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바꾼 자본 세계사 가로지르기 3
박홍규 지음 / 다른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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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어떤 것이든 단 한 가지 소원을 이룰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을 얻고 싶어요, 영원히 살고 싶어요, 죽은 우리 엄마를 살려주세요, 세상에서 축구를 제일 잘하고 싶어요, 나보다 예쁜 여자가 없었으면 좋겠어요 ……. 말도 안되는 상상이겠지만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복권 당첨, 부자되기, 부동산 재벌 등을 선택하지 않을까 싶다. 도대체 세상을 살아가는 데 ‘돈’이란 무엇인가.

자본주의에 기초한 삶의 방식에서 모든 것은 화폐가치로 환산된다. 우리는 돈은 피보다 진하다는 말이 실감나는 현실을 살아간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돈 혹은 자본이란 말을 잘 알아야 한다. 도대체 돈은 무엇이며 자본의 역사는 어떠했는가.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면 우리는 조금 더 자본을 제대로 알 수 있지 않을까?

세계사 가로지르기 시리즈로 나온 『세상을 바꾼 자본』은 색다른 경제사다. 청소년을 위한 시리즈의 하나로 ‘자본가를 꿈꾸는 청소년들에게 들려주는 이상한 경제학’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비밀 아닌 비밀들이 많다. 사회에 나가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노동자로 살아가는 데도 대한민국의 사회, 경제 교과서에는 노동자의 권리나 노사관계에 대해 구체적이고 설득력 있는 내용을 담고 있지 못하다. 경제의 주체와 관점은 이념의 문제가 아니라 직접적인 생활의 문제인데도 불구하고 기업가의 입장이나 수박 겉핥기식의 원론만 다루고 있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보다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삶을 위한 사회, 경제 교과서도 필요하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이 책은 교과서에 나오지 않는 경제 이야기가 가득하다. 우선 저자의 목소리를 들어보자.

자본의 시대는 16세기 서양이 비서양을 침략하고부터 시작되었다. 황금과 화폐로 축적된 자본은 무한한 탐욕으로 세계를 지배했다. 대부분의 인간은 자본이 가난을 극복하게 해 준다는 이유에서 환영했다. 그러나 자본은 대부분의 인간에게 행복이 아니라 불행을 대부분 초래했다. 단적으로, 자본의 시대에 사는 한국인은 돈과 행복이 무관하지 않고 충분한 돈이 없어서 대부분 불행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러한 인간을 자본인이라 부른다. 이 책은 그런 자본인, 탐횡인으로부터 해방되자는 취지로 쓴다. - 74쪽

이 책의 목적이 뚜렷하다. 자본으로부터의 자유! 그것이 이 책의 목적이 아닐까 자본으로부터 소외된 인간이 아니라 돈에 종속된 사람이 아니라 주체적인 인간이 되자는 말이다. 그러나 그 길은 멀고 험난하다. 얄팍한 경제에 관련된 지식만 가지고 그렇게 살 수는 없다. 현실적인 문제에 부딪치면 이야기가 달라지더라도 자본인, 탐횡인으로부터 해방되어야 진정한 행복에 이를 수 있지 않을까. 현실을 거부하자는 말이 아니다.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를 옹호하는 말도 아니다. 우리가 발딛고 있는 현실을 비판적으로 인식하고 한발 더 나아가 보다 나은 세상을 위한 고민을 시작하는 말이다.

제대로 알지 못하면 사랑하지 못한다. 아는 것으로부터 사랑은 시작된다. 사랑한다는 말은 안다는 말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사랑하고 우리의 삶을 사랑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삶의 조건인 자본주의를 제대로 이해하고 비판적으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 리오 휴버먼의 『자본주의 역사 바로알기』가 한 쪽에 치우진 자본주의에 관한 역사책으로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물론 이 책도 읽을 필요가 없다. 그러나 책은 항상 빛과 어둠을 함께 드리운다. 이 책이 가진 장점을 읽어내는 독자라면 자신의 생각을 조금 더 말랑말랑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타인의 이야기에 귀 기울일 자세가 독서의 기본이다.

이 책의 저자 박홍규는 다양한 분야의 인문학 서적을 읽고 쓰고 번역하는 법학자이다. 게다가 추천사를 쓴 강수돌 교수보다 더 지독한 반자본주의자이다. 이반 일리히의 『행복은 자전거를 타고 온다』의 번역자 답게 자전거를 타고 도시락을 싸들고 다니는 괴짜 법학 교수이다. 휴대폰은 물론이고 화석연료를 사용하는 자동차도 없다. 우리 모두 박홍규가 될 수는 없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들의 삶의 조건이 어떠한지는 정확하게 알아야 하고 어떻게 살아왔고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자본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은 많은 사람들이 읽고 생각하고 우리들의 삶을 성찰해 볼 필요가 있다. 더구나 모든 걸 돈이 해결해 준다고 생각하는 청소년들에게 색다른 경제 개념이 필요하다. 과연 자본은 무엇이며 어떤 속성을 가지고 있고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져주는 책이다.

다만 아쉬운 것은 청소년들의 눈높이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용어와 문장들이 여과없이 사용되어 조금 더 쉽고 친절한 안내서의 역할을 하지 못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아무리 좋은 생각도 독자의 눈높이를 생각하고 저변을 확대하는 일에 신경 쓴다면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하고 성찰적 지식인으로 존경받는 저자의 책이 논쟁의 중심에서 또 다른 책을 재생산하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나는 언제나 그의 책을 기다린다.


110518-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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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의 사회
장 보드리야르 지음, 이상률 옮김 / 문예출판사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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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요롭게 된 인간들은 지금까지 어느 시대에도 그러했던 바와 같이, 다른 사람들에 의해 둘러싸여 있는 것이 아니라 사물에 의해 둘러싸여 있다. - 15쪽

시대를 뛰어넘는 고전은 시간을 견뎌낸 글이다. 우리는 보통 명불허전(名不虛傳)이라는 말로 이름값에 고개를 끄덕인다. 하지만 모든 고전에 내게로 다가와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누구나 알고 있지만 아무도 읽지 않은 책이 고전이라는 농담이 있다. 개인의 필요와 배경지식 그리고 호기심에 따라 고전은 때에 따라 읽어야 하는 게 아닐까.

고미숙의 『돈의 달인, 호모 코뮤니타스』, 김찬호의 『돈의 인문학』 등 돈에 관한 책을 읽다가 문득 떠오른 책이 바로 장 보드리야르의 『소비의 사회』였다. 아마도 『시뮬라시옹』을 읽고 미뤄 두었기 때문인지 리스먼의 『고독한 군중』을 읽어야겠다고 생각했을 무렵인지는 잘 떠오르지 않는다. 어쨌든 오래 맴돌던 책을 들고 조금씩 정독했다.

알랭 드 보통처럼 대중적인 소설 형식이나 가벼운 에세이 형식으로 풀어내지 않는다면 프랑스 철학자들의 책은 난해하다. 그런 편견 때문인지 이 책은 첫 장부터 집중하고 긴장하며 읽기 시작했다. 책의 전반적인 내용은 다른 책에서 여러 번 접했고 인용된 부분들도 보았으니 그리 어렵지 않았다. 다만 보드리야르가 당대를 읽어내고 해석하는 방식이 궁금했을 뿐이다.

40여 년 전, 1970년에 나온 『소비의 사회』는 시대정신을 정확하게 간파한 역작이라고 할 만하다. 산업사회로의 이행과정에서 파생된 무수한 사태들에 대해 단순히 자본주의의 검은 그림자라고 설명할 수 없는 그 무엇을 보드리야르는 ‘소비의 사회’로 명명했다. 사진과 영화의 등장을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이라는 예리한 논문으로 당대 사회를 분석한 발터 벤야민처럼 광고의 홍수 속에 새로운 시대와 새로운 인간의 욕망을 간파한 이 책은 여전히 유효하다.

인간의 심리와 자본의 속성을 적절하게 분석하고 새로운 시대의 흐름을 적확하게 해석했다고 평가할 수 있는 책이다. 우리는 여전히 소비의 사회를 살아간다. 고(故) 전우익 선생의 말씀대로 우리는 평생 무언가를 사서 버리고 또 사고 버리는 패턴을 반복하다가 죽는다. 소비가 미덕인 시대를 살아가고 있지만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는 라캉의 말처럼 끊임없이 타인과 나를 비교하고 경쟁하고 불행해한다. 현대사회의 거대한 소비 시스템은 점점 견고해지고 거역할 수 없는 틀이 되어버렸다.

이 책이 나온 이후 세계 경제는 신자유주의 물결과 세계화의 도도한 흐름에 휩쓸려가고 있다. 각국의 경제 블록은 무너지기 시작했고 무국적 거대자본은 부유하는 자본주의의 미래를 보는 것 같다. 21세기에 접어들면서 자유주의 경제체제에 대한 반성과 남미의 도발적 흐름에 주목하고 있다. 우리는 ‘복지’에 대한 사회적 고민을 소모적 정치 논쟁으로 비화시키고 있다.

이 책은 사물의 형식적 의례, 소비의 이론, 대중매체, 섹스 그리고 여가 등 3부로 이루어져 있다. 중세 기사의 한 벌의 갑옷과 투구를 뜻하던 ‘파노플리’가 어떤 의미를 뜻하는지에 대한 설명에서 시작해서 악마와의 계약 이야기로 끝난다. 각장은 현대 사회 상품과 사물화,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의 욕망에 대해 깊이 있는 통찰과 다양한 분석을 통해 ‘소비’가 갖는 다양한 의미를 풀어 놓는다.

현대사회에서 ‘소비’를 키워드로 삼는다면 수많은 이론과 분석들이 넘쳐난다. 하지만 이 책이 의미를 갖는 것은 시대를 통찰하는 폭넓은 시야에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보드리야르의 관심과 현대사회에 대한 분석이 어떤 변화를 보였고 이후에 어떻게 비판받았는지에 대해서는 더 깊이 있는 관심과 독해가 필요할 것 같다.

이 책은 일반 독자의 입장에서도 충분히 읽는 즐거움을 맛볼 수 있고 현대 사회를 본질적으로 성찰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 과거를 통해 현재를 돌아보고 미래를 예견하는 자연스런 흐름은 한 권의 책으로 얻을 수 없다. 하지만 꾸준한 관심과 다양한 분야에 대한 깊이 있는 책읽기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즐거움이 아닐까 싶다. 우리가 알고 의미를 부여하고 소중하게 여기고 사랑하는 것들이 모두 의심스러워 보인 적은 없는가. 우리는 소비한다, 고로 존재한다. 하지만 소비하지 않아도 존재할 수는 없을까.

소비는 하나의 신화다. 현대사회가 자기 자신에 대해서 하는 말(parole), 우리 사회가 스스로를 말하는 방식, 그것이 소비다. - 3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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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또 하루 문학과지성 시인선 390
김광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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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주변에 모든 사물들을 자세히 들여다보자. 특히 익숙한 것일수록, 오래된 것일수록 우리에게 많은 말을 건넨다. 그것은 사물에 투영된 우리들 의식의 반영일 뿐 아니라 생활 속에 배태된 사유의 본질을 의미한다. 언어는 사람됨을 규정하고 우리의 의식을 특정한다. 언어의 한계의 우리의 한계이며 생각의 범주이고 삶의 테두리가 된다. 그렇다면 언어를 확장하는 과정이 외부의 세계를 확장하는 일이 아닐까.

평범한(?) 삶을 살아가면서 사람들은 창작 행위를 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그 말은 옳으면서 그르다. 동일한 생활 패턴을 반복하다보면 생각의 범위와 경험의 한계를 벗어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최근 작가들이 하나둘씩 교수 자리를 꿰차거나 샐러리맨의 평범한 일상을 즐기고(?) 있는 것이 독자의 입장에서는 불편하다. 뭐 특별한 감흥이나 다른 세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리가 없기 때문이다. 아무리 뛰어난 상상력과 발군의 글솜씨를 가졌다 하더라도 한정된 세계에서 특별함을 창조하기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신현림의 말대로 지루한 세상에 불타는 구두를 던지지 못한다면 문학은 고급 살롱의 언어 유희에 그칠 위험이 있다. 세기말의 혼돈과 새천년의 희망을 지나 자본주의가 굳건하게 세계를 지배하고 경쟁질서가 공고한 사회에서 문학의 역할은 과연 어떠해야할까.

노시인의 시집을 읽다가 잠깐 상념에 잠긴다.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로 유명한 시인 김광규의 시를 오래 읽어왔다. 『우리를 적시는 마지막 꿈』, 『아니다 그렇지 않다』, 『좀팽이처럼』, 『아니리』, 『가진 것 하나도 없지만』, 『처음 만나던 때』, 『시간의 부드러운 손』 등 편안하면서도 일상속에 숨겨진 작은 비밀들을 감각적으로 묘파할 줄 아는 시인 김광규의 시선은 나이와 함께 무디어진다. 여전히 일상에 매몰되어 있는 생의 감각들을 되살려내고 있지만 예전 같지는 않다.

저녁나절

썰물이 빠진 뒤
뭍으로 길게 닻을 던진 채
개펄 바닥에 주저앉아 나른한
오후를 보내고 있는 거룻배들
정물로 머무는 동안 소금의
하얀 발자국 조금씩 드러날 때
말나루 먼 바다에서 아련히
밀물 들어오는 소리
갈대숲 어느새 물에 잠기고
물새들 날카롭게 지저귀고
잠에서 깨어난 거룻배들
물 위로 떠오르고
황혼의 냄새 불그스레 번져갈 때
조약돌처럼 널리 땅 위의 기억들
적시며 밀려오는 파도
어두워가는 여생의 하루


그것은 세월과 나이의 힘이며 절정을 지나 생을 마감하는 시인의 조근조근한 말투처럼 여겨져 옷깃을 여미게 한다. 환한 빛이 사라지고 어둠이 밀려오기 전, 말로 표현하기 힘든 빛의 여운과 어둠의 그림자가 드리운 시간을 나는 ‘푸른 시간’이라고 부른다. 시인도 저녁나절 그 시간에 또 하루가 저물어 가는 아쉬움을 ‘어두워가는 여생의 하루’라고 했을 것이다.

김광규 시인의 시는 어깨에 힘을 빼고 툭툭 던지는 쨉처럼 상대를 긴장시키고 거리를 조절한다. 시는 언제나 독자들에게 편안한 긴장을 주는 언어의 견고한 구조물이다. 헐렁하고 편안해 보이지만 단단하게 잘 빚은 백자 같은 기품이 있어야 오래 여운이 남기 마련이다. 쉽게 읽히지만 단순하지 않고 오래 기억하고 싶지만 쉽게 떠오르지 않는 언어의 바다.

나뉨

소형 임대 아파트 주민들이
드나들지 못하도록
오고 가지 못하도록
주상복합 고층 아파트 입주자들이
통로를 막고
길에 철조망을 쳤다
그렇다
우리는 예부터 나누어진 겨레
분단국가에서 살고 있다

분노와 절망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데도 슬픔이 배어나오는 시인의 목소리가 좋았다. 당연히 주목해야 하는 이웃의 모습, 상식적으로 갖추어야 하는 인간에 대한 예의가 무엇인지 말해주는 것 같은 김광규의 시는 통렬한 풍자보다 쉽고 간명하다. 계급과 계층이라는 말을 몰라도 눈에 보이는 일상에서 생각해 보자고 요구하는 낮은 목소리가 더 멀리 울려 퍼지기도 하는 법이다.



죽을 때까지 이어지는
삶은 끊임없는 연속입니다
쉴 새 없이 뛰는 심장
숨 쉬는 허파
가슴속에 품은
사랑도 그렇지 않은가요
산책을 하다가 피곤하면
길가의 벤치에 앉아 잠시
쉬어가듯이
우리의 삶도 사랑도 그렇게
가끔 쉴 수 있다면
좋으련만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단 한 순간도 쉬지 않는 심장, 처럼 우리들의 삶도 멈추지 않는 걸까. 우리들의 사랑도 그러한가. 알 수 없는 일이다. 숭산 스님의 말씀처럼 오직 모를 뿐!

고희를 맞은 시인의 눈에 비친 세상은 한결 고즈넉해 보인다. 편안하게 일생을 살아온 명예교수의 뒷짐과는 또 다른 고요함의 세계 같은 것이 이 시집 곳곳에 배어 있다. 여행의 기록이 지루하게 펼쳐지기도 하지만 여전히 일상에서 길어 올린 시편들이 가슴을 울린다. 잔잔하지만 넓은 파문을 일으키는 그의 몰년이 시집의 마지막이다. 하지만 아직, 그의 몰년을 말할 때는 아닌 것 같다. 조용히 스러지는 김광규의 시들은 푸른 시간에 읽기 좋다. 아니면 몰년 부근에.

몰년(沒年)

죽은 이는 그해까지 살았습니다.
예측 못한 미래를 끝내고
사후(死後)를 남긴 셈이지요
끝없이 이어지는 시간 …… 나머지는
괄호 안의 빈칸 속에서
갑갑한 줄도 모르고 살아가는
산 자들의 몫입니다



110513-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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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타는 왜 사막으로 갔을까 - 살아남은 동물들의 비밀
최형선 지음 / 부키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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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다른 동물과 어떤 차이점이 있을까. 우리가 아는 것처럼 고도의 발달된 언어의 사용과 소통 능력, 직립보행과 도구의 사용 등 문명을 이룩한 원동력은 생각보다 작은 차이에서 출발한다. 다른 동물들도 수준의 차이가 있을 뿐 인간과 크게 다르지 않은 습성과 능력들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지속가능한 삶을 위해서 우리는 조금 더 지혜로워질 필요가 있다. 환경과 조화를 이루는 삶이 선택이 아니라 필수적인 조건이 된 현대 사회에서 생태학적 상상력은 가장 중요한 능력이 되었다. 자연과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자명한 사실을 다시 거론할 필요가 있을까. 그 자연 속에는 다른 동물들도 포함되어 있다. 하늘과 나무와 숲과 강과 맑은 공기뿐만 아니라 그 안에 생태계를 유지하며 살아가는 수많은 동물들의 진화과정은 인간의 진화과정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최형선의 『낙타는 왜 사막으로 갔을까』는 새겨 읽을 만한 책이다. 단순히 동물들의 생태를 쫓아 그 습성과 특징을 관찰한 결과를 기록한 글이 아니다. 인간과 마찬가지로 동물들이 하나의 숭고한 생명체로 태어나 성장하고 죽음에 이르는 과정이 진지한 자세로 기술되어 있다. 필자가 이 책을 독자들에게 어떤 의미로 서술했는지 느낄 수 있는 대목들이 많다. 동양철학의 관점에서 인간의 본성에 빗대기도 하고 인간 삶의 조건들과 대조하기도 하는 부분들은 이 책 곳곳에서 발견되다.

깊은 성찰과 철학적 관점으로 동물들의 생태를 관찰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의 습성에서 인간의 삶을 반성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다른 동물들의 신체적 특징과 속성은 바로 인간을 돌아보는 거울이기 때문이다. 자연속에서 자연스럽게 환경에 맞게 진화하고 살아남은 동물들의 모습은 오래된 시간의 역사를 보여준다. 상상하기도 어려운 중생대와 고생대로 거슬러 올라가 동물들의 조상을 상상해 보면 지금 우리의 모습은 기억조차 할 수 없는 순간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듯하다. 겨우 백 년도 안되지 않은가.

다른 동물도 마찬가지기는 하다. 짧은 생을 마감하기 직전까지 오로지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생존경쟁과 죽음의 그림자를 벗어나기 위한 노력이 눈물겹다. 살기 위해 먹어야 하고 다른 동물을 먹잇감으로 삼아야 하는 연쇄 작용은 본질적으로 비극적인 삶을 상징하는 것 같다. 치타의 사냥법, 줄기러기의 이동, 낙타의 사막행, 일본원숭이의 배려, 박쥐의 기회주의, 캥거루의 지나친 모성, 코끼리의 여유, 바다로 간 고래 등 이 책에서는 익숙하면서도 쉽게 접할 수 없는 야생 동물들의 생태를 상세하게 다루고 있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현재까지 살아남은 대표적인 동물의 비밀을 밝히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오랜 시간을 견뎌내고 생존 경쟁에서 살아남은 동물들은 나름의 비법을 가지고 있다. 어떤 인간의 드라마틱한 삶보다도 더 극적인 적응력과 자연선택을 통해 살아남은 동물들의 슬픔을 읽어낸 것은 나만의 독법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결국 모든 인간이 짊어진 고독이라는 운명처럼 우리는 다른 동물들의 숙명을 이해하는 시간을 가져 볼 필요가 있겠다. 그 큰 덩치를 이끌고 생존 경쟁에서 ‘인내’ 하나만을 미덕으로 삼아 사막으로 걸어 들어가는 낙타의 당당함을 보라. 포유동물이면서 당황스런 상상력으로 바다로 뛰어든 고래는 또 어떤가. 우리는 삶의 불가해함을 말하곤 한다. 하지만 어느 동물인들 그렇지 않은가. 대자연 속의 인간은 그저 한없이 초라해 보일 뿐이다.

험한 환경 속에서 고통을 이겨 내면 삶의 자세가 진중해진다. 낙타는 자신을 드러내려고 설치는 짓을 하지 않는다. 늘 심오하고 조신해 보인다. - 79쪽

이 책의 제목처럼 낙타가 왜 사막으로 갔는지 궁금해 할 필요는 없다. 사실 생태적, 환경적 차원에서 접근하는 뻔한 답보다도 조금 더 상상력을 동원한다면 인간의 삶이 보인다. 우리는 왜 때때로 낙타나 고래 혹은 줄기러기와 박쥐와 코끼리와 치타처럼 행동하는지 돌아보자. 왜 그런가?

동물의 생태를 관찰하고 타산지석으로 삼으려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은 아니다. 얄팍한 지혜를 얻기 위해 다른 동물을 관찰하고 실험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지닌 본질적인 호기심과 다른 종의 삶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갖는 것이 이 책을 읽는 미덕이 아닐까 싶다.

동물생태학 책으로 재미있게 읽었던 『하이에나는 우유배달부!』처럼 가볍고 즐겁게 읽을 수 있는 책에서 너무 심각하게 밑줄을 그은 건 아닌가 싶기도 하다. 하지만 결국 모든 책과 지식과 정보는 내 삶에 대해 화두를 던질 뿐이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을 읽는 내내 우리는 타인에 삶을 통해 나의 존재 의미를 확인하듯이 다른 종을 통해 인간의 생을 성찰할 수 있게 된다.

데스몬드 모리스의 말처럼 인간은 『털없는 원숭이』에 불과한 지도 모른다. 살아남은 인간들의 슬픔을 다른 동물들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면 이 책은 충분히 가치가 있다. 오늘도 내일도 치열한 생존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모든 종(種)들을 위하여!!!


11051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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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지기 때문에 놀러 왔지 (양장) - 조선의 문장가 이옥과 김려 이야기
설흔 지음 / 창비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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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앞에서 모든 인간은 겸손해 진다. 그래서 영원히 살 것처럼 꿈꾸는 사람은 내일 죽을 것처럼 현재를 즐긴다. 하지만 순간을 영원으로 빛내는 문자는 인간의 육신과 달리 오랜 시간을 견디고 또 견뎌낸다. 우리는 그것을 역사라고 부른다. 문학은 선택적으로 기록된 역사에 생명을 불어 넣는다. 구체적인 모습으로 형상화하는 과정에서 역사는 살아 숨 쉬게 된다. 몇 줄의 기록과 시대적 상황이 작가의 상상력과 만나면 우리는 과거를 볼 수 있다. 시공간을 넘나들며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꿈꾸는 문학은 여전히 우리에게 많은 말을 건넨다.

기록과 보존에 부실하여 씨줄과 날줄처럼 한 인물의 삶과 그의 글들이 엮이지 않을 때는 그 빈 공간을 채우고 싶은 욕망이 생긴다. 우리는 언제나 행간을 읽어내며 시대를 통찰하고 현재를 조망한다. 그것은 단순히 과거 기록의 재현이 아니라 당대의 삶을 생생하게 되살려내고 싶은 욕망이며 우리가 걸어온 길에 대한 호기심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나간 시간을 돌아볼 수 있는 고전은 언제나 우리에게 색다른 즐거움과 반성의 기회를 제공한다.

설흔의 『멋지기 때문에 놀러왔지』는 소설의 형식으로 풀어낸 팩션(fact+fiction)이다. 절친한 두 사람의 삶과 글은 서로 얽히고설켜있다. 이옥(1760~1815)과 김려(1766~1821) 바로 그 문제적 인물들이다. 두 사람은 정조의 문체 반정에 연루되어 불행을 감내해야 했다. 하지만 두 사람의 태도와 그 후의 삶은 사뭇 대조된다. 성리학적 이데올로기가 지배했던 18세기에 경박한 소설식 문체인 소품체(小品體)로 글을 썼던 이옥은 천상천하 유아독존 왕의 눈밖에 난다. 그의 삶은 그걸로 끝난 것과 다름없다. 그에 비해 김려는 조금 나았을 뿐 평생 가슴에 멍에를 지고 살았다. 그러면 두 사람의 관계를 상상하게 된 작가의 동기는 무엇이었을까?

아무도 이옥의 아들이 김려를 찾아와 문집을 내달라는 데서 시작되지 않았을까. 평생 이옥이 쓴 글들을 읽으며 김려는 무슨 생각을 했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경상도 삼가현으로 귀향 가는 길에 쓴 『남정십편』과 삼가현에서 쓴 『봉성문여』가 대표적인 이옥의 소품이다. 결국 이옥은 자신의 글쓰기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증명했다고 볼 수 있다. 이옥에 비하면 평범한 글에 안주해 버린 김려의 회한을 상상하며 작가는 두 사람을 모델로 소설을 썼을 것이다.

문(文)으로 도(道)를 실천한다는 재도론(載道論)이 시대정신이었던 조선에 태어나 재기발랄한 글로 자신의 재능을 감출 수 없었던 이옥의 생애와 사상은 이 소설에서 김려의 관점 재조명된다. 소설적 감동은 이옥이 친구의 귀향지를 따라 방랑한 사실을 그의 아들을 통해 확인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역사적 사실을 소설이라는 형식으로 담아냈지만 이 책은 소설로 읽기에는 로 아쉽거나 혹은 아까운 부분이 많다.

이 책을 보면서 2006년에 나온 『고전문학사의 라이벌』(한겨레출판)을 떠올린 건 자연스런 일이다. 정출헌의 ‘이옥 vs 김려’ 편을 다시 꺼내 뒤적인다. 보다 구체적이고 사실적인 부분들을 확인할 수 있었지만 두 인물이 생동감 있게 살아 숨쉴 수 있도록 영혼을 불어넣은 공은 당연히 작가 설흔에게 돌아간다. 딱딱하고 재미없는 고전을 입체적으로 조명하고 다시 살려내는 일은 후세 사람들의 자연스런 욕망일까?

이옥은 그런 사람이었다. 아무리 빈궁하고 어려워도 자기의 마음이 거절하는 일은 도무지 하지 못하는 사람. - 147쪽

소설가 김훈은 “신념이 가득한자, 자신이 정의롭다고 확신하는 자들을 믿지 않는다. 오히려 의문이 가득한 자들을 신뢰한다.”고 말했지만 이옥은 신념이 강한 선비도 아니었고 정의를 위해 일생을 바친 사람도 아니다. 작가는 이 소설에서 이옥과 김려의 우정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나 문체 반정의 이면을 파헤치고 시대정신을 되돌아본 것 같다. 글은 틀 안에 가둘 때 생명을 잃고 마는 것이니 네모난 시대의 사각형 글에서 벗어난 글들이 견딜 수 있었겠는가. 빵빵한 집안의 박지원처럼 놀고먹으며 살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니.

또 한 가지 주목해야 할 것은 이옥의 존재감이다. 김려의 환상 속에 잠시 등장하긴 하지만 주인공격인 이옥은 이야기의 전면에 등장하지 않는다. 김려의 이옥의 아들이 주고 받는 대화, 김려의 기억과 현재 상황들이 맞물려 추리소설처럼 정교한 구조를 가지고 있어 청소년들 뿐만 아니라 누구든 재미있게 읽으면서 당대를 이해할 수 있는 책으로 추천할 만하다. 이덕무를 다룬 『책만 보는 바보』와 다른 스타일의 책이지만 조금 더 깊이가 있다.


110509-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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