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계곡의 나우시카 1
미야자키 하야오 지음, 서현아 옮김 / 학산문화사(만화) / 2004년 10월
평점 :
절판


2002. 1. 15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전 7권, 학산문화사


말할 것도 없는, 미야자키 하야오(宮崎 駿, Hayao Miyazaki)의 1984년작
만화영화 [바람계곡의 나우시카(風の谷のナウシカ)]의 토대가 된 만화책입니다.
종이책으로 된 만화는 저작권 표시가 1983년이네요.
쓴 김에 책에 나와 있는, 이 작품의 영어 제목을 적자면
Nausicaa of the Valley of the Wind로군요.
일본어 발음도 알파벳으로 씌어 있습니다. ^^; Kaze no Tani no Nausicaa래요.

두 시간 분량으로 꽉 짜인 만화영화보다 더 엄청난 이야기를
품고, 그래서 사실은 더 암울하고 어두운 회의와 허무의 숲을
더 힘겹게 헤쳐 나가는 나우시카의 이야기,
그래서 미야자키 하야오를 아무래도 만화가라기보다
철학자로 생각하게 하는 책입니다.

우리 나라에선 학산문화사에서 2000년 11월에 나왔습니다.
2000년 12월에 1권을 사고는 책꽂이에 방치하다가
1년이 지나서 나머지 여섯 권을 선물받고
병가를 내 쉬던 중, 그것도 마지막날이 되어서야 책을 집어들었네요.

1권 끄트머리에 소개된 미야자키 하야오의 글을 옮겨 보겠습니다.

"나우시카는 그리스의 서사시 오디세우스 이야기에 등장하는 파이아키아
왕녀의 이름이다. 나는 버나드 엡슬린의 [그리스 신화소사전]에서 그녀를
처음 알고부터 완전히 매료되고 말았다. 그 후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를
소설화한 것을 읽어 봤지만, 기대와는 달리 그녀는 엡슬린의 소사전에서처럼
반짝거리지 않았다. 그래서 내게 나우시카란 어디까지나 엡슬린 문고판
3페이지에 걸쳐 묘사한 소녀 그대로이다. 엡슬린 역시 나우시카에게
특별한 호의를 갖고 있었다는 것은, 제우스나 아킬레우스 같은 유명인물도
1페이지 남짓밖에 써 주지 않은 소사전에서 그녀에게만은 3페이지나
할애하고 있다는 것으로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나우시카-발이 빠르고 공상적인, 아름다운 소녀. 구혼자나 세속적인
행복보다 악기와 노래를 사랑하고, 자연과 어울리는 것을 더욱 기뻐하는
예민한 감수성의 소유자. 바닷가에 떠내려온 오디세우스의 피투성이
모습에도 두려움 없이 그를 구하고 치료해 준 것은 바로 그녀였다.
즉흥적인 노래로 그의 마음을 달래 준 것도 그녀다. 나우시카의
양친은 그녀가 오디세우스를 사랑할까 봐 걱정하여 그를 서둘러
출항시킨다. 그를 태운 배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해안에서 바라보는
그녀는 그 후 어떤 전설에 따르면 평생 결혼하지 않고 최초의 음유시인이
되어 궁정에서 궁정으로 여행을 하며 오디세우스와 그의 모험 항해를
노래했다고 한다.

[...]

나우시카를 알게 되면서 나는 어느 일본 설화의 여주인공을 떠올렸다.
아마 옛날 이야기(今昔物語)에 나와 있었던 것 같다.
벌레를 사랑하는 아씨라 불렸던 소녀가 있었다.
어느 귀족의 딸이었던 그 소녀는 혼기가 차도록 들판을 뛰어다니고,
애벌레가 나비로 탈바꿈하는 모습에 감동하기도 해서 주위에서는
괴짜 취급을 받았다. 그 또래 소녀들처럼 눈썹을 밀지도,
이를 먹으로 물들여 장식하지도 않고 새하얀 이와 새카만 눈썹을
그냥 가지고 있어서 모습 또한 이상했다고 씌어 있다.

오늘날이라면 그 소녀는 괴짜 취급을 당하진 않을 것이다.
조금 별스런 데가 있어도 자연애호가 또는 개성적인 취미를 가진 사람으로 볼 뿐,
충분히 사회에 자리잡을 수 있다. 그러나 겐지모노가타리(原氏物語 ; 11세기 초,
무라사키 시키부가 쓴 히카루 겐지와 여성들의 이야기)나
마쿠라노소시(枕草子 ; 10세기 후반부터 11세기 초, 세이쇼나곤이 쓴
궁정 생활의 회상, 견문, 자연 등에 관한 수필집)의 시대에
벌레를 사랑하고 눈썹도 밀지 않은 귀족 처녀의 존재는 용납될 수 없는 것이었다.
나는 어린 마음에도 그 소녀의 운명이 걱정되어 견딜 수 없었다.

사회의 속박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감성 그대로 야산을 뛰어다니며
풀이나 나무, 흘러가는 구름에 마음을 움직이던 그 소녀는 그 후
어떤 삶을 살았을까... 오늘날이라면 그녀를 이해하고 사랑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겠지만, 관습과 터부로 가득한 헤이안 시대에
그녀를 기다렸을 운명은 어떤 것이었을까...

안타깝게도 나우시카와 달리, 벌레를 사랑하는 아씨에게는
만날 오디세우스도, 부를 노래도, 속박을 피해 유랑할 곳도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만약 위대한 항해자를 만났다면, 그녀는 반드시
불길한 피투성이의 남자에게서 찬란히 빛나는 무언가를
발견했을 것이다.

내 안에서 나우시카와 벌레를 사랑하는 아씨는 어느샌가
동일인물이 되어 있었다.

이번에 [애니메쥬]의 사람들에게 만화를 그려 보라는 권유를
받고 들뜬 마음에 자기 류의 나우시카를 그리고 싶다고
생각한 것이 화근이 되어, 오랜 옛날에 재능이 없어
만화를 단념할 때의 그 아픔을 다시금 곱씹게 되고 말았다.
이제는 어떻게든 이 소녀가 해방과 평화의 나날에
이르러 주기만을 바랄 뿐이다."

이 글을 보면 미야자키 역시 '구원의 여성상'을 그리는
남성 작가 중 한 사람일 뿐인 것도 같지만,
저는 미야자키의 만화영화 속에 등장하는 여성들을 보면서
이 사람은 흔한 낭만주의자들과는 격이 다르다고 느낀 적이
많습니다.

물론, 미야자키의 여주인공들은 암담한 인류에게 희망이 됩니다.
암담한 것은 무슨 재앙이 닥쳐와서가 아니라,
인류 그 자체가 암담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존재 그 자체가 암담한 인류의 일원으로 살면서
필연적으로 따르는 회의와 절망에 온 존재로 맞서는
여주인공은 슬픔을 압니다. 자신의 아픔은 없이
대중의 요구에 따라 한결같이 따뜻한 품을 내주는
박제화한 여신이 아니라, 생동하는 전사의 박력을 갖추었기에
인간의 여성이 지니는 의지 중 아름다운 부분을
실감나게 보여 줍니다.

미국 만화에서는 주인공이 여자이면 대개 그에 맞서는
악녀가 등장합니다. 미야자키의 작품에서도 여주인공의 대립항에
여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돌아볼 여지도 없는 궁지에 몰아
가차없이 파멸시켜 마땅한 미국 만화의 비현실적인 악녀와 달리
미야자키의 작품에 나오는 '나쁜 여자'는 이성과 합리를 대표합니다.
그녀가 냉정하고 때로는 '나빠' 보이는 것도 사실은 상황 파악이
빠르고 냉철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녀는 이성과 합리주의가
인류에게 할 수 있는 좋은 일을 하며, 이성으로써
인간의 이름으로 짓는 범죄를 깨닫고 그 오류를 납득합니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에서 크샤나가 그렇고,
[미래소년 코난]에서 몬스키, [원령공주]에서 에보시가 그렇습니다.

여주인공과 함께 하는 남성은 대개 공주를 구하는 기사로
등장하지요. 미야자키의 작품에서도 대개 기사, 또는 마음이 따뜻한
전사로서 남자(라기보다 소년)가 등장합니다.
그러나 다른 흔한 만화에서처럼 이 남자 없이는 여주인공 혼자
암것도 못하지도 않고, 또 다른 흔한 만화에서처럼
남자가 여주인공에게만 경도되어
깊고 너른 사고는 도통 할 줄 모르는 멍청이도 아닙니다.
미야자키는 여자와 남자 사이에(꼭 여자와 남자 사이가 아니더라도),
벗 사이, 동반자 관계란 이런 것이다 하고 보여 주는 것 같습니다.

그의 작품에 나오는 소년은 힘이 셉니다. ^^;
미래소년 코난은 두말하면 잔소리이고,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에서
아스텔, [천공의 성 라퓨타]에서 파즈도 그러하며,
[원령공주]에서 아시타카는 그 힘이 특히 강조됩니다.
미야자키는 남자가 여자보다 우월한 건 근력밖에 없다는 걸
아는 듯합니다. 그걸 아는 남자의 힘은 아름답습니다.


***

이 글을 쓸 때 "마쿠라노소시(枕草子)"라는 말을
내 손으로 쳤으면서도,
이후 그런 책이 있다는 걸 까맣게 잊어버렸다.
지금 나는 마쿠라노소시 한국어판을 만들고 있다.
작업 의뢰가 왔을 때도 "마쿠라노소시가 뭐예요?" 하고
물었다. ^^; 지금 이 글을 옮기면서 보고 깜짝 놀랐다.
이 글을 쓸 때는 마쿠라노소시를 내가 만들게
될 줄 몰랐고, 방금 전까지 마쿠라노소시 작업을 하면서도
예전 내 손끝에 이 책의 제목이 슬쩍 지나갔다는 것을
기억하지 못했다. 이것도 인연인가. - 2004. 4.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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