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나먼 은하계가 너무 커서 우리 귀엔 들리지도 않는 비명을 내지르며 돌고 돌다가 내 가슴에 안경알 고정시키는 나사못만큼 작은 소용돌이로 붙박여올 때 저기 저 남태평양쯤에서 몰려다니던 미친 태풍이 구름을 몰고 천둥 벼락 치며 휘몰려 다니다가 내 발끝에서부터 내 새끼손가락의 보일 듯 말 듯한 지문만큼 작은 소용돌이로 북상해 올 때 김혜순의 아홉 번째 ‘첫’을 외치는 시집의 표지 후기에 적힌 글이다. 그때가 언제인지 알 수 없으나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시인이 그때마다 길어 올린 언어의 물은 흥건히 가슴을 적시지 않고 자아의 타자와 사물과 세계는 골고루 섞이고 융합하다가 서로를 밀어내고 고통스럽게 이별한다. 안경알에 박힌 나사의 소용돌이와 새끼손가락 끝에 희미하게 남은 소용돌이는 서로 무관한 하지만 시인의 가슴에 파문을 남긴다. 김혜순의 시들은 늘 그렇게 충돌과 소용돌이 속에서 부딪히고 깨지며 상상의 세계와 감성의 세계를 현실 밖으로 끄집어낸다. 우주로 확장된 언어들의 울림은 독자의 공감을 얻기 힘들다. 자세히, 그리고 가만히 들여다보아야 보일까 말까 하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시인들의 초상이 하나씩 사라지는 서사의 시대에 김혜순은 여전히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또 다른 별에서> <우리들의 음화>를 그려다가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에서 <불쌍한 사랑 기계>가 되었다. <달력 공장 공장장님 보세요>라고 외치다가 이제 <당신의 첫>으로 돌아왔다. 지극히 역설적인 시집이 아닌가 싶다. 언제고 마지막일 수 있는 시의 변주들을 들고 뻔뻔스럽게 ‘첫’을 외치고 있다. 처음이고 싶은 욕망의 표현이라기보다 나를 중심으로 세상과 조우하는 경험이 만들어 낸 감각과 떨림 그리고 조용한 진동들은 모두가 처음일 수 있겠다. 지평선 누가 쪼개 놓았나 저 지평선 하늘과 땅이 갈라진 흔적 그 사이로 핏물이 번져 나오는 저녁 누가 쪼개놓았나 윗눈꺼풀과 아랫눈꺼풀 사이 바깥의 광활과 안의 광활로 내 몸이 갈라진 흔적 그 사이에서 눈물이 솟구치는 저녁 상처만이 상처와 서로 스밀 수 있는가 두 눈을 뜨자 닥쳐오는 저 노을 상처와 상처가 맞닿아 하염없이 붉은 물이 흐르고 당신이란 이름의 비상구도 깜깜하게 닫히네 누가 쪼개놓았나 흰낮과 검은밤 낮이면 그녀는 매가 되고 밤이 오면 그가 늑대가 되는 그 사이로 칼날처럼 스쳐 지나는 우리 만남의 저녁 ‘당신이란 이름의 비상구’가 닫혀버리지만 ‘우리 만남의 저녁’은 계속된다. 끝없는 자기 부정과 세상과의 불화 속에서도 시인은 치열하게 지평선 너머로 시선을 던진다. 광활한 공간은 지평선으로 맞닿아 있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시인이 보는 사람과 세상은 보이지 않는 간격을 메우는 일일지도 모른다. 언어로 표상되는 낯선 세계에서 그녀의 시는 만났다가 헤어지고 또 다른 시선으로 인식의 대상들을 풀어 놓는다. 지평선은 어디에나 있고 저녁은 끊임없이 반복된다. 첫 내가 세상에서 가장 질투하는 것, 당신의 첫, 당신이 세상에서 가장 질투하는 것, 그건 내가 모르지. 당신의 잠든 얼굴 속에서 슬며시 스며나오는 당신의 첫. 당신이 여기 올 때 거기에서 가져온 것. 나는 당신의 첫을 끊어버리고 싶어. 나는 당신의 얼굴, 그 속의 무엇을 질투하지? 무엇이 무엇인데? 그건 나도 모르지. 아마도 당신을 만든 당신 어머니의 첫 젖 같은 것. 그런 성분으로 만들어진 당신의 첫. ‘당신’이라는 존재의 처음은 어디였을까? 그것은 나의 처음을 묻는 질문과 다름이 없다. 그 ‘첫을 끊어버리고 싶’다는 말은 영원을 준비하는 말은 아닐까. 존재의 본질에 대한 호기심과 탐구가 아닐지라도 현존하는 모든 것들에 대한 관심은 우리들 모두에게 늘 존재의 의미를 묻는다. ‘당신의 첫’은 나의 마지막일 필요는 없다. 다만 거기에 머물러 있는 것들에 대해 늘 고민하고 생각하고 그리고 인식한다. 생명과 존재에 대한 탐구와 인식 태도는 시인의 시를 태어나게 하는 근원이 된다. 시집 곳곳에 마련된 시원의 세계는 세상만물에 대한 태도이며 방법이고 목적이다. 당신의 눈물 당신이 나를 스쳐보던 그 시선 그 시선이 멈추었던 그 순간 거기 나 영원히 있고 싶어 물끄러미 물 꾸러미 당신 것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내 것인 물 한 꾸러미 그 속에서 헤엄치고 싶어 잠들면 내 가슴을 헤적이던 물의 나라 그곳으로 잠겨서 가고 싶어 당신 시선의 줄에 매달려 가는 조그만 어항이어 싶어 모든 시들은 대상에 대한 무한한 애정에서 비롯된다고 믿는다. 그것이 증오로 때로는 자기 분열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당신’으로 호명된 대상은 나를 돌아보는 거울이 된다. 당신을 통해 헤엄치고 가슴을 적시고 싶은 것이다. 물끄러미 바라보는 시선은 그렇게 끝없이 확장될 것이고 새끼손가락의 소용돌이처럼 가슴속에 작은 파문을 일으킨다. 일상을 조금만 벗어나면 보이지 않던 많은 것들이 보인다. ‘지금-여기’가 아니라 ‘거기-당신’에 대해 작은 애정과 관심, 치열한 고민과 주관적 인식을 통해 세계를 인식하는 태도를 버리지 않고 있는 시인의 내면 풍경은 그렇게 고스란히 내게로 전해진다. 비록 그것이 오독일지라도 내가 누구인지 묻고 싶을 때 ‘그때 나’를 확인하는 방법으로 늘 유용하다. 080521-0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