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날 때마다 울었다 문학과지성 시인선 394
박형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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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질녘 붉은 빛을 토해내며 서산마루에 걸린 태양은 죽음과 좌절, 소멸과 허무를 떠올리는 법이다. 그것을 푸른 시간을 예비한 빛의 굴절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많지 않다. 밤의 시작을 알리는 황혼처럼 길이 끝난 곳에서 길이 다시 시작된다. 누군가의 죽음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한마디로 표현하기 어렵지만 아이러니한 공통점은 망각이다. 언젠가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운명으로 받아들여야 하지만 그것은 항상 남의 일이라고 생각하는 버릇을 가진 것이 인간이다.

시골, 원형적 삶의 공간에서 퍼올리는 한국어의 아름다움과 공동체에 대한 기억. 박형준의 시의 토대는 그의 유년 시절과 농촌에서의 삶이다. 이제 얼마나 더 우리에게 농촌 공동체의 따스한 기억이 ‘추억’으로 혹은 ‘낭만’과 ‘아쉬움’으로 여겨질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그 기억의 원형은 안타깝지만 지속적으로 전수되리라 믿는다.


황혼



아버지 삼우제 끝나고

식구들, 산소에 앉아 밥을 먹는다



저쪽에서 불빛이 보인다

창호지 안쪽에 배어든

호롱불



아버지가 삐걱 문을 열고 나올 것 같다


박형준의 새 시집 『생각날 때마다 울었다』는 그간에 시인이 보여준 세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아버지의 죽음에 관한 ‘황혼’이 서시가 되었지만 죽음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떠나는 것들과 남은 것들의 아쉬운 결별보다 보이지 않는 간격에 관심을 가져보자. 창호지 안쪽에서 흔들리는 그것은 누구인가.

독특한 감수성은 시인에게 필수아이템이다. 그것을 드러내는 방식을 개성이라고 하지만 시인 나름의 빛깔과 무늬가 독자에게 수놓아질 수도 있고 불편하고 어색한 남의 옷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박형준의 그것은 어떠한가.



당신의 팔



당신의 팔 속에서

강물 흐르는 소리가 난다



사람이 사랑을

사랑이 사람을

못 믿고

사랑을 사람이 두고

못 믿고



강물 속에 고기가

고기 속에 고기가

흐린 불빛 떠다니는

정육점 같은 팔 속에

나는 있고

고기 같은 강물 속에

당신은 있다



물살이 저녁 강 연안 지대에 부서진다

저녁 강물의 테이블엔

식빵 가루 점점이 흩어져 있다

어디선가 날려온 은빛 깃털이

물살에 떠밀려간다

울음 한번 짧게 울곤,

다른 데로 날아가는 두루미 부리같이



나는 당신의 팔 속

강물에 떠다니는

부스러기를 찍어 먹고

살 속의 창에

가슴속에 두고 아껴온

입맞춤을 하고 나는 언제나

당신의 팔에서 타인을 사랑한다

언제나 당신의 팔 속에서 죽는다


보통 보이지 않는 대상을 표현하려는 자들의 몸부림만큼 처연해 보이는 것도 없다. 하지만 우리는 그 낯섦과 새로움에 반하고 기꺼이 당신의 팔 속에서 안기고 싶은 것이다. 사소하고 평범한 것들로부터의 탈주 혹은 외면.

동물의 왕국에서나 눈여겨 볼법한 황제 펭귄의 생태가 갑작스레 따뜻하게 전해지는 것은 옆으로 누운 활자처럼 바람이 불면 부는대로 쓸려가지 못하는 운명 때문은 아닐는지. 삶은 누구에게나 그렇게 고단하게 북풍을 견디고 눈보라를 맞으며 바다를 바라보는 일은 아닌지. 그래서 시인은 봄은 ‘의지’로 온다고 말하고 있는 것인지.


황제펭귄



얼음이 단단해지는 남극의 겨울이 오면 황제펭귄은 바다에서 내륙으로 이동한다. 포식자를 피해 짧은 다리로 빙산을 타고 얼음길을 걸어 바람막이의 안전한 평지를 찾아 100km를 이동한다. 그들은 그곳에서 제의처럼 짝짓기를 끝내고 암컷은 알 낳기에만 몰두하여 몇 주 후에 주먹 크기만 한 알을 낳는다. 암컷은 힘을 모두 소진하였기 때문에 더 이상 알을 품을 수 없어 수컷에게 넘긴다. 암컷은 수컷에게 알을 넘기기 위해 수컷에게 최대한 몸을 밀착시키고 신속하게 알을 건네준다. 수컷의 짧은 두 다리 사이에는 주머니가 있어서 이 속에서 알은 안전하게 부화의 과정을 거친다. 암컷들은 원기를 회복하기 위해 다시 바다로 되돌아간다. 그때부터 수컷들의 순례의 행진이 시작된다. 눈보라와 영하 60°C의 강추위 속에서 수백만 마리의 수컷 펭귄들이 다리 사이에 알을 끼우고 암컷들이 떠난 바다에 시선을 고정한 채, 알을 지키기 위해 둥그렇게 뭉쳐 서로를 보호한다. 온몸이 눈보라에 뒤덮인 채로 어둠 속에서 백야의 무덤이 되어간다. 바깥에 있는 펭귄들은 안으로 들어가고 안에 있는 펭귄들은 다시 바깥으로 나오면서 그들은 그렇게 2개월 이상을 보낸다. 드디어 순례의 정점에서 새기들이 부화하고 수컷들은 되새김질한 먹이를 새끼에게 먹여주지만 그들 역시 아무것도 먹지 못했기 때문에 이내 한계에 도달한다. 바로 이때 저 멀리 바다에 가 있던 암컷들이 입안에 가득 먹이를 지닌 채 아침 해를 등에 지고 나타나기 시작한다. 한 걸음 한 걸음씩 다가오는 암컷들의 실루엣에 커다랗게 원을 이루면서 움쳐 있던 수컷들의 대오가 무너지고, 그들은 환호성을 지르면서 자신만의 목소리로 짝을 부른다. 2개월 이상의 긴 시간이 지났음에도 암컷들은 자신의 짝의 목소리를 정확히 기억한다. 입에 가득 문 먹이를 품은 채 뒤뚱거리는 다리로 수컷고 제 새끼에게 안겨든다.


이 도보승들에겐 흔히 Emperor라는 칭호가 붙는다.

이 피안의 황제들은 자신을 침묵 속에 열어놓고

자신의 고독으로 세계를 창조한다.

봄은 의지로 온다.


희망은 미래를 위한 일종의 환각이다. 그것은 이루어지짐과 무관에게 모든 것들의 존재이유가 되기도 한다. 펭귄은 무엇을 바라 2개월 이상의 긴 시간동안 바다를 바라고 있었을까. 시인은 우리가 사는 일도 황제펭귄의 그것과 비슷하지 않겠느냐고 묻는 듯하다. 그러다 문득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를 듣기도 하겠지만. 과거로 단단하게 뭉쳐진 빗방울처럼 그렇게.


빗소리



내가 잠든 사이 울면서

창문을 두드리다 돌아간

여자처럼



어느 술집

한 구석진 자리에 앉아서

거의 단 한마디 말도 하지 않은 채

술잔을 손으로 만지기만 하던

그 여자처럼

투명한 소주잔에 비친 지문처럼



창문에 반짝이는

저 밤 빗소리


그리하여 어느 날 투명한 울음을 울기도 할 것이다. 낯설게 다가오는 자신의 모습과 차창에 비친 또 다른 누군가와의 대면. 어색하기보다 차라리 객관화된 외로움 때문이라고 해야 할까. 투명한 울음으로 가득한 한 사람 한 사람이 부대끼며 전철을 타고 버스를 타고 오늘도 어디론가 사라진다.


투명한 울음



그런 날이 있다

지하철 첫차를 타고 가는 여자가

차창에 떠 있는 자기 모습을 보고

우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런 날이 있다

그녀의 눈에 떠 있는

내 얼굴을 보고 운 적이 있다

그런 날에는 깨진 사금파리에 빛나는

시려운 빛이라도 그리워진다


사라진 사람들은 저녁 빛을 받으며 돌아온다. 빛의 세상을 살아내고 어둠의 세계를 견디기 위하여 불빛을 찾아 하나둘씩 모여드는 사람들은 외로우니까 사람이라고 서로를 위로한다. 그 위로는 인간의 몫이 아니다. 시인은 사물들이 보여주는 형상들, 소리들에 주목한다. 부드럽고 따뜻한 것, 차갑고 단단한 것 그리고 빛과 그림자.


저녁 빛



사물 속에 빛나는 고통처럼

또 저녁이 온다

버드나무 꽃가루 자꾸 날아와

다래끼를 나게 하는 바다



선창가 외진 술집

금 간 담벼락 밑에 핀 질결이꽃처럼

먼지투성이의 삶을

눈빛으로나마 바다에 빠뜨리며 걷는다



시간을 들여다보느라

한 개의 초점만 남은 눈먼 시계공

수평선에 잔해를 이루며 노을은

시간의 땔감들을 한 단씩 태우며 저문다



새살이 돋아나는 통증인가

부서진 초침과 분침 들

부드러운 상처 속에서 뿜어져 나오는 별들로

또 하나의 성좌를 이룬다

수평선이 빛이 나에게 고통을 준다


모든 고통이 사라진 후 잠에서 깨어난 듯 어두워지는 사위를 둘러본다. 부박하고 처량한 삶의 본질을 들여다보는 일은 고통스럽다. 젊은이에게 간신히 작은 열매가 맺힐 무렵 찾아온 사랑처럼 누군가에겐 꽃이 피고 바람이 불고 그림자가 드리운다. 그나마 시인은 ‘생각날 때마다 울었다’는 고백을 하고 있지 않은가. 생각나지 않아서 울고 생각나도 울지 않은 사람들을 위한 사람들은 박형준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보자.


생각날 때마다 울었다



그 젊은이는 맨바닥에서 잠을 잤다

창문으로 사과나무의 꼭대기만 보였다



가을에 간신히 작은 열매가 맺혔다

그 젊은이에게 그렇게 사랑이 찾아왔다



그녀가 지나가는 말로 허리가 아프다고 했다

그는 그때까지 맨방바닥에서 사랑을 나눴다



지하 방의 창문으로 때 이른 낙과가 지나갔다

하지만 그 젊은이는 여자를 기다렸다



그녀의 옷에 묻은 찬 냄새를 기억하며

그 젊은이는 가을밤에 맨방바닥에서 잤다



서리가 입속에서 부서지는 날들이 지나갔다

창틀에 낙과가 쌓인 어느 날



물론 그 여자가 왔다 그 젊은이는 그때까지

사두고 한 번도 깔지 않은 요를 깔았다



지하 방을 가득 채우는 요의 끝을 만지며

그 젊은이는 천진하게 여자에게 웃었다



맨방바닥에 꽃무늬 요가 펴졌다 생생한 요의 그림자가

여자는 그 젊은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사과나무의 꼭대기,

생각날 때마다 울었다



111103-0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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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온한 것들의 존재론 - 미천한 것, 별 볼일 없는 것, 인간도 아닌 것들의 가치와 의미
이진경 지음 / 휴머니스트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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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온성이란 어떤 뜻밖의 만남에서 느끼는 ‘저들’의 기분이다. 위대함과 탁월함의 찬양자들, 자신의 고상함과 고매함을 자랑삼는 자들, 자신이 세상의 주인이며 세상을 지배한다고 믿는 자들, 바로 그런 자들이 어떤 당혹스런 만남 앞에서 느끼는 감정이다. - 21쪽

언어는 사유의 도구이다. 그것은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도 사유의 범위와 한계가 다르다는 의미이다. 언어의 한계가 사유의 한계라는 말은 자신의 존재는 자신이 사용하는 언어로 규정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여기서 존재는 우리말 ‘있음’으로 해석될 수 있으나 영어의 ‘be’, 독일어의 ‘sein’과는 용법상 차이가 많다. 그래서 우리에게 ‘존재론’이 낯설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는 변명이 가능하다. be 동사가 없는 한국어.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을 읽으면서 ‘존재론’을 처음 만났지만 쉽게 그 개념이 잡히지 않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두려움은 원시시대부터 인간에게 유전되어온 오래된 기억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탐구와 사유의 대상이지만 좀처럼 실체를 드러내지 않는 아득함이기도 하다. 이진경의 『불온한 것들의 존재론』은 ‘이진경’과 ‘존재론’의 결합이 아니라 ‘불온한 것들’에 초점을 두어야 하는 책이다. ‘존재론’이라는 뜬구름에 도전하는 ‘이진경’은 철학자가 아니다. 다만 그가 지금까지 걸어온 길과 펴낸 책과 사유의 폭을 수용한다면 이 책은 무엇보다 ‘재미(?)’ 있을 수 있다. 어떤 재미를 찾을 것인지는 물론 각자의 몫이다.

그래서 이 책의 시작은 ‘불온성’에 대한 저자의 정의로부터 시작된다. 뜻밖의 만남에서 느끼는 ‘저들’의 당혹스런 감정이라는 정의에는 많은 함의를 포함한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의문이 들기 시작한다. ‘저들’에게 불온한 것이 ‘우리’에게는 불온하지 않는가. 이것은 단순한 편가르기가 아니다. 저자의 대전제에 포함한 음험함을 간파하고 기꺼운 마음으로 동참할 생각이 있거나 얼떨결에 그의 이야기에 말려들거나!

내가 어느 쪽에 있든, 아니 어느 쪽에 속하는지도 몰라도 깊은 가을 진지한 질문과 사색을 즐기기를 원한다면 일독을 권할 만한 책이다. ‘이진경’에 대한 믿음과 ‘불온한 것들’에 대한 호기심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구성은 단순하다. 불온성에 대한 개념과 정의로 시작한 후 불온한 것들의 존재론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밝힌 다음 장애자, 박테리아, 사이보그, 온코마우스, 페티시스트, 프레카리아트에 대해 분석한다. 총론과 각론의 결합인 기본적인 구성을 통해 독자들은 자연스럽게 존재론에서 벗어나 불온한 것으로 관심의 초점을 이동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앞서 언급한 불온한 것들에 대한 호기심에서 ‘나’의 존재론으로 이동이며 나와 관계 맺은 ‘너’와 ‘세상’에 대한 관심에서 인식론과 가치론으로 이동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아니면 말고.

존재론은, 그 추상적인 말과는 반대로 가장 구체적이고 가장 정치적인 사유의 장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존재와 같은 추상적 단어로 많은 것을 대체하며 가리는 경우조차 만약 그 사유나 주장이 제대로 전개된 것이라면, 피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존재론은 자신의 사유를 걸 존재자들, 자신이 맨 처음 시선을 던진 출발점이 무엇인가에 따라 아주 다른 방향, 아주 다른 형태의 궤적을 그린다. - 352쪽

‘출구 혹은 입구’라는 부제의 에필로그에서 저자의 ‘존재론’이 비로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 존재는 존재자에 의해 결정되며 자신의 사유를 걸 존재자에 따라 아주 다른 방향과 궤적을 그리게 된다. 즉, 존재론은 자신의 삶의 방향성과 궤적에 대한 성찰이며 인과론적 차원에서 맨 처음 시선을 던지게 되는 우연과 조우하게 되는 순간의 깨달음인 것이다. 저자의 의도와 무관하게 그것은 허망한 성찰보다 뚜렷한 존재론적 접근 방식이라고 굳게 믿는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마주치는 마이너스 존재들: 장애자, 박테리아, 사이보그, 온코마스, 페티시스트, 프레카리아트에 대한 이해와 새로운 접근 방식은 각론의 재미이다. 도구를 사용하여 원하는 결과를 얻은 원시인이 최초의 사이보그라는 주장은 신선하지 않은가. 책표지에 한 사람의 그림자가 물구나무선 모습은 책을 읽는 동안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그것은 낯설음에 대한 요구이며 새로운 시각에 대한 지속적인 충고로 들린다.

한 권의 책에서 무엇을 읽어내든 독자의 몫이라는 무책임한 말이 아니다. 이해의 폭과 넓이를 어디까지로 설정할 것인가. 스키마의 정도와 주체적인 수용능력을 일일이 표시할 수도 없다. 때로는 부딪치고 깨지고 헤롱대며 수용할 뿐이다. 그렇게 책장을 덮으려던 순간에 저자가 친절하게도 한마디 던져줄 수도 있다. 아니 그의 내밀한 의도를 언뜻 엿보일 수도 있다. 불온한 것들과 친구가 되라고, 그것은 낯설고 불편한 것들과의 만남이며 새로운 인식의 출발이라는 것을.

불온한 것들과 친구가 된다는 것은 낯설고 불편했던 것들에 익숙해지고 편안해지는 것만은 아니다. 반대로 익숙해지는 것보다 빠르게 그것들과 다시 낯설어지고, 익숙했던 것들마저 다시 낯설고 불편하게 만나는 것이다. - 358쪽


111101-0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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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정투쟁 - 사회적 갈등의 도덕적 형식론 악셀 호네트 선집 1
악셀 호네트 지음, 문성훈.이현재 옮김 / 사월의책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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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모든 인간관계에서 자신의 욕구가 충족될 수 있다고 믿게 하는 심리적 기초를 형성하는 데 비해, 권리 인정은 자신이 모든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는다는 점에서 자신을 존중할 수 있는 의식을 불러일으킨다. - 230쪽

대한민국 정치사에 전례 없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2011년 10. 26 서울시장 재보선 결과는 1979년 10. 26에 버금가는 변화를 예고하고 있지만 그 방향과 흐름을 정확히 진단하는 것은 쉽지 않아 보인다. 정부와 정치권은 자신들만의 시각으로 현 상황을 해석하며 검찰의 칼날을 들이밀거나 이후의 추동세력을 보여주지 못하고 지리멸렬해질 우려가 있을 수 있다. ‘권력이 시민에게 넘어왔다’는 당선자의 말이 시사하는 바가 무엇인지 그것을 정치권과 시민들은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앞으로 남은 사회적 상황과 정치적 지형 변화는 어떤 스포츠보다 즐거운 게임으로 즐길 수도 있다. 그것이 우리의 현실만 아니라면.

프랑크푸르트학파 계보의 3세대로 평가받는 악셀 호테트는 『인정이론』을 통해 선배들의 ‘비판이론’을 한발 넘어서고 있다. 아도르노나 호르크하이머가 주도한 1923년 프랑크푸르트 사회조사연구소는 서구 마르크스주의의 한 분파로 발전했고 하버마스는 이들의 뒤를 이어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변동의 성격과 결과를 분석하는데 주력했다. 이들은 모두 기본적으로 자본주의 사회의 변동과 갈등 양상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보이지 않는 계급사회에 내재하는 갈등의 원인은 무엇이며 이를 해소하기 위한 방법은 무엇인가. 그것은 결과 사회를 발전시키는 원동력이 될 것이다.

이 책은 ‘권력 투쟁’과 ‘계급 투쟁’을 넘어 ‘인정 투쟁’이라는 말로 인간의 삶과 사회적 현상을 분석하고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권력 투쟁은 어찌 보면 매우 단순하다. 인간의 가장 본능적이고 전통적인 ‘권력’에 대한 욕망을 갈등의 기본 원인으로 보는 관점이다. 그것은 단위사회의 크기에 따라 서로 다른 양상만을 보여줄 뿐 가장 궁극적이고 지속적인 투쟁이 될 것이다.

현대사회에서는 희미해진 개념 중 하나가 계급이다. 중산층이 무너지고 상하위 소득수준의 격차가 점점 벌어지는 상황에서도 소득의 재분배나 지속가능한 사회에 대한 고민이 없다면 권력의지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계급투쟁은 모든 갈등의 원인을 ‘돈’으로 돌리려는 환원주의가 될 우려가 있지만 가장 분명하고 즉물적인 현재적 관점의 요인이 될 수밖에 없다. ‘서민을 위한 정치’를 해 달라는 많은 사람들의 말은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지 않도록 열심히 일하면 일한만큼의 대가를 얻을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달라는 요구이다. 지나친 소득격차, 자녀양육, 대학입시, 학벌주의, 주택문제, 노후대책 등 다양한 사회적 의제들의 밑바탕에는 언제나 경제 문제로 환원된다.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돈은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아니, 먹고 사는 문제가 궁극적인 사회적 갈등의 근본원인일까. 호네트는 ‘인정투쟁’의 이념이 매우 오래된 역사적 기원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이 책에서는 근대 사회철학의 토대가 되는 헤겔과 미드의 이론을 철저하게 분석하며 인정투쟁의 이론을 검증한다. 두 철학자가 주장한 이론적 틀이나 저작을 꼼꼼하게 읽지 않았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책을 읽어나가는데 어려움이 많았다. 확실한 개념이 자리 잡지 않은 상태의 독서는 무의미한 공상에 불과할지도 모르겠다.

인정의 개념은 인간의 본능에서 연유한다. 어머니와의 분리가 이루어질 수 있는 바탕에는 어머니에게 사랑받고 있다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고 인정하는 첫 번째 단계가 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인정받지 못하면 분노하게 된다. 그것이 인간이다. 앞서 언급한 사회적 갈등과 다양한 투쟁의 근본적 이유는 바로 이러한 인정욕구에 기인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저자는 ‘사랑, 권리, 연대’라는 상호주관적 인정의 유형들을 통해 현대사회에서 인정관계가 어떻게 구조화되어 있는지 분석하고 있다. 결국 폭행이나 권리의 부정 더 나아가 가치의 부정은 자기 정체성을 무시당하는 일이기 때문에 가장 극단적인 좌절과 분노를 가져온다. 인간은 돼지가 아니기 때문에 돈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인정’이 필요한 것이다.

전체 3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마지막 사회철학적 조망에서 이 책의 부제가 된 ‘사회적 갈등의 도덕적 형식론’을 펼치고 있다. 마르크스와 소렐, 사르트르의 전통을 더듬고 ‘무시와 저항’이라고 하는 사회적 갈등의 도덕적 논리를 살펴본다. 이렇게 부지런히 일했고 이정도로 열심히 살았는데도 불구하고 주어진 현실과 삶의 조건 그리고 미래에 대한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것은 도덕과 윤리적 개념으로 풀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사회적 갈등의 원인은 권력과 자본 넘어 있는 것은 아닌가. ‘인정’은 삶의 가장 기본적이고 궁극적인 조건이며 이유가 아니겠는가. 호네트가 그것을 어떻게 분석하고 증명하고 있든 그것을 인정하는데서 우리의 고민은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모든 새로운 가치 있는 속성은 인정 행위를 통해 확인됨으로써 인간 주체의 자주성 능력을 향상시키게 되며, 이것이 바로 문화적 변동이라는 역사적 과정 속에서 일어나는 진보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 369쪽


111028-0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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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의사 박경철의 자기혁명 - 시대의 지성, 청춘의 멘토 박경철의 독설충고
박경철 지음 / 리더스북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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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지상에서 살고 있는 동안에는
네가 무슨 일을 하든 금하지 않겠노라.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하는 법이니라.
- 15쪽(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의 『파우스트(faust)』 중에서)

안철수, 박원순, 박경철의 공통점

사람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으며 새로운 시대의 리더로 자리 잡은 세 사람의 공통점은 책에 미친 사람들이다. 큰 평수가 논란이 된 서울 시장 후보 박원순의 거실은 책을 버리지 못해 도서관에서나 볼 수 있는 개가형 서고처럼 꾸며져 있다. 어린시절부터 책벌레였던 안철수와 박경철은 ‘청춘 콘서트’를 통해 이 시대 젊은이들의 멘토로 자리잡았다.

진행하던 라디로 프로그램을 접고 마지막 ‘청춘 콘서트’를 마치고 안동에 내려 간 뒤 얼마 후에 박경철은 『자기혁명』을 내놓았다. 책을 많이 읽은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오류 중에서 현학적인 취향과 계몽적 태도는 그 피해가 심각할 수 있다. 지식이 자기 것으로 온전히 소화되지 못하거나 일방적인 시선으로 세상을 재단할 경우 자신의 앎의 범위를 세계의 전부로 착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는 속담이 있듯이 얄팍한 독서와 편협한 사고는 ‘단무지’보다 무서울 수 있다. 하지만 오래 숙성된 포도주처럼 독하지 않고 진한 향기를 내는 사유의 깊이는 주변 사람을 물들이고 저절로 고개를 숙이게 한다.

여름에 ‘청춘콘서트’에 갔다가 김제동의 이야기를 듣고 콧날이 시큰했다. 웃음을 주려는 노력 때문이 아니라 우스운 것이 많은 세상 이야기 때문이었다. 진지한 고민과 우울한 현실이 김제동에게 얼마나 큰 코미디로 느껴지는지 말하는 순간 청중들은 자신이 왜 웃을 수 없었는지 깨닫게 되었다. 안철수와 박경철의 대담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사회, 경제, 정치적 ‘상식’을 되돌아보게 했다. 이 책은 박경철이 프롤로그에서 말하고 있듯이 ‘당신은 지금 당신 삶의 주인인가!’에 대한 끝없는 질문이다. 홍세화의 『생각의 좌표』에서 묻고 있는 것과 그 맥락이 닿아 있다. 생각의 주인이 자신이 아닌 사람들과 삶의 좌표를 잃어버린 이 시대의 청춘들에게 전하는 박경철의 진심어린 조언이 가슴 아프다.

‘청춘’, 어떻게 할 것인가?

통상적으로 20대를 지칭하는 이 말은 사회에 첫 발조차 내딛지 못한 취업 준비생을 비롯해서 이제 갓 대학에 입학한 대학생에 이르기까지 삶의 좌표를 설정하지 못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청춘’은 나이가 아니라 살아있는 정신을 지칭한 말이어야 한다. 열린 가슴과 변화 가능성이 없는 청춘은 청춘이 아니다.

괴테의 말처럼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하는 법이기 때문에 실수와 좌절을 두려워하지 말고 수많은 방황과 시행착오를 통해 먼저 자아를 찾아야 한다. 나는 누구이며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고민 없이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는 천민 자본주의에 매몰된다면 자기 삶의 주인이 될 수 없다. ‘돈’ 없이 살 수도 없지만 오로지 ‘돈’을 위해 뛴다고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뚜렷한 사회인식과 자신의 위치를 점검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자기 삶의 주인이 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적절한 시간 활용이 중요하고 책읽기와 글쓰기도 필요하다. 저자는 이런 과정을 통해 ‘자기혁명’이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다. 진정한 자기 혁명은 점진적 변화와 다른 사람과 똑같은 목표를 얻기 위한 노력과는 구별된다.

성급하게 서두르지 않아도 좋다. 한 걸음씩 그러나 치열하게 고뇌하고 방항하며 시행착오를 통해 스스로의 질문들에 답을 해나가야 한다. 세상을 어떻게 읽어야 할 것인가, 지금 여기에서 내 삶의 주인이 되는 방법은 무엇인가, 그러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가. 수백회의 강연과 탄탄한 인문학적 독서는 이 책의 내용과 구성을 탄탄하게 다져준다. 시골의사, 경제전문가 박경철이 아니라 청춘들의 친근한 멘토 박경철의 진지한 목소리가 담겨 있는 이 책이 베스트셀러에 오른 이유가 충분히 짐작되고도 남음이 있다.

변화와 실천

지금까지 철학자들은 세계를 ‘해석’하는데 주목했다면 이제는 ‘변화’와 ‘실천’을 이야기할 시점이다. 박경철은 그것은 사회적 소용돌이와 정치적 불안이 아니라 내부로부터의 ‘혁명’이라고 이야기한다.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 이전에 도대체 세상은 어떻게 돌아가는가를 알아야 한다. 내가 살아갈 사회, 정치, 경제, 문화를 이해하는 것은 ‘자기혁명’의 기본 전제가 아닐까.

서점에 차고 넘치는 ‘자기계발서’, 마약 같은 ‘행복론’, 점수올리는 비법을 전하는 ‘공부법’ 등은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거시적인 안목을 주지 못한다. 하지만 박경철의 『자기혁명』은 깊이와 넓이를 담보하고 있다. 한 권의 책이 인생을 변화시켜주기도 한다. 그 책이 전하는 감동이나 저자의 생각에 동의할 때 그렇다. 달콤한 감언이설도 없고 실천 매뉴얼도 없는 책이지만 오래오래 삶의 지표로 삼을 만한 이야기가 담긴 책이어서 누구에게나 추천할 만하다.

그것은 저자의 말대로 청춘에 대한 동정(sympathy)이 아니라 공감(empathy)으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시혜와 계몽의 수직적 태도가 아니라 배려와 공감의 수평적 ‘애티튜드(attitude)’ 때문이다. 근거 없는 수다와 소문이 아니라 사실과 경험에 근거한 저자의 진심어린 충고가 ‘청춘’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되는 나머지는 이 책을 읽는 청춘들의 몫이다.


111023-0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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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앞에 없는 사람 문학과지성 시인선 397
심보선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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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여, 너는 내게 단 한 번 물었는데
나는 네게 영원히 답하고 있구나.

- 시인의 말



심심하여 시인의 말을 패러디.
 
사랑이여, 너는 내게 단 한 번 물었는데
나는 네게 영원히 답하고 있구나.

세상이여, 너는 내게 단 한 번 물었는데
나는 네게 영원히 답하고 있구나.

시집을 들추니 ‘Mundi에게’가 눈길을 끈다. 라틴어로 세계, 세상이라는 의미의 ‘Mundi’. 현존재인 ‘나’의 시점으로 존재자인 대상을 통찰하는 것은 시인의 의무가 mundi를 거쳐야 하는 모든 사람들의 권리이다. 다만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해석할 것인가의 문제가 남는데 심보선은 그것을 ‘들’과 ‘둘’로 나누었다. 거칠게 ‘들’은 ‘野’, 즉 사회를 말할 것이고 ‘둘’은 ‘人’ 즉 기대고 선 두 사람의 관계 혹은 사랑을 의미한다. 한 권의 의미망을 형성하고 싶은 시인의 욕망과 무관하게 이 시집은 이 시대를 바라보는 또 하나의 프리즘의 역할을 한다. 
 

좋은 일들 


내가 오늘 한 일 중 좋은 일 하나는

매미 한 마리가 땅바닥에 배를 뒤집은 채

느리게 죽어가는 것을 지켜봐준 일

죽은 매미를 손에 쥐고 나무에 기대 맴맴 울며

잠깐 그것의 후생이 되어준 일

눈물을 흘리고 싶었지만 눈물이 흐르진 않았다

그것 또한 좋은 일 중의 하나

태양으로부터 드리워진 부드러운 빛의 붓질이

내 눈동자를 어루만질 때

외곽에 펼쳐진 해안의 윤곽이 또렷해진다

그때 나는 좋았던 일들만을 짐짓 기억하며

두터운 밤공기와 단단한 대지의 틈새로

해진 구두코를 슬쩍 들이미는 것이다

오늘의 좋은 일들에 비추어볼 때

어쩌면 나는 생각보다 조금 위대한 사람

나의 심장이 구석구석의 실정맥 속으로

갸륵한 용기들을 알알이 흘려보내는 것 같은 착란

그러나 이 지상에 명료한 그림자는 없으니

나는 이제 나를 고백하는 일에 보다 절제하련다

발아래서 퀼트처럼 알록달록 조각조작

교차하며 이어지는 상념의 나날들

언제나 인생은 설명할 수 없는 일들투성이

언젠가 운명이 흰수염고래처럼 흘러오겠지



언어[言]로 지은 집[寺]. 시(詩)의 한자어는 문학의 성격을 가장 간결하게 표현한다. 말은 수많은 형태와 빛깔을 지닌 건축물을 만들고 사람들은 말없이 그 안에서 숨을 쉰다. ‘나’와 ‘너’ 그리고 세계를 떠나 생각할 수 없지만 때때로 암흑처럼 어두운 세상은 침묵한다.



텅 빈 우정



당신이 텅 빈 공기와 다름없다는 사실.

나는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대신 당신의 손으로 쓰게 할 것입니다.

당신은 자신의 투명한 손이 무한정 떨리는 것을

견뎌야 할 것입니다.



나는 주사위를 던지듯

당신을 향해 미소를 짓습니다.

나는 주사위를 던지듯

당신을 향해 발걸음을 옮깁니다.



그 우연에 대하여

먼 훗날 더 먼 훗날을 문득 떠올리게 될 것처럼

나는 대체로 무관심하답니다.



당신이 텅 빈 공기와 다름없다는 사실.

나는 고백하지 않을 것입니다.

대신 당신의 입으로 말하게 할 것입니다.



당신은 자신의 투명한 입술이 하염없이 떨리는 것을

견뎌야 할 것입니다.



오늘은 신비로운 일이 하나도 일어나지 않는 날.

내일은 진동과 집중이 한꺼번에 멈추는 날.

그다음 날은 침묵이 마침내 신이 되는 날.



당신과 내가 원하기만 한다면

동시에 함께 웃을 수 있는 것처럼.



당신과 내가 원하기만 한다면

모든 것이 동시에 끝날 것입니다.




‘당신’은 2인칭에 머물지 않고 3인칭 극존칭으로 존재한다. 거울 속의 ‘나’를 향한 독백이어도 좋고 마주앉은 ‘너’여도 좋다. 부재하는 제3자이면 어떤가. 연시(戀詩)에 기대어 사람을 바라보고 세상을 관찰하는 것은 오래된 방법이다. 주관적 경험의 객관화가 이루어지는 순간 말[言]은 나름의 기능[寺]을 획득하고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게 된다. 그리하여 존재하는 모든 것은 당신이 된다. 그것이 ‘낙화’할 때까지.



낙화



어느 지상에 가을이 임하고 있다.

처음 보는 낯선 빛이 만인(萬人)의 발을

지그시 누르고 있다

낙화의 순간

누군가 무언가를 향해 나아간다

누군가 넘어지고

무언가 잘못된다

아직은 인간인 고아(孤兒)가

가족과 이웃

좋은 이와 나쁜 이를

구별할 수 없어 모두가 그리웁다

떨어지는 꽃이여

찰나의 귓바퀴를 맴도는 시간의 방랑이여

누군가 급히 거둬들인 시선이여

무언가 슬피 가리키는 손가락이여

지상의 어느 문에도 맞지 않아

허공에서 영원히 헛돌고 있는

고단한 열쇠여


그 고단한 열쇠는 세상의 모든 ‘처음’을 기나리고 그러다, 그러다가 ‘첫 줄’을 기다린다. 세상의 모든 첫 줄은 다음 줄로 인도할 뿐이다. 첫 줄은 존재하지 않았던 세상을 안내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사라진 과거와 현재에 대한 슬픈 조문(弔文)에 불과하다. 그것이 불이 되어 활활 타오를 수 있다는 순진한 믿음이 우리를 늘 미래로 인도한다. 그리하여 이 별에는 ‘이별’이 존재한다.



이 별의 일



너와의 이별은 도무지 이 별의 일이 아닌 것 같다.

멸망을 기다리고 있다.

그다음에 이별하자.

어디쯤 왔는가, 멸망이여.


멸망이 이별을 안내하는 것이 아니라 이별을 위해 멸망을 열망한다. 멸망이 쉽지 않다면 이별은 더더욱 어려워진다. 이 별에서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이별은 그러나 너무 쉽다. 제2부 ‘둘’의 서시는 이렇게 이별보다 멸망을 두려워하며 시작된다.



노스탤지어



유물론자들은 일찍 죽는다

그들은 모순을 설파하지

자기 영혼에 불꽃을 던진 방화범

판관은 고민한다

후회는 양심의 증거인가

죄의 증거인가

法은 만졌을 때 더 차가운 것을

좋은 물증으로 택하지

그러나 음유시인은 노래한다

감미로운 이끼가 풍미하는 절벽

하품과 하품 사이에서 나고 죽는

산양의 일생

평생 되새김질할 만큼

뱃속에 가득한 無

기억의 치외법권에서 들려오는

영원한 헛구역질 소리

뒤돌아보지 않으리

이 삶은 내가 살고도

내가 살지 않았으니


여기까지 옮기고 나니 동갑내기 시인 진은영의 해설, “하이데거는 ‘눈앞에 있음’(Vorhandensein, 현전하는 존재)과 ‘손 안에 있음’(Zuhandensein, 도구적 존재)을 구별하면서 한 사물이 도구적 용도 속에서 파악되는 한, 그 사물은 눈앞에 드러나지 않는다고 규정했다.”는 부분이 떠올랐다. 결국 눈앞에 사람이 없다는 것은 공기가 사라져버렸을 때의 답답함을 통해 공기의 소중함과 고마움을 확인하는 것과 같은 원리라는 것이다. 즉, 존재는 부재를 통해 자신을 증명한다. 그래서, 문학과지성사 시인선의 시인들은 언제나 뒤표지에 실린 시인의 글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려는 것일까. 미래의 모든 부재를 예언하는 세상의 존재들이여.

사랑은 인간이 신에게서 빌려온 유일한 단어예요. 그러니 사랑 때문에, 우리는 할 수 없는 것을 하고,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고, 쓸 수 없는 것을 쓰는 것이죠.


나는 말하죠. 오늘 밤, 당신은 나와 너무 닮아 낯설군요.

당신은 말하죠. 아니, 당신은 너무 낯설어 나를 닮았어요.


그런가요, 그래요, 그럼, 잘 자요, 당신, 내 사랑.




111021-0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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