게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조금 더 먼 곳에 시선을 던지고 주위를 살펴보면 모두가 그렇게 살고 있다. 이렇게 바쁘고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시스템 안에서 제각각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다. 살아남기 위한 경쟁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세계 경제는 만신창이가 되었다’는 도발적인 문장으로 시작하는 장하준의 신작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모습을 정확하게 분석하고 있는 책이라고 말할 수 있다. 1980년대 영국의 마가렛 대처 수상부터 시작된 것으로 이야기되는 신자유주의의 물결에 대한 논쟁은 그간 끊임없이 경제학자들과 정치인들 그리고 기업가들의 입을 통해 들려왔다. 일반들은 선택의 여지없이 그들의 결정과 정책에 따른 삶의 조건에 온몸을 맞춰왔다. 30여 년이 흐른 지금 자본주의 시스템은 어떤가. ‘자본주의’의 개념 자체를 논하는 이야기부터 더 나은 ‘자본주의’를 꿈꾸는 이야기까지 수많은 논란이 계속되고 있지만 아무도 정답은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영국의 케임브리지 대학의 경제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는 한국인 장하준은 『사다리 걷어차기』부터 『쾌도난마 한국경제』, 『국가의 역할』, 『나쁜 사마리안인들』에 이르기까지 줄곧 세계 경제의 문제점을 비판적 시각으로 진단해 오고 있다. 이 책은 장하준의 경제적 신념을 살펴볼 수 있는 역작이다. 일반인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경제학에 대한 지식과 정책들이 어떤 문제를 안고 있는지 그것이 어떤 의도와 생각으로 현실에 적용되고 있는지 파악할 수 있다. 장하준이 말하는 ‘그들’은 권력과 자본을 쥐고 있는 정치가와, 기업가 그리고 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이다. 그들이 말하지 않는 경제에 관한 진실은 보수와 진보를 가리지 않는다.

세계의 실물 경제를 움직인 경제학 이론과 정치적 주장들이 안고 있는 문제점을 23가지로 정리하며 저자는 미국과 유럽은 물론이고 아시아와 아프리카 아이슬란드의 경제현실을 종횡무진 넘나든다. 해박한 경제학적 지식을 토대로 지난 30여년 세계경제를 진단하고 현재의 모습을 평가한다. 2008년 금융위기로 촉발된 자유주의 경제체제에 대한 반성과 성찰은 장하준의 날카로운 시선으로 파헤쳐진다. 단순히 낡은 경제학의 이론들과 새로운 이론들을 비교하는 전문서적이 아니라 경제를 둘러싼 정부의 역할과 기업의 생리 그리고 경제학자들의 주장을 점검하며 현실 경제의 문제점과 그 대안까지 제시하고 있다.

나는 수많은 문제점과 제약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는 인류가 만들어 낸 가장 좋은 경제 시스템이라고 믿는다. 그저 지난 30여 년간 세계를 지배해 온 특정 자본주의 시스템, 즉 자유 시장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싶을 뿐이다. - P. 14

서론에서 이렇게 명확하게 밝히고 있듯이 이 책에서는 자유 시장 자본주의에 대해 ‘자유 시장이라는 것은 없다’로 시작해서 ‘좋은 경제 정책을 세우는 데 좋은 경제학자가 필요한 건 아니다’로 끝날 때까지 명시적인 이야기로 주의를 끌고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와 ‘이런 말은 하지 않는다’는 짧은 글로 현실을 진단한 후 문제점을 진단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마지막 결론에서 저자는 ‘세계 경제를 어떻게 재건할 것인가?’라는 문제에 대해 여덟가지 원칙을 제시한다. 더 나은 경제 시스템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자본주의를 거부할 수는 없다. 하지만 지난 30년 간의 실험을 통해 실패로 결론 난 자유 시장 자본주의를 그대로 유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기업가와 경제학자는 물론 정치인들이 이 책을 꼭 읽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현실 경제 체제를 비판하고 문제를 지적하는 데 머물고 있지 않다. 근본적인 원인을 지적하고 문제점을 파악하는 과정에서 80년대 이전의 자본주의 시스템이 작동했던 원리를 통해 그 대안과 해법을 모색하고 있다.

세상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복잡하고 정교해지고 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함께 행복하게 살아가자는 아주 순진한 발상에서 출발한다면 경제학자 장하준의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경제는 이념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먹고 마시고 입고 살아가는 삶의 문제이다. 보다 나은 세상을 꿈꾼다면 지금 이대로 점점 더 문제가 많아지고 있는 혹은 이미 실패한 시스템을 그대로 유지할 수는 없다. 생각을 바꾸고 정책을 점검하고 제도를 개선하는 일은 우리들의 마땅한 의무이다. 어떤 목적을 가지고 세계 경제 시스템 안에서 역동적으로 살아 숨쉴 수 있을 것인지 ‘그들’에게만 맡길 문제는 아니지 않는가. 우리 모두가 머리를 맞대고 삶의 방향을 고민하고 시스템을 점검할 시간이다. ‘경제’에 관심이 있는, 그러니까 모든 사람들에게 반드시 추천할 수밖에 없는 책 한 권이 깊은 생각에 잠기게 한다.


지난 30여년에 걸쳐 벌어진 경제 현상들을 보면 우리는 자유 시장 경제학보다 이들 다른 경제학자에게서 배울 점이 훨씬 많음을 알 수 있다. 여러 기업, 정부, 정책들 중 어떤 것들은 성공하고 어떤 것들은 실패하는지를 잘 보면 이제는 무시당하고, 심지어 잊힌 이런 경제학자들에게서 중요한 교훈을 배워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경제학은 쓸모없거나 해로운 것이 아니다. 다만 올바른 경제학을 배워야 하는 것이다. - P. 326


101125-10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수학 오디세이 - 수학이 즐거워지는 수학 이야기
앤 루니 지음, 문수인 옮김 / 돋을새김 / 2010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당신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1부터 9까지 숫자 중에 하나를 떠올려 보자. 그 숫자에 9를 곱하고 두 자리 수가 나오면 각각의 숫자를 더한다. 그 수에서 4를 빼고 제곱을 한다. 그리고 다시 4를 뺀다.

정답은 바로 오늘 날짜인 ‘21’

마술처럼 보이는 이 놀이는 숫자의 비밀을 알려주는 간단한 놀이에 불과하다. 눈을 뜨고 잠드는 순간까지 우리는 숫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수학과 무관하게 살아가는 사람은 없다는 뜻이다. 우리의 삶이 복잡해질수록 더 많은 숫자가 필요하고 더 자주 수학과 만나게 된다. 머리가 복잡해지자 불현 듯 명료한 수의 세계가 조금 궁금해졌다.

누구나 한 번쯤 왜 하루가 24시간이고 한 달은 30일이며 1년은 365일지 궁금한 적이 있었을 것이다. 가장 복잡해 보이는 컴퓨터는 2진법을 사용한다. 오래 전부터 사용해온 10진법에서 60진법에 이르기까지 수와 관련된 비밀은 인류의 역사와 함께 해왔다. 기록을 위해 문자를 발명한 것처럼 수의 발명도 기록과 계산의 편의를 위해서 시작된 것이다. 2000년 전 나일강의 문화권에서 시작되었다는 수학의 역사는 인류 발전의 역사와 그 궤를 함께 해왔다. 앤 루니의 『수학 오디세이』는 수학의 신비로움에 한발 다가설 수 있는 책이다. 수의 신비는 물론 수학의 역사와 수학자들의 삶을 들여다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수학을 잘 하기 위한 학습도 아니고 수수께끼나 수학의 우수성을 설명하는 책도 아니다. 이 책은 수학이 걸어온 걸을 더듬어보는 수학에 관한 인문학적 교양서이다. 책을 읽기 전에 작가 소개를 보고 조금 놀랐다.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좀체 보기 힘든 특이한 책이어서 먼저 눈길을 끌었다. 앤 루니는 중세문학을 전공한 사람이다. 문학 전공자가 과학과 역사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를 풀어내는 것은 자연스러워 보이지만 수학에 관한 폭넓은 정보와 지식을 바탕으로 수학의 즐거움과 중요성을 설명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학문간 경계를 넘어 다양하고 폭넓은 분야에 대한 관심과 해박한 지식을 갖추고 있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 이 책을 통해 확인된다. 저자의 전공과 이력이 책의 내용과 무관할 수 없기 때문에 이 책을 읽는 동안 신기하기도 했고 오히려 즐겁고 가벼운 마음으로 읽을 수 있었다. 책의 내용은 숫자에서 시작해서 증명으로 끝난다. 전체 9개의 챕터로 구성되어 계산, 기하학, 삼각법, 곡선, 대수학, 미적분, 통계, 집합에 이르기까지 인류 역사에 중요한 수학적 발견과 배경을 설명한다. 딱딱하고 지루하게 수학적 이론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특징과 배경을 중심으로 그것의 사회적 영향 등을 소개한다. 어려운 개념이나 수학자의 삶을 소개하는 정보 박스가 곳곳에 배치되어 이해를 돕고 있는 것은 이 책의 또 하나의 특징이다.

한 권의 책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분야에 대한 관심을 촉발하거나 틀에 박힌 생활에 숨통을 트여주기도 한다. 매일매일 반복되는 우리의 삶이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뜨리기도 하고 새로운 희망으로 이끌기도 한다. 하지만 책은 언제나 그 자리에서 우리를 따뜻하게 맞이하며 위로를 건네기도 하고 채찍질하기도 하며 이성의 정수박이에 찬물을 들이붓기도 한다. 그것은 유사한 분야에서 사유의 폭을 넓히는 과정에서 비롯되기보다 낯선 분야에 발을 들여놓을 때가 더 많다.

세상은 물음표로 가득하다. 왜 사람들은 이런 생각과 행동을 하는지, 왜 나는 이렇게 살아가는지, 왜 자연은 그러한지. 절대적인 진리와 흔들림 없이 명쾌한 이론이 때로는 우리를 좀 더 자유롭게 한다는 측면에서 수학은 가장 적합한 또 하나의 돌파구를 마련해 줄 수도 있다. 논리 정연한 수학의 세계는 철저하게 감정을 배제한 채 이성적이고 체계적인 생각의 기회를 제공해 준다.

저자는 이 책에서 사람들이 살아오면서 겪게 되는 수학의 세계를 탐구하는 과정이나 수학의 발전과정을 설명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모호하고 혼란스런 세상에 질서를 부여하고 질서정연한 자연의 이치를 깨달을 수 있는 방법을 스스로 찾아보라고 재촉하는 듯하다.

그물처럼 촘촘한 네트워크 세상에서 우리는 수많은 지식과 이론을 바탕으로 살아간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세상의 원리들이 수학과 과학의 원리를 통해 우리에게 전달된다. 인류가 눈부신 물질문명을 이룩하여 상상을 현실로 만들어가는 과정은 새로운 도전과 끝없는 노력의 작은 결과물들 때문이다. 축적된 지식과 역사의 연결고리가 없었다면 지금 우리의 삶도 없다. 그것이 수학이든 그 어떤 것이든 겸손한 자세로 받아들이고 진지하게 생각하는 시간이 필요한 것은 내일을 위한 준비가 아니라 우리들의 삶을 위한 반성이기 때문이다. 손으로 만질 수도 눈에 보이지도 않는 수학의 세계를 들여다는 보는 것은 바로 이런 노력의 일부일지도 모른다.

우주를 이해하려면 반드시 그것이 어떤 언어로 작성되었는지 알아야만 한다. 수학이 바로 그 언어이다. - 갈릴레오


101121-10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밥값 창비시선 322
정호승 지음 / 창비 / 2010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한 시대를 풍미했던 시인의 시를 통해 우리는 당대의 시대정신을 읽는다. 사회와 문화, 정치와 역사를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전달할 수 있는 문학작품은 위대하다. ‘문학의 종언’에 관한 많은 논란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시가 읽히는 시대는 어떤가. 사춘기 시절, 문학에 눈을 뜨게 해 준 정신적 스승 가운데 한 사람인 정호승의 열 번째 시집을 읽는 감회는 남다르다. 『서울의 예수』, 『새벽편지』를 닳도록 읽던 시절이 가장 행복했음을 그 시간이 한참 흐른 후에야 어렴풋이 깨닫게 되는 게 인생일 지도 모른다. 무언가 조금 알 것 같을 때 떠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작년 겨울 정호승 시인을 학교에 특강 초청 강사로 모셨다. 나는 고등학생이었다가 고등학교 국어교사가 되었지만 시인은 여전히 그대로 시인이었다. 흰머리가 조금 늘었을 뿐 그 형형한 눈빛에는 변함이 없었다. 물론 개인적 감회에 불과하겠지만 시를 읽고 시인을 만나는 기회는 많지 않기 때문에 더욱 그랬을 것이다. 첫 시집부터 고스란히 그의 시집이 꽂혀 있는 책꽂이가 이제 세월을 말해주는 것 같다.

김지하, 김남주, 황지우, 조태일, 곽재구, 김정환, 이성부나 이성복, 오규원, 황동규, 최승자, 김승희와 다른 방식으로 시대를 노래했기 때문에 현실참여도 서정도 아닌 혹은 두 가지를 모두 담고 싶었던 시인에 대한 평가는 제각각이었다. 극단의 경계에 머물며 별을 노래했던 시인 정호승.

봄비

어느날
썩은 내 가슴을
조금 파보았다
흙이 조금 남아 있었다
그 흙에
꽃씨를 심었다

어느날
꽃씨를 심은 내 가슴이
너무 궁금해서
조금 파보려고 하다가
봄비가 와서
그만두었다

‘서정시’라는 말을 들으면 떠오르는 시인이 된 정호승. 안도현이나 김용택과 더불어 시를 사람들에게 친숙하게 해 준 시인의 열 번째 시집은 ‘봄비’처럼 촉촉하게 가슴을 적시며 시작된다. 그 가슴 안에서 시의 씨앗이 자라고 꽃을 피우고 세상을 조금 더 아름답게 만들 수 있으리라고 믿고 싶어지는 그의 시를 읽는다.

추운 겨울 뜨겁게 한몸이 되는 역설적 순간을 위해 우리는 여전히 그 추위를 견딘다. 그렇게 믿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다. 일생에 한 번은 그렇게 꽝꽝 얼어붙고 싶다.


결빙

결빙의 순간은 뜨겁다
꽝꽝 얼어붙은 겨울 강
도도히 흐르는 강물조차
일생에 한번은
모든 흐름을 멈추고
서로 한몸을 이루는
순간은 뜨겁다

매일매일 ‘고비’를 넘기는 사람들. 영원히 살 것처럼 희망에 부풀고, 내일 죽을 것처럼 절망하지만 그래도 그 모든 고비들을 마지막이기를 바라는 마음들이 우리들의 인생이다. 시인은 이제 시대를 고민하지도 않고 아픔과 슬픔에 절망하지도 않는다. 다만 그 ‘고비’라는 모호한 말로 뭉뚱그린다.

가슴이 서늘해지도록 날선 시선도 조금은 둥그렇게 다듬어졌고, 세상을 따뜻하게 품는 방법도 알게 되었나보다. 가볍고 쉬운 발걸음이 경쾌해 보인다. 크게 문제될 것도 없고 아프지도 않아 보인다.

고비

고비 사막에 가지 않아도
늘 고비에 간다
영원히 살 것처럼 꿈꾸고
내일 죽을 것처럼 살면서
오늘도 죽을 고비를 겨우 넘겼다
이번이 마지막 고비다

그러나, 여전히 그의 이런 시에 눈길이 머문다. 심장이 왼쪽에 있음을 기억하라고 했던 어느 경제학자의 말이 떠오르는 시가 한 편 눈에 띤다. 빨간색 안경을 쓰고 세상을 본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파란 안경을 벗겨주고 싶었을까?

시인이 말한 ‘왼쪽’의 기준은 어디일까. 한 편의 시가 말하는 시대의 진실은 아득하기만 하다. 때론 너무 모호하고 난해하다. ‘왼쪽’에서 시인을 바라보면 그는 오른쪽에 있는 사람이 된다는 갑작스런 생각.

왼쪽에 대한 편견

한쪽 날개가 왼쪽으로 약간 기울어진 채
겨울 하늘을 나는 청둥오리가 더 아름답다
한쪽 어깨가 왼쪽으로 약간 기울어진 채 걸어가는 사람의 뒷모습이 더 아름답다
나는 젊은 마음의 육체를 지녔을 때부터 왼쪽 길로만 걸어가
지금 외로운 마음의 육체마저도 왼쪽으로 더 기울어졌다
직선의 대로이거나 어두운 골목이거나
내가 바라보던 모든 지평선도 수평선도 왼쪽으로 더 기울어졌다
기울어진다는 것은 아름다워진다는 것이다
기울어진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것이다
나는 지금도 멀리 사람을 바라볼 때
꼭 왼쪽에서 바라본다
왼쪽에서 바라본 사람의 옆모습이 가장 아름답다

‘모든 것은 사라진다’는 절대 불변의 진리는 사라지지 않는다. 잠시 지구에 여행 온 나그네들의 삶이 점점 팍팍해진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고 있으며 어떤 삶을 꿈꾸어야 하는가. 모든 사라지는 것들을 위하여 술에 취할 일이 아니라, 사라지는 꿈을 위해 슬퍼할 일이다. 시인도 사라지고 별빛도 사라지고 삶의 방향도 사람들이 걸어야 할 길도 사라지는 시대의 슬픔으로 읽히는 것은 순전히 나의 오독(誤讀)이다.

사라지는 것들을 위하여

사라지는 것들을 위하여
나는 나의 가장 가난했던
미소 속으로 사라진다

어느 목마른 저녁 거리에서
내가 늘 마시던 물은
내 눈물까지 데리고 땅속으로 사라지고
날마다 내 가슴속으로 눈부시게 날아오르던 새는
부러진 내 날개를 데리고 하늘 속으로 사라지고

이제는 쓸쓸한 저녁 바닷가
수평선 너머로 사라지는 수평선과 함께
인간이 되고 싶었던 나의 모든 꿈조차
꿈속으로 사라져

캄캄한 서울
종로 피맛골 한 모퉁이
취객들의 밤의 발자국에 깊이 어린
별빛들만 사라지지 않고 홀연히
술에 취한다

여전히 ‘소년’이 되고 싶은, 아니 여전히 ‘소년’인 시인의 고백으로 이 시집은 문을 닫는다. ‘봄비’로 시작해서 ‘소년’으로 끝날 때까지 밤새도록 별을 바라보다가 눈사람이 되고 싶은 사람들을 위해 시인은 오늘도 여전히 시를 쓰겠다고 고백한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시를 읽는다. 말랑한 감수성과 쉬운 표현 몸에 닿는 이야기들을 통해 이제 수많은 독자를 얻는 시인이 더 이상 내게는 차가운 머리와 뜨거운 가슴이 만나 고통스러워하는 시인으로 읽히지 않는다는 사실이 조금 아쉬울 뿐. 누군가의 말대로 이제 그가 ‘쓸’ 시를 기대해 본다. 그래야 언제나 ‘소년’으로 살고 있는 철없는 사람들의 안타까움을 달랠 수 있다. 오늘 밤은 별도 없이 캄캄하여 바라볼 수도 없다.

소년

몸에
함박눈을 뒤집어쓴
하얀 첨성대
첨성대 꼭대기에 홀로 서서
밤새도록 별을 바라보다가
눈사람이 된



101119-10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밥값 창비시선 322
정호승 지음 / 창비 / 2010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한 시대를 풍미했던 시인의 시를 통해 우리는 당대의 시대정신을 읽는다. 사회와 문화, 정치와 역사를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전달할 수 있는 문학작품은 위대하다. ‘문학의 종언’에 관한 많은 논란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시가 읽히는 시대는 어떤가. 사춘기 시절, 문학에 눈을 뜨게 해 준 정신적 스승 가운데 한 사람인 정호승의 열 번째 시집을 읽는 감회는 남다르다. 『서울의 예수』, 『새벽편지』를 닳도록 읽던 시절이 가장 행복했음을 그 시간이 한참 흐른 후에야 어렴풋이 깨닫게 되는 게 인생일 지도 모른다. 무언가 조금 알 것 같을 때 떠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작년 겨울 정호승 시인을 학교에 특강 초청 강사로 모셨다. 나는 고등학생이었다가 고등학교 국어교사가 되었지만 시인은 여전히 그대로 시인이었다. 흰머리가 조금 늘었을 뿐 그 형형한 눈빛에는 변함이 없었다. 물론 개인적 감회에 불과하겠지만 시를 읽고 시인을 만나는 기회는 많지 않기 때문에 더욱 그랬을 것이다. 첫 시집부터 고스란히 그의 시집이 꽂혀 있는 책꽂이가 이제 세월을 말해주는 것 같다.

김지하, 김남주, 황지우, 조태일, 곽재구, 김정환, 이성부나 이성복, 오규원, 황동규, 최승자, 김승희와 다른 방식으로 시대를 노래했기 때문에 현실참여도 서정도 아닌 혹은 두 가지를 모두 담고 싶었던 시인에 대한 평가는 제각각이었다. 극단의 경계에 머물며 별을 노래했던 시인 정호승.

봄비

어느날
썩은 내 가슴을
조금 파보았다
흙이 조금 남아 있었다
그 흙에
꽃씨를 심었다

어느날
꽃씨를 심은 내 가슴이
너무 궁금해서
조금 파보려고 하다가
봄비가 와서
그만두었다

‘서정시’라는 말을 들으면 떠오르는 시인이 된 정호승. 안도현이나 김용택과 더불어 시를 사람들에게 친숙하게 해 준 시인의 열 번째 시집은 ‘봄비’처럼 촉촉하게 가슴을 적시며 시작된다. 그 가슴 안에서 시의 씨앗이 자라고 꽃을 피우고 세상을 조금 더 아름답게 만들 수 있으리라고 믿고 싶어지는 그의 시를 읽는다.

추운 겨울 뜨겁게 한몸이 되는 역설적 순간을 위해 우리는 여전히 그 추위를 견딘다. 그렇게 믿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다. 일생에 한 번은 그렇게 꽝꽝 얼어붙고 싶다.


결빙

결빙의 순간은 뜨겁다
꽝꽝 얼어붙은 겨울 강
도도히 흐르는 강물조차
일생에 한번은
모든 흐름을 멈추고
서로 한몸을 이루는
순간은 뜨겁다

매일매일 ‘고비’를 넘기는 사람들. 영원히 살 것처럼 희망에 부풀고, 내일 죽을 것처럼 절망하지만 그래도 그 모든 고비들을 마지막이기를 바라는 마음들이 우리들의 인생이다. 시인은 이제 시대를 고민하지도 않고 아픔과 슬픔에 절망하지도 않는다. 다만 그 ‘고비’라는 모호한 말로 뭉뚱그린다.

가슴이 서늘해지도록 날선 시선도 조금은 둥그렇게 다듬어졌고, 세상을 따뜻하게 품는 방법도 알게 되었나보다. 가볍고 쉬운 발걸음이 경쾌해 보인다. 크게 문제될 것도 없고 아프지도 않아 보인다.

고비

고비 사막에 가지 않아도
늘 고비에 간다
영원히 살 것처럼 꿈꾸고
내일 죽을 것처럼 살면서
오늘도 죽을 고비를 겨우 넘겼다
이번이 마지막 고비다

그러나, 여전히 그의 이런 시에 눈길이 머문다. 심장이 왼쪽에 있음을 기억하라고 했던 어느 경제학자의 말이 떠오르는 시가 한 편 눈에 띤다. 빨간색 안경을 쓰고 세상을 본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파란 안경을 벗겨주고 싶었을까?

시인이 말한 ‘왼쪽’의 기준은 어디일까. 한 편의 시가 말하는 시대의 진실은 아득하기만 하다. 때론 너무 모호하고 난해하다. ‘왼쪽’에서 시인을 바라보면 그는 오른쪽에 있는 사람이 된다는 갑작스런 생각.

왼쪽에 대한 편견

한쪽 날개가 왼쪽으로 약간 기울어진 채
겨울 하늘을 나는 청둥오리가 더 아름답다
한쪽 어깨가 왼쪽으로 약간 기울어진 채 걸어가는 사람의 뒷모습이 더 아름답다
나는 젊은 마음의 육체를 지녔을 때부터 왼쪽 길로만 걸어가
지금 외로운 마음의 육체마저도 왼쪽으로 더 기울어졌다
직선의 대로이거나 어두운 골목이거나
내가 바라보던 모든 지평선도 수평선도 왼쪽으로 더 기울어졌다
기울어진다는 것은 아름다워진다는 것이다
기울어진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것이다
나는 지금도 멀리 사람을 바라볼 때
꼭 왼쪽에서 바라본다
왼쪽에서 바라본 사람의 옆모습이 가장 아름답다

‘모든 것은 사라진다’는 절대 불변의 진리는 사라지지 않는다. 잠시 지구에 여행 온 나그네들의 삶이 점점 팍팍해진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고 있으며 어떤 삶을 꿈꾸어야 하는가. 모든 사라지는 것들을 위하여 술에 취할 일이 아니라, 사라지는 꿈을 위해 슬퍼할 일이다. 시인도 사라지고 별빛도 사라지고 삶의 방향도 사람들이 걸어야 할 길도 사라지는 시대의 슬픔으로 읽히는 것은 순전히 나의 오독(誤讀)이다.

사라지는 것들을 위하여

사라지는 것들을 위하여
나는 나의 가장 가난했던
미소 속으로 사라진다

어느 목마른 저녁 거리에서
내가 늘 마시던 물은
내 눈물까지 데리고 땅속으로 사라지고
날마다 내 가슴속으로 눈부시게 날아오르던 새는
부러진 내 날개를 데리고 하늘 속으로 사라지고

이제는 쓸쓸한 저녁 바닷가
수평선 너머로 사라지는 수평선과 함께
인간이 되고 싶었던 나의 모든 꿈조차
꿈속으로 사라져

캄캄한 서울
종로 피맛골 한 모퉁이
취객들의 밤의 발자국에 깊이 어린
별빛들만 사라지지 않고 홀연히
술에 취한다

여전히 ‘소년’이 되고 싶은, 아니 여전히 ‘소년’인 시인의 고백으로 이 시집은 문을 닫는다. ‘봄비’로 시작해서 ‘소년’으로 끝날 때까지 밤새도록 별을 바라보다가 눈사람이 되고 싶은 사람들을 위해 시인은 오늘도 여전히 시를 쓰겠다고 고백한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시를 읽는다. 말랑한 감수성과 쉬운 표현 몸에 닿는 이야기들을 통해 이제 수많은 독자를 얻는 시인이 더 이상 내게는 차가운 머리와 뜨거운 가슴이 만나 고통스러워하는 시인으로 읽히지 않는다는 사실이 조금 아쉬울 뿐. 누군가의 말대로 이제 그가 ‘쓸’ 시를 기대해 본다. 그래야 언제나 ‘소년’으로 살고 있는 철없는 사람들의 안타까움을 달랠 수 있다. 오늘 밤은 별도 없이 캄캄하여 바라볼 수도 없다.

소년

몸에
함박눈을 뒤집어쓴
하얀 첨성대
첨성대 꼭대기에 홀로 서서
밤새도록 별을 바라보다가
눈사람이 된



101119-10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