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루탐산소다라고도 하며, 일반적으로 글루탐산나트륨이라고 부른다.
L-글루탐산의 결정을 물로 씻고 알칼리로 중화시켜 활성탄(活性炭)으로
탈색한 후에 감압하에서 농축하여 만든다.
무색의 침상결정이다.
글루탐산모노나트륨 자체는 아무런 맛이 없으나, 음식이 가진 원래의
맛을 좋게 한다.
물에 잘 용해되며 에틸알코올에는 잘 녹지 않는다. 이노신산과 혼합하여
맛의 상승효과를 높인 것을 이용하여 복합 화학조미료로 많이 사용된다.
중국에서는 웨이징[味精], 일본에서는 아지노모토[味元], 한국에서는
미원이라는 상품명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글루탐산은 어떻게 만들까요?

글루탐산은 α-아미노글루타르산이라고도 한다. 단백질의 구성 아미노산으로서
가장 널리 존재한다. 특히 밀의 글리아딘 속에는 40% 이상 들어 있다.
1908년 이케다 기쿠나에[池田菊苗]는 미역의 맛성분이 L-글루탐산임을 발견하였다.

콩·밀 등의 가수분해 또는 미생물을 이용하는 발효법에 의해 합성되어 왔으나,
지금은 석유화학 공업에서 다량으로 공급되는 아크릴로니트릴을 원료로 하여 합성한다

 

<미원의 마케팅 사례>

  

국산 발효조미료 1호 ‘미원’


보통명사 ‘미원’

초기 히트상품이 롱런하기 위해 요구되는 필수사항은 시장 선점이라고 할 수 있다. 공산품이 흔치 않던 시기에 각 부문에서 시장을 선점한 제품들은 그 브랜드명 자체가 해당 품목의 대명사가 된 경우가 많다. 국내 제품 중 고유명사가 보통명사의 의미로 널리 쓰이고 있는 대표적인 것이 조미료 ‘미원’이다. 미원은 조미료의 이름을 대신하고 있을 만큼 명성을 떨쳤다. 미원이 반세기 가까운 시간동안 꾸준한 사랑을 받으며 식탁위를 지켜왔기 때문이다. 조미료 미원은 현재 MSG(화학조미료)시장의 70%를 점유할 정도로 지금도 소비자들로부터 변함없는 사랑을 받고 있다. 이외에도 순수한 우리의 기술과 자본으로 만들어진 대표적인 제품으로 평가받고 있다는 점 또한 조미료의 대명사로 명명되는 이유로 작용했다. 이로써 어느 때부터인가 미원은 한국인의 입맛에 없어서는 안되는 필수품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미원 신화 탄생

우리 민족의 아픔인 6.25전쟁이 끝나고 복구산업이 시작될 무렵 외국의 새로운 상품들이 물 밀 듯이 몰려 들어왔다. 특히 창업자인 임대홍 회장은 일본상품들이 한국시장에 쏟아져 들어오는데 심한 민족적 반감을 느꼈다. 그 중에서도 일제 조미료‘아지노모도’는 경쟁상대 없이 우리나라에서 판을 치고 있었다. 또 가격이 비싸 일반인들은 엄두도 못내는 고가품이었다. 이를 보다 못한 그는 조미료를 직접 만들기로 작정하고 1955년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곳에서 1년여의 온갖 노력 끝에 조미료 제조공정을 익히고 부산으로 돌아왔다. 부산에 돌아오자마자 그는 1956년 1월, 1백50평 규모의 조그만 조미료 공장을 세웠다. 이것이 바로 우리나라 최초의 조미료 공장인 동아화성공업주식회사(미원의 전신)다. 그러던 중 (주)미원이 1963년 발효공법으로 대량생산 체제에 돌입하면서 저렴한 가격으로 공급하여 ‘맛의 혁명’ 이라고 일컬을 정도로 일반주부들 사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게 되었다. 이후 미원은 해를 거듭할수록 하나씩 기업형태를 갖추며 비약적으로 발전해 나갔다. 그리고 1970년대 초반에는 인도네시아에 진출, 주력사인 ‘미원인도네시아’를 비롯 6개 계열사를 거느린 ‘제2의 미원그룹’으로 탄탄하게 성장시켰다. 이어 베트남과 중국 등지에 진출했다. 미국과 유럽 등지에도 제품을 수출, 호평을 받았다.


조미료 전쟁이야기

미원이 식탁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자 60년대 초부터 조미료 생산업체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 격심한 경쟁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지난 94년 말 럭키(현 LG생활 건강)에서 ‘맛그린’이란 브랜드로 쇠고기·멸치·해물 등 3종류의 종합조미료를 출시했다. 이 당시 럭키는 MSG의 유해성 논란을 MSG무첨가를 외치며 시장에 진출하였으나 2년만에 시장에서 철수할 수 밖에 없었다. 그 실패의 원인은 ‘맛그린’의 가장 큰 특징이라던 MSG의 무첨가였다. 조미료라 하면 기호품이므로 그러기에 본인의 기호에 맞도록 첨가하는 것이며 음식의 맛을 상승시켜주는 역할을 해야 하는데 ‘맛그린’의 경우 MSG를 빼다보니 그 맛이 나지 않게 되자 소비자의 외면을 당할 수 밖에 없었다. 또한, 60년대 재계에서 미원과 미풍의 경쟁을 재계 백년전쟁이라고 비유할 만큼 양사의 경쟁은 치열했다. 1위 다툼이 뜨겁던 69년 3월 미풍 측이 일본의 이노신산 소다를 수입하겠다고 발표 후 광고 싸움을 벌이다 결국은 법정에 서게 된 것. 미원 측은 이 품목의 수입이 외화를 낭비하고 국내기술 개발을 저해한다고 주장한 반면 미풍은 새로운 조미료 개발을 위한 필수적인 조치라고 하여 양사는 계속되는 성명서와 신문광고를 내는 등 맞불작전을 펼친 것. 이어 법정싸움까지 번져 결국 3년 지난 미원의 승리로 끝났으나 보이지 않는 경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조미료시장을 둘러싼 미원과 삼성의 싸움은 삼성의 故 이병철 회장이 생전에 꼭 이루고 싶은 소원 중 하나로 미원에 대한 제압을 꼽았을 정도로 미원과의 경쟁에 대단한 집착을 보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청정원’ 브랜드의 성공

미원이 청정원이라는 상표를 도입한 것은 조미료 이미지가 너무 강한 ‘미원’이라는 기존 상표로는 한계가 있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미원측은 이와 관련, “인공조미료가 몸에 좋지 않다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미원제품 전반의 판매가 부진했었다”면서 “소비자들은 미원에서 만드는 캔커피까지도 미원을 넣는 것으로 착각할 정도였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미원이 `‘청정원’이라는 새로운 브랜드를 도입해 큰 성공을 거두었다. (주)미원은`‘청정원’이라는 새로운 브랜드를 도입, 간장, 고추장 등 장류 제품에 이어 식초, 카레, 소금 등으로 상표 사용을 확대해 나가고 있다. ‘임금님표 순창고추장’을 `‘청정원 순창고추장’으로 이름을 바꾼 결과, 지난해 5백억원이었던 이 제품의 매출이 올해는 10월 초 현재 작년 수준을 돌파했고 연말까지는 작년보다 60% 증가한 8백억원이 예상되고 있다. ‘청정원’의 브랜드 개념은 정직과 신뢰를 바탕으로 ‘본연의 맛(本品)’과 ‘참다운 제품(眞品)’으로 구성된 식품 패밀리 브랜드. 특히 심혈을 기울인 ‘청정원’의 브랜드 심벌은 찬란한 햇살, 아름다운 산, 깨끗한 물, 푸른 녹음이 어우러진 자연의 이미지를 통해, 깨끗하고 다채로우며 싱그러운 자연의 맛을 정성으로 담아내었다는 의미를 표현하였다.


변함없는 사랑을 위해

무조건 한 제품만을 고집한다고 해서 장수상품이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다. 브랜드는 같은 이름을 사용하더라도 다양한 용도의 “버전 업”된 제품들을 계속 개발해야 시장을 지킬 수 있다. 1960년대 이후 성공적인 마케팅 사례로 꼽혔던 미원은 그러나 조미료만으로 입지가 굳어지고 브랜드 이미지 또한 진부화 되어감을 피할 수 없었다. ‘93년 소비자를 대상으로 실시한 당시 미원 그룹의 이미지 조사에서 응답자의 33.8%가 미원을 떠올렸고 53.4%는 조미료를 떠올렸다. 소비자들은 조미료 외에 여러 가지 미원 제품을 사용하면서도 그것이 미원의 제품인지 모르는 경우가 많아 미원 그룹은 사실 눈에 보이지 않는 손실을 보고 있었던 셈이다. 이러한 제반 환경에 대응하기 위해 미원은 (주)대상으로 기업명을 바꾸는 한편, 종합 식품회사로서의 이미지를 구축하기 위해 식품 사업 B.I 전략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신뢰할 수 있는 정직한 종합식품 브랜드의 창출이 요구되었던 것이다. 또한 대상(주)은 국내에 인기에 만족하지 않고 세계적인 발효기술을 바탕으로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 국가들과 중국 등 해외로 눈을 돌려 국내 회사의 해외진출 모범사례로 통할 정도로 성공을 거두었다. 창업주인 임대홍 회장은 “국가와 민족을 위한 기업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고 이해해야 한다. 특히 우리 것에 대한 깊은 사랑을 가지고 밝은 사회를 만드는데 기여하겠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경영철학을 피력한바 있다. 앞으로도 대상이 현재의 영광에 만족하지 않고 끊임없는 연구 기술 개발을 통해 더욱 맛있는 제2의 제3의 미원으로 거듭나 한국인의 식탁뿐만 아니라 세계인의 식탁을 지켜가기를 소비자들은 바란다.

<배민호 기자>

 


출 처 : [인터넷] http://www.zpos.com/MarketWorld/market_world/mwg_b_02.htm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폴리와 함께 - 할인행사
존 햄버그 감독, 제니퍼 애니스톤 외 출연 / 유니버설픽쳐스 / 2007년 12월
평점 :
품절


위험분석가 이지만 모험을 즐길지 모르는 루벤,

한곳에 정착하지 못하는 폴리,

루벤은 폴리로 인해 매운음식도 먹고(비록 40일?동안 19번은 토하지만..ㅋㅋ), 살사도 배우고, 자신을 배신한 아내를 잊을 수 있게 된다.

폴리는 루벤으로 인해 열쇠를 찾을 수 있게 되고, 정착할 마음이 생기고, 좀더 책임감 있는 여자로 변한다.

큰 감동은 없지만 무난히 즐길 수 있는 영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6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레고만큼 적절한 이름을 선택한 브랜드도 없을 것이다. 창업자인 올커크 크리스챤센(Ole Kirk Christiansen)은 덴마크어로 "잘 논다"(Leg와 Godt)를 합쳐서 "lego"를 만들었다. 또한 라틴어로 레고는 "책을 읽고 있다"거나 "함께 참여하고 있다"는 의미를 지닌다.


올 커크 크리스챤센은 1930년대의 대공황기에 덴마크에서 일자리를 잃고 말았다. 목수였던 그는 어린이의 상상력과 창의적인 소질을 자극할 수 있는 고급 장난감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는 요요도 만들고, 바퀴달린 코끼리 형상도 만들었다. 또 장난감 유모차와 자동차, 오리모양의 장난감 등을 제작했고, 그의 목제 장난감도 관심을 끌게되자 일손이 달려 다른 일꾼들을 고용하기 시작했다.
1940년대말쯤에는 레고에서 일하는 인력이 50명을 넘었고, 그 지역에서는 가장 규모가 큰 회사로 자리잡았다.
1955년에는 수많은 시도와 실험을 거친 끝에 그 유명한 레고 벽돌이 덴마크에서 그 모습을 드러냈는데 이 신제품은 이 회사가 앞서 만든 장난감과는 달리 완벽한 "놀이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다.
1958년 올커크 크리스챤센이 사망하고 그의 아들인 갓프레드가 경영권을 인수할 즈음 레고는 이미 상당한 성공을 거두고 있었다. 한 해 매출은 150만 달러를 넘어섰고, 1968년에는 최초의 레고 랜드를 개장함으로써 전혀 새로운 영역으로 진출하게 되었다.
1993년, 레고는 브랜드 확장을 시도해 어린이 의류 사업에도 진출했다. 레고와 덴마크의 의류 생산업체인 카부키 간의 라이센스 협정에 따라 레고 키즈믹스&매치웨어(Lego Kids' Mix&Match Wear)가 등장했는데, 스칸디나비아와 네덜란드 전역의 아울렛에서 판매되고 있다.



장난감 사업만큼 유행에 민감한 사업도 드물다. 레고는 끊임없는 이노베이션을 통해 생산·판매하는 제품의 참신함을 교묘하게 유지시켜 나갔다.
1970년대에 레고는 모터가 달린 동력 장난감 제조업체들의 도전에 대응하기 위해 레고모터를 내놓았다. 최근에는 종래의 전형적인 레고를 보완하기 위해 "기사와 드래곤", "공룡", "잃어버린 세계"등 일련의 테마별 레고 세트를 내놓음으로서 낡은 인상을 떨쳐버렸다.



다른 장난감업체와 달리 레고 브랜드가 지속적으로 활력을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은 지속적인 이노베이션과 참신함을 잃지 않는데 있다. 현재까지 이 회사는 젊은 기운이 유지될 수 있도록 운영되었다. 이런 기운이 그대로 유지된다면 레고브랜드는 어린이들의 상상력이 시들지 않는 한 계속 살아남을 것이다.




내용출처 : [인터넷] 네임뱅크(http://namenet.co.kr/bank/sub.html?command=c_view&cat=31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리복은 1895년 최초로 스파이크 러닝화를 만든 영국의 젊은 스포츠인, J.W.포스터 (Foster)
에 의해 설립되어 세계 최고의 스포츠화 및 의류를 개발하는 데 지속적인 연구와 투자를
해 온 스포츠, 휘트니스 전문 회사입니다.
오늘날 리복 제품은 140개국 이상에서 판매되고 있으며, 특히 영국, 스페인, 덴마크를

포함한 유럽에서는 'No. 1' 브랜드로서 그 위치를 확고히 하고 있습니다.




**리복의 역사


*1895년



리복은 1895년 최초로 스파이크 러닝화를 만든 영국의 젊은 스포츠인 J.W.Foster에 의해
설립되어 세계 최고의 스포츠화 및 의류를 개발하는데 지속적인 연구와 투자를 해 온
스포츠, 휘트니스 전문회사입니다.
1895년 영국 볼튼(Bolton)의 한 육상선수었던 J.W.포스터(Foster)는 좀 더 나은 기록을
위해 못(스파이크)이 박힌 러닝화를 원했지만 그러한 신발이 제작될 여건이 안되었던
그 당시 한가지 해결방안은 포스터 자신이 직접 러닝화를 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1900년

1900년 포스터는 그의 스파이크 러닝화 제조기술을 점차 개선하여 다른 선수들에게도 제공해주는 등 사업을 대중적으로 확장해 나갔습니다. 포스터의 발명품인 스파이크 러닝화는 최고의 러닝화로 인정되었고 엄청난 기록의 향상을 가져온 기술적 진보였습니다. 포스터 디럭스 스파이크(Foster Deluxe Spike)화는 최근 50년동안 최고의 러닝화로서 자리를 굳혀온 바 있습니다.



* 1904년


포스터의 스파이크화는 글래스고에서 열린 단종 경기에서 알프 슈럽 (Alf Shrubb)이
역사적인 기록을 세우는데 큰 도움이 되었으며 1908년 포스터의 러닝 펌프 (Running Pump)는 올림픽과 프로페셔널 경기에서 최고의 제품으로 손꼽히게 되었습니다.
1년 후 포스터는 발을 측정하는 도표를 개발, 선수들에게 꼭 맞는 신발을 만들기 위해
처음으로 과학적인 방법을 도입합니다.



*1933년


J.W.포스터가 타계하자 사업은 두 아들인 제임스(James)와 존(John)에게 남겨졌습니다.



*1938년


1938년 C.B. 홈즈(Homles)가 호주의 엠파이어 게임(Empire Games)에서 포스터의 스파이크 러닝화를 신고 100야드, 200야드 두 종목에서 신기록을 세웠고, 그의 러닝 스타일은 '퍼포먼스 위드 스타일(Performance with Style)'의 전형이 되었습니다.




*1958년

1958년 무렵 사업은 점차 다른 스포츠화에도 확대되었습니다. 창시자의 손자 조(Joe) 포스터는 아버지의 소망대로 회계사가 되는 것을 거부하고, 17세에 패밀리의 비즈니스에 동참하였으며, 포스터 가 사람들은 직접 신발을 재단하고 바느질하면서 최고의 퍼포먼스를 위한 제품의 창조를 계속했습니다. 군복무 후 세계를 여행하며 스포츠, 휘트니스계의 성장을 보고 돌아온 두 손자 조셉과 제프리는 새로운 사업에 착수합니다. 처음에는 '머큐리 스포츠'라는 이름으로 시작하여, 후에 가장 빨리 달린다는 아프리카의 가젤류의 이름인 '리복(Reebok)'으로 바꾸었으며 보다 다양한 스포츠에 관여하게 되었습니다. 포스터 가에 있어 항상 가장 중요한 것은 최고의 퍼포먼스와 품질이었고, 리복의 가치는 그간 리복을 신고 달린 엘리트 선수들의 승리의 기록과 메달로 입증되었습니다.



* 1979년


1979년경에 리복의 사업은 계속 확장되었지만, 미국에서는 사실 그다지 유명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1979년 국제 박람회에서 리복을 보게 된 미국의 아웃도어 장비업자 폴 파이어맨(Paul Fireman)이 리복의 미국 내 판매권을 취득합니다.



* 1982년

1982년 리복에서 선보인 최초의 여성용 에어로빅화 '프리스타일(Freestyle)'은 엄청난 히트를 기록합니다. 패션 칼라의 가먼트레더(6개월된 송아지의 가죽)로 만들어진 '프리스타일'이 엄청난 성공은 휘트니스 붐으로 이어지며, 곧 전 에어로빅과 휘트니스계의 발전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 1985년

1985년은 리복이 상장회사로 미국 뉴욕 증권가에 정식으로 등록되어 신문에 매일 주가가 보도되기 시작한 해로, 리복은 스포츠, 휘트니스 산업에서 동경의 대상이 되었으며 전세계 누구나 기억할 수 있는 친숙한 이름이 되었습니다.



* 1987년


1987년 리복은 세계 넘버 원 스포츠화 마케터 이상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좋은 제품만 공급하는 것 이상의 파워를 갖게 된 리복은 성공을 사회에 환원하는 방향을 모색하게 되고, 이후 현재까지 지속적으로 국제인권단체 엠네스티(Amnesty)를 후원하면서 인권상(Human Rights Award) 프로그램을 펼쳐 인권 침해를 극복하기 위해 애쓰는 젊은이들의 노력을 인정하기 위해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습니다..



*1989년


1989년, 독특한 공기주입 방식을 이용한 PUMP 농구화의 개발로 리복은 다시 한 번 세계 시장을 석권하게 됩니다. 리복의 기술은 발전을 거듭하면서 제품의 질을 향상시켰고 이것은 INSTAPUMP 기술로의 발전으로 이어집니다.



* 1996년

1996년에는 종래의 쿠셔닝 개념에 반하는 전혀 새로운 쿠셔닝 기준, DMX Technology가 개발됩니다. 열역학을 이용한 유연성과 공기흐름 구조의 연관작용으로 EVA Form에 비해 유연성 20%, 안정성 10~15%정도 상승 효과가 있는 DMX Technology를 개발하여 러닝화 브랜드로서 가장 앞선 기술력을 갖추게 됩니다.



* 2002년

2002년 리복은 제품 혁신에서 출발하여 놀랍게 발전된 스포츠 & 휘트니스 산업의 중심에서, 그리고 지난 100여 년의 역사에 그치지 않고 무한한 가능성으로 계속적으로 발전된 미래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내용출처 : [인터넷] www.reebok.co.kr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1)과일-토마토,키위,감귤..원활한 혈액순환을 도와주고 피부노화방지에 좋다고함
제주도 해녀들이 자외선을 받으면서도 상대적으로 피부가 좋은 이유는
감귤을 많이 먹어서 그렇다고 함.

2)생선-고등어,꽁치,참치등...등푸른 생선은 오메가3가 풍부한 불포화지방산
이라서 혈전을 예방해주고 코레스토롤 수치를 낮춰준다고 합니다
에스키모인들이 암이나 심장병이 적은데 이유는 오메가3가 풍부한
생선을 많이 먹어서 그렇다고 합니다.전 세계 장수지역들은 예외없이
등푸른 생선을 많이 먹고있는 것으로 확인됨.

3)쌀밥-이것은 좀 아이러니하게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하루 규칙적으로 3끼를
먹으면 살도 빠지고 무병장수한다고 합니다.이것은 여러가지 병을 안고
있는 사람을 상대로 3주간 밥을 꼬박꼬박 챙겨먹였더니 모든 병의 수치가
정상에 가까워지면서 체중이 주는 것을 목격할 수가 있었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