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요
안도현 지음 / 창비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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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요,

  로 시작하는 허수경의 ‘혼자 가는 먼 집’은 허수경의 시집을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기억나지 않는  시이다. 당연하겠지만 한 권의 시집을 읽는 동안 시인과 대화를 나누고 공감하며 아파한다. 물론 때로는 기뻐하고 함께 상상하며 즐거운 환상을 갖기도 한다. 부드러운 바람과 뺨을 간질이는 들풀을 만나기도 한다. ‘당신’처럼 무심하게 사용하던 말에 주목하고 다시 생각하고 ‘좋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히 시인의 눈이고 능력이며 의무이다.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말들에게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 안타까운 몸짓들을 보듬으며 일상적인 것을 낯설게 바라보는 눈을 빌려주는 것이 시인의 역할이다. 안도현의 그 시인의 역할을 넘어 길잡이와 안내자의 역할까지 떠맡았다. 도종환의 <꽃잎의 말로 편지를 쓴다>에 이어 육성 시낭송 CD와 함께 독자들을 만난다. <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요>는 한국문학예술위원회 문학나눔사무국에서 기획, 제작한 책이다. 이메일로 배달되는 시들을 이렇게 책으로 만나니 느낌이 새롭기는 하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이런 종류의 책들은 좋아하지 않는다. 문학의 대중화에는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이 많겠지만 단편적인 시 하나가 줄 수 있는 감동의 무게는 한계가 있다. 애니매이션과 함께 분위기를 살려주는 배경음악과 더불어 즐기는 시 한 편이 나쁘지는 않다. 시는 음악과 분리될 수 없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그래서 내게는 산만하고 어지러운 느낌이다. 한 시인의 목소리를 꾸준히 그리고 차분하게 들어 볼 수 있는 시집과는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철저하게 안도현의 눈을 빌려 읽는 재미 혹은 한계를 감안해야 한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이제 정확히 세어보지 않아 모르겠지만 400여 권 쯤 되는 시집들을 뒤적이며 내가 좋아하는 시들을 엮고 간단한 감상이나 느낌들을 적어본 적이 있다. 물론 이것은 책이 되지 않는다. 내가 유명한 시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혼자만의 즐거움으로 충분하고 가끔 인용할 때도 있지만 공유하고 공감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안도현은 이 책에서 다양한 시인들의 다양한 시들을 골라냈다. 한 편 한 편 애정을 가지고 시의 참맛을 느낄 수 있는 시들을 나름의 기준으로 골랐다. 시가 마음에 닿지 않거나 공감할 수 없다면 이런 종류의 책은 참 지루해지기도 하고 손이 가지 않기도 한다. 하지만 보편적 정서를 읽어내고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얻어낸 시인이 들려주는 다른 시인들의 시와 시와 관련된 짧은 단상은 불편하지 않다.

  그래도 여전히 내가 찾아 읽고 손수 베껴놓은 시만한 게 없다. 누구나 그렇듯이 지극히 개인적인 감동과 울림은 저마다 다른 소리를 내기 때문이다. 누군가 권해 준 한 권의 시집, 누군가 보내 준 한 편의 시가 전하는 느낌은 보내준 사람의 마음을 담고 있어 색다르다. 안도현이 권하는 시를 읽어보는 것은 개인적인 친밀감은 없지만 쉽고 편안하게 시와 친해질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다.

지퍼 - 송승환

건너편 사람들 틈에 환영처럼 그녀가 있다

한번 벌어지면 쉽게 채워지지 않는다

선로 위 끊임없이 지하철이 달려온다


와온(臥溫)의 저녁 - 유재영

어린 물살들이 먼바다에 나가 해종일 숭어 새끼들과 놀다 돌아올 시간이 되자 마을 불빛들은 모두 앞다퉈 몰려나와 물길을 환히 비춰주었다


  짧은 시 두 편이 보여주는 정갈하고 깔끔한 매력은 냉수처럼 시원하다. 일상에서 ‘지퍼’를 통해 관계를 설명하고 바닷가 마을의 저녁 풍경을 수채화로 전해주는 시는 설명이 필요없다. 안도현은 이런 시를 고르면서 마음까지 깨끗했겠다.

저곳 - 박형준

공중(空中)이란 말
참 좋지요
중심이 비어서
새들이 꽉 찬
저곳

그대와
그 안에서
방을 들이고
아이들 낳고
냄새를 피웠으면

공중(空中)이라는


뼛속이 비어서
하늘 끝까지
날아가는
새떼


  시를 참 잘 쓰는 시인이다. 탁월한 감각과 절제된 언어로 공간을 점유하는 박형준의 이 시는 정중동의 감각을 보여준다. 천상 시인들의 향연이 벌어지는 곳에서 저마다 한 칼 한다고 외치고 있으니 어찌보면 독자들은 즐거운 만찬을 즐기고 있는 것이다.

달빛 소나타 - 신현정

가을밤을 앉아 있는

그녀의 목덜미가 하도 눈부시게 희어서

귀뚜라미가 사는 것 같아서

달빛들이 사는 것 같아서

손톱들이 우는 것 같아서

그녀의 등 뒤로

살그머니 돌아가서

오오 목덜미에

단 한번의

서늘한 키스를 하고

아 그 밤으로

그대로 달아난 나여


  그래서 이렇게 서늘한 키스와 마주하기도 한다. 가을밤, 달빛, 목덜미……. 달아났던 혹은 달아나고 싶었던 수많은 ‘나’는 이 시의 독자가 되어 그 오래된 기억과 마주하고 당혹해하고 웃음짓기도 하고 하늘을 더듬기도 할 것이다.

청춘 1 - 권혁웅

그대 다시는 그 눈밭을 걸어가지 못하리라
그대가 낸 길을 눈들이 서둘러 덮어버렸으니
붕대도 거즈도 없이
돌아갈 길을 지그시 눌러버렸으니


  이제 덮여버렸나? 뒤돌아 보아도 길이 보이지 않도록 붕대와 거즈로 지그시 눌러버렸으니 이제 돌아갈 길이 없다, 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과거형 인간’이 되어 버린 것이고 ‘청춘’은 아득한 곳으로 사라지며 김연수의 말대로 들고양이처럼 소리도 없이 그리고 느닷없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오오, 밤의 하늘이여! 밝아올 내일이여! 그리고 보고 싶은 친구여!


080620-0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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