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요
안도현 지음 / 창비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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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요,

  로 시작하는 허수경의 ‘혼자 가는 먼 집’은 허수경의 시집을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기억나지 않는  시이다. 당연하겠지만 한 권의 시집을 읽는 동안 시인과 대화를 나누고 공감하며 아파한다. 물론 때로는 기뻐하고 함께 상상하며 즐거운 환상을 갖기도 한다. 부드러운 바람과 뺨을 간질이는 들풀을 만나기도 한다. ‘당신’처럼 무심하게 사용하던 말에 주목하고 다시 생각하고 ‘좋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히 시인의 눈이고 능력이며 의무이다.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말들에게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 안타까운 몸짓들을 보듬으며 일상적인 것을 낯설게 바라보는 눈을 빌려주는 것이 시인의 역할이다. 안도현의 그 시인의 역할을 넘어 길잡이와 안내자의 역할까지 떠맡았다. 도종환의 <꽃잎의 말로 편지를 쓴다>에 이어 육성 시낭송 CD와 함께 독자들을 만난다. <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요>는 한국문학예술위원회 문학나눔사무국에서 기획, 제작한 책이다. 이메일로 배달되는 시들을 이렇게 책으로 만나니 느낌이 새롭기는 하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이런 종류의 책들은 좋아하지 않는다. 문학의 대중화에는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이 많겠지만 단편적인 시 하나가 줄 수 있는 감동의 무게는 한계가 있다. 애니매이션과 함께 분위기를 살려주는 배경음악과 더불어 즐기는 시 한 편이 나쁘지는 않다. 시는 음악과 분리될 수 없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그래서 내게는 산만하고 어지러운 느낌이다. 한 시인의 목소리를 꾸준히 그리고 차분하게 들어 볼 수 있는 시집과는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철저하게 안도현의 눈을 빌려 읽는 재미 혹은 한계를 감안해야 한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이제 정확히 세어보지 않아 모르겠지만 400여 권 쯤 되는 시집들을 뒤적이며 내가 좋아하는 시들을 엮고 간단한 감상이나 느낌들을 적어본 적이 있다. 물론 이것은 책이 되지 않는다. 내가 유명한 시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혼자만의 즐거움으로 충분하고 가끔 인용할 때도 있지만 공유하고 공감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안도현은 이 책에서 다양한 시인들의 다양한 시들을 골라냈다. 한 편 한 편 애정을 가지고 시의 참맛을 느낄 수 있는 시들을 나름의 기준으로 골랐다. 시가 마음에 닿지 않거나 공감할 수 없다면 이런 종류의 책은 참 지루해지기도 하고 손이 가지 않기도 한다. 하지만 보편적 정서를 읽어내고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얻어낸 시인이 들려주는 다른 시인들의 시와 시와 관련된 짧은 단상은 불편하지 않다.

  그래도 여전히 내가 찾아 읽고 손수 베껴놓은 시만한 게 없다. 누구나 그렇듯이 지극히 개인적인 감동과 울림은 저마다 다른 소리를 내기 때문이다. 누군가 권해 준 한 권의 시집, 누군가 보내 준 한 편의 시가 전하는 느낌은 보내준 사람의 마음을 담고 있어 색다르다. 안도현이 권하는 시를 읽어보는 것은 개인적인 친밀감은 없지만 쉽고 편안하게 시와 친해질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다.

지퍼 - 송승환

건너편 사람들 틈에 환영처럼 그녀가 있다

한번 벌어지면 쉽게 채워지지 않는다

선로 위 끊임없이 지하철이 달려온다


와온(臥溫)의 저녁 - 유재영

어린 물살들이 먼바다에 나가 해종일 숭어 새끼들과 놀다 돌아올 시간이 되자 마을 불빛들은 모두 앞다퉈 몰려나와 물길을 환히 비춰주었다


  짧은 시 두 편이 보여주는 정갈하고 깔끔한 매력은 냉수처럼 시원하다. 일상에서 ‘지퍼’를 통해 관계를 설명하고 바닷가 마을의 저녁 풍경을 수채화로 전해주는 시는 설명이 필요없다. 안도현은 이런 시를 고르면서 마음까지 깨끗했겠다.

저곳 - 박형준

공중(空中)이란 말
참 좋지요
중심이 비어서
새들이 꽉 찬
저곳

그대와
그 안에서
방을 들이고
아이들 낳고
냄새를 피웠으면

공중(空中)이라는


뼛속이 비어서
하늘 끝까지
날아가는
새떼


  시를 참 잘 쓰는 시인이다. 탁월한 감각과 절제된 언어로 공간을 점유하는 박형준의 이 시는 정중동의 감각을 보여준다. 천상 시인들의 향연이 벌어지는 곳에서 저마다 한 칼 한다고 외치고 있으니 어찌보면 독자들은 즐거운 만찬을 즐기고 있는 것이다.

달빛 소나타 - 신현정

가을밤을 앉아 있는

그녀의 목덜미가 하도 눈부시게 희어서

귀뚜라미가 사는 것 같아서

달빛들이 사는 것 같아서

손톱들이 우는 것 같아서

그녀의 등 뒤로

살그머니 돌아가서

오오 목덜미에

단 한번의

서늘한 키스를 하고

아 그 밤으로

그대로 달아난 나여


  그래서 이렇게 서늘한 키스와 마주하기도 한다. 가을밤, 달빛, 목덜미……. 달아났던 혹은 달아나고 싶었던 수많은 ‘나’는 이 시의 독자가 되어 그 오래된 기억과 마주하고 당혹해하고 웃음짓기도 하고 하늘을 더듬기도 할 것이다.

청춘 1 - 권혁웅

그대 다시는 그 눈밭을 걸어가지 못하리라
그대가 낸 길을 눈들이 서둘러 덮어버렸으니
붕대도 거즈도 없이
돌아갈 길을 지그시 눌러버렸으니


  이제 덮여버렸나? 뒤돌아 보아도 길이 보이지 않도록 붕대와 거즈로 지그시 눌러버렸으니 이제 돌아갈 길이 없다, 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과거형 인간’이 되어 버린 것이고 ‘청춘’은 아득한 곳으로 사라지며 김연수의 말대로 들고양이처럼 소리도 없이 그리고 느닷없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오오, 밤의 하늘이여! 밝아올 내일이여! 그리고 보고 싶은 친구여!


080620-0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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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피는 고래
김형경 지음 / 창비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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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춰봐도
가슴에는 하나 가득 슬픔 뿐이네
무엇을 할 것인가 둘러 보아도
보이는 건 모두가 돌아 앉았네
자 떠나자 동해바다로
삼등삼등 완행열차 기차를 타고
간밤에 꾸었던 꿈의 세계는
아침에 일어나면 잊혀지지만
그래도 생각나는 내 꿈 하나는
조그만 예쁜 고래 한마리
자 떠나자 동해바다로
신화처럼 숨을 쉬는 고래 잡으러

우리들 사랑이 깨진다 해도
모든 것을 한꺼번에 잃는다 해도
우리들 가슴속에는 뚜렷이 남는
한마리 예쁜 고래 하나가
자 떠나자 동해바다로
신화처럼 숨을 쉬는 고래잡으러
자 떠나자 동해바다로
신화처럼 숨을 쉬는 고래잡으러


  소설의 제목을 보는 순간 최인호의 <고래사냥>과 송창식의 <고래사냥>이 떠올랐다. 당연한 반응인지 조건 반사인지 모르겠지만 ‘고래’라는 단어가 내게 주는 느낌은 아득한 꿈이고 동경이며 신화이다. 그래서 반복되는 ‘신화처럼 숨을 쉬는’이 주는 느낌은 여전히 생생한 감동과 울렁거림으로 남아있다. 아련한 기억과 추억 속의 노래가 되어버린 ‘고래’ 이야기는 많은 사람들에게 두근거림으로 남아 있다. 이 노래를 들으면 당장 경춘선을 타거나 동해안으로 달려가야 할 것 같다. 이제는 시간이 흘렀고 세대가 달라졌으니 공감할 수 있는 폭이 줄어들었지만 ‘고래’가 주는 상징은 여전하다고 믿는다.

  김형경의 소설 <꽃피는 고래>는 장르가 모호하다. 니은이라는 여자 아이를 내세운 성장 소설로 볼 수 있겠지만 정작 주인공은 장포수 할아버지와 왕고래집 할머니로 볼 수도 있다. 소설의 구성이나 전달 방식은 형식에 불과하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형식을 떠난 내용은 상상할 수 없고 내용을 고려하지 않은 형식 또한 무의미하다. 색다른 시도나 파격적인 형식의 소설이 아니라 내면의 흐름을 따라가는 고백적인 소설이기 때문에 다소 지루하거나 롤러코스터의 즐거움은 없다.

  첨예한 갈등과 긴장감으로 독자들을 몰아붙이는 소설이 아니기 때문에 비슷한 감성 가졌거나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어야 이 소설에 몰입할 수 있겠다. 그 진폭을 넓히는 것은 물론 작가의 몫이겠지만 쓰고 싶은 소설의 내용과 바탕을 폭넓게 아우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 소설은 세대를 넘어서는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해 노력한 흔적은 없다. 다만 인생을 이제 막 시작하려는 소녀의 입장에서 황혼기를 맞은 노인들의 삶과 인생을 들여다보는 형식을 취하고 있어 세대 간에 고민의 흔적이 겹치고 결국 세상을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질문과 대답은 각자의 몫으로 남겨진다.

  장포수 할아버지의 고래잡이 배는 한 시대를 대표하고 한 사람의 인생을 상징한다. 왕고래집 할머니의 한글 익히기와 짧은 글들은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생의 의미를 확인하게 한다. 단순하면서도 인물들 간의 심리와 내면의 풍경들이 잘 묘사되어 있고 한 옥타브 낮은 목소리로 읖조리듯 풀어나가는 니은이의 이야기도 들을 만하다.

“글을 쓰다보니 마음이 이상해지더라. 그냥 글자만 쓰는 거라 여겼는데 그게 아니더라. 마음을 깊이 뒤집어 밭을 가는 것도 같고 맘속에서 찌개를 끓이는 것도 같고.” - P. 137

  한글을 배워 자신의 이야기를 쓰기 시작한 할머니는 마음 밭의 고랑들이 깊기만 하다. 처용포라고 하는 가상의 공간에서 바다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잔잔한 이야기들은 읽는 사람의 마음에 깊이 새겨진다. 그림으로 치자면 맑고 투명한 수채화를 닮았다. 순수하고 깨끗한 느낌의 소설이라는 말이 아니라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과 인생을 바라보는 시선에 대한 감동을 의미한다.

  김형경의 소설을 처음 읽었다. <천 개의 공감>과 같은 책을 통해 만날 때와 색다르다. 산문으로 먼저 그녀를 만났지만 소설도 나쁘지 않았다. 정이현의 소설처럼 감각적이고 공지영의 소설처럼 감칠맛이 나고 은희경의 소설처럼 몰입하게 하는 소설은 분명 아니다. 하지만 이 소설은 그저 잔잔한 바다의 수면 위로 눈부시게 솟아오르는 고래의 모습을 상상하게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매력적이다.

  그럼 이제 동해로 가야하나? 고민에 빠진다.


080614-0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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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당 범우비평판세계문학선 40
강용흘 지음, 장문평 옮김 / 범우사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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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득한 기억의 저편을 더듬어 보니 나에게도 초당에 대한 기억이 있다!는 놀라움. 초등학교 입학 전에 나는 교사였던 아버지 덕에 사택에 살았었다. 그 집이 초가지붕이었던 것으로 기억되어 있다. 70년대 초반의 풍경일 테니 틀린 기억일 수도 있다. 새마을 운동과 함께 시골집의 지붕부터 고쳤으니 학교 사택의 지붕을 기억하기가 쉽지는 않은 노릇이다. 특별한 기억으로 남아 있는 그곳은 마당에 상추와 가지가 자라고 담장엔 호박 넝쿨이 올라갔다. 재래식 화장실로 가는 길에 닭장이 있었는데 얼마나 사납게 홰를 치던지 그 앞을 지나지 못해 어머니가 데려다 주던 생각이 난다.

  아주 오래된 이야기 같지만 30여 년 전의 일이다. 이제는 시골에서도 초가지붕을 찾아 볼 수는 없다. 그러니까 강용흘의 <초당>이라는 제목은 가장 적절한 우리들 삶의 풍경을 나타내는 말이다. 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기를 나타내는 여러 가지 요소 중에서 신분 제도의 붕괴와 전통적 삶의 변화를 꼽을 수 있다. 일상적 시골의 풍경을 소설에서 만나는 것은 신선하고 새롭다. 그것은 우리들 할아버지, 할머니의 삶이었고 어린 시절 겪었던 마지막 전 근대의 생활과 문화를 간직한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이미 사라져 버린, 그러나 아직은 생생하게 잡힐 것 같은 아련함이 배어 있는 시기가 바로 그 때가 아닌가 싶다.

  강용흘은 1898년에 태어나 1972년에 미국에서 사망했다. 그는 스무 살 무렵 3.1 운동 후에 혈혈단신으로 미국에 간다. 광복 후에 귀국해서 4년 정도 체류했지만 다시 미국으로 돌아간다. 생의 3분의 1만을 한국에서 보낸 그가 보여주는 한국은 우리의 과거이지만 낯설고 아름답다. 그것은 단순히 내부자의 시선으로 오래된 기억을 떠올리는 것과는 차이가 많다. 미국에서 영어로 쓴 소설을 다시 한국어로 번역해서 읽는 느낌은 미국과의 거리만큼 낯설기도 하다. 우리말 문장이 주는 점착적인 느낌은 없다. 사색적이고 차분한 서술과 객관적인 듯한 시선은 오히려 우리들 삶을 객관화시켜 주고 있다.

  1931년에 발표된 이 소설은 외적인 면에서 이채롭다. 앞서 언급한대로 미국에서 영어로 발표되어 구겐하임상 등 2개의 상을 받았고 한국에 번역 소개된 작품이다. 이미륵의 <압록강은 흐른다>와 상황과 맥락이 유사하다. 세계 속의 한국인의 문학은 이제 어렵지 않게 되었지만 그 주제와 대상이 한국에 대한 혹은 동양적인 것들을 형상화 한 작품은 그리 많지 않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제는 한국적인 것을 찾으려면 서울에서도 고궁이나 박물관을 찾아야 한다. 그런 면에서 이 소설은 우리에게 특별함을 준다.

  가끔 이 책, 저 책에서 제목만 듣던 책을 주변 사람의 권유로 읽게 되면 감회가 새롭다. 친숙한 친구의 이야기를 듣는 것 같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 책을 읽는 동안 즐거웠고 아득해졌고 현장감이 넘쳤고 내 것이 아닌 것들도 추억하게 되는 착각을 했다. 왜 아니겠는가? 그 파란만장한 20세기 초반의 한국사의 격동기를 온몸으로 겪어냈던 저자의 체험은 우리에게 여전히 충분한 감동을 전달한다.

  마치 단편적인 기억들을 전해 주시던 어른들의 이야기를 쭉 모아놓은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구한말에서 개화기를 거쳐 일제 강점기, 3.1 운동에 이르기까지 격동의 세월을 감내해야 했던 저자는 조금 특별한 사람이었다. 일반적인 생각과 태도를 갖고 세상을 대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더더욱 극적인 긴장감을 가지고 읽게 된다. 함경도 시골 마을에서 서울을 거쳐 일본에 유학하고 다시 서울에 돌아왔다가 중국을 거쳐 러시아로 가던 도중 체포되고 모진 고문을 받다가 풀려나고 또다시 3.1 운동 당시 고문을 당하고 우여곡절 끝에 미국행 배에 오르는 과정은 한 편의 대하 라마를 연상시킨다.

  어린 시절 조모와 숙부들, 사촌들과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1부는 백석의 시를 연상시킬 만한 우리 민족의 삶의 원형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어 실감나게 당시를 들여다 볼 수 있다. 문학의 힘은 생동감과 구체적 형상화의 힘에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한다. 단순한 역사적 사실의 나열을 통해 확인되지 않는 우리 선조들의 삶의 모습은 순수하고 아름답게 그려져 있다. 물론 어린 소년의 시각이지만 아련한 추억처럼 물컹거린다.

  우리가 살아왔던 전통의 모습이 무조건 아름답거나 애틋하다고 볼 수는 없다. 강용흘은 유명한 시인과 박사 숙부와 함께 살았던 뼈대 있는 양반 가문의 자손이었다. 따라서 세상을 대하는 눈과 방법이 다르다. 인생의 목표는 일찌감치 박사가 되어 나라의 둘도 없는 일꾼이 되는 것이었다. 당시의 보편적인 희망과 목표였을 것이니 굳이 비난을 받을 수는 없겠으나 지독한 가난과 생존의 위협을 느낀 것은 당시의 시대 상황 때문이었지 신분적 계급 때문은 아니었다.

  물론 저자의 눈을 통해 개화기 급작스런 생활의 변화와 일본 제국주의 침략으로 인한 부당한 고문과 핍박은 생생하게 그려지고 있다. 더 이상 시골에 안주하고 싶지 않았던 저자는 보다 넓은 세상에 대한 동경을 굳건한 의지와 결단 그리고 용기로 이루어낸다. 자전적 소설인 이 작품은 그래서 마치 꾸며낸 듯 파란만장하다. 미국으로 가는 배에 오르기까지 스무 살 언저리의 청년이 겪기에는 험난하고 고통스런 과정이 펼쳐진다.

  이 소설은 한국문학에 대한 사전적 정의나 연구 대상과 무관하게 객관적인 시선으로 우리의 삶과 지나간 시대를 조망할 수 있는 소중한 문화적 자산이다. 잊혀진 지난날의 추억이나 아련한 두근거림을 위한 감상을 위해서가 아니라 기억할 만한 한 인간의 인생 역정을 통해 우리의 아픈 역사와 한 시대를 조망할 수 있는 소설로 읽혔다. 그래서 일본에서 태어나 4살이 되어서야 한국에 돌아온 아버지의 삶을 추억하다가 <여행할 권리>에 등장하는 김연수의 아버지도 떠올렸다. 생각은 꼬리를 물고 허망하고 쓸데없는 곳까지 나아간다. 그리고 지금은 21세기 역사의 현장을 살아가고 있다.


080612-0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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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신세계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2
올더스 헉슬리 지음, 이덕형 옮김 / 문예출판사 / 199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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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읽어야 하지만 아무도 읽지 않는 책이 고전이라고 한다. 그래도 의무감에 책을 읽을 필요는 없다. 무심코 구미가 당기거나 관련 서적을 뒤적이다가 아직도 이 책을 읽지 않았구나 싶으면 그 때 천천히 음미해도 늦지 않는다고 나는 생각한다. 구실 좋은 핑계가 될 수 있겠으나 나는 늘 고전에 약해진다. 마음이 약해지지도 하고 읽지 않은 책이 많아 호기심이 생기는 책도 많다. 강유원의 말대로 결국엔 고전으로 돌아갈 지 모르지만 세상엔 즐길만한 책과 읽고 싶은 책이 늘어간다.

  그러나 때때로 도서관이나 서점에서 길을 잃기도 한다. 수 많은 책들 속에서 손이 가거나 책다운 책(?)을 쉽게 발견하기란 여간 어렵지 않기 때문이다. 그 기준은 각자가 마련하는 것이겠지만 숙연해지는 마음을 갖게 하는 책,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지는 책, 읽고 나서도 오래 여운을 남겨 창 밖으로 멍한 시선을 두게 하는 책을 만나는 것은 드물다.

  장르를 불문하고 그 책의 가치는 오랜 시간을 거쳐 많은 독자들의 입을 통해 전해진다. 그래서 고전은 아마도 가장 믿을 만하고 안전한 독서 방법일 지도 모르겠다.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는 정말 ‘멋진 신세계’를 보여주지 않는다. 쉽게 눈치 챌 수 있겠지만 지독한 반어와 역설이다.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처럼 말이다.

  1932년이면 1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파시즘과 제국주의가 유럽을 지배하던 망령된 시절이었다. 산업화로 인해 기계와 물질 문명에 대한 믿음을 굳건해지고 사람들의 의식은 종교와 사회적 변혁 속에서 혼란스러웠던 시기이다. 다방면에 해박한 지식을 가진 헉슬리는 한 권의 소설을 통해 암울한 미래상을 그려내고 있다. 그것은 인간의 생명과 기계문명에 대한 묵시록적 예언처럼 가슴 서늘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소설 속의 모습은 부분적으로 실현되고 있으며 어쩌면 그 결과는 더욱 참담하게 예견되고 있다. 인간 복제는 기술적으로 가능해졌다. 그야말로 개나 소나 복제가 가능하다. 쥘 베른의 <해저 2만리>나 <지구속 여행>처럼 기발한 상상력과 미래에 대한 보이지 않는 흥분과 기대가 뒤섞여 있는 소설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본질적 질문이며 가상의 미래를 통해 현실을 반성하게 하는 거울의 역할을 하는 소설이다.

  인간복제를 다른 수많은 SF 영화들은 옥덕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에 빚지고 있는 듯하다. 에이리언의 탄생 장면이나 인간복제를 다룬 영화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창조적 세계에 대한 영감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소설가의 상상력을 상상을 초월한다. 21세기식으로 말한다면 문화 컨텐츠 산업의 기수가 될 수 있었을 작가의 <멋진 신세계>는 여전히 인간의 현재와 미래에 경종을 울리고 있다.

  이 소설의 구조는 단순하다. 부모나 가족이 존재하지 않고 병 속에서 인공 수정을 통해 등급이 나누어진 인간들이 탄생한다. 알파, 베타, 감마, 엡실론 계급이 그것이다. 태어날 때부터 각자의 역할과 능력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인간들 사이의 갈등이나 경쟁이 없고 기계적이고 효율적으로 사회는 구성되어 있다. 무스타파 몬드라는 세계 총통이 태어나는 인간의 교육과 수요를 조절하고 신과 같은 존재인 포드님의 원칙들이 지켜지지만 어디에나 그렇듯 부정응 알파 계급인 버나드 마르크스가 야만인 구역으로 여행을 떠났다가 어머니의 아들인 존과 함께 문명 세계로 돌아온다. 레니나에게 특별한 감정을 가지고 있던 버나드는 그녀에게 이렇게 말한다.

“레니나, 당신은 자유로워지고 싶지 않으세요?”
“무슨 말을 하고 계신지 난 모르겠군요. 전 자유로워요. 자유롭게 가장 멋진 시간을 즐기고 있어요. 오늘날에는 모든 사람이 행복해요.” - P. 112

“…… 하지만 레니나, 다른 방법으로 행복할 수 있는 자유를 원하지 않습니까? 예컨대 당신 자신만의 방법으로 말입니다. 타인들과 같은 방법이 아닌 방법으로 말입니다.” - P. 113


  진정한 자유는 문명세계의 모든 사람들에게 행복을 가져다 주는 소마라는 약품이 아니라는 것을 어렴풋이 짐작하게 되는 버나드는 제조(?) 과정에서 알코올이 과다 투여된 인간으로 의심받는다. 이유야 어떻든 그가 데려온 존은 세익스피어를 읽고 오델로를 인용하는 야만인이다. 레니나를 불행하게 만드는 감정을 만들어주는 존은 결국 문명 세계에 적응하지 못한다.

  그들은 ‘외부생식과 신파블로프식 조건반사 훈련과 수면시 교육법’을 통해 시간은 걸리지만 가장 확실한 방법으로 프로그래밍 된 인간들이기 때문이다. 행복을 만들어 줄 수 있다는 생각, 불안과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는 욕망은 지극히 인간적이지만 인간의 조건을 포기하고 싶은 욕망이라는 사실을 멋진 신세계의 인간들을 알지 못한다.

  올더스 헉슬리는 이 책에서 단순하게 문명 세계에 대한 비판과 미래 세계에 대한 경고를 보내고 있는 것은 아니다. 무언가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댓가를 치러야한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세상에 공짜가 어디에 있겠는가?

“……인간에겐 무상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곤 하나도 없는 걸세. 행복도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것야. 왓슨 군, 자네도 그 대가를 치르고 있는 중이야. 자네는 미에 대하여 지대한 관심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지불해야 하는 걸세. 나도 과거에는 진리에 너무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네. 그래서 나도 그 대가를 지불했던 걸세.” - P.285

  세상은 더 이상 장밋빛 미래를 보여주지 않는다. 열심히 노력하면 잘 살 수 있다는 순진한 믿음도 없고 과학과 기술이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 줄 것이라는 순진한 기대도 사라졌다. 그렇다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과연 미래는 어떤 모습으로 그려지는 걸까? 그것이 매우 궁금해졌다. 우울한 우리들의 자화상, 아니 지구의 미래를 상상하다가 헉슬 리가 보고 싶어졌다. 지금 그가 살아있다면 과연 어떤 미래를 그려낼지! 인간 복제가 아니라 동물복제나 광우병으로 세상의 종말이 오는 소설 한 편 쯤 쓰지 않았을지! 인류의 미래보다 대한민국의 10년 후가 더 궁금해지는 2008년이다. 소설은 소설일 뿐?


080608-0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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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첫 문학과지성 시인선 345
김혜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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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나먼 은하계가
너무 커서 우리 귀엔 들리지도 않는
비명을 내지르며 돌고 돌다가
내 가슴에 안경알 고정시키는 나사못만큼
작은 소용돌이로 붙박여올 때

저기 저 남태평양쯤에서
몰려다니던 미친 태풍이
구름을 몰고 천둥 벼락 치며 휘몰려 다니다가
내 발끝에서부터
내 새끼손가락의 보일 듯 말 듯한 지문만큼
작은 소용돌이로 북상해 올 때


  김혜순의 아홉 번째 ‘첫’을 외치는 시집의 표지 후기에 적힌 글이다. 그때가 언제인지 알 수 없으나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시인이 그때마다 길어 올린 언어의 물은 흥건히 가슴을 적시지 않고 자아의 타자와 사물과 세계는 골고루 섞이고 융합하다가 서로를 밀어내고 고통스럽게 이별한다.

  안경알에 박힌 나사의 소용돌이와 새끼손가락 끝에 희미하게 남은 소용돌이는 서로 무관한 하지만 시인의 가슴에 파문을 남긴다. 김혜순의 시들은 늘 그렇게 충돌과 소용돌이 속에서 부딪히고 깨지며 상상의 세계와 감성의 세계를 현실 밖으로 끄집어낸다. 우주로 확장된 언어들의 울림은 독자의 공감을 얻기 힘들다. 자세히, 그리고 가만히 들여다보아야 보일까 말까 하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시인들의 초상이 하나씩 사라지는 서사의 시대에 김혜순은 여전히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또 다른 별에서> <우리들의 음화>를 그려다가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에서 <불쌍한 사랑 기계>가 되었다. <달력 공장 공장장님 보세요>라고 외치다가 이제 <당신의 첫>으로 돌아왔다.

  지극히 역설적인 시집이 아닌가 싶다. 언제고 마지막일 수 있는 시의 변주들을 들고 뻔뻔스럽게 ‘첫’을 외치고 있다. 처음이고 싶은 욕망의 표현이라기보다 나를 중심으로 세상과 조우하는 경험이 만들어 낸 감각과 떨림 그리고 조용한 진동들은 모두가 처음일 수 있겠다.

지평선

누가 쪼개 놓았나
저 지평선
하늘과 땅이 갈라진 흔적
그 사이로 핏물이 번져 나오는 저녁

누가 쪼개놓았나
윗눈꺼풀과 아랫눈꺼풀 사이
바깥의 광활과 안의 광활로 내 몸이 갈라진 흔적
그 사이에서 눈물이 솟구치는 저녁

상처만이 상처와 서로 스밀 수 있는가
두 눈을 뜨자 닥쳐오는 저 노을
상처와 상처가 맞닿아
하염없이 붉은 물이 흐르고
당신이란 이름의 비상구도 깜깜하게 닫히네

누가 쪼개놓았나
흰낮과 검은밤
낮이면 그녀는 매가 되고
밤이 오면 그가 늑대가 되는
그 사이로 칼날처럼 스쳐 지나는
우리 만남의 저녁


  ‘당신이란 이름의 비상구’가 닫혀버리지만 ‘우리 만남의 저녁’은 계속된다. 끝없는 자기 부정과 세상과의 불화 속에서도 시인은 치열하게 지평선 너머로 시선을 던진다. 광활한 공간은 지평선으로 맞닿아 있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시인이 보는 사람과 세상은 보이지 않는 간격을 메우는 일일지도 모른다. 언어로 표상되는 낯선 세계에서 그녀의 시는 만났다가 헤어지고 또 다른 시선으로 인식의 대상들을 풀어 놓는다. 지평선은 어디에나 있고 저녁은 끊임없이 반복된다.



내가 세상에서 가장 질투하는 것, 당신의 첫,
당신이 세상에서 가장 질투하는 것, 그건 내가 모르지.
당신의 잠든 얼굴 속에서 슬며시 스며나오는 당신의 첫.
당신이 여기 올 때 거기에서 가져온 것.
나는 당신의 첫을 끊어버리고 싶어.
나는 당신의 얼굴, 그 속의 무엇을 질투하지?
무엇이 무엇인데? 그건 나도 모르지.
아마도 당신을 만든 당신 어머니의 첫 젖 같은 것.
그런 성분으로 만들어진 당신의 첫.


  ‘당신’이라는 존재의 처음은 어디였을까? 그것은 나의 처음을 묻는 질문과 다름이 없다. 그 ‘첫을 끊어버리고 싶’다는 말은 영원을 준비하는 말은 아닐까. 존재의 본질에 대한 호기심과 탐구가 아닐지라도 현존하는 모든 것들에 대한 관심은 우리들 모두에게 늘 존재의 의미를 묻는다.

  ‘당신의 첫’은 나의 마지막일 필요는 없다. 다만 거기에 머물러 있는 것들에 대해 늘 고민하고 생각하고 그리고 인식한다. 생명과 존재에 대한 탐구와 인식 태도는 시인의 시를 태어나게 하는 근원이 된다. 시집 곳곳에 마련된 시원의 세계는 세상만물에 대한 태도이며 방법이고 목적이다.

당신의 눈물

당신이 나를 스쳐보던 그 시선
그 시선이 멈추었던 그 순간
거기 나 영원히 있고 싶어
물끄러미

꾸러미
당신 것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내 것인
물 한 꾸러미
그 속에서 헤엄치고 싶어
잠들면 내 가슴을 헤적이던
물의 나라
그곳으로 잠겨서 가고 싶어
당신 시선의 줄에 매달려 가는
조그만 어항이어 싶어


  모든 시들은 대상에 대한 무한한 애정에서 비롯된다고 믿는다. 그것이 증오로 때로는 자기 분열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당신’으로 호명된 대상은 나를 돌아보는 거울이 된다. 당신을 통해 헤엄치고 가슴을 적시고 싶은 것이다. 물끄러미 바라보는 시선은 그렇게 끝없이 확장될 것이고 새끼손가락의 소용돌이처럼 가슴속에 작은 파문을 일으킨다.

  일상을 조금만 벗어나면 보이지 않던 많은 것들이 보인다. ‘지금-여기’가 아니라 ‘거기-당신’에 대해 작은 애정과 관심, 치열한 고민과 주관적 인식을 통해 세계를 인식하는 태도를 버리지 않고 있는 시인의 내면 풍경은 그렇게 고스란히 내게로 전해진다. 비록 그것이 오독일지라도 내가 누구인지 묻고 싶을 때 ‘그때 나’를 확인하는 방법으로 늘 유용하다.


080521-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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