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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는 왜 사라졌는가 - 도시 멸망 탐사 르포르타주
애널리 뉴위츠 지음, 이재황 옮김 / 책과함께 / 2021년 9월
평점 :
사람들이 모이면 도시가 된다. 도시로 사람들이 모이는 이유가 무엇일까?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제일 먼저는 생활의 편리성 때문이 아닐까 싶다. 직업을 위해서든 교육 때문이든 결국 사람들을 모이게 끔 하는 뭔가의 이유가 도시에게 있으며 사람들이 모이다보니 자연스럽게 도시의 위용을 갖추게 된다. 현재도 그렇거니와 과거에도 수 많은 도시들이 만들어졌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해 왔다. 유서깊은 도시는 그만큼 사람들이 왕성하게 모여 활동을 했다는 증거가 고스란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최근 들어와서 도시의 필요성을 회의적으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감지되고 있다. 아마도 감염병에 취약하기 때문이라는 생각때문이다. COVID-19 로 시작된 팬데믹 위기는 시작일 뿐 앞으로도 생각지도 못한 감염병이 인류를 지속적으로 위협할 것임은 분명하다. 감염병의 창궐은 현대의 도시의 모습을 변형시킬 가능성이 크다. 감염병을 예방하기 위한 가장 단순한 방법은 흩어지는 것이다. 사회적 거리두기를 위해서는 도시를 쪼개는 것이다. 감염병 뿐만 아니라 기후 재앙이라고 불리우는 재난이 도시를 위협하는 존재로 남아 있다. 산불, 허리케인, 홍수, 가뭄, 지진 등 천재지변은 도시를 사라지게 하는 원인이 될 수 있다.
<도시는 왜 사라졌는가>는 고고학자들이 발굴해 낸 옛 도시들의 역사 기록이다. 도시史를 밝혀내는 일은 쉽지 않는 일이다. 몇 천 년, 몇 만 년 전의 역사라면 더더욱 그렇다. 현대의 과학기술법을 활용하여 고고학자들이 사라졌다고 생각한 옛 도시史를 찾아내고 의미를 새롭게 조명했다. 수 많은 도시 중에 4개 도시를 기록한다. 그 도시들은 당시 인구 몇 만명이 거주할 만큼 세계 최대의 도시였다. 터기, 이탈리아, 캄보디아, 미국에 엄청난 대도시들이 존재했다. 차탈회윅, 폼페이, 앙코르, 카호키아. 4개의 도시들이 커졌다가 사라졌다가 반복된 과정을 역사적으로, 정치적으로 조사한 고고학자들의 모습에 경이를 보내고 싶다. 파묻힌 지층에서 발굴해 낸 뼈조각들을 분석하고, 각종 유물들, 집터, 물줄기, 새겨진 조각상 등을 통해 사람들의 생활 상을 그려내고 있다.
도시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다시 도시가 된다!
신석기 시대에도 도시가 있었다고 한다. 현대의 도시처럼 인구 몇 천만명의 도시는 아니더라도 당시 수준으로 보았을 때 꽤 많은 인구가 밀집해서 살았던 도시가 있었고 고고학자들이 발굴하여 도시의 면면을 그려내고 있다. 사람들이 불을 피우고 남았던 재의 흔적이라든지 동물과 사람의 뼈, 켜켜이 쌓여 있는 흙의 층 등을 면밀히 관찰하고 분석한 뒤 도시의 모습을 설명하고 특징을 밝혀내고 있다. 고고학자들은 상상력 뿐만 아니라 최소한의 흔적만으로도 오래 전 사람들이 살았던 모습들을 설명해 내니 놀라울 따름이다. <도시는 왜 사라졌는가>의 첫 번째 도시는 인류 최초로 모여서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던 신석기 혁명 당시의 도시다. 도시의 이름은 약간 생소하다. 지금의 터키 내륙의 '차탈회윅'이라는 도시다.
신석기 시대의 도시 '차탈회윅'에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지하에 살았고, 지상은 그들에게 있어서 옥상과도 같았다. 왜 그들의 집 형태가 지하에 조성되었는지는 확실히 밝혀진 바는 없지만 자연 조건과 밀접한 관련이 있지 않았을까 싶다. 불을 피우고 연기를 옥상으로 배출하기 위한 시설들이 발굴되었고 연기가 지하에 머물다보니 사람에게도 건강상 좋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회반죽으로 벽을 칠하고 동물이나 각종 사람들을 벽화로 남기기도 했다. 장례 풍습으로 죽은 사람의 유골을 방바닥에 묻었다고 한다. 지금도 발굴 현장에는 유골들이 심심치 않게 발견된다고 한다. 차탈회윅은 신석기 혁명의 문화를 누리며 오랫동안 존속했지만 결국 사람들이 떠나고 빈터로 남게 되었다. 도시가 사라진 것이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기후의 변화도 한 몫을 했을 것이고 강물의 흐름이 변경되었다는 의견도 있다. 여러 가지 의견 중에 특이하게 보아야 할 부분은 '계층 형성' 의 이유다. 잘 살고 못사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힘이 있고 약한 사람들이 구분되면서 저절로 계층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힘의 불균형은 그동안 평등한 구조에서 살았던 사람들이 떠나게 되는 요소가 되었다는 것이 고고학자들의 의견이다. 사람들이 많이 모일수록 전염병을 일으키는 미생물에 취약할 수 밖에 없다. 낙농 식품을 이용할 수 있게 되면서 자연에 순응하기 보다 자연을 이용하면서 사람들의 삶에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첫 번째 신석기 도시 차탈회윅에 있어 두 번째 도시의 생성과 소멸에 다룬 곳은 폼페이다. 폼페이는 우리가 잘 아는바와 같이 화산 폭발에 의해 하루 아침에 사라진 도시다. 6미터 화산재로 덮혀 버린 도시인 폼페이는 현재까지도 고고학자들에 의해 발굴이 진행 중이라고 한다. 특히 데이터고고학을 통해 폼페이에 살았던 사람들의 면면을 분석하고 재현해 내고 있다. 발굴 현장을 둘러보면 폼페이는 상당히 활발히 상경기가 이루어진 곳이었다. 고고학자들은 폼페이의 소매혁명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폼페이도 차탈회윅처럼 시민들 간 계층 구분이 있었다. 소수의 로마 귀족들과 노예에서 해방된 사람들, 노예들 다양한 신분이 도시의 구성원으로 함께 어울려 지내는 곳이었다. 화산 폭발 전에도 지진을 통해 피해를 입기도 했지만 결정적인 한 방은 화산 폭발이었다. 화산재도 피해를 주었지만 더 큰 피해는 뜨거운 기체였다. 살아 있는 것이라면 순식간에 녹일 정도였다. 로마 당국에서는 화산재가 덮힌 폼페이를 재건할만한도 할텐데도 어떤 이유에서인지 나서는 황제는 없었다. 결국 천 년이 지난 후에야 발굴팀들이 재정적 지원을 받아 작업에 들어갈 수 있었다. 사라진 폼페이는 영원히 역사 속에서 잊혀진 듯 했으나 화산재 덕분에(?) 폼페이 도시 모습을 최대한 재현해 낼 수 있게 되었다. 심지어 죽어가는 사람들의 표정까지도 석회를 떠서 생생하게 살려낼 수 있었다. 그러고보면 폼페이는 사라진 게 아니라 잠시 감춰진 것 뿐이다!
인위개변지형학을 통해 캄보디아 앙코르를 바라보다!
인위개변지형학이란 땅의 모양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연구하는 학문이다. 동남아시아 지형 자체가 늪 지대가 많다보니 늪지대의 물을 빼고 인간이 스스로 사용하기 이해 땅의 모습을 변화시킨 다양한 방법들을 연구하는 과학자들을 통해 만들어졌다. 캄보디아 앙코르에는 엄청 큰 저수지가 조성되어 있다. 저수지의 활용 여부에 따라 도시의 흥망성쇄가 결정되었다고 한다. 수로를 정비하는 사람이 사라지고 저수지가 범람했을 때 앙코르에는 사람들이 흩어지기 시작했고 반면에 관개 수로가 잘 정비되어 농사가 잘 진행되었을 때 왕조가 튼튼하게 버티어 갈 수 있었다. 고고학자들은 앙코르 도시를 좀 더 면밀히 관찰하기 위해 '라이다' 라는 광파 탐지 거리 측정 영상기술을 사용해 다양한 지도를 만들었다. 라이다라는 영상기술법은 인위개변지형학 연구에 최적화된 방법이다. 노동은 앙코르의 가장 귀중한 자산이었다. 노동력을 잘 관리한 왕들은 크메르 제국을 강하게 키워갈 수 있었지만 그렇지 않았을 경우 도시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현재 많은 관광객들이 찾아오는 앙코르와트는 커다란 저수지 안에 있는 사원 단지다. 수리야비르만 2세라는 왕이 앙코르 도시에 세운 기념물 가운데 하나다. 앙코르는 기후 변동에 취약했다. 특히 14세기 말부터 혹독한 가뭄과 이례적인 강수량으로 도시는 파멸에 가까울 정도로 망가지기 시작했다. 수자원 시설이 파괴되면서 사람들은 도시를 떠나기 시작했다. 물론 앙코르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도시는 사라질지 모르지만 문화와 전통은 살아남는다!
모든 도시는 주민들에게 공적 정체성을 체험할 기회를 제공했다고 한다. 아메리카 대륙의 카호키아는 대중들을 위한 광장이 발달되어 있었다. 정치적 성격보다는 종교적 특징이 광장으로 사람들을 모이게 했다. 정치적 과정에서 사람들이 흩어지기도 했지만 이것은 도시를 잠시 버린 것 뿐이지 다시 모이기를 반복했다. 고고학자들은 이런 과정을 '확장과 폐기의 패턴'으로 보고 있다. 정치적 불안정과 권위주의적 민족주의 시기는 도시의 움직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창수의 독서 향기> https://www.youtube.com/watch?v=MlxeVb-MYtk&t=442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