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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팬지 폴리틱스 - 권력 투쟁의 동물적 기원
프란스 드 발 지음, 장대익.황상익 옮김 / 바다출판사 / 2018년 3월
평점 :
망자亡者에 대한 슬픔은 나이에 반비례한다. 어디 눈물 없는 장례식이 있을까마는 숱한 죽음들, 무덤과 화장터 사이를 떠도는 회한悔恨은 인간의 숙명이니 극복이 아니라 수용과 성찰이 필요하다. 한 시대가, 아니 한 계절은 잠시 머물다 떠난다. 하지만 우리 삶은 매 순간 어느 시대 혹은 어느 계절의 복판에 서 있다. 지금이 절정이다. 지나간 모든 것이 아름답지 않듯, 남은 시간이 두렵지만은 않기를.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정치’라는 관점으로 바라보면 인류 문명은 정치 발달의 문화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군주정에서 민주정으로 ‘발전’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각자의 욕망과 기대를 실현하기 위한 정치 행위의 반복이야말로 인간의 본질이 아니겠냐는 말이다. 우주에 발자국을 남기고, 인공지능 시대를 산다고 해도 인간은 어쩌면 ‘털없는 원숭이’에서 한발도 더 나아가지 못한 건 아닐까. 진화를 거듭한 현생 인류의 모습이 침팬지의 군집생활과 큰 차이가 없다는 점은 놀랍지 않다. 충분히 예상하고도 남을 만큼, 사회뉴스 정치인들의 정치 행태, 끔찍한 사회뉴스가 매일매일 이를 증명하지 않는가.
햄릿은 ‘to be or not to be’를 고민했으나 오늘의 한국인들은 이쪽이냐 저쪽이냐로 정의와 공정과 상식과 현재와 미래까지 판단하며 선택한다. 망국적 극단적 전체주의의 망령이 되살아나는 것은 아닌지 우려될 만큼 필터 버블이 작동하는 알고리즘에 반성은 없는 듯하다. 혹시 프란스 드 발의 『침팬지 폴리틱스』조차 이쪽과 저쪽을 구분하는 기준으로 삼으려는 사람이 있을 거라는 사실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으나 저자의 의도, 책 내용과 무관하지 부디 댓글만 남기지 않기를.
물론, 그 정치 행위의 근간에는 ‘욕망’이 자리잡고 있다. 성욕과 식욕, 즉 생존과 관련된 침팬지의 모든 정치 행위는 선악의 저편에 놓여 있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진화의 결과일 뿐이다. 그것을 인간의 관점으로 ‘해석’하려는 관찰자들은 다양하다. 제인 구달로 상징되는 1세대 동물사회학자들의 연구 결과가 없었다면 출발이 조금 어려웠을지 모르지만 수많은 영장류를 통해 인간의 본능과 욕망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멈추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가 우리를 모르고 내 안엔 내가 너무도 많기 때문이다.
40여 년 전에 출간된 이 책의 핵심 내용은 단순하다. 침팬지의 사회구조가 인간과 다를 바 없이 인간사회와 매우 흡사하다는 결론을 향한 거대한 관찰의 기록물이다. 그것이 놀라운가, 아니면 반가운가. 그래서 어쩌자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어떻다는 것도 아니다. 그저 “우리 인간의 정체는 무엇인가”라는 질문만 또다시 남는다. 인간과 동물의 차이, 침팬지와 인간의 유사성과 차별성에 논문은 과학자들의 몫이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해 이에룬의 보안관 행동이나 마마가 가진 모성의 힘에 대해 다시 한번 고민해야 한다. 100층이 넘는 빌딩 꼭대기에 앉아 있어도 한 인간의 개인적, 사회적 욕망은 라윗과 니키 혹은 마마, 이미, 테펄의 그것과 동일하기 때문이다. 뭐가 다르겠는가. 누구든 식욕과 성욕이 전부일 수 있으며, 누구든 더 큰 야망과 욕심의 허망함에 무너지지 않겠는가.
네덜란드 아른험에 위치한 뷔르허스 동물원Burgers Zoo(1971년 8월 개관)의 야외 사육장이 있다. 여기 사는 침팬지들의 이야기다. 집필시기는 1979~1980년(1982년 출간), 주요 침팬지는 수컷 에룬, 라윗, 니키, 단디, 암컷 마마, 호릴라, 프란예, 이미, 테펄, 파위스트 정도다. 이름으로 호명되는 각각의 침팬지의 행동은 인간과 다를 바 없다. 앞서 말했듯 이 책은 인간과의 유사성에 대한 호기심으로 읽을 필요가 없다. 98%의 유전자가 인간과 동일한 침팬지의 행동이 인간과 비슷하리라는 건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다만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인간의 정치적 행위란 무엇인가, 그 기저에 깔린 본능과 욕망은 사회적으로 용인될 수 있는가 등의 문제다.
권력투쟁과 기회주의, 호혜성, 전략적 삼각관계, 화해, 연합, 평화 협정, 중재, 분할 지배 등 인간사회에서도 매일 벌어지는 일들이 침팬지와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이 오히려 놀랍다. 크든 작든 모든 관계와 조직과 공동체와 국가에서 벌어지는 일들도 마찬가지다. 침팬지 폴리틱스는 호모 사피엔스폴리틱스의 축소판이 아니라 오히려 현대사회의 원형prototype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는 게 쉽지 않다는 건 생존 혹은 정치(관계)를 일컫는다. 쉽고 재밌는 일이 더 많은 인생을 꿈꾸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오늘도 안녕하지 않은 일들로 가득 채운 하루를 보내며 사람들은 또 어떤 내일을 꿈꿀까. 부디 시간으로 해결될 수 있는 일들에 매달리지 않기를. 자기 위로와 합리화를 위해 너무 애쓰지 않기를. 침팬지 폴리틱스도 협력, 호혜, 연합, 중재, 의존이 강력한 힘을 발휘할 때가 더 많다. 이해관계에 매몰된 걸 모두 아는데, 정의와 공정, 상식과 합리, 자유와 평화로 포장한들 사람들이 더 이상 속지 않는다는 걸 정치인들만 모르는 걸까. 아니면 우리는 알면서도 매번 속는 걸까. 이도저도 아니면 대안이 없거나 상상력이 부족한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