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가나 영화기자들에게 후한 점수를 받고 있진 않지만 '트랜스포머' 는 아주 흥미로운 영화였다. 우선 이 후텁지근한 여름에 보기에 눈이 시원해서 좋고, 음악도 신 나고, 이 종류의 영화에서 빠질 수 없는 미덕으로 결말도 산뜻하다.
물론 결국은 미군(그것도 해외에 파견된!)이 지구를 구한다거나(--대통령도 소용없다), 로봇에게조차 적용되는'희생없이 승리없다'는 무서운 가훈의 반복은 상당히 미국적이다. (심지어 주인공의 이름도 Sam이다. 너무 노골적이지 않나?-_-) 미국을 공격하려면 최소한 외계에서 온 로봇은 되어야 한다는 가정도 대단하다. 그래도 비슷하게 거대한 로봇들이 비슷하게 굉장한 화력으로 불을 뿜어봤자 승패가 가려질 리 없으니 결국 육탄전으로 마무리를 본다는 설정은 애교가 넘쳤다.
영화에서 가장 흥미로운 설정은 '어쩌면 우리 곁에 있는 사물들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모습을 바꾼 로봇일지 모른다'는 것.
영화 속의 변신 로봇들. 단연 압권은 꼬마 악마 프렌지의 변신!
네꼬 씨와 가장 가까운 기계들을 가만 생각해보았다. 몰라서 그렇지 본모습을 감추고 있는 사연 많은 물건일지도 모르니까.
우선 휴대폰인 모토로라 크레이저 파이어. 기계(그것도 디지털)와 사이가 상당히 먼 나는 휴대폰을 한번 사면 다이얼패드가 안 먹혀도 두 번 세 번 고쳐가며 마르고 닳도록 쓰는 편이다. 흠집이 많이 난 애니콜 씨와 오래도록 같이 다녔는데, 지난번 남자친구가 굳이 성탄선물로 휴대폰을 사주어서 당황하는 한편 머쓱하고 좋았더랬다. 그러고 얼마 안 가 그와 헤어졌고 도무지 그가 사준 휴대폰을 들고 다닐 수가 없어서 (아니, 매일 손에 들고 다는 건데!) 새 휴대폰을 장만했다. 평소 로망이었던 빨간 휴대폰이다. 알고 보니 여기엔 내 사랑 올드독의 플래시를 다운받을 수 있고 사진도 예쁘게 나오며 알람 소리가 아름답다. 러블리 클레어 씨가 고양이 홀로그램이 있는 휴대폰 줄도 사줬다. 뜻밖의 기쁨이 되었다고나. 혹시 너도 로봇?
다음은 디지털 카메라, 캐논 익서스 430. 계획에 없던 이 아이템이 내 수중에 들어온 것은 뜻밖의 사고 덕분이었다. 친구들과 차를 렌트해서 강릉에 놀러 갔는데, 돌아오는 길에 휴게소에서 다른 차의 실수로 사고가 난 것이다. 좋게 해결하고 넘어가려는데 그쪽에서 황당하게 나오는 바람에 (본인들의 실수를 인정하기는커녕 큰소리를!) 11명 전원이 병원에 가버리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 합의금으로 받은 돈을 뜻깊게(!) 소비하기 위해 디카를 마련했다. 덕분에 나는 서재에 숱 많은 소년고양이와 꽁치조림 사진을 올릴 수 있게 됐다. 너도 로봇?
마지막으로 내 차, 2001년식 베르나. 엔카 싸이트에서 이 차를 보고 마음에 들어서 매장을 찾았더니 역시 마음에 쏙 든다. 그런데 계약을 하려고 보니 글쎄 이 차가 가압류 상태에 있는 거다! 전 주인이 신용카드 대금 20만원 정도를 밀렸는데 카드 회사에서 압류를 해버린 것. 물론 차주인이 엔카에 차를 팔 때는 돈을 갚았고 카드 회사에서도 법원에 압류를 풀어달라고 접수를 했으나 수많은 서류 더미에 쌓여 아직 처리 전 단계였던 것이다. 남들은 무슨 중고차를 그렇게 오래 기다려서 갖고 오냐고 날 한심해 했지만, 나는 무려 한 달을 기다려 서류를 깨끗이 하고 그 친구를 데리고 왔다. 과거에 무슨 사연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이젠 다 잊고 나랑 새출발 하자, 차가 듣든 말든 나는 그렇게 말해주었다. 지금 내 차 도베 씨는 ('여행하다'라는 뜻의 DOVE로, 신부님이 이름을 지어주셨다) 나의 눈물과 웃음과 혼잣말을 묵묵히 받아주는 소중한 친구다. 그럼 네가 로봇이란 말이냐?
돌아보면 기계뿐 아니라 많은 것들이 다 각자의 사연을 가지고 나에게 왔다. 내가 알아차리지 못해서 그렇지, 기린 그림이 그려진 티셔츠도, 냉장고 속의 호박도, 하다 못해 지금 내가 마시는 캔맥주도 다 책 한권 분량의 과거가 있지 않을까? 그러니 서재에서 만나는 나의 고마운 이웃들의 내가 알지 못하는 사연들은 어떻겠는가. 그 생각을 하니 문득 마음이 짠하다. 네꼬 씨답게 역시, 엉뚱한 결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