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 히로부미의 계획 VS 안중근의 반격 - 교과서가 다 담지 못한 안중근 의거
류은 지음, 이강훈 그림 / 책과함께어린이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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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이 우덕순에게 써 준 시 <장부가>, 149쪽

 

정부가 세상을 살아감이여, 그 뜻이 크도다. 

시대가 영웅을 만드니, 영웅이 시대를 만드는구나.(...)

쥐 같은 도적 이토여, 어찌 살기를 바랄 수 있으리.

이리 될 줄 알았으랴만, 이미 돌이킬 수 없노라.(...)

 

이토 히로부미의 계획을 정확히 간파한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20대 약관의 나이인 안중근이었다. 이 책은 초대 조선통감이었던 이토 히로부미가 발톱을 감추고 일본 정부를 대신하여 조선의 외교권과 자주권을 박탈했는지 과정을 여과 없이 서술하고 있다. 명성왕후 시해 사건을 주도한 미우라 일본 공사를 조선으로 불러들인 이후 이토였다. 고종 황제의 퇴위에 압력을 행사한 이도 이토였고, 대한제국의 군대를 해산시킨 이도 이토였다. 결국 일제가 대한제국을 강점한 모든 계획의 시작과 끝이 이토 히로부미의 손끝에서 진행되었다. 이 사실을 사건별로 정확히 기술한 책이 바로 <이토 히로부미의 계획 VS 안중근의 반격> 이다. 안중근이 하얼빈에서 이토를 저격한 사건을 기술한 책들과 뤼순 감옥에서 사형 당하기 전까지의 내용을 기술한 책들이 시중에 많이 나와 있다. 참고로 몇 가지 책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 <안중근의 마지막 유언, 문영숙 저>  안중근의 전기로 씌여진 책이 아니라 역사적 상황을 읽기 쉽도록 소설화 시킨 책이다.

- <영웅 안중근의 마지막 이야기, 박삼중 고수산나 저> 안중근 의사의 뒷 이야기를 역사적 실존 인물이 남긴 기록물과 유품들을 근거로 읽기 쉽도록 정리한 책이다.

- <안중근의 재판정 참관기, 김흥식 저> 안중근 의사의 재판 과정을 속기한 <만주일일신문> 기자의 속기록을 참고한 책이다.

- <안중근가 사람들, 정운현 정창현 저> 독실한 천주교인이었던 안중근 일가의 숨겨진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이처럼 안중근의 이야기에 관한 책들이 많이 나와 있다. <토지>의 박경리 작가도 토지 16부에서 안중근의 이야기를 담아냈다. "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 역두에서 조선 침략의 원흉 이등박문을 사살했던 그해, 1909년 청일간에 간도협약을...." 

 

안중근은 동양평화론을 주창했다. 한중일 모두가 서로 공동으로 동양의 평화를 위해 노력하자는 취지의 구체적인 방안을 기술한 책이다. 물론 끝까지 저술을 마치지 못하고 사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지만 말이다. 안중근의 죽음 이후 전국에서 항일 의병이 활발해졌고 많은 젊은이들이 만주와 연해주로 집결하기 시작했다. 그 뒤 10년 후에는 3.1 만세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일제가 조선을 강점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안중근은 일치감치 깨닫고 결국 이토를 사살해야겠다는 계획을 치밀하게 세웠다. 일본은 재판의 과정까지 치밀하게 개입하여 안중근을 사형에 이르게까지 했다. 

 

청나라와 영국간에 벌어진 아편전쟁 이후 세계 열강은 동아시아로 관심을 돌리기 시작했고 결국 청과 일은 강제적으로 문호를 개방할 수 밖에 없었다. 일본은 미국에 의해 문호를 개방할 수 밖에 없었는데 그후 일본은 미국에게 당한 과정 그대로 조선에게 강제로 조약을 체결시켰다. 청일전쟁, 러일전쟁의 틈바구니 속에서 나약한 조선은 세계 각국에 독립국가임을 선포하였지만 일본의 외교적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 과정 속에서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은 전 세계의 언론에 조명을 받기 시작했다. 일본에 의해 강제로 침략당하고 있는 힘약한 조선이 드러나게 되었다. 

 

안중근에 관한 이야기는 두루두루 읽혀져야 한다. 다양한 측면에서 씌여진 책들을 읽어보길 바란다. 미처 알지 못했던 사실들을 알게 된다. 특히 19세기 조선이 처한 암울한 현실을 다시 보게 된다. 자신의 목숨을 아낌없이 버린 안중근과 같은 독립운동가가 있었기에 현재의 대한민국이 존재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 같다. 

 

<이창수의 독서 향기> https://www.youtube.com/watch?v=MlxeVb-MYtk&t=442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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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자의 DNA - 300년 전쟁사에서 찾은 승리의 도구
앤드루 로버츠 지음, 문수혜 옮김 / 다산북스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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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영웅을 만든다!

 

우리나라도 임진왜란을 통해 이순신이라는 불세출의 영웅이 만들어졌듯이 세계 전쟁의 역사 속에 수 많은 영웅들이 탄생되었다. 앤드루 로버츠는 <승자의 DAN>에서 9명의 영웅을 언급하고 있다. 역사가들의 따라 평가가 다르긴 하지만 대체적으로 긍정적인 평가가 우세한 7명의 영웅과 시대적 악의 화신이라고 불리우는 2명의 영웅을 다뤘다. 모두의 공통점이 있다면 그들이 타고날 때부터 영웅의 기질을 타고 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병약한 체질로 누가보더라도 영웅감이 아닌 이들도 있다. 특히 키가 단신이었던 이들도 있었으니 그들이 전쟁터에서 지휘관의 역할을 제대로 감당해냈으리라 의심이 들 정도의 이들도 있다. 시대가 영웅을 낳는다는 역사가들의 말처럼 전쟁은 탁월한 승부 기질이 있는 이들을 국가의 운명을 맡길 키맨으로 부른다. 

 

정치적 감각도 탁월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언변에도 어눌한 이들도 있었고 때로는 전투에서는 매번 실패했지만 전쟁에서는 커다란 승리를 안겨 조국을 폐허더미 속에서 건져낸 명장도 있다. 후대의 역사가들로 그리 좋은 평점을 받지 못하지만 전쟁 당시 최고의 적임자였음을 저자는 논리정연하게 풀어나가고 있다. 

 

누구에게도 익숙하지 않은 미국의 육군 참모총장이자 미국 군대의 전체의 그림을 그린 조지 마셜은 특이한 이력을 소유한 전쟁 영웅이다. 전면에 나서기보다 전장의 후방에서 실제적인 막후자로 활동했던 인물로 오히려 당시 맥아더, 아이젠하워와 같은 전쟁 영웅들에 가려 사람들에게 크게 인기를 누리지 못했던 인물로 평가되었다. 하지만 후대의 역사가들에 의해 조지 마셜의 큰 그림들이 퍼즐처럼 맞춰지면서 전쟁사의 영웅으로 한 폐이지를 차지하게 되었다. 

 

우리가 잘 아는 나폴레옹은 전쟁터 속에서도 이름 없늠 무명의 병사들과도 격의 없이 지낼 인물로 회자되고 있다. 나폴레옹 군대가 응집력이 있고 무서운 공격력을 보인 것은 나폴레옹의 파격적인 보상에 있다고들 이야기한다.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전쟁에서 공을 세웠을 경우에는 즉시 보상을 해 주었고 병사들의 이름을 한 명 한 명 외울 정도로 명석한 암기력을 소유하고 있었다. 고위직 간부들보다 병사들을 먼저 돌보기를 우선했던 그의 용병술은 충성심을 바탕으로 이루어졌다. 

 

한 때 우리나라 군복에도 자랑스런 부대의 마크라든지 차별성을 두고자 하는 다양한 비표들을 붙이게 해서 자부심을 고취시킨 적이 있다. 알록달록한 색상으로 된 다양한 마크들이 멀리서도 보일정도였다. 그러나 96년 강릉무장공비사건 이후로 군복의 모든 표시들이 검정색으로 단일화되기 시작했다. 적에게 식별이 용이했다는 단점을 보완하기 위한 조치였다. 나폴레옹 군대도 승전의 보상으로 개개인의 병사들에게 훈장을 즉시 달아주어 특별함을 느끼도록 해 주었다.

 

눈물이 많기로 소문난 윈스턴 처칠은 늦깍이의 나이에 영국의 전시총리로 독일의 공격에서 영국을 구해낸 명장으로 기록되고 있다. 전쟁이 아니었다면 그는 정치의 일선에서 두각을 보일 수 있는 여건이었지만 전쟁이 그를 다시 정치의 전면에 서게 했다는 점은 한 사람의 일생에서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기도 하다. 

 

세계의 전쟁사의 이면에는 한 사람의 인생이 생각지도 못하게 급물살처럼 바뀌게 되는 것을 보게 된다. 혼란한 역사 정국은 누군가는 책임감을 짊어질 영웅을 부르게 만드는지도 모르겠다. 오늘날은 과거와의 달리 전쟁의 양상이 많이 달라지고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민을 하나로 응집하게 하고 설득해 나가는 지도자는 반드시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이창수의 독서 향기> https://www.youtube.com/watch?v=MlxeVb-MYtk&t=442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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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는 왜 사라졌는가 - 도시 멸망 탐사 르포르타주
애널리 뉴위츠 지음, 이재황 옮김 / 책과함께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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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모이면 도시가 된다. 도시로 사람들이 모이는 이유가 무엇일까?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제일 먼저는 생활의 편리성 때문이 아닐까 싶다. 직업을 위해서든 교육 때문이든 결국 사람들을 모이게 끔 하는 뭔가의 이유가 도시에게 있으며 사람들이 모이다보니 자연스럽게 도시의 위용을 갖추게 된다. 현재도 그렇거니와 과거에도 수 많은 도시들이 만들어졌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해 왔다. 유서깊은 도시는 그만큼 사람들이 왕성하게 모여 활동을 했다는 증거가 고스란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최근 들어와서 도시의 필요성을 회의적으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감지되고 있다. 아마도 감염병에 취약하기 때문이라는 생각때문이다. COVID-19 로 시작된 팬데믹 위기는 시작일 뿐 앞으로도 생각지도 못한 감염병이 인류를 지속적으로 위협할 것임은 분명하다. 감염병의 창궐은 현대의 도시의 모습을 변형시킬 가능성이 크다. 감염병을 예방하기 위한 가장 단순한 방법은 흩어지는 것이다. 사회적 거리두기를 위해서는 도시를 쪼개는 것이다. 감염병 뿐만 아니라 기후 재앙이라고 불리우는 재난이 도시를 위협하는 존재로 남아 있다. 산불, 허리케인, 홍수, 가뭄, 지진 등 천재지변은 도시를 사라지게 하는 원인이 될 수 있다.

 

<도시는 왜 사라졌는가>는 고고학자들이 발굴해 낸 옛 도시들의 역사 기록이다. 도시史를 밝혀내는 일은 쉽지 않는 일이다. 몇 천 년, 몇 만 년 전의 역사라면 더더욱 그렇다. 현대의 과학기술법을 활용하여 고고학자들이 사라졌다고 생각한 옛 도시史를 찾아내고 의미를 새롭게 조명했다. 수 많은 도시 중에 4개 도시를 기록한다. 그 도시들은 당시 인구 몇 만명이 거주할 만큼 세계 최대의 도시였다. 터기, 이탈리아, 캄보디아, 미국에 엄청난 대도시들이 존재했다. 차탈회윅, 폼페이, 앙코르, 카호키아. 4개의 도시들이 커졌다가 사라졌다가 반복된 과정을 역사적으로, 정치적으로 조사한 고고학자들의 모습에 경이를 보내고 싶다. 파묻힌 지층에서 발굴해 낸 뼈조각들을 분석하고, 각종 유물들, 집터, 물줄기, 새겨진 조각상 등을 통해 사람들의 생활 상을 그려내고 있다. 

 

 

도시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다시 도시가 된다!

 

신석기 시대에도 도시가 있었다고 한다. 현대의 도시처럼 인구 몇 천만명의 도시는 아니더라도 당시 수준으로 보았을 때 꽤 많은 인구가 밀집해서 살았던 도시가 있었고 고고학자들이 발굴하여 도시의 면면을 그려내고 있다. 사람들이 불을 피우고 남았던 재의 흔적이라든지 동물과 사람의 뼈, 켜켜이 쌓여 있는 흙의 층 등을 면밀히 관찰하고 분석한 뒤 도시의 모습을 설명하고 특징을 밝혀내고 있다. 고고학자들은 상상력 뿐만 아니라 최소한의 흔적만으로도 오래 전 사람들이 살았던 모습들을 설명해 내니 놀라울 따름이다. <도시는 왜 사라졌는가>의 첫 번째 도시는 인류 최초로 모여서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던 신석기 혁명 당시의 도시다. 도시의 이름은 약간 생소하다. 지금의 터키 내륙의 '차탈회윅'이라는 도시다. 

 

신석기 시대의 도시 '차탈회윅'에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지하에 살았고, 지상은 그들에게 있어서 옥상과도 같았다. 왜 그들의 집 형태가 지하에 조성되었는지는 확실히 밝혀진 바는 없지만 자연 조건과 밀접한 관련이 있지 않았을까 싶다. 불을 피우고 연기를 옥상으로 배출하기 위한 시설들이 발굴되었고 연기가 지하에 머물다보니 사람에게도 건강상 좋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회반죽으로 벽을 칠하고 동물이나 각종 사람들을 벽화로 남기기도 했다. 장례 풍습으로 죽은 사람의 유골을 방바닥에 묻었다고 한다. 지금도 발굴 현장에는 유골들이 심심치 않게 발견된다고 한다. 차탈회윅은 신석기 혁명의 문화를 누리며 오랫동안 존속했지만 결국 사람들이 떠나고 빈터로 남게 되었다. 도시가 사라진 것이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기후의 변화도 한 몫을 했을 것이고 강물의 흐름이 변경되었다는 의견도 있다. 여러 가지 의견 중에 특이하게 보아야 할 부분은 '계층 형성' 의 이유다. 잘 살고 못사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힘이 있고 약한 사람들이 구분되면서 저절로 계층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힘의 불균형은 그동안 평등한 구조에서 살았던 사람들이 떠나게 되는 요소가 되었다는 것이 고고학자들의 의견이다. 사람들이 많이 모일수록 전염병을 일으키는 미생물에 취약할 수 밖에 없다. 낙농 식품을 이용할 수 있게 되면서 자연에 순응하기 보다 자연을 이용하면서 사람들의 삶에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첫 번째 신석기 도시 차탈회윅에 있어 두 번째 도시의 생성과 소멸에 다룬 곳은 폼페이다. 폼페이는 우리가 잘 아는바와 같이 화산 폭발에 의해 하루 아침에 사라진 도시다. 6미터 화산재로 덮혀 버린 도시인 폼페이는 현재까지도 고고학자들에 의해 발굴이 진행 중이라고 한다. 특히 데이터고고학을 통해 폼페이에 살았던 사람들의 면면을 분석하고 재현해 내고 있다. 발굴 현장을 둘러보면 폼페이는 상당히 활발히 상경기가 이루어진 곳이었다. 고고학자들은 폼페이의 소매혁명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폼페이도 차탈회윅처럼 시민들 간 계층 구분이 있었다. 소수의 로마 귀족들과 노예에서 해방된 사람들, 노예들 다양한 신분이 도시의 구성원으로 함께 어울려 지내는 곳이었다. 화산 폭발 전에도 지진을 통해 피해를 입기도 했지만 결정적인 한 방은 화산 폭발이었다. 화산재도 피해를 주었지만 더 큰 피해는 뜨거운 기체였다. 살아 있는 것이라면 순식간에 녹일 정도였다. 로마 당국에서는 화산재가 덮힌 폼페이를 재건할만한도 할텐데도 어떤 이유에서인지 나서는 황제는 없었다. 결국 천 년이 지난 후에야 발굴팀들이 재정적 지원을 받아 작업에 들어갈 수 있었다. 사라진 폼페이는 영원히 역사 속에서 잊혀진 듯 했으나 화산재 덕분에(?) 폼페이 도시 모습을 최대한 재현해 낼 수 있게 되었다. 심지어 죽어가는 사람들의 표정까지도 석회를 떠서 생생하게 살려낼 수 있었다. 그러고보면 폼페이는 사라진 게 아니라 잠시 감춰진 것 뿐이다!

 

인위개변지형학을 통해 캄보디아 앙코르를 바라보다!

 

인위개변지형학이란 땅의 모양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연구하는 학문이다. 동남아시아 지형 자체가 늪 지대가 많다보니 늪지대의 물을 빼고 인간이 스스로 사용하기 이해 땅의 모습을 변화시킨 다양한 방법들을 연구하는 과학자들을 통해 만들어졌다. 캄보디아 앙코르에는 엄청 큰 저수지가 조성되어 있다. 저수지의 활용 여부에 따라 도시의 흥망성쇄가 결정되었다고 한다. 수로를 정비하는 사람이 사라지고 저수지가 범람했을 때 앙코르에는 사람들이 흩어지기 시작했고 반면에 관개 수로가 잘 정비되어 농사가 잘 진행되었을 때 왕조가 튼튼하게 버티어 갈 수 있었다. 고고학자들은 앙코르 도시를 좀 더 면밀히 관찰하기 위해 '라이다' 라는 광파 탐지 거리 측정 영상기술을 사용해 다양한 지도를 만들었다. 라이다라는 영상기술법은 인위개변지형학 연구에 최적화된 방법이다. 노동은 앙코르의 가장 귀중한 자산이었다. 노동력을 잘 관리한 왕들은 크메르 제국을 강하게 키워갈 수 있었지만 그렇지 않았을 경우 도시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현재 많은 관광객들이 찾아오는 앙코르와트는 커다란 저수지 안에 있는 사원 단지다. 수리야비르만 2세라는 왕이 앙코르 도시에 세운 기념물 가운데 하나다. 앙코르는 기후 변동에 취약했다. 특히 14세기 말부터 혹독한 가뭄과 이례적인 강수량으로 도시는 파멸에 가까울 정도로 망가지기 시작했다. 수자원 시설이 파괴되면서 사람들은 도시를 떠나기 시작했다. 물론 앙코르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도시는 사라질지 모르지만 문화와 전통은 살아남는다!

 

모든 도시는 주민들에게 공적 정체성을 체험할 기회를 제공했다고 한다. 아메리카 대륙의 카호키아는 대중들을 위한 광장이 발달되어 있었다. 정치적 성격보다는 종교적 특징이 광장으로 사람들을 모이게 했다. 정치적 과정에서 사람들이 흩어지기도 했지만 이것은 도시를 잠시 버린 것 뿐이지 다시 모이기를 반복했다. 고고학자들은 이런 과정을 '확장과 폐기의 패턴'으로 보고 있다. 정치적 불안정과 권위주의적 민족주의 시기는 도시의 움직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창수의 독서 향기> https://www.youtube.com/watch?v=MlxeVb-MYtk&t=442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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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돼지 이야기 - 돼지는 어쩌다가 우리 밥상과 술상에 매일 오르게 되었을까
최승철.김태경 지음 / 팬앤펜(PAN n PEN)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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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적 어머니의 심부름으로 정육점을 다녀 온 곤 했다. 자주 안 것은 아니다. 특별한 날에만. 생일 즘에는 소고기를 사러, 명절에는 돼지고기를 사러. 그것도 아주 작은 양만 사왔다. 정육점 주인 아저씨께서 저울에다가 무게를 잰 다음 큰 갈로 듬성듬성 썰어서 신문지에 돌돌 말아주면 그것을 들고 나왔다. 집으로 걸어가는 길에 고기를 싼 신문지를 보면 벌써 기름끼가 스며들어 반질반질해지는 것을 본다. 군침을 흘리며 오늘 하루만큼은 괴기국을 먹을 수 있겠구나라는 기쁨으로 쏜살처럼 집으로 갔던 기억이 난다. 1970년~1980년대만 하더라도 가난한 저소득층에게는 돼지고기조차도 쉽게 먹을 수 없는 육류였다. 또 한 번은 어머니께서 큰 다라(바구니)에다가 뭔가를 잔뜩 넣어가지고 오신 다음 부엌 시멘트 바닥에 쏟아 놓으시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소금으로 이리저리 세척하시면서 손질하는 것을 보니 돼지 창자였다. 아마도 동네에서 돼지 한 마리를 잡았는데 저렴한 가격으로 돼지 창자를 사오신 것이다. 한창 성장기에 있는 자녀에게 고기 반찬을 못해주더라도 최소한 단백질 덩어리는 섭취시켜야겠다는 어머님의 심정이 담긴 음식이었다. 여러 번 손질을 거친 다음에 삶아서 먹고 반찬해서 먹고 두루두루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난다. 돼지 창자도 1년에 한 번 먹을까 말까한 고급 음식이었다. 부족한 단백질 보충은 시장에 가서 닭목아지(닭을 손질하고 남은 닭머리와 목부분)를 칼로 다져 후라이팬에 지져 먹었다. 참고로 당시 닭목아지 1개는 100원이었다. 

 

<대한민국 돼지 이야기>는 돼지에 관한 역사서이자 대백과사전이다. 밥상에 자주 오르내리는 우리와 친숙한 돼지에 대해 피상적으로만 알고 있었지 돼지가 우리 역사 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유용하게 쓰이고 인류와 함께 한 육축이었음을 다시금 알게 되었다. 특히 눈에 띄었던 것은 돼지를 신성시하고 아주 귀한 동물로 여겼던 역사가 사료에 기록되어 있다는 점이다. 고구려와 고려는 국가 초기에 국가의 수도를 정할 때 돼지의 움직임을 보고 도성을 정했다고 한다. 고려 태조 왕건이 지금의 개성에 도읍지를 정할 때도 돼지의 움직임을 보고 정했다고 전해온다. 당연히 돼지를 키우는 관청이 따로 존재했고 돼지의 개체수는 국가적으로 관리에 들어갈 정도로 귀중한 자원이었다. 조선시대에는 중국 사신을 맞을 때 귀한 음식으로 돼지를 이용한 음식을 내 놓았다고 한다. 돼지를 우습게 봐서는 안 될 것 같다. 

 

우리나라 토종 돼지는 재래종으로 크기가 작되 먹성은 엄청 좋았다고 한다. 그만큼 사료값이 많이 들다보니 개체수를 늘이기에 부담이 되었고 일제강점기 이후 덩치가 크고 새끼를 많이 낳는 외래종이 들어오면서부터 재래종은 역사의 뒤안길로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특히 일제강점기 때는 의도적으로 돼지 사육을 늘리는 정책을 실시했는데 그 이유는 식민지 국가로써 아픔의 역사가 담겨 있다. 일본으로 반출되는 곡식의 양을 증가하기 위해 양질의 퇴비가 필요하게 되었는데 퇴비 생산에 가장 큰 몫을 감당하는 것이 돼지였다. 돼지는 잡식성으로 심지어 사람의 인분까지 먹어치울 정도로 식욕이 왕성했고 돼지가 밟고 지나간 자리들은 짚더미와 함께 섞이면서 양질의 퇴비로 만들어졌다. 화전민들이 산간 지역을 개간할 때 사용했던 가축이 돼지였다. 움직임이 활발했고 농사 짓기 좋은 땅으로 돼지가 역할을 톡톡히 해냈던 것이다. 

 

혹시, 용인자연농원(지금의 에버랜드) 시작에 양돈 농장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분들이 많지 않을 것이다. 1973년에 개발된 용인 양돈장은 우리나라 최초의 기업형 양돈장으로 기록되고 있다. 한국 전쟁 후 한국 축산업 발전에 중요한 역할은 선교사들이 주축이 되어 진행되었다.

 

돼지의 먹는 부위도 시대마다 달라졌다. 지금은 삼겹살이 성수기에 금결살로 소비되지만 삼겹살 소비가 확실히 늘어난 것은 얼마되지 않았다. 돼지는 부위별로 버릴 것이 없을 정도로 고르게 쓰인다. 꼬리털은 발모제로 쓰인다고 할 정도니 정말 버릴 것이 하나도 없는 가축인 것 같다.  돼지는 단순한 먹거리가 아니라 사람들과 함께 살아온 가축이자 삶을 윤택하게 해 주는 사람과 뗄레야 뗄 수 없는 존재였다. 인류와 함께 했던 돼지의 이야기를 역사로 풀어낸 <대한민국 돼지 이야기>를 상식 삼아 읽어볼 것을 권해 본다. 

 

 

 

<이창수의 독서 향기> https://www.youtube.com/watch?v=MlxeVb-MYtk&t=442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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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인의 위대한 패배자들 - 한니발부터 닉슨까지, 패배자로 기록된 리더의 이면
장크리스토프 뷔송.에마뉘엘 에슈트 지음, 류재화 옮김 / 책과함께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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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승리한 자들의 기록이다'라는 말이 있듯이 승자의 기록이 오랫동안 남아 역사가 되곤 했다. 우리나라도 세계기록문화유산인 조선왕조실록 뿐만 아니라 전해오는 기록들을 보더라도 승자의 기록이 압도적으로 많은 것이 사실이다. 사실 패자의 기록은 패자 자신이 죽거나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는 경우가 많았기에 기록으로 무언가를 남길 수 있는 처지가 되지 못했다. 다만 억울한 패배라든지 패배에 담긴 특별한 역사적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후대에 역사가들에 의해 다시 조명되고 역사화되는 과정을 밟게 된다. 하지만 대부분 무명의 용사들이 이름없이 죽어갔듯이 대부분의 인물들은 연기 사라지듯 조용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된다.

 

<13인의 위대한 패배자들>는 승자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주목받을 수 없었던 인물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이 보인 투쟁과 정신적 사상들이 다시 조명되기 시작했고 결과는 패배였지만 패배의 역사 뒤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사건의 주인공들을 다시 소환하고 있다. 저자들이 고집스럽게 역사 속에 파묻힌 패배자들 중 열 세명을 시대순으로 다시 불려냈다. 책의 부제 또한 '한니발부터 닉슨까지 패배자로 기록된 리더의 이면' 인 것처럼 리더는 패배자였더라도 분명히 기록될 만한 가치가 있음을 역사가들이 증명하고 있는 듯 싶다. 

 

내가 주목한 인물로는 아르헨티나 출신의 체 게바라와 탄핵 당한 미국 대통령 리처드 닉슨이다. 체 게바라의 본명은 에르네스토 게바라였다. 아르헨티나 사람들이 편하게 습관적으로 부른 호칭이 진짜 이름보다 더 많이 애용되고 있다. 체 게바라를 대표하는 사진, 별무늬 장식이 달린 베레모를 쓴 사진은 파리 출신의 사진작가 '알베르토 코르다'가 촬영했다. 그는 극좌파 중에서도 더 자기파괴적인 성향을 지닌 원액의 스탈린이라고 저자들은 평가한다. 볼리비아 산악지대를 거침없이 다니면서 지옥행군도 마다하지 않았고 변변치 않은 전투복과 신발로 험악한 지형을 소수의 부대원들을 인솔해서 다녔던 혁명가였다. 항상 그의 전투복 바지에는 책과 탄환, 에어로솔이 들어 있었다고 한다. 어디에서든지 책을 읽었으며 천식이 있었기에 상비약을 챙겨다녀야했다. 

 

볼리비아, 쿠바 등 혁명이 필요한 지역을 국경선을 밥 먹듯 넘나들며 어느 한 곳에 구애받지 않고 무에서 유를 창조하듯 자신의 혁명 사상에 동조하는 이들을 끌어모으고 기존의 정치체를 전복하는 하는 일에 목숨마저 두려워하지 않았다. 결국 그가 패배자로 역사에서 기록된 것은 쿠바의 카스트로와의 관계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볼리비아에서 결국 최후의 생애를 마감했지만, 남아메리카에서 그의 사상을 이어받은 이들이 계속 일어나고 있는 것은 그의 영향력이 만만치 않았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워터케이트로 불명예 퇴진을 당했던 리처드 닉슨은 정치적 대결자였던 케네디와 늘 비교되곤 했다. 케네디가 귀족의 느낌으로 대중들에게 다가갔다면 리처드 닉슨은 늘 시골 아저씨처럼 평가되었다. 닉슨의 가정 환경도 케네디가와는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초라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세계 정세에서 반공주의가 흐름 속 대세를 잡아가는 쯤에 닉슨은 정치적 재계를 시도할 수 있었고 결국 최고 권력자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베트남 전쟁 종식을 선언하고 중국 마오쩌둥과 회담을 통해 국교를 정상화하는 등 대국민적으로 인지도가 높았으며 그의 재선은 따논 당상이었다. 대통령 대선에서도 당연히 민주당 후보를 앞질렀다. 그러나 문제가 터진 것은 도청했던 사실을 은닉하고 거짓말에 거짓말을 더했던 것이 화근이 되었다. 닉슨의 정치적 참모들의 판단도 부정확했을 뿐만 아니라 국민적 신뢰도가 워낙 높았던 것이 그의 판단력을 흐리게 했었을 수가 있었다고 역사가들은 평가한다. 탄핵당한 대통령의 불명예 퇴진으로 그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듯 했으나, 그의 죽음 이후 닉슨을 추모하는 후임자들의 등장과 그가 남긴 외교적 성과들이 재조명 되면서 위대한 패배자로 재인식되고 있다. 

 

역사가들의 의해 소환된 13명의 패배자들의 면모를 다시 살펴 보는 기회를  가져보시라. 

 

<이창수의 독서 향기> https://www.youtube.com/watch?v=MlxeVb-MYtk&t=442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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