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책꽂이의 저 많은 책들을 다 읽으셨습니까?” 라는 질문에 “다 읽은 책을 뭐 하러 꽂아 두냐?” 하고 응수했다는 움베르토 에코 씨의 아름다운 일화.

2. 자신의 화려한 서재를 촬영하러 온 방송국 카메라 앞에서 의연하게 “이것들은 책이라기보다, 아름다운 가구죠.” 라고 말했다는 조지 마이클 씨의 훈훈한 이야기.

3. “책을 읽으려고 사나, 노후 대비로 사는 거지.” 언젠가 은퇴하면 헌책방을 내겠다는 계획으로 (절대 핑계 아님) 책을 사 모으시는 치밀한 우리 팀장님.



분명히 그중 한 권도 제대로 안 읽을 줄 알면서도 꼭 5만원을 넘겨 주문하는 나. 죄책감은커녕 알뜰함을 스스로 칭찬해온 나로서는 아주 가끔, 이래도 되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 때마다 위의 세 이야기를 번갈아 떠올리며 ‘이정도야 뭐.’ 하고 불편함을 애써 외면해왔다. 그런데 아무래도 불편하다. 불편하다. 마음은 편안한데, 이젠 책상 쓰기가 불편해져버린 것이다. 털썩.


이대로는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책상을 정리했다. 겹을 이루어 서 있는 책들의 자리를 다시 잡아주느라 책의 숲을 파헤쳐 들어갈 때마다 내 얼굴에 점점 그늘이 지는 것이 느껴졌다. “이런 책을 내가 샀더랬지! 그랬지! 내가 샀지! 그러곤 모른척했지! 내가 그랬지! 내가 그랬지!” 하는 자책이 쿵쾅쿵쾅 심장을 두드린다.

 

그러다 가끔 내가 읽고 묻어둔(!) 책들이 보이면 왈칵 반갑다. 읽은 책을 보는 내 눈길엔 반가움을 넘어선 자랑스러움을 넘어선 감격을 넘어선 오만함이 뚝뚝 떨어진다. 반대로, 살 땐 ‘이런 책을 안 읽고 어떻게 살아왔단 말이냐. 그러고도 네가 글을 아는 고양이냐’ 하고 조급증을 내며 사들이고도 까맣게 잊었던 책들과 재회한 내 눈길은, 돈 꾸고 연락 끊은 친구를 사람 많은 길바닥에서 마주친 그것. 무안함을 넘어선 부끄러움을 넘어선 자책을 넘어선 울고 싶은 마음이다.


5월엔 더 이상 책을 사지 않으리.

 

‘사실 난 가구란 말인가’ 라고 신세한탄을 하고 있을 나의 책들아.

이달엔 더 이상 새 가구를 들이지 않고 너희를 읽어주겠다.

그동안, 내가 정말 잘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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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5-10 1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라딘을 끊기 전에는 책지름 끊는 거 사실상 어려워요. 흑흑흑...
여기저기서 얼마나 뽐뿌질들을 하시는지..ㅠㅠ

Mephistopheles 2007-05-10 1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내성이 생겨서 읽은 책이 아니면 주문을 자제하게 되더라구요..^^

비로그인 2007-05-10 1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을 왜 사요? 빌려보면 되지 ㅎㅎ

비로그인 2007-05-10 1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쿨럭........절대 남의 일 같지 않은 이 엄청난 찔림은.........
그러고보니, 알라딘에서 책장 주는 이벤트 한다고 책 구입을 그렇게나 유혹시키더니.
결과가 어떻게 되었나..... 켕. 내 책들 어쩔꼬. (긁적)

향기로운 2007-05-10 1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나 네꼬님^^ 글을 아는 고양이냐.하는 반문 너무 멋져요^^ㅎㅎ

네꼬 2007-05-10 1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체셔님 / 그런 의미라면 전, 님을 끊어야 할지도 모른다는... 훌쩍. ㅠ_ㅠ

메피스토님 / 오! "읽을" 이 아니고 "읽은"이에요? 그럼 먼저 읽고 나중에 사신다는...? 오, 이런 발상의 전환이!

테츠님 / '사둔 책도 다 안 읽었는데.' 라는 핑계 때문이죠. -_-. 테츠님은 정말 빌려서도 잘 봐요? 좋겠다.

엘신님 / 엄청난 찔림이라니, 엘신님이 이렇게 반가울 때가 또 있었나!!!!!

네꼬 2007-05-10 1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향기님 / 부끄러워요. (짱구 버전의 긁적임과 함께.)

무스탕 2007-05-10 1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못한줄 아셨으면 됐습니다. 진정한 고양이의 자세입니다 ^^
근데여... 저도그래여... 저도 쟁겨놓고 바라만보고 있는 책들이 많아요... -_-

치유 2007-05-10 14: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안한 마음 가져갑니다..*^^*
지름신을 불러오신 님에게 추천@@ 빠방~~~~~~~~~~~~~!!

네꼬 2007-05-10 14: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스탕님 / 관대한 용서에 감사하면서도 '무스탕님은 다 읽으시는구나' 했는데, 뒤엣말을 보니 격렬한 친근감이. (^^)

배꽃님 / 이런 (내가 좋아하는) 뜻밖의 결론이! 히죽.

antitheme 2007-05-10 14: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오늘 몇권 질렀습니다.

네꼬 2007-05-10 14: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님 / 인테리어라고 커밍아웃한바에야, 취향에 맞는 걸 고르는 게 현명하죠. 하하.

안티님 / 저도 어느새 두리번거리는 저를 보아요. ㅠ_ㅠ

마늘빵 2007-05-10 14: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첨에는 실버에 맞추자 했는데, 그 담에 골드까지만, 그러다 이제는 플래티넘을 훌쩍 넘습니다. -_- 음. 난 빌려보는건 안되던데.

Mephistopheles 2007-05-10 14: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타여요 오타 ㅋㅋㅋ "읽을"이 맞아요..^^

네꼬 2007-05-10 14: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프님 / 네, 저도 플래티넘 할인, 문자 서비스 등을 받기가... 부끄러워요. 누가 볼까 두렵. ㅠ_ㅠ

메피스토님 / 하하하하하. 확 존경할 뻔했는데, 확 좋아졌어요, 메티스토님이. 인간적이셔. ㅋㅋ

치유 2007-05-10 14: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81000

축하드려요..우연찮게 잡았네요..


네꼬 2007-05-10 14: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배꽃님, 어므나. 저 이런 거 첨이에요. 전혀 생각도 못했고요. 우하하하핫. 감사합니다. ♡♡♡♡♡ (용기 백배.)

무스탕 2007-05-10 15: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엄머! 아직도 요 숫자네요. 저도 축하!! ^^*

281000


마노아 2007-05-10 16: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서 말이죠. 일반 회원으로 내려가는 것이 최선의 과제가 아닐까 싶어요..;;;
그래야 쌓인 책을 좀 읽죠... 흑흑..ㅠ..ㅠ

네꼬 2007-05-10 16: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스탕님 / 히히. 쓰다듬어주세요. ♡

마노아님 / 아아, 플래티넘 회원이 일반 회원으로 내려가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니, 이 모순된 현실. (퍽! 벽을 때리는 고양이 주먹.) ㅠ_ㅠ

다락방 2007-05-11 0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는 어제 회사동료 생일선물용과 저를 위한것으로 11만원어치를 질렀어요. 미친걸까요?

지름의 대마왕. 철푸덕. orz

네꼬 2007-05-11 09: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마왕 다락방님 / 저도 언제나 '이유'가 있답니다. 그만 일어나세요. ^^

마늘빵 2007-05-11 1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슥삭슥삭.

네꼬 2007-05-11 1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프님 / 무스탕님처럼 쓰다듬는 소리죠? (얼핏 칼 가는 소리처럼 들린다는...) 켕.

홍수맘 2007-05-11 1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괜히 뜨금 하면서 갑니다. ^ ^;;;;;;;;

네꼬 2007-05-11 1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홍수맘님 / 뜨끔하는 분들이 종종 계시다니 외롭지 않아요. ^^

도넛공주 2007-05-16 14: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꼬님 멋지시네요. 저는 저희 아버지께서 워낙 책을 모아대셔서 완전히 질려버렸지요. 그래서 사서 읽기보다는 서서 읽기를!

네꼬 2007-05-17 1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주님 / 오, 서서! *_* 근데 저는 서서 읽다가 좋은 책은 기어이 사 들고 온다는 게 문제. (저는 왜 서서 보는 걸까요?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