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희경의 단편 「유리 가가린의 푸른 별」(『아름다움은 나를 멸시한다』 수록)은 아니었고...윤대녕의 단편이었나? 기억나지 않는다.(아시는 분 있으시면 알려주세요.) 진공상태의 우주에서 한 사람을 살리기 위해 상대를 밀어주고 그 반작용으로 춥고 어둡고 아득한 먼 우주로 하염없이 멀어지는 우주인. 그 인상적인 장면이 어느 단편이었는지 모르겠으나, 칼 세이건의 『코스모드』를 읽을 때도 브라이언 그린의 『엔드 오브 타임』을 읽을 때도 머릿속에서 계속 맴도는 장면이다. 지구 반대편으로 떠난 그 우주인은 아직도 멀어지고 있을까, 언제까지 멀어지다가 우주의 끝에 도달했을까, 우주 공간에 끝이라는 개념이 적용될 수 있을까, 공간의 끝이 없다면 시간도 영원할까, 시간의 끝이라는 개념은 물리학의 이론으로만 존재하는 걸까, 실제 그 순간이 온다는 말인가.
우주의 기원, 세상의 저편에 대한 호기심으로 가득했던 시절이 따로 있었던 게 아니라 여전히 하늘을 쳐다보는 이유가 혹시 무의식에 남은 유년시절의 기억들 때문일까. 빌 브라이슨의 『거의 모든 것의 역사』나 데이비드 크리스천의 『시간의 지도』를 읽을 때의 개인적 감동은 오롯이 상상력에 기반한 나만의 세계였을 것이다. 과학의 시선은 실제계에서 벌어지는 객관적 사실을 향하고 있으나 그 결과에 대한 해석은 과학자의 몫이 아닐 수도 있다. 브라이언 그린도 물리학이라는 도구로 우주와 생명을 포함한 세상의 기원과 작동 원리를 들여다보면서 끊임없이 인문학을 끌어들인다. 철학과 문학적 소양은 일반인에게 적절한 설명 도구로 유용할 뿐 아니라 결국 앎이 삶이 되어야 한다는 소리 없는 웅변처럼 들렸다. 안다고 달라지는 게 별로 없다. 아는 것과 이해한다는 건 다른 문제다. 시간의 끝,이라는 개념은 오히려 개인의 죽음에 닿아 있다. 눈을 감으면 모든 게 사라진다. 사후 세계의 믿음이나 내세와 무관한 물리적 현상으로서의 죽음이 시간이 끝이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제외한 타인의 삶, 지구의 종말, 우주의 끝에 대한 호기심과 과학적 상상력은 왜 필요한가.
자유의지가 있느냐 없느냐는 논쟁이 이어지며 일요일 밤 3시간이 넘도록 모임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우주는 무엇이며 그것은 각자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아니 그 호기심으로 얻은 얇은 지식과 생각들은 어떤 태도로 현실에 반영되어 어떤 방향으로 우리를 이끄는 걸까. 명쾌하고 분명한, 논란이 없는 수학과 과학도 환원주의 관점으로 회귀하지 않으려면 거시 세계의 인간을 돌아볼 수밖에 없다. 지금 여기가 어디인지 나는 누구인지 매일 묻지 않으면 단 하루도 견디기 어려운 세상이다. 세계를 바꿀 수 없다면 내가 변해야 한다는 적응과 실용적 자기계발식 금언이 아니다. 어차피 우연의 우연의 우연이 겹쳐 필연을 가장한 존재와 관계라고 해도 선택의 문제, 의지의 표상이 우리를 괴롭힌다. 인간이 ‘위대한 존재’인지 ‘먼지같은 존재’인지 논쟁을 하다가 ‘위대한 먼지’로 타협했다는 분의 이야기가 새삼스러웠다. 우리는 ‘위대한 먼지’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스크린 속에 이미 펼쳐져 있든, 무한한 순환 고리로 연결되어 있든, 연쇄적인 반응의 결과이든 상관없다. 곧 봄이 온다는 소식이 들리고 인간의 삶은 바늘로 찍은 점보다 짧은 찰나에 불과하다는 사실정도만 자각할 수 있어도 충분하겠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