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온한 것들의 존재론 - 미천한 것, 별 볼일 없는 것, 인간도 아닌 것들의 가치와 의미
이진경 지음 / 휴머니스트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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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온성이란 어떤 뜻밖의 만남에서 느끼는 ‘저들’의 기분이다. 위대함과 탁월함의 찬양자들, 자신의 고상함과 고매함을 자랑삼는 자들, 자신이 세상의 주인이며 세상을 지배한다고 믿는 자들, 바로 그런 자들이 어떤 당혹스런 만남 앞에서 느끼는 감정이다. - 21쪽

언어는 사유의 도구이다. 그것은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도 사유의 범위와 한계가 다르다는 의미이다. 언어의 한계가 사유의 한계라는 말은 자신의 존재는 자신이 사용하는 언어로 규정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여기서 존재는 우리말 ‘있음’으로 해석될 수 있으나 영어의 ‘be’, 독일어의 ‘sein’과는 용법상 차이가 많다. 그래서 우리에게 ‘존재론’이 낯설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는 변명이 가능하다. be 동사가 없는 한국어.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을 읽으면서 ‘존재론’을 처음 만났지만 쉽게 그 개념이 잡히지 않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두려움은 원시시대부터 인간에게 유전되어온 오래된 기억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탐구와 사유의 대상이지만 좀처럼 실체를 드러내지 않는 아득함이기도 하다. 이진경의 『불온한 것들의 존재론』은 ‘이진경’과 ‘존재론’의 결합이 아니라 ‘불온한 것들’에 초점을 두어야 하는 책이다. ‘존재론’이라는 뜬구름에 도전하는 ‘이진경’은 철학자가 아니다. 다만 그가 지금까지 걸어온 길과 펴낸 책과 사유의 폭을 수용한다면 이 책은 무엇보다 ‘재미(?)’ 있을 수 있다. 어떤 재미를 찾을 것인지는 물론 각자의 몫이다.

그래서 이 책의 시작은 ‘불온성’에 대한 저자의 정의로부터 시작된다. 뜻밖의 만남에서 느끼는 ‘저들’의 당혹스런 감정이라는 정의에는 많은 함의를 포함한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의문이 들기 시작한다. ‘저들’에게 불온한 것이 ‘우리’에게는 불온하지 않는가. 이것은 단순한 편가르기가 아니다. 저자의 대전제에 포함한 음험함을 간파하고 기꺼운 마음으로 동참할 생각이 있거나 얼떨결에 그의 이야기에 말려들거나!

내가 어느 쪽에 있든, 아니 어느 쪽에 속하는지도 몰라도 깊은 가을 진지한 질문과 사색을 즐기기를 원한다면 일독을 권할 만한 책이다. ‘이진경’에 대한 믿음과 ‘불온한 것들’에 대한 호기심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구성은 단순하다. 불온성에 대한 개념과 정의로 시작한 후 불온한 것들의 존재론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밝힌 다음 장애자, 박테리아, 사이보그, 온코마우스, 페티시스트, 프레카리아트에 대해 분석한다. 총론과 각론의 결합인 기본적인 구성을 통해 독자들은 자연스럽게 존재론에서 벗어나 불온한 것으로 관심의 초점을 이동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앞서 언급한 불온한 것들에 대한 호기심에서 ‘나’의 존재론으로 이동이며 나와 관계 맺은 ‘너’와 ‘세상’에 대한 관심에서 인식론과 가치론으로 이동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아니면 말고.

존재론은, 그 추상적인 말과는 반대로 가장 구체적이고 가장 정치적인 사유의 장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존재와 같은 추상적 단어로 많은 것을 대체하며 가리는 경우조차 만약 그 사유나 주장이 제대로 전개된 것이라면, 피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존재론은 자신의 사유를 걸 존재자들, 자신이 맨 처음 시선을 던진 출발점이 무엇인가에 따라 아주 다른 방향, 아주 다른 형태의 궤적을 그린다. - 352쪽

‘출구 혹은 입구’라는 부제의 에필로그에서 저자의 ‘존재론’이 비로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 존재는 존재자에 의해 결정되며 자신의 사유를 걸 존재자에 따라 아주 다른 방향과 궤적을 그리게 된다. 즉, 존재론은 자신의 삶의 방향성과 궤적에 대한 성찰이며 인과론적 차원에서 맨 처음 시선을 던지게 되는 우연과 조우하게 되는 순간의 깨달음인 것이다. 저자의 의도와 무관하게 그것은 허망한 성찰보다 뚜렷한 존재론적 접근 방식이라고 굳게 믿는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마주치는 마이너스 존재들: 장애자, 박테리아, 사이보그, 온코마스, 페티시스트, 프레카리아트에 대한 이해와 새로운 접근 방식은 각론의 재미이다. 도구를 사용하여 원하는 결과를 얻은 원시인이 최초의 사이보그라는 주장은 신선하지 않은가. 책표지에 한 사람의 그림자가 물구나무선 모습은 책을 읽는 동안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그것은 낯설음에 대한 요구이며 새로운 시각에 대한 지속적인 충고로 들린다.

한 권의 책에서 무엇을 읽어내든 독자의 몫이라는 무책임한 말이 아니다. 이해의 폭과 넓이를 어디까지로 설정할 것인가. 스키마의 정도와 주체적인 수용능력을 일일이 표시할 수도 없다. 때로는 부딪치고 깨지고 헤롱대며 수용할 뿐이다. 그렇게 책장을 덮으려던 순간에 저자가 친절하게도 한마디 던져줄 수도 있다. 아니 그의 내밀한 의도를 언뜻 엿보일 수도 있다. 불온한 것들과 친구가 되라고, 그것은 낯설고 불편한 것들과의 만남이며 새로운 인식의 출발이라는 것을.

불온한 것들과 친구가 된다는 것은 낯설고 불편했던 것들에 익숙해지고 편안해지는 것만은 아니다. 반대로 익숙해지는 것보다 빠르게 그것들과 다시 낯설어지고, 익숙했던 것들마저 다시 낯설고 불편하게 만나는 것이다. - 35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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