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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당 ㅣ 범우비평판세계문학선 40
강용흘 지음, 장문평 옮김 / 범우사 / 2002년 9월
평점 :
품절
아득한 기억의 저편을 더듬어 보니 나에게도 초당에 대한 기억이 있다!는 놀라움. 초등학교 입학 전에 나는 교사였던 아버지 덕에 사택에 살았었다. 그 집이 초가지붕이었던 것으로 기억되어 있다. 70년대 초반의 풍경일 테니 틀린 기억일 수도 있다. 새마을 운동과 함께 시골집의 지붕부터 고쳤으니 학교 사택의 지붕을 기억하기가 쉽지는 않은 노릇이다. 특별한 기억으로 남아 있는 그곳은 마당에 상추와 가지가 자라고 담장엔 호박 넝쿨이 올라갔다. 재래식 화장실로 가는 길에 닭장이 있었는데 얼마나 사납게 홰를 치던지 그 앞을 지나지 못해 어머니가 데려다 주던 생각이 난다.
아주 오래된 이야기 같지만 30여 년 전의 일이다. 이제는 시골에서도 초가지붕을 찾아 볼 수는 없다. 그러니까 강용흘의 <초당>이라는 제목은 가장 적절한 우리들 삶의 풍경을 나타내는 말이다. 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기를 나타내는 여러 가지 요소 중에서 신분 제도의 붕괴와 전통적 삶의 변화를 꼽을 수 있다. 일상적 시골의 풍경을 소설에서 만나는 것은 신선하고 새롭다. 그것은 우리들 할아버지, 할머니의 삶이었고 어린 시절 겪었던 마지막 전 근대의 생활과 문화를 간직한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이미 사라져 버린, 그러나 아직은 생생하게 잡힐 것 같은 아련함이 배어 있는 시기가 바로 그 때가 아닌가 싶다.
강용흘은 1898년에 태어나 1972년에 미국에서 사망했다. 그는 스무 살 무렵 3.1 운동 후에 혈혈단신으로 미국에 간다. 광복 후에 귀국해서 4년 정도 체류했지만 다시 미국으로 돌아간다. 생의 3분의 1만을 한국에서 보낸 그가 보여주는 한국은 우리의 과거이지만 낯설고 아름답다. 그것은 단순히 내부자의 시선으로 오래된 기억을 떠올리는 것과는 차이가 많다. 미국에서 영어로 쓴 소설을 다시 한국어로 번역해서 읽는 느낌은 미국과의 거리만큼 낯설기도 하다. 우리말 문장이 주는 점착적인 느낌은 없다. 사색적이고 차분한 서술과 객관적인 듯한 시선은 오히려 우리들 삶을 객관화시켜 주고 있다.
1931년에 발표된 이 소설은 외적인 면에서 이채롭다. 앞서 언급한대로 미국에서 영어로 발표되어 구겐하임상 등 2개의 상을 받았고 한국에 번역 소개된 작품이다. 이미륵의 <압록강은 흐른다>와 상황과 맥락이 유사하다. 세계 속의 한국인의 문학은 이제 어렵지 않게 되었지만 그 주제와 대상이 한국에 대한 혹은 동양적인 것들을 형상화 한 작품은 그리 많지 않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제는 한국적인 것을 찾으려면 서울에서도 고궁이나 박물관을 찾아야 한다. 그런 면에서 이 소설은 우리에게 특별함을 준다.
가끔 이 책, 저 책에서 제목만 듣던 책을 주변 사람의 권유로 읽게 되면 감회가 새롭다. 친숙한 친구의 이야기를 듣는 것 같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 책을 읽는 동안 즐거웠고 아득해졌고 현장감이 넘쳤고 내 것이 아닌 것들도 추억하게 되는 착각을 했다. 왜 아니겠는가? 그 파란만장한 20세기 초반의 한국사의 격동기를 온몸으로 겪어냈던 저자의 체험은 우리에게 여전히 충분한 감동을 전달한다.
마치 단편적인 기억들을 전해 주시던 어른들의 이야기를 쭉 모아놓은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구한말에서 개화기를 거쳐 일제 강점기, 3.1 운동에 이르기까지 격동의 세월을 감내해야 했던 저자는 조금 특별한 사람이었다. 일반적인 생각과 태도를 갖고 세상을 대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더더욱 극적인 긴장감을 가지고 읽게 된다. 함경도 시골 마을에서 서울을 거쳐 일본에 유학하고 다시 서울에 돌아왔다가 중국을 거쳐 러시아로 가던 도중 체포되고 모진 고문을 받다가 풀려나고 또다시 3.1 운동 당시 고문을 당하고 우여곡절 끝에 미국행 배에 오르는 과정은 한 편의 대하 라마를 연상시킨다.
어린 시절 조모와 숙부들, 사촌들과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1부는 백석의 시를 연상시킬 만한 우리 민족의 삶의 원형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어 실감나게 당시를 들여다 볼 수 있다. 문학의 힘은 생동감과 구체적 형상화의 힘에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한다. 단순한 역사적 사실의 나열을 통해 확인되지 않는 우리 선조들의 삶의 모습은 순수하고 아름답게 그려져 있다. 물론 어린 소년의 시각이지만 아련한 추억처럼 물컹거린다.
우리가 살아왔던 전통의 모습이 무조건 아름답거나 애틋하다고 볼 수는 없다. 강용흘은 유명한 시인과 박사 숙부와 함께 살았던 뼈대 있는 양반 가문의 자손이었다. 따라서 세상을 대하는 눈과 방법이 다르다. 인생의 목표는 일찌감치 박사가 되어 나라의 둘도 없는 일꾼이 되는 것이었다. 당시의 보편적인 희망과 목표였을 것이니 굳이 비난을 받을 수는 없겠으나 지독한 가난과 생존의 위협을 느낀 것은 당시의 시대 상황 때문이었지 신분적 계급 때문은 아니었다.
물론 저자의 눈을 통해 개화기 급작스런 생활의 변화와 일본 제국주의 침략으로 인한 부당한 고문과 핍박은 생생하게 그려지고 있다. 더 이상 시골에 안주하고 싶지 않았던 저자는 보다 넓은 세상에 대한 동경을 굳건한 의지와 결단 그리고 용기로 이루어낸다. 자전적 소설인 이 작품은 그래서 마치 꾸며낸 듯 파란만장하다. 미국으로 가는 배에 오르기까지 스무 살 언저리의 청년이 겪기에는 험난하고 고통스런 과정이 펼쳐진다.
이 소설은 한국문학에 대한 사전적 정의나 연구 대상과 무관하게 객관적인 시선으로 우리의 삶과 지나간 시대를 조망할 수 있는 소중한 문화적 자산이다. 잊혀진 지난날의 추억이나 아련한 두근거림을 위한 감상을 위해서가 아니라 기억할 만한 한 인간의 인생 역정을 통해 우리의 아픈 역사와 한 시대를 조망할 수 있는 소설로 읽혔다. 그래서 일본에서 태어나 4살이 되어서야 한국에 돌아온 아버지의 삶을 추억하다가 <여행할 권리>에 등장하는 김연수의 아버지도 떠올렸다. 생각은 꼬리를 물고 허망하고 쓸데없는 곳까지 나아간다. 그리고 지금은 21세기 역사의 현장을 살아가고 있다.
080612-0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