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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신세계 ㅣ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2
올더스 헉슬리 지음, 이덕형 옮김 / 문예출판사 / 1998년 10월
평점 :
누구나 읽어야 하지만 아무도 읽지 않는 책이 고전이라고 한다. 그래도 의무감에 책을 읽을 필요는 없다. 무심코 구미가 당기거나 관련 서적을 뒤적이다가 아직도 이 책을 읽지 않았구나 싶으면 그 때 천천히 음미해도 늦지 않는다고 나는 생각한다. 구실 좋은 핑계가 될 수 있겠으나 나는 늘 고전에 약해진다. 마음이 약해지지도 하고 읽지 않은 책이 많아 호기심이 생기는 책도 많다. 강유원의 말대로 결국엔 고전으로 돌아갈 지 모르지만 세상엔 즐길만한 책과 읽고 싶은 책이 늘어간다.
그러나 때때로 도서관이나 서점에서 길을 잃기도 한다. 수 많은 책들 속에서 손이 가거나 책다운 책(?)을 쉽게 발견하기란 여간 어렵지 않기 때문이다. 그 기준은 각자가 마련하는 것이겠지만 숙연해지는 마음을 갖게 하는 책,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지는 책, 읽고 나서도 오래 여운을 남겨 창 밖으로 멍한 시선을 두게 하는 책을 만나는 것은 드물다.
장르를 불문하고 그 책의 가치는 오랜 시간을 거쳐 많은 독자들의 입을 통해 전해진다. 그래서 고전은 아마도 가장 믿을 만하고 안전한 독서 방법일 지도 모르겠다.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는 정말 ‘멋진 신세계’를 보여주지 않는다. 쉽게 눈치 챌 수 있겠지만 지독한 반어와 역설이다.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처럼 말이다.
1932년이면 1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파시즘과 제국주의가 유럽을 지배하던 망령된 시절이었다. 산업화로 인해 기계와 물질 문명에 대한 믿음을 굳건해지고 사람들의 의식은 종교와 사회적 변혁 속에서 혼란스러웠던 시기이다. 다방면에 해박한 지식을 가진 헉슬리는 한 권의 소설을 통해 암울한 미래상을 그려내고 있다. 그것은 인간의 생명과 기계문명에 대한 묵시록적 예언처럼 가슴 서늘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소설 속의 모습은 부분적으로 실현되고 있으며 어쩌면 그 결과는 더욱 참담하게 예견되고 있다. 인간 복제는 기술적으로 가능해졌다. 그야말로 개나 소나 복제가 가능하다. 쥘 베른의 <해저 2만리>나 <지구속 여행>처럼 기발한 상상력과 미래에 대한 보이지 않는 흥분과 기대가 뒤섞여 있는 소설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본질적 질문이며 가상의 미래를 통해 현실을 반성하게 하는 거울의 역할을 하는 소설이다.
인간복제를 다른 수많은 SF 영화들은 옥덕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에 빚지고 있는 듯하다. 에이리언의 탄생 장면이나 인간복제를 다룬 영화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창조적 세계에 대한 영감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소설가의 상상력을 상상을 초월한다. 21세기식으로 말한다면 문화 컨텐츠 산업의 기수가 될 수 있었을 작가의 <멋진 신세계>는 여전히 인간의 현재와 미래에 경종을 울리고 있다.
이 소설의 구조는 단순하다. 부모나 가족이 존재하지 않고 병 속에서 인공 수정을 통해 등급이 나누어진 인간들이 탄생한다. 알파, 베타, 감마, 엡실론 계급이 그것이다. 태어날 때부터 각자의 역할과 능력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인간들 사이의 갈등이나 경쟁이 없고 기계적이고 효율적으로 사회는 구성되어 있다. 무스타파 몬드라는 세계 총통이 태어나는 인간의 교육과 수요를 조절하고 신과 같은 존재인 포드님의 원칙들이 지켜지지만 어디에나 그렇듯 부정응 알파 계급인 버나드 마르크스가 야만인 구역으로 여행을 떠났다가 어머니의 아들인 존과 함께 문명 세계로 돌아온다. 레니나에게 특별한 감정을 가지고 있던 버나드는 그녀에게 이렇게 말한다.
“레니나, 당신은 자유로워지고 싶지 않으세요?”
“무슨 말을 하고 계신지 난 모르겠군요. 전 자유로워요. 자유롭게 가장 멋진 시간을 즐기고 있어요. 오늘날에는 모든 사람이 행복해요.” - P. 112
“…… 하지만 레니나, 다른 방법으로 행복할 수 있는 자유를 원하지 않습니까? 예컨대 당신 자신만의 방법으로 말입니다. 타인들과 같은 방법이 아닌 방법으로 말입니다.” - P. 113
진정한 자유는 문명세계의 모든 사람들에게 행복을 가져다 주는 소마라는 약품이 아니라는 것을 어렴풋이 짐작하게 되는 버나드는 제조(?) 과정에서 알코올이 과다 투여된 인간으로 의심받는다. 이유야 어떻든 그가 데려온 존은 세익스피어를 읽고 오델로를 인용하는 야만인이다. 레니나를 불행하게 만드는 감정을 만들어주는 존은 결국 문명 세계에 적응하지 못한다.
그들은 ‘외부생식과 신파블로프식 조건반사 훈련과 수면시 교육법’을 통해 시간은 걸리지만 가장 확실한 방법으로 프로그래밍 된 인간들이기 때문이다. 행복을 만들어 줄 수 있다는 생각, 불안과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는 욕망은 지극히 인간적이지만 인간의 조건을 포기하고 싶은 욕망이라는 사실을 멋진 신세계의 인간들을 알지 못한다.
올더스 헉슬리는 이 책에서 단순하게 문명 세계에 대한 비판과 미래 세계에 대한 경고를 보내고 있는 것은 아니다. 무언가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댓가를 치러야한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세상에 공짜가 어디에 있겠는가?
“……인간에겐 무상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곤 하나도 없는 걸세. 행복도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것야. 왓슨 군, 자네도 그 대가를 치르고 있는 중이야. 자네는 미에 대하여 지대한 관심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지불해야 하는 걸세. 나도 과거에는 진리에 너무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네. 그래서 나도 그 대가를 지불했던 걸세.” - P.285
세상은 더 이상 장밋빛 미래를 보여주지 않는다. 열심히 노력하면 잘 살 수 있다는 순진한 믿음도 없고 과학과 기술이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 줄 것이라는 순진한 기대도 사라졌다. 그렇다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과연 미래는 어떤 모습으로 그려지는 걸까? 그것이 매우 궁금해졌다. 우울한 우리들의 자화상, 아니 지구의 미래를 상상하다가 헉슬 리가 보고 싶어졌다. 지금 그가 살아있다면 과연 어떤 미래를 그려낼지! 인간 복제가 아니라 동물복제나 광우병으로 세상의 종말이 오는 소설 한 편 쯤 쓰지 않았을지! 인류의 미래보다 대한민국의 10년 후가 더 궁금해지는 2008년이다. 소설은 소설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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