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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드코어 히스토리 - 종말의 역사에서 생존의 답을 찾다
댄 칼린 지음, 김재경 옮김 / 북라이프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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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종말을 예견하는 이들이 많아졌다. 현재도 그렇지만 과거에도 많은 이들이 '지금'이 종말이 아닐까 할 정도로 끔찍한 사건 앞에 불투명한 생존을 맞이해야 했다. 대규모 전쟁, 전염병, 가공할만한 무기 등으로 한치 앞도 보지 못할 정도의 긴장감이 조성된 적이 있지만 어찌어찌하여 위기를 넘겨 오늘날까지 올 수 있었다. 결코 인간의 윤리성이 탁월하거나 지혜때문이 아님을 저자는 강조한다.

 

코로나-19 바이러스 감염병으로 인해 앞으로의 세계는 지금까지 살아왔던 삶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갈 것을 예견한다. 과거 유럽 인구의 절반 가량을 죽음에 이르게 한 흑사병이 창궐할 때 사람들은 인간의 노력으로 또는 신의 노력으로 전염병을 극복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하지만, 흑사병이 남긴 결과는 인구의 감소, 인구의 감소로 인한 노동력 저하, 노동력 감소로 인한 사회 질서 붕괴, 부패한 종교의 개혁이 순차적으로 일어나게 되었다. 종말의 위기에서 생존의 지혜를 찾아낸 것은 살아남은 자들의 몸부림의 결과였다고 본다.

 

"흑사병이 돌기 전에는 성직자들이 자신의 삶을 온전히 교회에 바쳤다. 하지만 그들을 대신해 자리에 오른 사람들은 그리 헌실적일 필요도 없었고 충분히 교육받지도 않았다. 특히 평생의 헌신이나 뛰어난 자질 덕분이 아니라 돈 거래를 통해 교회의 높은 자리를 차지하면서 부정부패가 교회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성직자의 평판은 약 두 세기 만에 곤두박질쳤다" (50~51쪽)

 

1517년 독일의 수도원 수사였던 마르틴 루터가 종교 개혁의 신호탄을 쏟아 올린 계기가 된 것은 사람들이 세상의 종말을 느꼈기때문이다. 페르시아가 제국을 이루어 패권을 장악할 때도 모두가 종말의 위기를 느꼈을 것이다. 막강한 페르시아도 두려워한 대상이 있으니 스파르타였다.

 

"페르시아의 위대한 왕들은 전장에서는 스파르타인을 무찌를 수 없지만 재물을 활용하면 더 효과적으로 그들을 제압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28쪽)

 

페르시아 전쟁과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거치면서 지중해 최강자로 떠오른 도시국가 스파르타는 강인한 군대로 유명했다. 소수의 정예부대가 다수의 부대를 압도할 정도로 정신적으로도 무장되어 있었다. 페르시아제국마저도 번번히 스파르타를 어찌 할 수 없을 정도로. 그러나 빈틈은 있는 법. 저자에 역사적 문헌 조사에 의하면 전장에서 스파르타를 이길 수는 없지만 재물을 이용하면 효과적으로 제압할 수 있었다고 한다.

 

아시리아민족을 이야기하면 역사가들은 인류 역사상 최초로 주요 제국을 설립한 민족으로 기록한다. 아시리아의 수도 니네베에는 각국의 사신들을 맞이할 때 반기를 들거나 배신하지 못하도록 기둥마다 끔찍한 장면을 그림으로 그려놓고 사신들이 보도록 의도적으로 만들어놓았다고 한다. 그 누가 아시리아 민족에 대항할 수 있을까 싶었지만 제국의 상징이었던 '니네베'도 한순간에 몰락하고 말았다.

 

로마 제국은 그들이 야만인이라고 불리우는 각종 민족들에게 제국을 넘겨주어야 했다. 게르만인을 중심으로 용병을 구성하여 넓은 영토를 유지했지만 거꾸로 게르만인으로 인해 제국을 넘겨주어야 하는 아픔을 당한 나라가 로마였다. 로마 제국이 해체된 후 유럽은 여러 지형으로 나뉘었는데 로마인들이 말하는 '야만인'으로 국가들이 형성되었다. 대표적인 나라가 '야만인' 프랑크족으로 이루어진 프랑스이다. 중국도 마찬가지다. 늘 변방에 오랑캐라 불리우는 '야만인'으로 인해 평안할 날이 없었다. 특히 알타이 산맥 중심으로 활동했던 기마 유목민인 스키타이족, 사르마티아족, 훈족, 아바르족, 투르크족, 몽골족이 대표적이다.

 

현대에 와서는 1,2차 세계대전을 치루면서 이러다가 인류가 종말하는 것은 아닌지 모두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특히 미국 물리학자 오펜하우머를 중심으로 개발한 '핵' 실험 후 핵이 단시간 안에 많은 사상자를 낼 수 있는 무기로 전환될 수 있다는 확신이 들자 장기전에 돌입할 수 있는 세계대전을 더 이상의 사상자를 줄여한다는 당위성을 내세워 급기야 일본에 최초로 핵무기를 사용하고 말았다.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트루먼 대통령은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고 한다.

 

"미국이 전쟁을 끝낼 만한 무기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쓰지 않았다는 사실이 알려졌다면 원자 폭탄이 개발된 후에 사망한 모든 미군 가족은 분노했을 것이다"(227쪽)

 

사상자를 줄이기 위해 원자 폭탄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는 당시 미국 대통령의 말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사실 1950년 한국전쟁은 핵무기를 가지고 있었던 미국과 당시 소련의 전면적을 예고했기에 제3차 세계대전으로 확전될 가능성이 있었다. 만약 핵을 사용하게 된다면 피해는 이루말할 수 없을 정도로 커졌을 것이다. 다행인 것은 미소 양국이 그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기에 섣불리 핵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생존을 찾기 위한 적절한 정치적 타협이 이루어진 셈이다. 원자 폭탄에 이어 수소 폭탄까지 가공할만한 무기가 개발되면서 이제는 어느 한 순간에 지구 한 쪽이 멸종할 수 밖에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생태계의 불안전함도 한 몫하고 있다. 그렇다면 생존의 답을 어디에서 찾아야할까?

 

지나온 역사에서 얻을 수 있는 답은.... 없다! 다만, 생존을 연장하기 위한 방법으로 인간의 욕망을 최대한 자제시키고 인간의 윤리성을 회복하는 방법을 서로 합의하며, 공존하기 위한 길을 찾아가는 것 외에 인간이 할 수 있는 대책은 불가능하다고 본다. 개인적인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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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친일파 - 반일 종족주의 거짓을 파헤친다
호사카 유지 지음 / 봄이아트북스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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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호사카 유지는 낙성대경제연구소 소장인 이영훈 교수 외 『반일 종족주의』저자들의 주장을 궤변이라고 주장한다.


이영훈 교수는 『반일 종족주의』에서 일본 탄광으로 강제 징용된 조선인 노동자의 개인청구권에 대한 대법원 판결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면서 일본 우파의 입장에서 터무니없는 입장을 늘어놓고 있다고 말한다. 뿐만 아니라 일본군 '위안부'에 끌려가 피해를 입은 조선의 여성들을 공창제에 비유하여 자발적 직업 여성으로 비유하고 있어 호사카 유지는 여러가지 사료를 토대로 거짓 증언임을 밝혀 내고 있다.


왜 이영훈 교수는 일제강점기에 있었던 강제 징용과 위안부 문제를 일본 우파의 입장에서 변호하려고 했을까? 그것이 무척 궁금하다. 아베 정권을 위시로 한 일본 우익 정치 집단들이 독도 문제와 함께 강제 징용 개인 청구권 문제를 외면해 버리는 것은 그렇다고 칠 수 있겠다 싶다. 그런데 왜 대한민국 사람인 이영훈 교수가 진실을 왜곡하고 자신의 논리를 지속적으로 주장하는 이유가 무엇일지 궁금할 할 수 밖에 없다. 이영훈 교수는 일제강점기에 있었던 일들을 집요하게 끌어내어 문제시화하는 사람들을 '반일 종족'이라고 이야기한다. 반면 호사카 유지는 궤변을 늘어 놓는 이들을 '신친일파'라고 부른다. '반일종족'과 '신친일파'로 부르는 이들의 의견을 독자들이 들어보고 분명한 판단을 할 차례다.


호사카 유지는 강제 징용과 위안부에 있어서 분명한 사실은 불법으로 진행된 사기 행각이라고 단정짓는다. 거짓으로 부풀려 조선의 젊은이들을 강제로 끌고 갔다는 것이 정확한 팩트다. 돈을 많이 벌게 해 주겠다는 식으로 일본인들 조차도 거부하는 일들을 식민지 땅의 젊은이들을 강제로 끌고 가 노동력을 빼앗고 인권을 유린했다는 것이 분명한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우파의 논리를 따르는 일부 이영훈 교수와 같은 이들은 자발적 취업이라고 이야기한다.


탄광에서 일한 것보다 폭력과 생명의 위협으로 도주한 젊은이들이 많다는 것이 역사적 진실이다. 노동의 댓가로 임금을 정상적으로 받지 못했다는 것도 진실이다. 위안부라는 용어로 조선의 젊은 여성들을 군 최일선으로 데려다가 성노예 취급을 했다는 것은 누가봐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일본 우파의 주장처럼 지속적으로 그런 일이 없었다고 한다면 세상에 누가 그것을 진실로 들어 줄 수 있을까?


호사카 유지의 『신친일파』는 일제강점기 시기 강제징용과 위안부, 독도문제와 관련하여 균형잡힌 시각을 가지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역사적 과오에 대해 진실로 화해를 요청하는 것과 무작정 잡아 떼는 것은 차원이 다르다. 사람은 용서할 수 있으대 죄는 잊을 수 없음을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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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독립선언서 함께 읽기 천천히 읽는 책 32
이명종 지음 / 현북스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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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선언서>는 모두 몇 종일까?

<대한민국 정부 수립일>은 언제일까?

왜 그들은 자신의 목숨을 걸고 <독립선언서>를 당당하게 작성하였을까?

 

1910년 8월 22일은 한국의 주권을 일본에게 강제로 빼앗긴 날이다. 1910년 8월 29일은 대한제국 순종 황제가 주권을 포기한 날이다. 지금까지 주권(주인된 권리)은 국민에게 없었다. 황제 1인에게 있었다. 순종 황제가 주권을 포기했으니 이날부터 대한 국민이 주권을 돌려 받는 날로 선포한 독립선언서가 있다. 바로 <대동단결 선언>이다. 중국 상해에서 신규식 등 14명이 1917년 7월에 선언했다. 안창호의 유품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1919년 2월, 해외에 나가 있는 민족 독립운동가 39명이 <대한 독립선언서>를 발표했다. 대한 독립의 목적이 근대 민주주의 국가 수립임을 밝힌 문서다. 좀더 자세한 것은 『역사와 함께 읽는 민주주의』(박상준, 2020, 한울 출판사)를 참고하면 좋을 듯 싶다. <대한 독립선언서> 끝부분에는 무장 투쟁만이 완전한 독립을 이룰 수 있음을 천명하고 있다.

 

"모든 동포에게 동등한 권리와 많은 재산을 베풀어 남자와 여자, 가난한 자와 부유한 자를 균등하게 대하고, 뛰어나거나 모자라거나 나이가 많거나 적거나 모두를 똑같이 고르게 하면서 어질고 오래 살도록 하여 세계 인류를 구제할 것이니 이는 우리가 나라를 세우며 드는 깃발이다" (62쪽, 대한 독립선언서 中)

 

독립 국가를 건설하려는 목적을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 구현에 있음을 <대한 독립선언서>에 기록하고 있다.

 

1919년 3월 1일, 민족 대표 33명이 서울 인사동 태화관에서 <3.1 독립선언서>를 발표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이 선언서는 독립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다. '우리헌법읽기국민운동' 이주영 공동대표는 이날을 대한민국 생일이라는 표현을 쓴다. 1919년 4월 11일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 이름을 정한 날이고,  1919년 9월 11일은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한 날이다. 33인 대표는 손병희, 길선주 등 발각되는 날 죽을 순서라는 사실을 알고 서명을 한 사람들이다.

 

1919년 10월 31일, 중국 상해에서 박은식 등 대한 민족 대표 30명이 <대한 민족 대표 독립선언서>를 선포했다. 이제 우리 민족은 '대한민국의 임시정부'가 통치하겠다고 만천하에 알린 날이다. 따라서 일본에 대한 모든 의무를 폐기하고 우리 땅에 있는 일본의 모든 관청과 군대를 철거하라고 명령한다.

 

지금까지 발견된 <독립선언서>는 103종에 달한다고 한다. 우리가 <독립선언서>를 읽어야 하는 이유는 '대한민국'의 시작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국가의 권력이 '황제' 1인에게 나오는 것이 아니라, '국민'에게 있으며, 자유롭게 평등한 사회를 이루고 세계 인류에 이바지하고자 하는 우리 민족의 가치관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나라를 잃고 해외로 떠나갈 수 밖에 없었던 상황 속에서도 오직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애쓴 수 많은 독립 운동가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이 나라, 이 민족이 건재할 수 있었음을 <독립선언서>를 통해 깨닫게 된다.

 

우리 민족은 위기 앞에 '대동단결'하려는 정신이 남다르다.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외환위기 속에서도 꿋꿋히 견뎌 낼 수 있었다. 전 세계를 강타하고 있는 코로나바이러스-19 감염증도 분명히 이겨내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대한민국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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