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그라데이션"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말로 바림이라 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
gradation(영어 발음에 맞게 쓰자면 그레이데이션인데)은
그림이나 사진 따위의 색조를 한쪽은 진하게, 그 옆으로 갈수록 점점 옅게 하는 기법인데,
출판 디자인 분야에서도 자주 쓰이는 용어다.
일하다가 그라데이션이라는 말에 익숙해졌는데,
그런 기법은 전통 수묵화나 염색에도 널리 쓰이기 때문에
당연히 그것을 표현하는 우리말이 이미 있었음을 알고는
별 생각 없이 관용적인 표현을 받아들인 나 자신에 대해 충격을 받았다.
하긴 그뿐인가. 도비라, 하시라, 하리꼬미, 오시 등 이른바 출판 관계 "전문 용어"들이
다 그렇다. 그 말들은 이미 속표지, 기둥, 터잡기, 금긋기로 바꿔 쓸 수 있건만
(다만 하시라를 기둥이라고 바꿔 쓰는 건 곤란하다. 국립국어원에서
하시라를 기둥이라 순화했는데, 그게 건축에서도 쓰이는 말인 모양이다.
하지만 출판에서 하시라란 책의 쪽수를 매긴 숫자 부분
  흔히 그 숫자 옆에
책제목이나 장제목 따위를 나란히 인쇄한다  을 말하는데,
"기둥"이란 말을 듣고 누가 그것인 줄 알까. 차라리 "쪽수란" 정도로 바꾸는 게 어떨지.)
일할 때 입에 붙은 대로 쉽게 도비라니 하시라니 하고 말해버린다.
이른바 "전문 용어"가 쉽사리 고쳐지지 않는 건,
그 말을 알고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사람이 그렇지 못한 사람에 대해
차별의식을 품고 있기 때문 아닐까.
처음 들으면 무슨 말인지 모를 말을 자유자재로 구사한다는 우월감 같은 거.
참나, 얼마나 자랑할 게 없으면 그런 걸로 우월감을 느끼나.

아무튼 "바림"이란 말은, 참 오묘하다. 그냥 들어도 대충 감이 오는 말 아닌가.
색을 점점 엷게 하는 것을 바림이라 하고,
"그림을 그리는 바탕에 물기를 먹여 눅눅하게 한 다음 색을 칠해
짙은 색으로부터 점점 연하게 퍼지
"도록 하는 방법은 피우기라고 한단다.
연기가 피어오르듯 색이 점점 번져가는 것이다.

[좋은 문장을 쓰기 위한 우리말 풀이사전]을 보고 쓴다.


댓글(18)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숨은아이 2005-11-29 1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주 내내 침묵 모드여야 하는데;;

2005-11-29 11: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숨은아이 2005-11-29 1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 님/별일은 아니고요, 질질 끄는 일이 있어서, 서재에는 얼씬도 않고 일해야 한다는 뜻이어요. ^^;

물만두 2005-11-29 1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프다며~ 일하고 감기 나으셈~ 용어는 법률용어가 제일 시급하지 싶네 ㅠ.ㅠ;;;

마늘빵 2005-11-29 1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람피우기로 잘못봤다는... 죄송. ㅡㅡa

숨은아이 2005-11-29 1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만두 언니/이제 거의 다 나았어요. 고마워요. 법률용어도 많이 바꿔놓았다네요. 잘 안 써서 그렇지... -_-
아프락사스님/글 올리고 나서 저도 그 생각 했어요. ㅎㅎ

글샘 2005-11-29 1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비라 같은 건, 속표지로 쉽게 바꿀 수 있는 말인데도... 뭔가 전문가 의식이 발동하는 모양입니다.(도비라는 원래 장지문이란 일본어인데 ㅋㅋㅋ)
하시라 같은 것은 사실 좀 그렇죠.(책기둥이라 하기도 그렇고, 쪽기둥도 좀 그렇고... 일본책처럼 세로쓰기로 된 책에선 하시라가 맞는데, 우리 책에선 하시라가 아니고 대들보처럼 쓰이거든요. 가로로... 쉽지 않은 일입니다. 우리말 살리기도...)

호랑녀 2005-11-29 1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글샘님... 그래서 하시라 라고 하는구나. 그게 왜 기둥 이라는 말의 하시라일지 궁금했어요.
바림... 피우기... 그런 뜻이로군요. 알겠습니다 ^^

어룸 2005-11-29 1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핫!!! 저만 잘못읽은게 아녔군요!! 아프락사스님, 부비부비~~>ㅂ<
암튼 앞으로는 '바림'이라고 꼬옥 써야겠어요!! 음!!

라주미힌 2005-11-29 1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 마음에서 나오는 거라 생각되요..
바람 피우기... ㅎㅎ.

줄리 2005-11-29 14: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좋은 말들 배우고 가요. 바림, 피우기 말예요.
근데 사실 저두 바람피우기? 이러면서 페이퍼 눌렀어요. 아는대로만 보인다잖아요.
그런데 바람피우기 란 말도 생각해보니 참 그럴듯한 말 같아요.

숨은아이 2005-11-29 14: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샘님/아, 그렇군요. 도비라는 장지문, 하시라는 기둥... 다 건축 요소에서 따온 말이네요. 그러니까 장지문을 열면 기둥이 보이겠군요. ^^
호랑녀님/글샘님 덕분에 저도 알았습니다. 근데 요즘은 쪽수 보이는 위치가 다양해서 위아래 가로로만 놓지 않고 양 가장자리 중간에 놓기도 하고, 심지어는 책을 묶는 안쪽에 놓기도 하더군요. 디자이너를이 자꾸 새로운 시도를 하는데, 사실 안쪽에 놓는 건 안 좋아요. 책을 넘기며 쪽수를 확인해야 하는데 안쪽에 숨어 있으니 원...
투풀님/ㅎㅎ 바림이란 말은 꼭 써주시기야요!
라주미힌님/흠, 그럼 라주미힌님은 어케 읽으셨을까? ㅎㅎ
줄리님/오, 줄리님 오랜만에 오셨네요! 폴짝폴짝.

숨은아이 2005-11-29 14: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시 줄리님/그것도 그렇네요. 왜 하필 "바람'을 "피운다"고 했을까? 바깥 바람의 냄새를 솔솔 피운다는 뜻일까? 뭔가 내력이 있을 텐데, 그죠?

깍두기 2005-11-29 14: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림, 너무 맘에 드는 말이네요.
피우기도.
우리말은 아름다워.

panda78 2005-11-29 18: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림이라... 정말 이쁩니다. ^^ 그라데이션은 꽤 많이 쓰는 말인데, 이렇게 이쁜 우리말이 있었다니.

숨은아이 2005-11-29 2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깍두기님/깍두기님은 더 아름다워요.
판다님/그러게요 그러게요.
따우님/글쿤요. ´_`"의사소통"을 중요시 여긴다면 그렇지 않을 텐데... 근데 "전문 용어"의 경우는, 한번 배운 말을 (같이 일할 사람들끼리는 다 통하는데) 굳이 고쳐서 말하려면 줄곧 신경 써서 노력해야 하기 때문에 어려운 일이기도 하지요.

superfrog 2005-11-30 1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라데이션도 있잖아요. 보카시..ㅎㅎ
그래도 '대지바리'하던 시절보다는 일본어에서 온 용어들이 많이 줄긴 줄었어요.

숨은아이 2005-11-30 1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금붕어님/아, 보카시가 그라데이션이었나요? ^^ 매킨토시를 이용하는 디자이너에게 편집 작업의 일부가 넘어가면서 일본 용어가 줄고 영어 표현이 늘었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