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쪽 (신경쇠약자)는 훌륭한 진보의 도구이기 때문에 진보를 통해서 그의 역할을 지속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바로 전통과 인습이란 멍에에 대한 반역자이기 때문에 매우 풍부한 개혁의 원천이 될 수도 있다. 그리고 문명이 가장 발달한 사회는 대표의 기능이 가장 필요하고 발달된 사회이며, 동시에 그와 같은 사회는 고도의 복합성을 지니게 되어 끊임없는 변화에 의존하고 있으므로, 신경쇠약자들은 바로 그들의 수가 가장 많은 때에 생존해야 할 최선의 이유를 가지고 있다.

신경이 예민한 사람들은 그만큼 불합리하고 모순된 일에 예민하게 반응하기 때문에 진보를 자극한다.


119쪽 우리는 용어를 잘못 사용함으로써 그 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했다고 생각할는지도 모르지만, 실은 문제를 은폐하는 데 성공했을 뿐이다.

얼렁뚱땅 말로 넘어가는 것은 문제를 은폐하는 것일 뿐... 해결은 더욱 멀어진다.


134쪽 사실상 자살이나 살인의 증가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그 사건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건을 어떻게 말하느냐 하는 것이다. 그러한 행동이 혐오되는 경우에는 그 행동에 대한 감정이 말하는 것에 침투되므로, 개인적인 경향을 고무하기보다는 오히려 제한하게 된다. 그러나 반대로, 사회가 퇴폐적일 때 사회의 불안정한 상태는 그와 같은 행동이 논의될 때마다 솔직하게 표현된 비도덕적 행동에 대한 탐닉이 자극되고, 그 행동의 비도덕성을 애매하게 만들 것이다. 그렇게 되면 자살이나 살인의 실례가 선례가 되기 때문이 아니라, 사회적인 관용과 무관심으로 인해서 그 행동에 대한 반동이 약화되기 때문에 사회는 실제로 위험해지는 것이다.

말하는 것 자체가 아니라 어떻게 말하느냐가 문제... 문제를 쉬쉬 숨기면 공개적 논의가 되지 않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해결책을 모색할 수도 없고, 그러면 문제는 더욱 심각해진다.


284쪽 실제로 그 현상이 가족의 특성에서 기인하는 것이라면, 이혼이 드문 나라에서보다 이혼이 빈번한 나라에서는 기혼여자도 역시 자살로부터의 보호를 적게 받게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도 역시 남편들과 마찬가지로 좋지 않은 가족관계의 영향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실은 그와 정반대인 것이다. 기혼여자의 자살방지계수는 남편들의 계수가 떨어짐에 따라 비례적으로 상승하고 있으며, 또한 이혼의 빈도와도 비례적으로 상승하고 있다. 결혼의 유대가 더운 빈번하게 끊어지는 사회일수록 아내들은 남편들에 비하여 더욱 자살로부터 보호를 받는 것이다.

이혼이 자유로운 사회일수록 여성의 자살률이 낮다. 그리고 결혼 생활이 남자들에게 많은 이득을 가져다주는 사회일수록 기혼 여성의 자살률이 높다. 그러니까 남자들이 결혼해서 좋아지는 만큼 여자의 상태는 나빠진다. 수치상으로 봤을 때, 적어도 19세기 유럽에서는, 결혼한 남자들은 그 아내의 뼛골을 파먹으며 산 것이여...


290-291쪽 일반적으로 여성의 성적 욕구는 정신적인 성격이 적으며, 그녀들의 정신생활은 덜 발달되어 있다. 여성들은 유기체의 욕구에 보다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으며, 그것을 인도하기보다는 그것에 따르게 되므로 유기체가 능률적인 규제력을 갖는다.

여성이 공적 사회에 진출하지 못하고, 덜 정치적이라 해서, 정신생활이 덜 발달되었다는 논리는 뭐냐?


368쪽 여성은 여성 고유의 기질로 인해서 남성보다 생명을 더 존중한다고 생각할 이유가 없다. 여성은 생존경쟁에 깊숙이 참여하지 않기 때문에 남성만큼의 기회를 갖지 못할 뿐인 것이다.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더 생명을 존중한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남성과 같은 방식으로 출세한 여성은 더욱 잔인할 수도 있다.


(391쪽) 가장 현저한 형태의 비도덕적 행동인 범죄조차도 반드시 불건전한 병적 증세만으로 볼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392쪽) 어느 정도의 범죄가 발견되지 않는 사회는 없다. 도덕이 일상적으로 침해받지 않고 살고 있는 국민도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범죄란 필연적인 것이고 존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며, 더 나아가 사회조직의 기본적인 조건이라고 논리적으로 이해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범죄는 정상적인 것이다. (중략) 필연적인 불완전성은 병이 아니다. (393쪽) 그러나 범죄는 오직 비난되고 억제될 때에만 유용하다. 범죄를 정상적인 사회학적 현상으로 취급하는 것만으로도 범죄를 면죄시킨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범죄가 반드시 있다는 것이 정상이라면 범죄가 처벌되어야 한다는 것도 정상이다.

이 책에서 읽은 가장 놀라운 생각... 다른 측면으로 연장해서 생각해볼까. 장애인이란 인간 사회에 반드시 일정 부분 존재하게 마련이다. 그렇다면 사회 구성원 중 일부로서 장애인이 있다는 것은 정상이다. 사회 구성원 중 일부가 반드시 장애인으로 존재하는 것이 정상이라면, 장애인을 치료하고 보호해야 하는 것도 정상이다.


395쪽 사회에서는 무제한의 비판정신과 자유로운 연구가 계속되는 그룹이 있어야 하고, 또한 군대처럼 옛 권위의 종교가 그대로 유지되는 그룹도 있어야 한다. 물론 정상적인 시기에는 그와 같은 특수한 초점의 영향은 어느 수준에서 제한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와 같은 감정은 특수한 상황에 관련된 것이며 일반화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록 제한되어야 한다고 하더라도, 그 존재는 매우 중요하다. 사회는 단일한 시기에서도 여러 가지의 상이한 상황을 당면할 뿐 아니라 그와 같은 전환 없이는 생존할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그 점은 더욱 분명해진다.

한 사회 속에 여러 성격을 지닌 집단이 공존해야 한다는 것, 그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은 마음에 들지만, 필요악을 설정하는 듯해서... 잘 모르겠다.


396쪽 집합적인 슬픔의 경향은 지나치지만 않다면 각기의 존재 이유들을 가지고 있다. 오직 순수한 기쁨만이 정상적인 감정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이다. 인간은 슬픔에 대하여 완전히 무감각해 가지고서는 생존할 수 없다. 인간은 여러 가지 슬픔을 포용함으로써만 견딜 수 있으며, 따라서 기쁨은 어느 정도 우울함을 내포할 수 있다. 우울증은 그것이 지나칠 때만 병적이 된다. 그러나 생활에 있어 우울이 완전히 제거되는 것도 역시 병적이다. 행복한 과장은 그 반대의 경향에 의해서 조절되어야 한다. (중략) 지나치게 명랑한 도덕성은 이완된 도덕성이다.

이의 없다! 슬픔을 모르면 행복해질 수 없다!

밑줄긋기만으론 만족하지 못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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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5-11-02 2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으면 열받지 싶네...

숨은아이 2005-11-02 2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페이퍼에서는 파란 글자만 읽으셔도 돼요. 왜냐, 제가 쓴 거니까! 음하하핫;

바람구두 2005-11-03 09: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크흐...

숨은아이 2005-11-03 1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치느라 손가락 좀 아팠어요. "고쳐졌으면 하는 것들" 페이퍼도 그렇고.... ㅠ.ㅠ
 

 

 


21쪽 아래에서 세 번째 줄, “그러므로 연구에 지나치게 몰두한 나머지 죽은 학자는 과로로 인해 자살을 했다고 해도 전혀 무리한 말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모든 사실은 냉아적인 자살이 되며, 완전하게 완료된 자살과 혼동하는 것은 방법론적으로 옳지 않다.” 냉아적인 자살이 뭘까? 혹시 ‘맹아적인 자살’인가?


23쪽 [표 1 주요 유럽 제국의 자살 건수]에서 1843년에 공통적으로 자살 건수가 급격히 늘었는데, 그 부분에 대한 설명이 없다. (이건 지금 와서 고칠 수가 없지. 에밀 뒤르켐은 이미 세상을 떠났으니.)


71쪽과 72쪽, 표에 제시된 “오스트리아 상부” “오스트리아 하부”의 수치와 본문에 해설된 수치가 뒤바뀌었다.


128쪽 각주 19번에서 파리 인근 코뮌 중 인구가 적으면서 자살률이 높은 곳들에 대해 설명했는데, 주민 수가 978명, 105명, 33명인 마을의 자살자 수를 인구 1백만 명 당 429명, 800명, 1081명으로 환산했다. 그래놓고 “자살률이 높은 지역은 도시의 수가 많기 때문이며, 도시의 자살률이 낮기 때문이 아니라 도시의 수가 적기 때문이다.”라고 한다. 이 문장에서도 중간에 빠진 말이 있는 것 같은데, 어쨌거나 사회학 방법론에 대해 잘 모르긴 하지만, 인구가 적은 마을에서는 단 한 명만 자살하더라도 자살률이 높게 나올 수밖에 없지 않나? 결론에는 동의하지만 결론에 이르는 설명에는 갸우뚱...


129쪽 다섯째 줄에 나오는 “투린”은 토리노의 영어식 이름.


165쪽 넷째 줄과 다섯째 줄. “성격상 근본적으로 전통주의자들인 여자들은 고정된 신념에 의해서 행동하고 지적인 필요를 크게 느끼지 않는다.” 흠, 사회적인 요인을 찾는다면서 여성에 대해서는 ‘성격상 근본주의자’라고 한다. 에밀 뒤르켐이 말하는 ‘사회’에 ‘사적인 사회’는 포함되지 않는다.


176쪽 아홉 째줄. “1871~75년 사이의 올덴부르크의 통계간행물은 자살의 분포를 결 상태의 각 범주에 따라...”라고 했는데, ‘결 상태’란 ‘결혼 상태’를 말하는 것 같다.


187쪽 첫째와 둘째 줄. “이와 같이 자살방지계수는 가정생활이 길어짐에 따라서 증가한다.”에서 ‘증가한다’가 아니라 ‘증감한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노년층에 접어들면 자살방지계수가 줄어들므로.


191쪽 두 번째 문단 첫째 줄에서 “자녀가 있는 홀로 된 남자가 자녀가 없는 홀로 된 남자보다 자살의 경향에 불리한 이유는 자녀들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이는 자녀가 있는 홀아비가 자녀가 없는 홀아비보다 덜 자살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에 대해 옮긴이는 “뒤르켐의 뜻은 자녀가 없는 홀아비들이 자녀가 없는 남편에 대한 비율보다 자녀가 있는 홀아비들이 자녀가 있는 남편에 대해 더욱 불리하다는 뜻으로 보인다.”고 역주를 달아놓았다. 역주가 더 헷갈린다. -.- 원문에서도, 자녀가 있는 남편의 자살률이 가장 낮고, 자녀가 있는 홀아비의 자살률이 그 다음, 자녀가 없는 남편이 그 다음, 그리고 자녀가 없는 홀아비가 가장 많이 자살한다고 주장했는데 무슨 엉뚱한 소리.


191쪽 마지막 문단에서는 “자녀가 없는 부인은 1백만 명 가운데 221명의 비율로 자살을 일으키는데”라고 해놓고, 바로 다음 쪽인 192쪽 두 번째 문단에서 “자녀가 없는 기혼여자는 1백만 명당 79명의 자살률을 가지고 있는데”라고 했다. 어느 쪽이 옳은가?


198쪽 두 번째 문단 끝에 올덴부르크에서는 “과부도 마찬가지로 기혼여자보다 더 높은 면역성을 보였다.”고 했는데, 178쪽에 나오는 표에 따르면 올덴부르크의 과부들은 기혼여자보다 더 많이 자살한다. 번역의 오류로 보인다.


201쪽의 수식 중에서,


지방에서의 홀로된 남편의 계수

------------------------

지방에서의 홀로된 남자의 계수


는 이렇게 바꿔야 한다.


지방에서의 남편(기혼남자)의 계수

------------------------

지방에서의 홀로된 남자(홀아비)의 계수


그리고 


지방에서의 홀로된 아내의 계수

------------------------

지방에서의 과부의 계수


도 마찬가지로,


지방에서의 아내(기혼여자)의 계수

------------------------

지방에서의 과부의 계수


로 바꿔야 한다.


212쪽 두 번째 문단 다섯째 줄, “이탈리아의 경우 여자의 자살률...”은 “이탈리아의 경우 여자의 자살률...”이라고 해야 한다.


232쪽 세 번째 문단의 둘째 셋째 줄, “티투스 리비”는 “티투스 리비우스”라고 하는 편이 좋다.


244쪽 마지막 문장 “우리가 프랑스와 영국의 경우에서 본 것과 같은 방식에 따라 복무기간의 증가에 따른 증가와는 전혀 다른 원인에 의한 자살 경향의 촉진이 있는 것 같다.”는 “우리가 프랑스와 영국의 경우에서 본 것과 같은 방식에 따라 복무기간의 증가에 따라 전혀 다른 원인에 의한 자살 경향의 촉진이 있는 것 같다.”로 해야.


245쪽 네 번째 문단 둘째 줄, “따라서 자원자들과 입대자들은...”은 “따라서 자원자들과 입대자들은...”이라고 해야.


258쪽 세 번째 문단의 둘째 줄 “1880년에서 1870년 사이에는 자살률이 대체로 안정되어 있었으나 1871년에서 1877년 사이...”는, 문맥으로 보아 “1860년에서 1870년 사이에는 자살률이 대체로 안정되어 있었으나 1871년에서 1877년 사이...”로 바꿔야 하지 않을까?


277쪽 둘째 줄과 표 제목에서 “이혼”이라 해야 할 말을 “이론”이라고 썼다.


278쪽 둘째 문단 마지막 줄에서 “혼합된 현들 가운데에서는 아르가우를 제외하고서는 이혼과 자살의 순서가 정확하게 일치하고 있다.”고 했는데, 앞면의 표에 따르면 예외인 현으로 ‘아르가우’말고도 ‘생갈’이 더 있다.


324쪽 두 번째 문단 아래에서 세 번째 줄, “자살은 평균인에게는 선 것으로...”는 “자살은 평균인에게는 선 것으로...”라고 해야.


360쪽 두 번째 문단 셋째 줄에서 시작한 문장 “본질적으로, 그리고 추상적으로, 인격으로 인간의 존엄성을 설명하는 종교적 상징의 실체와는 거리가 멀며 이것은 쉽게 증명될 수 있다.”는 “본질적으로, 그리고 추상적으로, 인격으로 인간의 존엄성을 설명하는 것은 종교적 상징의 실체와는 거리가 멀며 이것은 쉽게 증명될 수 있다.”가 맞는 것 같다.


366쪽 세 번째 문단 마지막 문장, “그들은 자살과 살인은 경우에 따라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게 되지만, 두 가지가 동시에 일어날 수 없는 동일한 조건의 두 가지 표현, 즉 동일한 원인의 두 가지 결과로 보인다.”는 “그들은 자살과 살인은 경우에 따라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게 되지만, 두 가지가 동시에 일어날 수 없는 동일한 조건의 두 가지 표현, 즉 동일한 원인의 두 가지 결과로 보았다.”로 바꿔야.


368쪽 마지막 문장, “여성은 생존경쟁에 깊숙히 참여하지 않기 때문에 남성만큼의 기회를 갖지 못할 뿐인 것이다.”에서 “깊숙히”는 “깊숙이”로 고쳐야.


371쪽 본문과 표의 설명이 뒤죽박죽이다. 본문 첫줄의 “비계획적 살인”은 표에 따르면 “계획적 살인”, 둘째 줄의 “계획적 살인”은 역시 표에 따르면 “비계획적 살인”이 되어야 한다. 셋째 줄에 “영아살해의 최빈치는 5월에 있으며”라고 했는데 표에 따르면 3월이다. 두 번째 문단 둘째 줄, 넷째 줄의 “계획적 살인”도 표에 따르면 “비계획적 살인”이라 해야 옳고, 넷째 줄의 “계획적 살인”은 “비계획적 살인”이라 해야 옳다.


404쪽 열한 번째 줄, “교육은 스스로를 수정할 수 없으므로 사람들 따라서 병든다.”를 “교육은 스스로를 수정할 수 없으므로 사람들 따라서 병든다.”로 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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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2005-11-02 2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님이 새로 번역할 때까지 안 사고 버텨야 하는 걸까요? 끄응.
그나저나 바람구두님 뒤를 이어 참 열심히 부추기시네요. ^^;;

숨은아이 2005-11-03 0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헉, 설마;;;;; 이걸 참고 삼아 그냥 읽으소서. ^^

릴케 현상 2005-11-03 17: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로의식^^

숨은아이 2005-11-04 1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쎄요, 그냥 리포트 쓰는 기분으로 정리했어요. -.-
 
자살론
에밀 뒤르켐 지음 / 청아출판사 / 1994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자살을 이해하려면 철학적이거나 심리학적인 설명이 필요할 것이다. 그래서, “자살에 대한 사회학적 연구의 고전”이라고 표지에 떡 쓰여 있는데도, 난 막연히 철학적이거나 심리학적인 설명을 기대했나 보다. 그러나 “사회학적 연구의 고전”답게, 이 책은 자살이란 ‘개인적인 행동’에 그치지 않고 ‘사회적인 현상’이며, 따라서 자살률이 높아지는 것은 사회적 병리 현상이고, 이에 대한 치유책도 사회 조직에 있음을 밝히는 데 주력한다. (자살에 대해 철학적으로 심리학적으로 탐구할 필요도 반드시 있을 것이다. 그것은 다른 책을 찾아봐야겠다.)

영문판을 대본으로 삼아 중역하면서도 종종 불어 원서를 참조한 듯 보이는 영문학자의 번역이 나쁘지 않지만, 기본적으로 연구 논문으로 쓰인 책이기에 수많은 표와 수치 해설로 점철된 1부와 2부는 잠 안 올 때 읽기 딱 좋았다. 대체로 지은이의 주장에 동감하긴 하지만, 그리고 지은이의 냉철한 논리에 허를 찔리는 느낌도 들었지만, 가끔은 표를 해석하는 방식이 자의적이란 느낌이 들고, 표의 수치와 본문의 수치가 어긋나기도 해서 의심스러운 부분도 있었다.

지은이는 서문에서 사회학 연구 대상이 객관적인 실체여야 하는 이유를 밝힌 뒤, 1부에서는 자살이 개인적 충동이 아니라(개인적 충동이 결정적 계기가 되기는 하겠으나) 바로 ‘객관적인 실체’로서 사회학 연구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는 걸 증명하고자 한다. 흔히 사람을 자살로 몰아가는 것은 어떤 정신적인 병증 때문이라고 생각하는데(미쳐서 자살해버렸다는 식으로), 그러나 자살은 정신병의 필연적인 귀결이 아니라 우연한 결과다. 정신 이상 상태에서 자살을 시도할 가능성은 있으나 모든 자살자가 정신이상자는 아니며, 어떤 사람이 술 취한 상태에서 자살할 가능성도 있으나 그가 술에 취했기 때문에 자살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정신적 흥분 상태는 자살을 행동으로 옮기게 하는 계기는 될 수 있으나 그 원인은 따로 있다.

2부에서는 모든 자살이 동일한 현상이 아니며 개인주의가 극대화한 데서 기인한 자살(삶의 이유를 찾지 못해서 죽는다), 집단에 대한 결속감이 지나친 데서 기인한 자살(공동체 차원의 높은 가치를 위해서 죽는다), 사회적 가치관 혼란에 따른 상실감에 기인한 자살로 나누어 볼 수 있음을 증명하고자 했다. 우리 사회에서 보자면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스스로 분신을 택했던 분들,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노동운동가의 자살이 두 번째 유형에 속한다 하겠다. 그리고 몇 년 전 기업을 경영하던 이들이나 고위 관료였던 이들이 잇따라 자살했던 현상은 세 번째 유형에 속하겠지? (잠시 애도.) 물론 이것은 자살의 동기가 아니라, 자살 경향을 낳는 사회의 흐름이다. 그러한 자살 경향을 실행에 옮기는 이는 소수이며, 그 동기는 본인만이 아는 것이다.

비로소 3부에 이르러서 책이 재미있어진다. 2부에서 주장한 원인들이 어떻게 해서 자살로 이어지는지, 그리고 그 해법은 무엇인지 썼는데, 우선 표가 없어서 살 것 같았다. 혁명기에는 자살률이 급격하게 떨어진다고 한다. 사람들이 공동체 차원의 높은 가치를 두고 열정에 휩싸이면 자살은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공동체 차원의 가치를 구현할 만하다고 제시한 것이 “회사”라는 ‘직업공동체’라니, 이 책이 19세기 말에 발표되었다는 점이 실감난다. 만약 에밀 뒤르켐이 요즘에 살아서 이 책을 썼다면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을 텐데. 그리고 원시생활을 하는 사회를 “야만 사회” “미개 사회”로 본다거나 여성이 사회적으로 미개한 상태라서 자살률이 낮다고 한 데에서도 역시 19세기 서구 남성 지식인의 시각이 드러난다.

그렇다면 21세기에 공동체의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공간은, 조직은 무엇일까. 인간이 자기 자신을 기쁘게 긍정할 수 있도록 가치를 부여할 만한 곳은.


덧붙임 1. 국립국어원이 정리한 인명 표기안에 따르면 지은이의 이름은 “에밀 뒤르켕”이라고 쓰는 것이 옳다.

덧붙임 2. 가끔 문장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장애가 될 만한 오탈자가 눈에 띄는데, 나는 1997년에 찍은 3쇄본을 갖고 있기 때문에 요즘 유통되는 책에서는 이 부분이 고쳐졌나 서점에 확인하러 갔다. 그런데 올해까지 여러 번 쇄를 거듭해서 찍었는데도 잘못된 부분들이 그대로였다! 책이 나온 지 10년이 넘도록 오탈자를 고치지 않다니. --+

덧붙임 3. 1997년 5월 22일 장백서원에서 산 뒤 고이 꽂아만 두었던 이 책을 꺼내도록 자극해주신 바람구두님, 고맙습니다.

자살론 | 원제 Le Suicide(1897)
에밀 뒤르켐 Emile Durkheim (지은이) | 청아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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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케 현상 2005-11-02 2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밀 뒤르크하임이라고도 하더군요 이름을 불어식으로도 읽고 독어식으로 읽기도 하는 이유가 있다고 하던데...기억이 안 나네요^^

조선인 2005-11-02 2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난, 잘못 배워서 큰일이에요. 뒤르껭이 입에 딱 달라붙어 있어요.

릴케 현상 2005-11-02 2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발음할 때는 뒤르껭이 맞잖나요^^ 표기법의 문제죠.
참 언젠가 변정수씨 글을 보니 한국의 식자들이 곧잘 주장하는 '원어 발음 대로'라는 게 그야말로 한국식 사고라고 하더군요. 말하자면 한국인들은 '뒤르껭'이라고 소리가 나니까 그렇게 써야 한다고 하면서 외래어표기법에 이의를 제기하는데 실제로 프랑스 사람들 입장에서는 '뒤르껭'과 '뒤르켕'의 소리를 구분하지 못한다고 하더군요. 제 기억이 정확한지 몰겠지만=3=3=3

숨은아이 2005-11-03 0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산책님/뒤르크하임이라고도 한다고요? 아마 그가 로렌 지방 태생이라 그런 모양이네요. 알사스와 로렌, 독일이랑 프랑스랑 서로 뺏고 빼앗겼던 지방이고, 독일 계통 주민이 많이 사는 동네라면서요.
조선인님/그냥 뒤르껭이라고 해도 되지 않을까요? "카뮈"라고 하는 것보다 "까뮈"라 하는 쪽이 더 발음하긴 편하잖아요. 외국어 이름은 표기랑 발음을 통일하기 어려워요. -.-
다시 산책님/맞아요, 표기법의 문제죠. 근데 프랑스 사람들이 뒤르껭과 뒤르켕을 구별하지 못한다고요? 흐음, 프랑스어의 발음 체계가 가장 정교하다고 들은 것 같은데... 아무튼, 외래어 표기법이란 한국 사람들끼리 표기의 편의를 위해 정한 거지만, 왜 경음 표기를 피하도록 정했는지 모르겠어요.

조선인 2005-11-03 1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국어연구원에서는 경음을 싫어하는 경향이 있더라구요.
원래 우리 말에 경음이 이렇게 많지 않은데, 전쟁을 겪으며 사람들이 퍽퍽해진 탓이라나. 문제는 경음강화가 시작된 전쟁이 임진왜란부터라고 하니, 과연 6.25탓이라고만 할 수 있을까 싶어요.

숨은아이 2005-11-03 1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선인님/경음이 좀 속되게 느껴지나? 그런 경우도 있지만...
 
자살론
에밀 뒤르켐 지음 / 청아출판사 / 1994년 1월
구판절판


교육은 사회의 표상이며 반영일 뿐이다. 교육은 사회를 간추린 형태로 모방하고 재생하는 것이지 사회를 창조하는 것은 아니다. 교육은 사람들 자신이 건강할 때에만 건강할 수 있다. 교육은 스스로를 수정할 수 없으므로 사람들을 따라서 병든다. 도덕적 환경이 병들어 있을 때에는 교사들 자신이 그와 같은 환경 속에 살며 그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으므로, 그들은 학생들을 자신이 받은 영향과 다른 방향으로 교육시킬 수가 없게 된다. 새로운 세대는 언제나 그 전 세대에 의해서 양육된다. 따라서 후계자가 향상되기 위해서는 선행자가 향상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이 관계는 순환적이다. 이따금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난 관념과 열망을 가진 개인이 나타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독립된 개인들은 사람들의 도덕적 특질을 개조할 수 없다. -404쪽 쪽

물론 우리는 하나의 웅변으로 사회가 기적적으로 전환될 수 있으리라고 믿고 싶어한다. 그러나 (중략) 어떤 이해할 수 없는 기적에 의해서 사회체계와 반대되는 교육제도가 형성된다고 하더라도, 그와 같은 상반성으로써는 아무런 효과도 얻지 못한다. 도덕적인 상태가 근거하는 집합적 조직이 온전하다면, 어린아이들은 집합체와의 접촉의 순간부터 그 영향을 느끼게 된다. 그에 비해서 학교와 인위적인 환경은 아이들을 일시적으로 아주 약한 힘으로만 보호할 수 있을 뿐이다. (중략) 그러므로 교육은 사회 자체가 개혁됨으로써만 개혁될 수 있다. -404-405쪽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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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은아이 2005-11-02 19: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 내 아이가 더 나은 사회에 살기 원한다면, 부모가 먼저 더 나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부모 혼자만 바뀌면 소용이 없고, 사회가 같이 바뀌도록 애써야 한다.

글샘 2005-11-02 2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서 교육은 교사의 질을 뛰어 넘을 수 없다고도 하지요. 자녀 교육은 부모의 질을 뛰어 넘을 수 없듯이 말입니다.
저 개혁이란 말이 왜 자꾸만 멀어지는지 몰라도, 진보쪽에 발을 디디고 서 있을 수밖에 없겠지요.
오늘도 교육인적자원부는 지난 번에 약속한 것을 파기하고, 교사를 평가해 보겠다고 난리 법석이네요. 정말 병든 사회에서 건강하지 못한 교육 현장에 서 있는 것은 곤혹스런 일임을 새삼 깨닫는 나날입니다.

숨은아이 2005-11-03 0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으, 선생님들 힘드시겠어요.
 

만화 [우리 집으로 와요]를 보고 슬퍼져서, 도저히 몇 쪽 안 남은 [자살론]을 읽을 기분이 안 나 집어든 책이다. 찰리 챈 시리즈의 전작인 [열쇠 없는 집]과 [중국 앵무새]를 읽은 지 워낙 오래되어서, 등장인물들이 말하는 “챈 경감의 활약상”이 기억나지 않았다. [중국 앵무새]를 꽤 재미있게 본 기억이 나는데, 그 내용은 전혀 깜깜하게 잊은 터라(-.-) [커튼 뒤...]가 [중국...]보다 나은지 어떤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여주인공은 [중국...] 쪽이 훨씬 더 멋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남성 조연의 유머는 [커튼 뒤...] 쪽이 더 재미있다.

그런데 20세기 초에 쓴 책이라서 그런지, 읽다 보니 오늘날이라면 생각도 못할 인권 침해를 주인공들이 버젓이 저지르는 게 눈에 걸렸다. 이 소설에서는 남편에게서 도망쳤으리라고 생각되는 여성의 신분을 확인하고자, 그 남편과 그 여성을 대면시키려고 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 여성이 무슨 이유로 도망쳤는지도 모르면서, 오로지 실종 여성의 신분을 확인하려는 생각 때문에 그렇게 한다. (물론 이 소설에서는 그렇게 설정되진 않았지만) 만약 이 여성이 남편의 폭력을 피해 도망쳤다면, 그 남편의 눈에 이 여성을 데려다놓는 건 매우 위험한 상황이 될 수도 있다. 왜 수사진은 그 여성에게 직접 협조를 요청하지 않고, 무작정 남편 앞에 끌어다놓으려고만 할까?

찰리 챈, 커튼 뒤의 비밀(1928) - 세계추리베스트 19
얼 데어 비거스 (지은이), 김문유 (옮긴이) | 국일미디어(국일출판사) 
 
정   가 : 6,900원
출간일 : 2003-12-25 | ISBN : 8974254255
반양장본 | 550쪽 | 196*130m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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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5-11-02 15: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출판사 그 뒤에 책 낼 생각을 안 하니 ㅠ.ㅠ;;;

숨은아이 2005-11-02 15: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찰리 챈 시리즈는 다 내주면 좋겠는데 말이죠...

숨은아이 2005-11-02 16: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월요일에 일 끝나서 백수 상태여요. 그동안 쓰려고 작정했던 거 몰아서 쓰고 있어요~ ^^

아영엄마 2005-11-02 16: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탐정 시리즈를 언제고 한 번 볼 생각입니다. ^^

숨은아이 2005-11-02 17: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따우님/고마워요. 며칠간 실컷 논 뒤에 다시 일해얄 텐데...
아영엄마님/오, 아영엄마님보다 제가 먼저 읽은 추리소설도 있군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