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가 결혼했다 - 2006년 제2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박현욱 지음 / 문이당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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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모든 것은 축구로부터 시작되었다”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감각적인 소설 <아내가 결혼했다>를 단숨에 읽어버렸다. 체감 재미도 100점을 줘도 아깝지 않다. 워낙 평소에 축구를 좋아하는 개인적인 성향도 한 몫 했겠지만, 축구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충분히 ‘재미있게’ 빠져 볼 수 있는 소설을 간만에 만났다. 그 재미라는 것도 단순하거나 뻔한 스토리와 분위기를 몰아가는 통속(?)소설과는 거리를 분명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 이 소설의 재미는 독특한 형식과 참신한 내용에 바탕을 두고 있다.

소설의 의무는 재미다. 누군가 이렇게 말한다면 반론의 여지가 많다. 하지만 재미없는 소설은 의미만 있을 뿐 소설의 역할을 다시 한 번 고민해 봐야 한다. 재미라는 모호한 말 속에 많은 함의가 들어 있다. 감각적 쾌락과 지적 즐거움을 동시에 가져다 줄 수 있는 탁월한 작품을 우리는 주저없이 명작이라 부른다. 이 소설을 명작의 반열에 올려놓을 수는 물론 없다. 하지만 소설이 거둘 수 있는 극단적 재미를 추구하는 데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김영하와 성석제를 비벼놓은 듯한 감각적인 문장과 키치세대를 떠올리게 하는 스피디한 전개와 직설적인 화법은 그대로 TV 드라마나 영화 한 편을 본 느낌이다.

소설이 발표되자마자 10여개 영화사에서 판권을 사겠다고 덤볐다는 후일담에 고개를 끄덕일만하다. 연애와 결혼 부부와 가족이라는 작은 주제를 순서대로 나열하며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생의 본질(?)적인 문제들을 다루고 있으니 일단 모든 사람들의 공감대를 형성하기에 충분하다. 거기다가 2002년 월드컵의 흥분이 가라앉기 전에 50여일 앞으로 다가온 2006년 독일 월드컵을 기다리는 국민들을 겨냥한(?) 시의성 또한 기막히다. 한 남자의 연애사와 축구 이야기라는 두 개의 축은 소설의 구성을 탄탄하게 받쳐주고 있다. 각각 따로 국밥이 아니라 하나로 어울어지는 교묘한 합체와 분리가 소설의 흥미를 배가 시킨다. 작가 박현욱이 작가의 말에서 이야기했든 문학이라는 넓은 바다에 이런 소설가가 발끝을 적신다고 해서 큰 누가 되지는 않을 것이며 쓰면 쓸수록 글은 계속 늘 것이라는 믿음이 지켜지길 바란다. 독자의 입장에서 다양한 소설을 맛볼 수 있다는 것은 미식가가 느끼는 그 즐거움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축구 때문에 시작된 사랑이라고 말하지만 모든 만남은 필연을 가장한 우연이다. 물론 작고 사소한 계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기본적으로 모든 만남은 우연이고 그 우연 속에서 서로에게 혹은 스스로에게 의미를 만들어가는 과정이 바로 연애의 시작이다. 연애와 결혼에 관한 사회사적 고찰과 전 지구적 자료를 뒤적이며 다양한 형태의 결혼 제도와 형태를 소설 속에 녹여내고 있지만 현실에서 용인될 수 없다는 단점이 있다. 그러나 현실의 잣대로 소설을 비추어 보는 멍청이가 있다면 당연히 책을 덮어야 할 것이다. 우리 민족의 역사만을 놓고 살펴보아도 일부일처제가 갖는 의미와 역사는 너무 짧다. 주인공 남자의 아내 인아의 말은 말도 안 되는 상황을 말 되게 만드는 힘이 있다. 주인공은 오로지 그녀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녀의 논리와 눈물에 설득 당하고 만다. 아내가 결혼하다니? 누구나 제목을 읽고 나면 전처의 이야기에 관한 소설일 거라고 짐작하기 쉽지만 작가는 허를 찌른다. 전처가 아니라 아내가 결혼 하겠다고 남편에게 청첩장을 보내오는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인간이 만들어낸 가장 우습고 혹은 비참한 제도 중의 하나를 끝까지 고수 할 수 있을까? 아니면 그렇게 지켜내면서 얻어야 하는 그래야만 하는 가치는 무엇일까? 작가는 근본적으로 인간과 사회, 그 중에서도 결혼 제도의 모순을 한 사내를 통해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풍자나 비판의 목소리가 아니라 솔직하고 편안한 모습으로 아주 현실적으로 보여준다. 재치있는 문장과 유머는 내용의 황당함을 상쇄하고도 남는다. 축구에 관한 많은 자료와 역사는 인류에게 특별한 의미를 준다. 다른 스포츠와 달리 축구는 특별하다. 여기에 동의하지 못하는 독자들도 이번 기회에 축구와 친해지거나 호기심을 가져도 좋을 것이다.

전통적인 서사구조에서 벗어나 있는 이 소설은 결말이 없다. 물론 궁금하지도 않다. 결말이 별 볼일 없다는 것은 과정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순간순간 상황이 보여주는 선택과 갈등 미묘한 움직임이 아니라 끊임없이 사랑과 연애, 결혼과 부부 그리고 가족의 의미를 독자들에게 되묻고 있는 듯하다. 도대체 인생이 무얼까. 낯설게 바라보는 인간 생활과 귀찮아서 묻어둔 이야기들을 이렇게 재미있게 풀어낼 수 있는 것은 당연히 작가의 탁월한 능력이다. 단 세 명의 주인공을 등장시켜 장편을 지루하지 않게 만들어 낼 수 있는 작가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박현욱은 그걸 해냈다. 대단하다. 긴 말이 필요 없는 책이 가끔 있다. 이 책은 그냥 읽으면 된다. 재밌으니까.


060503-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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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문학의 종언 바리에테 5
가라타니 고진 지음, 조영일 옮김 / 비(도서출판b)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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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대의 기점과 개념에 관한 논의는 어떤 면에서 길고도 지루하다. 그만큼 중요하고 인류사에서 전환기적 시점이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살고 있는 지금을 현대라고 한다. 현대는 ‘현재’라는 개념과는 물론 구별되어야 한다. 불과 200여년 사이에 인류의 삶과 사상은 그 이전의 어느 시대도 빠르게 변화해 왔다. 중세를 넘어 근대로의 이행기의 특징은 거칠게 표현하면 인간 중심 사회로의 전환이다. 신 중심 사회의 미망에서 벗어나 인간과 이성이 중시되는 사회로 변화한다. 민족과 국가를 앞세운 파시즘은 맑시즘에 대한 반발로 파악하기도 하지만 1, 2차 세계 대전을 거치면서 인류 문명은 급격한 변동을 겪었다.

  종교와 과학의 대립은 근대의 분수령이 되었으며 예술은 그 언저리에서 언제나 사회를 반영하는 거울의 역할을 했왔다. 특히 문학은 사회 변혁을 위한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문학의 역할과 위상에 대한 지루한 논쟁은, ‘요즘 애들 버릇없다’는 함무라비 법전의 문구처럼 ‘문학의 위기’ 또한 시대의 변화와 더불어 끊임없이 논의되는 지루한 반성문이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문학은 어디에 자리매김 될 수 있을까하는 문제가 되기 된다. 이 문제는 언제나 있어왔다는 반성적 고찰로 끝날 수도 있으나 그대로 넘길 수도 없다.

  일본의 지성 가라타니 고진의 <근대 문학의 종언>은 이러한 문제를 폭넓게 다루고 있다. 문학의 위기를 논하는 문학계의 엄살이 아니라 ‘근대 문학’의 종언을 선언한 가라타니의 논문은 한국문학계에도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2003년 10월 긴키대학에서 발표된 논문이 <문학동네>를 통해 국내에 소개된 이후 비평계가 아니라 언론에서 더 관심을 보였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앞서 말한것처럼 문학의 위기 운운이 아니라 ‘근대 문학의 종언’에 대한 선언적 의미는 가히 충격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이제 문학의 위기를 넘어 ‘종언’이라고 마침표를 찍어버리는 가라타니의 말은 여러 가지 논쟁을 가져왔다. 한국 사회에서도 통용될 수 있는 선언인가하는 문제부터 일반화될 수 없는 문학에 대한 종언을 받아들이는 방법에 이르기까지 짚어 볼 사항은 복잡하고 다양하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가라타니가 던진 화두이다. ‘문학의 위기’가 아니라 ‘문학의 종언’이라니?

  여기서 문학의 범위를 살펴 볼 필요가 있다. 가라타니는 근대 문학을 특히 소설로 한정 시키고 있다. 사회와 제도를 넘어서서 문학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는 끝이 없어 보였다. 소설로 표현되는 사상들은 어떤 장르와 매체로도 감당할 수 없는 위력과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는 것이 가라타니의 판단이다. 사르트르의 <구토>를 예로 들면서 사르트르의 사회적 역할과 위상은 소설가 이상이었음을 상기시킨다. 그러나 이러한 문학의 역할과 기원은 18세기 러시아와 유럽에서 비롯된 것으로 일본 문학에서는 소세키의 ‘문학론’으로 확인할 수 있다. 사진의 발명과 더불어 회화의 역할과 의미가 재정립 되었듯이 영화의 출발과 더불어 소설은 존재 자체에 대한 위협에 직면하게 되었다는 것이 비평가들의 부정적 전망이었다. 그러나 회화처럼 소설은 그 위치와 역할의 무한한 위협과 도전 속에서도 근근이 버텨내고 있다. 가라타니는 여기에 종지부를 찍는 선언을 한 것이다. 아메리카 문학은 50년대에 그리고 일본 문학은 80년대에 이러한 현상들이 벌어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한국에도 여러번 방문한 적이 있는 가라타니는 한국에서 만큼은 아직도 문학의 역할에 대해서 낙관적 전망을 보았다고 한다. 물론 일본에 비교해서 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근대문학의 종언’은 시대와 국가를 막론하고 전세계적인 현상으로 볼 수도 있다는 함의를 이끌어 낸다. 과연 그의 말은 진실인가?

  물론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많다. ‘종언’이라니. 작가들에게는 귀에 들리지도 않을 말이다. 가라타니가 특히 비판의 화살을 겨누고 있는 것은 문학 비평가들인지도 모른다. 그가 본격적으로 문학 비평가로서 비교문학을 연구한 것은 시기적으로 대략 <일본 근대문학의 기원>을 내놓은 80년부터 대략 10여년이라는 짧은 기간이다. 이후 철학자로서의 행보를 보여준 가라타니의 견해는 아직 확신에 찬 선언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다만 그 선언적 의미가 주는 화두에 대해서는 우리가 고민해 볼 가치가 있다고 본다.

  가라타니는 학부에서 경제학을 전공하고 영문학으로 석사를 받았다. 이 책에서 그는 ‘근대문학의 종언’을 심도 있게 다루거나 논리적으로 자신의 주장을 펼쳐 나가고 있지 않다. 짧은 논문은 발표문 형식으로 그가 가지고 있는 고민의 일부를 던져주고 있을 뿐이다. 1부에서 번역가 시메이와 소세키의 문학론을 살펴보고 근대문학의 종언을 선언한 논문을 실었다. 나머지 2부 ‘국가와 역사’,3부 ‘텍스트의 미래로’에서는 가라타니 사상의 진면목을 확인할 수 있다. 60년 주기의 역사의 반복에 관한 특이한 견해와 교환과 폭력에 관한 국가관, 그리고 자신만의 어소시에이션이즘 이론을 펼치는 대담은 흥미롭다. 책 전체가 강연과 대담을 모아놓은 것이기 때문에 가독성이 높다.

  마르크스의 <자본론>에서부터 <공산당 선언>을 통해 경제 체제와 국가의 역할에 대한 견해가 특히 인상적이었다. 생산단계에서 자본과 노동자의 충돌과 투쟁보다 소비 단계에서 ‘선택’의 문제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한 부분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자본도 최종 소비단계에서 한 번은 약자의 역할을 할 수 밖에 없다. 물론 산업 사회에서 물질을 토대로 한 자본의 경우에 한정되는 문제가 있지만 한 번도 주목한 적이 없는 부분에 대한 고민은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질 만하다. 또 대담에 참여한 학자들의 자신감이 눈여결 볼만하다. 겉으로 드러난 자신감이 아니라 일본의 학문이 아메리카와 유럽에서 갖는 의미와 세계성에 대한 고민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독자성과 주체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외국에서 학위를 받아 온 교수들에 의해 무분별하게 소개에 급급한 우리 학계의 현실을 잠깐동안 돌아보았다. 비판과 반성을 위한 계기로 삼을 만하다. 비난과 자조에 머물러서는 안 되겠지만 대담자들이 보여주는 논의의 범위와 이론들은 우리의 그것들과는 많은 차이가 있는 것이 분명하다.

  다양한 문제들이 계통 없이 뒤섞여 있다는 느낌보다는 가리타니 고진에 대한 최근의 견해와 이론들의 흐름을 파악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는 책이다. 보다 깊이 있는 관심과 고민은 물론 다른 책을 통해 확인해 보아야 할 문제다. 아쉬웠던 것은 일본 문학에 대한 지식이 전무하기 때문에 그가 예를 들어 설명하는 일본 문학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당연한 거지만 모든 분야에 통달한 전문 독자는 없다고 위로할 뿐이다. 이 책뿐만 아니라 다른 책에서도 자주 접하게 되는 네그리와 하트의 <제국>과 <다중>이 숙제로 남겨졌다.



060506-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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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티멘털
히라노 게이치로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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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세상의 모든 우연들이 관계를 만들어 간다. 독자가 한 작가를 만나는 것은 선택과 우연 이외에는 설명할 방법이 없다. 이 간접적인 만남은 직접적인 인간관계보다 의사소통의 장을 마련하고 깊이있는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공간이 된다. 일방적으로 혹은 맹목적으로 작가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거나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것은 작가에 대한 모독이다. 우연히 만난 일본의 젊은 작가와의 만남은 강렬한 인상을 남기며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았다. 세기말에 만난 히라노 기이치로의 소설 <일식>은 대가의 탄생을 예고했다는 상투적인 표현이 아깝지 않은 작품으로 기억한다.

최근 다시 주목받을 때까지 그를 잊고 있었다. 이후 <달>과 최근에 <장송>이 출판되면서 작가 스스로 밝히고 있는 3부작이 마무리 되었다. 두 소설을 천천히 읽어야겠다. 책 읽는데 순서가 있을 수 없지만 그의 소설집 <센티멘탈 in a sentimental mood>은 장송 이후에 쓴 단편들의 모음이다. 이 책에서도 젊은(?) 소설가의 특성은 유감없이 발휘되는 느낌이다. 소설에 대한 작가의 태도가 무엇이며 앞으로의 전망이 어떨 것인가를 짐작할 수 있는 작품들이다. 앞에서 언급한 3부작이 주로 중세와 근대에 대한 치밀한 탐구 정신의 산물이었다면 이 단편들은 드디어 현대와의 만남을 준비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과거의 시간들을 바탕으로 현재가 구성되어 있다는 직선적인 시간 개념에 입각해서 순차적인 소설쓰기를 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최연소 아쿠타가와상 수상자라는 천재성이 말해주는 외형적인 개성도 도쿄대 법학부 재학생으로 무심히 게재한 소설의 수상으로 그의 관심이 변화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물론 무명으로 끝나버리거나 문학의 길로 접어들지 않았다면 다른 이야기가 펼쳐졌겠지만.

지금, 여기, 우리들의 이야기를 벗어난 소설을 생각할 수는 없다. 모든 작가들의 관심이 시공간을 넘나들더라도 결국 현재성을 확보하고 인간의 문제에 대한 깊이 있는 탐구 정신을 벗어날 수는 없는 것이다. 소설의 한계와 범위를 정할 수 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궁극적인 소설의 본령을 생각해 보면 히라노의 게이치로의 소설은 이제 공시적 관점으로 전환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얼마나 깊고 예리한 혹은 폭넓고 따스한 시선으로 바라볼 것인가는 작가의 역량과 선택에 달려 있다. 작은 단편집에 실린 소설은 겨우 네 편이다. 그러나 네 편이 가지고 있는 무게가 만만치 않다. ‘청수淸水’는 그가 꾸준히 천착해온 철학적 주제들과 맥을 같이 한다. 무한한 시공간 속에서 인간의 삶과 죽음의 문제를 기억과 연결시키는 솜씨가 일품이다. 단순한 사소설을 넘어서 일상을 한계를 벗어나려는 몸부림으로 보인다.

나머지 세 작품은 각각 특별한 맛과 취향을 보여준다. 이 작품의 표제가 된 ‘다카세가와’는 도쿄 북쪽의 강이다. 이 강변에서 벌어지는 젊은 소설가 오노와 잡지사 여기자 유미코의 섹스 장면에 대한 묘사가 노골적이다. 사랑의 의미를 묻는 대신 남녀간의 관계에 대한 세밀화가 오히려 극적인 재미를 더해준다. 부분의 묘사는 전체를 조망하는 잣대가 되기도 한다. 이 단편에 등장하는 존 콜트레인과 듀크 엘링턴의 노래 ‘in a sentimental mood’를 들으며 읽는다면 감각적 이미지들이 살아 움직일 것이다. 사랑과 섹스에 대한 진부한 질문 대신에 현실적인 풍경이 오히려 그로테스크하다. 해체주의 시를 대할 때의 생경함과 당혹감을 느끼게 하는 ‘추억’은 내용과 형식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교묘한 퍼즐같은 작품이다. 작가의 의도와 고정된 틀에 대한 회의가 독자를 낯설게 한다. 마지막 작품인 ‘얼음 덩어리’는 새로운 형식과 내용이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 작품이다. 2단 편집으로 같은 페이지의 오른쪽과 왼쪽의 내용이 다르다. 동시에 벌어지는 다른 공간의 이야기가 교차 편집되어 있다. 영화에서 자주 쓰이는 기법이다. ‘롤라런’이나 ‘라 빠르망’을 기억하는 관객은 이 소설을 그렇게 읽을 수 있겠다. 중간중간 교차 혹은 중복되는 내용을 맞추기 위해 텍스트의 길이까지 세심하게 신경써야 하는 실험은 새로움으로 끝나지 않고 정교한 틀로 인식된다. 많지 않은 단편을 읽으면서 여러 가지 새로움과 즐거움을 동시에 얻을 수 있는 책은 많지 않다. 히라노 게이치로의 <센티멘탈>은 그의 장편들을 읽기 전에 가볍게 접근하는 에피타이저나 장편들을 읽은 후의 디저트로도 좋다. 다만 장편을 장식하는 부록으로 읽지만 않는다면.

소설가의 나이가 젊다는 것은 많은 가능성과 기대감을 갖게 한다. 국적과 문화를 넘어서 흥미로운 새로운 작품들을 읽어나가는 재미는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다. 히라노 게이치로의 <달>과 <장송> 그리고 번역중인 작품들이 남겨졌다. 천천히 음미하는 즐거움을!


060519-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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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미시령 창비시선 260
고형렬 지음 / 창비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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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화

오십육년간 하루 한끼 하다
절에 비 오는 낮은 궁금했을 것
눈 날리는 날은 더 적적해
친구 없어 몸이라도 굴리고 싶게

이 나라 청화
중이여, 우리에겐 그대가 있군
가장 깊은 곳에서 높은 그대
저 텅 빈 듯한 산중에
지금은 또 누가 삶을 견딜까

그의 창자는 아무리 날이 좋고
마음산 어두워도
하루 한끼만 받고 궁금했던
그대 작은 신발, 만지고 싶다

고형렬의 이번 시집들은 조용하고 잔잔하다. 때로 격렬하게, 혹은 역동적인 몸짓으로 이야기하거나 목소리를 높이지 않고 나지막하다. 산사의 고요함처럼 맑은 정신을 길어 올리는 고즈넉함이 아니라 밋밋하고 특징없는 고요함이다. 울림은 적고 목소리는 낮다. ‘그대’가 누구인지 밝혀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느닷없는 대상과 목적없는 행위들은 다소 낯선 풍경들을 자아낸다. 앞으로 시집은 직접 보고 골라야겠다. 시인들의 허명 때문에 손해를 입을 수 있으니 조심하라!

네거티브, 검판
김정환 시인에게

이렇게 그리울 줄 알았다면

사진 찍어둘 것을
1980년대 초, 서울 살러 왔을 때
종로 3가에서 을지로 3가 사이
지하철공사장, 거대한 수로처럼 철기둥이 땅속으로
마구 들어가 박힌 대로(大路), 산더미처럼 쌓여 있던
그 붉고 검은 흙들 진창들

흑백으로라도 웃는 둘을 잠시만 세워두었더라면

그 길로 곡예하듯
검판 보러 가던 여름과 겨울이 보고 싶진 않았을 것
기록만 있다면 벌레 먹어도 좋은 것
매미는 울어대고 오공(五共)시대 끝에서 타던 청계천
을지로는 3․1고가로 침침한
눈 펑펑 내리던 그 흑백의 길

내 횡경막 속에 묻힌 역사적인 그 길
지금 그 길, 대화와 수서로 영원한
휴가중, 도둑은 가버리고 늦은 화살만 날고 있는
한낮

그때 서른 무렵이었으니! 너무나 바쁜, 공화국의

개인적인 취향이겠으나 차라리 내게는 이런 류의 고요함과 아쉬움이 감각적으로 와 닿는다. 단순한 과거 회상의 시점이 아니라 현재와 대비되는 지나간 시간의 ‘진창들’이 손끝에 전해진다. ‘너무나 바쁜, 공화국의’ 허우적거림을 돌아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안타깝다. 그 정밀한 풍경 묘사만으로도 나는 한껏 시인의 서른 무렵을 돌아본 느낌이다. 한 편의 시가 전해주는 울림이 무엇일까? 공감할 수 있는 많은 부분들이 없어도 언어와 감각, 의미와 상상력을 통해 길어 올린 표상들이 공유되어야 하지 않을까?

여치의 눈

하느님이 처음 만들 때 눈빛과
손길이 보인다

잘 접혀진 파란 풀잎
울지 못하는 풀의 울음을 대신한다
나는,
가급적 날지 않으려는 너를 눈으로
들어올린다

하지만 나는
원래의 풀잎에 다시 놓아둔다
울어도 찍히지 않는 울음 때문에

여치,
풀잎 줄기 실뼈의 섬유질 속에
통곡이 파란, 가을을
나는 혼자
눈으로 접고 또 접고 있다

슴벅한 눈길에
스스로 놀라 푸르르 날아가리라

아니면 이렇게 관찰된 대상을 통한 주관적 개입이 바람직하다. 철저한 객관화 아니면 감정의 떨림을 전달받고 싶다. 그 많은 대상과 상황들 속에서 독자에게 공감대를 형성하거나 신선한 눈을 뜨게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하지만 안전 운전을 위해, 아름다움과 곱게 포장된 언어를 위해 시는 존재할 필요가 없다.


060524-0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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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당신 문학동네 시집 71
김용택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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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당신


잎이 필 때 사랑했네

바람 불 때 사랑했네

물들 때 사랑했네

빈 가지, 언 손으로

사랑을 찾아

추운 허공을 헤맸네

내가 죽을 때까지

강가에 나무, 그래서 당신


‘그래서’는 앞뒤의 문장을 인과 관계로 연결할 때 사용하는 접속사다. 원인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상태에서 결과가 ‘당신’일 경우 독자는 당혹스럽다. 혹은 그 결과에 대한 원인으로 ‘당신’을 지목한 경우에는 결과에 주목하게 된다. 섬진강 시인 김용택의 새 시집 <그래서 당신>의 표제작은 두 어휘의 사소한 부딪힘으로 상상의 힘을 발휘하게 한다. 위 시를 읽고나도 물론 쉽게 고개를 끄덕이기 힘들다. 논리적 관계를 무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장과 문장 사이에 불거진 의미들은 영원한 사랑에 대한, 혹은 사랑의 고통에 대한 시인의 통찰을 단순하게 상상하기 쉽다. 쉽지 않다는 얘기는 당신과 사랑 사이의 의미다. 지금까지 사랑을 찾아 헤맸지만 결국 죽을 때까지 강가에 서 있는 나무처럼 움직이지 않는 사랑을 곁에 두고 허공을 헤맸다는 이야기인가 하면 영원히 찾지 못하다가 결국 강가에 나무처럼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삶이라고 말하는 것인지 사랑과 당신의 의미를 찾아내는 일은 물론 독자의 몫이다.

또 하나, 이 시의 특징은 한 행이 한 연을 이루고 있는 긴 호흡이다. 한 연에서 다음 연으로 읽어나가는 동안 한 호흡을 가다듬고 한 행을 읽는다. 긴 세월의 흐름이나 오랜 기다림의 시간으로 느껴진다. 시의 형식은 단순히 짧은 문장 구조 뿐만 아니라 내적 깊이와 의미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차분하고 정갈한 마음으로 음미하면서 읽어도 좋고 한줄 한줄 새겨 읽어도 좋겠다.

이렇게 이 시집의 대부분의 시들은 짧은 문장과 절제된 언어로 대상과 감정을 묶어 놓는다. 그 대상이라는 것이 다양하지 않고 선명한 데서 우리는 맑은 물과 같은 감동을 전달 받을 수 있다. 시인의 삶이 곧 시가 된다고해서 시인의 삶을 경의롭게 바라보거나 강가의 초등학교 교사라는 외적 조건이 시의 의미를 규정짓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다만 삶을 대하는 태도와 방법이 투명하고 정갈한 것만은 분명하다. 거기에는 자연과의 호흡이 혼연일체를 이루고 있다. 나무와 바람과 강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흰 종이 위의 먹물이 번지듯이 자연스럽게 배어 있다. 작위적이지 않고 자연스럽게 그 마음들을 읽어내는 능력의 탁월함이 김용택 시의 진경이다.


그리움

바람이 불면

내 가슴속에서는 소리가 납니다


문학 소년, 소녀 시절 한 번씩 연습장에 끄적여 보았을 ‘그리움’에 대한 그 무한한 상상력과 감수성들을 시인은 두 줄로 말한다. 바람이 불면 내 가슴속에서 소리를 내는 자연스러움과 긴 설명이 필요없는 공감대가 그것이다. ‘사랑’이라는 다음 시도 마찬가지다.


사랑

밤길을 달리는데
자동차 불빛 속으로 벌레들이 날아와 유리창에 부딪혀 죽는다

필사적이다



목숨을 걸고 달려드는 벌레들의 맹목적 죽음은 자동차의 속도에 기인한다. 그러나 발상의 전환은 사랑을 부른다. 必死 - 반드시 죽겠다는 말이다. 목적도 없이 왜인줄도 모르고 목숨을 거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라고 외치는 벌레의 말없는 죽음들이 인간의 사랑을 돌아보게 하는 것이다. 추상적 관념에 대한 명확한 제시는 의미를 한정시킬 수 있다는 단점이 있지만 보다 명확하게 시인의 목소리를 전달한다. 표현속에 도드라지는 생각이 낯설고 감각적이다. 하지만 그 감각이 선동적이거나 톤이 높지는 않다. 잔잔하고 조용한 목소리로 우리들 삶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것이 이 시집의 장점이다.


화무십일홍

앞산

산벚꽃

다 졌네

화무십일홍, 우리네 삶 또한 저러하지요

저런 줄 알면서 우리들은 이럽니다

다 사람 일이지요

때로는 오래된 산길을 홀로 가는 것 같은 날이 있답니다

보고 잡네요

문득

고개 들어

꽃,

다 졌네


꽃이 다 질 때까지 누군가 문득 보고 싶은 것이다. 삶이다. 권불십호년權不十年이고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는 말은 생의 덧없음을 빗대는 흔한 표현이다. 그래서 더 큰 울림을 가져온다. 오래된 산길을 홀로 걷듯이, 누군가 보고 싶은 날들이 있는 있는 것처럼 그렇게 쉽게 생은 지고 만다. 그래서 시인은 마지막으로 ‘삶’이라는 제목의 시를 겁?없이 네 줄로 마감한다. 하지만 우리들 생이 도달하기 힘든 경지에 서 있다. 이런 모습으로,



내가 가는 길에
눈길 닿을 티끌 하나
겁먹은 삭정이 하나
두지 마라



060601-0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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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8-08-14 2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 포털 사이트 블로그 안부게시판에 시인 추천 해 달라고 한 1인 들렸다 갑니다.ㅡ,.ㅡ
일단 안도현씨 하고 김용택씨 대표작 부터 쭈욱 한 번 훑어 볼라고욥. (원래는 추천해 주신 분들 시집 중 대표작들 다 사려고 보관까지 해 놨는데, 다른 책들의 유혹 또한 못이겨 그만..ㅡ_ㅡ;;)추천보단 땡쓰2가 더 좋겠죠?!..ㅋㅋ 그런데, 이런....본의 아니게 백수 수준에 걸맞는 보답만 해 드리고 가는 듯...-_-;; 그나저나 이 책 리뷰 중에 힘님 꺼 바로 아래 있는 분의 리뷰도 참 인상적이었다는. 그래서 그 차이에 더 땡겼다죠~~~~^3^ 사진 또한 시라죠.. 시집을 좀 읽고나면 한 때 전공했던 사진도 취미로나마 본격적으로 다시 시작 해 보려고 한답니다. 그래서 시가 땡겼던 듯... 패션디자인과 사진... 둘 중 하나만이라도 잘하자 해서 사진과는 안녕했는데, 그 인연을 완전 끊어내지 못하고 있었나 봅니다. 아~ 문득 힘님은 구름 겹이 드리워진 저 푸른 하늘을 사진에 담으면서 어떤 시상을 탐하려 했을까 라는 생각 또한 감히 해 보고 갑니다. 그럼, 이만. ^_-

sceptic 2008-08-18 21:09   좋아요 0 | URL
반갑네요...^^

사진 전공하셨으면 한 수 배울 기회를...만들어봐야겠는데요...

때로는 사람보다 하늘이 좋아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