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기형도 

 

1

흩어진 그림자들, 모두
한곳으로 모이는
그 어두운 정오의 숲속으로

이따금 나는 한 개 짧은 그림자가 되어
천천히 걸어 들어간다
쉽게 조용해지는 나의 빈 손바닥 위에 가을은
둥글고 단단한 공기를 쥐어줄 뿐
그리고 나는 잠깐 동안 그것을 만져볼 뿐이다
나무들은 언제나 마지막이라 생각하며
작은 이파리들을 떨구지만
나의 희망은 이미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너무 어두워지면 모든 추억들은
갑자기 거칠어진다
내 뒤에 있는 캄캄하고 필연적인 힘들에 쫓기며
나는 내 침묵의 심지를 조금 낮춘다
공중의 나뭇잎 수효만큼 검은
옷을 입은 햇빛들 속에서 나는
곰곰이 내 어두움을 생각한다, 어디선가 길다란 연기들이 날아와
희미한 언덕을 만든다, 빠짐없이 되살아나는

내 젊은 날의 저녁들 때문이다

 

한때 절망이 내 삶의 전부였던 적이 있었다

그 절망의 내용조차 잊어버린 지금
나는 내 삶의 일부분도 알지 못한다
이미 대지의 맛에 익숙해진 나뭇잎들은
내 초라한 위기의 발목 근처로 어지럽게 떨어진다
오오, 그리운 생각들이란 얼마나 죽음의 편에 서 있는가

그러나 내 사랑하는 시월의 숲은
아무런 잘못도 없다


2


자고 일어나면 머리맡의 촛불은 이미 없어지고
하얗고 딱딱한 옷을 입은 빈 병만 우두커니 나를 쳐다본다




-




시를 읽을 시간도 없이,
하룻동안 내가 무엇무엇을 했고 무엇무엇을 못 다 했는지
헤아려 볼 시간도 없이,
응? 그렇다고 무슨 나라를 세우는 일을 하는 것도 아니면서, 응?
그렇게 한 달을 보냈더니 덜컥 문 앞에 10월이 와 있다.
약속한 친구가 확인 전화까지 하고 찾아와 초인종을 눌렀는데
그 소리를 듣고야 약속이 생각 나 허둥대는 꼴이 됐다.
낭패다. 


둥글고 단단한 공기를 만져보는 기분으로 시작하는 가을.
나도 이 공기만큼 둥글고 단단하고
조금 차가웠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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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7-09-28 09: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멍, 네꼬님, 둥글고 단단한 공기를 만지며 그리고 아주 조금 차갑게~
저도 이렇게 10월을 맞이할래요^^ '절망의 내용조차 잊어버린 지금' 콕 박혀요^^
네꼬님, 어쩜 이리 쨍할까요, 아침공기가..

네꼬 2007-09-28 13:20   좋아요 0 | URL
이 계절의 아침 공기는 사람을 경건하게 하지요.
고양이에게도 그렇습니다.
우리 10월을 잘 맞이하기로 해요.
: )

전호인 2007-09-28 09: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누구나가 멋진 글귀에 마음이 박히는 것은 어쩔 도리가 없는 것 같습니다. 공기를 만지며 느낄 수 있는 시월이 되길 바라면서 저도 한번 느껴볼랍니다.

네꼬 2007-09-28 13:21   좋아요 0 | URL
전호인님, 오래간만이어요, 확 반갑습니다.
해마다 이맘때 읽어보는 시인데, 읽을 때마다 새롭게 좋아요.
같이 좋아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비로그인 2007-09-28 09: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형도 詩, 오랜만인데요. 역시나 그 냄새가..
덕분에 멋진 시를 마시고 갑니다. (웃음)

네꼬 2007-09-28 13:21   좋아요 0 | URL
응? 맛있었어요, 시?
좀 썼을 텐데. ^^

비로그인 2007-09-28 14:18   좋아요 0 | URL
저한테는 이런 시가 맛있습니다.
나를 돌아보게 하는, 그리고 앞으로 있을 인생에 있어서도 귀한 거름이
되어주는 '몸에 좋은 약'이거든요.^^

네꼬 2007-10-01 10:45   좋아요 0 | URL
몸에 좋은 약, 우리 종종 나누어 먹어요. ♡

홍수맘 2007-09-28 1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직은 "더워" 소리가 절로 나오는 여기랍니다.
저 역시 시 한편 느낄 시간도 없이 벌써 10월을 맞이하는 기분이랍니다.
그래도 이 9월이 가기전에 님 덕에 좋은 시한편 감상하고 갑니다.

네꼬 2007-09-28 13:23   좋아요 0 | URL
홍수맘님 계신 곳은 제주,
네꼬 씨 있는 곳은 파주.
여기도 간혹 더운데, 제주는 더하겠지요?
시 읽기가 게을러져서 저는 팍팍해지는 것 같아요.

라로 2007-09-28 1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빠짐없이 되살아나는 내 젊은날의 저녁들 때문이라니,,,넘 멋져요~.
10월이라는 이렇게 멋진 기형도 시인의 시가 있었군요,,,
요절했는데도 시를 엄청 많이 남겼어요,,,,비교대비해보면...

밤새 비가 많이 왔는데,,,아셨나요?

네꼬 2007-09-28 13:24   좋아요 0 | URL
밤새 비가 왔나요? 새벽까지 깨어 있다가 잠들었는데 모르고 일어났습니다. 저..... 둔해요. (털썩.)

어떤 사람은 요절하면서도 한 세계를 남기고 가는데,
전느 기형도보다 몇 년을 더 살았는데도 여태 이래요.
가끔 무안합니다.

치니 2007-09-28 1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위 노란별 찜 해가요.

네꼬 2007-09-28 13:25   좋아요 0 | URL
오옷. 기형도 덕분에 치니님께 제가 묻어가요. 하하.

비로그인 2007-09-28 1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응? 네꼬님 What's going on?

네꼬 2007-09-28 13:27   좋아요 0 | URL
회사에서 팀을 바꾸면서 갑자기 너무 바빠졌어요. 제 성정이 워낙 얇고 조급해서 (겸손 아니고 정말 그렇다는 거. ㅠㅠ) 마음만 앞서고 일은... 제 발이 고양이 발이죠. 놀기나 좋아하는 고양이 발. 나비나 잡는 고양이 발.

도넛공주 2007-09-28 16: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도 둥글하시잖아요?

네꼬 2007-10-01 10:43   좋아요 0 | URL
웃겨서 기절.

nada 2007-09-28 19: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어요. 얼마나 더 둥글해지실라구.
더는 곤란해요. 제가 경락 좀 해드려요? (웃음)
저도 추석 때 시집 한 권 주문 넣었어요. 히.
나중에 한 편 읽어 드리지라..

네꼬 2007-10-01 10:43   좋아요 0 | URL
기절에서 깼다가 '경락 좀'에서 다시 기절.


어떤 시집이었을까? 궁금해요. 어서 읽어줘요!

Mephistopheles 2007-09-28 23: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슬쩍 부는 바람에 팔뚝의 털들이 자지러지게 일어나는 걸 보고 가을이구나를 느꼈다는..^^

네꼬 2007-10-01 10:44   좋아요 0 | URL
털이라고 하면 아무래도 메피님보단 고양이가 일가견이.. 가을이에요. 지금까진 좋은데 추워질 게 걱정이에요. ㅠㅠ

마노아 2007-10-01 1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슴은 여전히 뜨겁게, 머리만 차갑게 할 거죠? 하지만 네꼬님은 '따뜻'할 것 같아요^^

네꼬 2007-10-09 09:05   좋아요 0 | URL
나 이제야 답글 달아요. 그래서 내가 미워요? -_-

2007-10-01 11: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0-09 09: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세실 2007-10-06 1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날씨 참 좋아요. 10월의 가을하늘을 만끽하고 있습니다.
이 시는 스산한 저녁바람 맞으며 들어야 하는데....
네꼬님 행복한 10월 되셔야 합니다. 꼬옥요~~

네꼬 2007-10-09 09:07   좋아요 0 | URL
넵! 꼭 행복한 10월이 되도록 애쓰겠습니다. 답글이 늦었는데... 오늘은 바짝 추워요. 시가 오늘과는 어울리겠는데요?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