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얼빈 리포트 - 소설로 읽는 안중근 이야기
유홍종 지음 / 소이연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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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밝혀내다!

참고로 하얼빈은 만주어로 '그물 말리는 곳' 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원래는 한적한 어촌이었다고 한다. 

 

지금까지 안중근 의사 관련 자료들은 일본측이 기록한 문서에 많이 의존해 왔다. 이번 <하얼빈 리포트>는 최근 개방된 러시아 역사문서, 외부 유출이 금지되었던 해외자료들를 근거로 작성되었다.

 

자료에 의하면, 안중근 의사는 지금의 국정원에 해당되는 고종 황제 직속 군사 첩보기관 '제국익문사' 비밀요원이었다!

 

고종 황제는 일본에 의해 국정 운영이 어렵다는 판단 하에 비밀리에 첩보기관을 운영한다. '총독 김두성' 이라는 이름으로 비밀 요원들을 국내외에 파견하여 정보를 수집한다. 일본에 의해 군대도 해산되었기에 대한독립을 위한 의군들을 모집하고 의군들을 지원하기 위한 자금도 독일, 홍콩에 있는 영국 은행에 예치를 해 두었으나 강대국들의 횡포로 출금을 할 수 없었다. 당시 고종 황제가 예치해 두었던 황실 내탕금은 대한독립을 위해 모인 의군 1만명에게 최신식 총기를 구입해 줄 수 있는 금액이었다고 한다. 

 

1902년 6월, 고종은 오랫동안 추진해온 황실 직속 군사 첩보기관 '제국익문사'를 출범시켰다. _140쪽

익문사는 오늘날의 국정원이나 미국의 CIA에 해당ㄷ하는 정보기관이다. _142쪽

익문사의 통신원은 실제로 모스 전신이라는 빠른 통신수단이 있어서 멀리 미국이나 연해주에서도 대한의군 총사령관과 명령을 주고 받을 수 있었다._144쪽

 

당시 고종황제의 비자금은 해외차관이나 특수상품의 판매대금으로 충당되어 왔다. 그 가운데 가장 큰 액수는 영국의 홍콩은행 상하이지점에 예치된 중국 내의 홍삼 판매대금이다._172쪽

 

조선통감부 친일매국노들은 예금주인 고종도 모르게 이토 통감의 지시로 황실의 내탕금 인출을 문서위조로 빼낸 것이다._220쪽

당시 독일은행의 조선 황실 비자금 부정인출사건은 그 후 1945년 한국이 해방된 후에 방문한 미국인 선교사 헐버트가 이승만 정부에게 독일 채권 문제를 제기하면서 일본의 이토가 허위 인출서를 작성, 금융사기로 돈을 탈취해갔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_220쪽

 

하얼빈 거사는 일본 후쿠시마 파견된 한국계 출신 익문사 소속 요원 마사코가 수집한 극비 정보에서 시작되었다.

 

그녀가 수집한 극비정보는 즉각 샌프란시스코의 국민회 총장 정재관의 귀에 들어갔다. _247쪽

 

이토가 하얼빈에 온 이유에 대해서, 책에서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만주를 분할통치하고 있던 러시아와 일본은 구미 강국들이 만주철도부설권의 입찰에 뛰어들자, 이토는 서구 세력들의 개입을 막기 위해 러일회담을 제안한 것이다._251쪽

 

안중근 의사가 우리 민족의 원흉으로 지목한 이토는 1890년대 초기부터 중국을 지배하겠다는 장기전략을 수립했고 그 중간단계로 대한제국을 침략한 것이다. 최초 일본군은 동학 농민군을 지원한 적이 있다. 그 이유는 조선 침략의 교두부를 확보하기 위한 비밀 전략이었다. 명성황후를 시해(여우사냥)하기 위해 모인 일본인들 중에는 다음과 같은 경력을 지닌 사람이었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일본 신문 '한성신보' 사장 아다치, 편집장 고바야카, 기자출신의 기구치, 주한 일본공사 서시관 스기무라, 하버드대 출신 중의원 작가 시바시로, 도쿄대 법학부 출신 호기쿠치. _103쪽

 

똑똑하다고 해서 모두 다 제대로 된 이성을 가졌다고 할 수 없는 것 같다. 일본 안에서 당대의 지식인이라는 사람들이 한 나라의 국모를 처참하게 살해하는 일에 자진해서 가담했다니. 극우 성향을 지닌 일본 우익 세력들의 행동에 혀를 내두를수 밖에 없다. 

 

한 때 일본의 세력들을 견제하고자 고종 황제는 러시아 공관에 임시로 옮겨가 있기도 하고 러시아 측에 비밀문서를 통해 군사적 협조 요청을 했었다. 그러나 러시아도 겉으로는 돕는 척을 했으나 내심으로는 일본의 견제를 막기 위한 도구로 사용했을 뿐이다. 일례로 스탈린이 집권하고 수 많은 연해주 등지의 독립운동가들이 처참한 학살을 당하고 강제 이주를 당해야했다. 

 

『하얼빈 리포트』의 시작은 노후의 빌렘 신부와 마샤 김이라는 익문사 비밀요원이 프랑스에서 다시 만나는 장면이다. 빌렘 신부는 적극적으로 안중근 의사의 마지막 가는 길에 함께 해 주었던 인물이다. 안중근 의사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버지 안태훈의 독립운동 행적도 살펴보아야 한다. 이토의 저격 후 안중근 의사하면 하얼빈으로 통하지만 사실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한 부분들도 적극적으로 알려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특히 교육사업을 통해 인재를 양성하고자 했던 노력들은 칭찬받아 마땅한 일이다. 그의 가문은 대표적인 독립운동가 가문일정도로 대부분의 가족들이 독립운동에 전 생애를 바쳤다.

 

『하얼빈 리포트』를 통해 하얼빈의 안중근이 있기까지 수 많은 이들이 대한제국의 독립을 위해 애썼다는 사실을 감추지 않고 기록해 놓고 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던 고종황제의 노력, 첩보기관 익문사의 존재, 러시아 사람으로 고종황제의 손발이 되어 주었던 손탁 등에 대해 알려주고 있다. 안중근을 다룬 영화 <영웅>을 깊게 감상하고 싶은 분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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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하얼빈의 11일
원재훈 지음 / 사계절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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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한 영웅적 인간에게 그의 본모습보다는 자기 생각에 맞는 부분만을 확대하여 어울리지도 않는 동상을 만들어 세운다. 어설픈 동상이나 정치적인 외침보다는 안중근의 한마디를 되새기는 정신이 필요하다" (338쪽)

 

『안중근, 하얼빈의 11일』은 안중근 의사의 정신을 다시 한 번 살펴 볼 수 있는 책이다. 「안응칠 역사」를 통해 안중근 의사의 생애에 대한 일대기를 살펴보면 그가 어떻게 살았는지 알 수 있지만 그가 이토를 저격한 후 순국하기 전까지남긴 말 한마디, 가족들(어머니, 동생들, 아내)에게 쓴 편지, 뤼순 형무소에서 검사와 간수에게 남긴 대화의 흔적들을 통해 그가 추구하고자 했던 정신과 삶의 목표를 더 분명히 알 수 있다. 하얼빈에서의 11일 간은 숨막힐 정도로 긴장감이 도는 기간이었다.

 

한 치의 오차 없이 거사를 성공적으로 해내야 했던 안중근 의사에게 있어서는 하루 하루가 무척이나 긴 시간이었을 것이다. 자금이 없어 창춘행을 포기하고 다시 하얼빈으로 돌아와야했던 사연, 거사를 위해 지인(김성백)에게 돈을 빌려야 했던 사연, 거사일 당일 이토를 어디에서 저격해야 하는지 등의 모든 결정은 오로지 안중근 의사 본인에 의해 진행되어야만 했다. 거사 후에도 그가 자결하지 않았던 이유도 명백하다. 세계 만방에 대한 독립의 정당성과 동양 평화를 위한 목소리를 내야했기 때문이다. 순국하는 그날까지 안중근 의사는 죽음과도 싸워야했던 나날을 보내야했다.

 

이토가 저지른 명성황후 시해 사건은 내가 이토를 동양 평화의 적으로 삼게 된 결정적 단초였다. _27쪽

 

나는 이제 도마(안중근의 호) 안중근이라는 이름으로 조선이라는 나라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갈 것이다. _28쪽

 

장소에 의해 삶이 결정된다. 안중근에게는 하얼빈이 그러했다. _60쪽

 

만주 벌판에 떨어지니 한 인간의 존재가 신과 연결되지 않고는 존재할 수 없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_66쪽

 

로맹 롤랑은 영웅이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자" 라고 했다. _92쪽

 

이순신 장군에게서 우리가 배워야 할 정신이 있다면 그것은 상대를 미리 알고 준비를 하는, 즉 이겨 놓고 싸우는 그 정신이다._104쪽

 

역사란 참으로 사소한 일로 위대한 장면을 만들어낸다. _140쪽

 

상하이에서 안중근은 두 개의 큰 벽을 만나게 된다. 안중근의 눈에 비친 중국에 사는 동포들은 조국의 운명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일단 먹고살기에 급급한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에게 조국은 '먼 나라' 일 뿐이었다. _210쪽

 

문은 걸어 잠그면 벽이 된다. _ 202쪽

민영익과 같은 고관대작이 결코 문이 될 수 없음을 절감하고 길을 떠났다. _203쪽

 

 

뤼순 지방법원으로 결정한 이유는 청일전쟁의 전리품으로 점령한 뤼순이 국제 여론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롭고, 단독판사 제도를 시행한 탓에 일본 정부의 의지대로 조종할 수 있기 때문이다._210쪽

뤼순은 일본과 멀리 떨어진 곳이고 단독판사가 재판을 진행하기 때문에 안중근 사건을 일본 정부의 뜻대로 끌고 갈 수 있었다. _211쪽

뤼순 감옥은 안중근 의사와 더불어 민족의 선각자 단재 신채호와 우당 이회영이 옥사한 곳이기도 하다._241쪽

 

삼흥학교(안중근 의사가 가산을 팔아 진남포에 세운 학교)는 훗날 오성학교로 교명을 바꾸었다. _231쪽

 

안중근 의사가 수감되었던 독방은 다른 옥사에 비해 매우 특별한 장소였다. 형무소장의 집무실과 거의 같은 규모였다._244쪽

일본에서 특수 제작된 호송용 마차가 바로 일제가 안중근 의거에 얼마나 신경을 쓰고 있는지를 보여 주는 증거물이다._260쪽

 

두려움은 욕심에서 오는 거지요. 내가 동양 평화를 이야기하는 것도 그런 맥락과 이어집니다. 욕심을 버리면 두려움도 없습니다. _264쪽

위이불맹, 위엄이 있으되 사납지 않다. 정치를 하기 위해 지도자가 갖추어야 할 자질. 논어. _264쪽

 

조국의 현실을 외면하는 친일파와 하루하루 살림 걱정을 해야 하는 사람들의 무관심에 안중근은 상처 입은 짐승처럼 외로웠다. _276쪽

 

단지 동맹을 정천 동맹이라고 명명하고. 1909년 3월 5일이었다. 당시 엔치야 하리 마을에서 결성된 '바른 하늘 아래 맹세'인 '정천 동맹'은 대부분 의병 출신 동지들이었다. _279~28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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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안쏠로지 - 다시 안중근을 읽는 시간
(사)안중근의사숭모회/기념관 지음 / 서울셀렉션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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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의 모든 것, 안쏠로지

 

이 책에는 안중근 의사의 옥중 집필서이자 안중근 자서전인 『안응칠 역사』가 번역되어 있다. 한문으로 된 안중근 자서전이 한글로 읽기 쉽게 번역되었다.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남녀노소 구분없이 한 번 쯤은 읽어봐야하지 않을까. 최근 영화관에서 상영된 정성화 주연 「영웅」의 스토리가 안중근 자서전인 『안응칠 역사』에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다. 만약 옥중에서 안중근 의사가 자신의 자서전을 쓰지 못했다면 안중근 의사의 32년 개인사를 알 수가 없었을 것이다. 이에 『안응칠 역사』는 소중한 사료로 취급되어야 할 것 같다. 

 

『안응칠 역사』에는 안중근 의사가 조국의 독립을 위해 얼마나 희생하고 노력했는지 한 눈에 볼 수 있다. 나라 잃은 백성으로 한을 풀기 위해 고향을 떠나 의병에 가담하고 목숨을 잃을  뻔 한 여러 번의 고생 끝에 블라디보스토크에 둥지를 트는 과정이 담겨 있다. 어렸을 때에는 죽을 고비도 넘긴 사연, 아버지와 도와 동학당과 전투를 벌인 일, 부패한 관료들의 민초들을 향한 몹쓸 짓들을 방관하지 않고 불의를 꼬집다 변고를 치룬 일, 아버지 안태훈 진사가 성당에서 서너달 숨어 지내면서 신앙을 받아들이고 그의 가족들 모두 천주교로 입교한 이야기, 조국의 독립을 위해 의병으로 국내 진공 작전을 펼친 일, 그리고 영화 「영웅」의 주 스토리인 하얼빈 의거의 드라마틱한 사건의 전말, 뤼순 형무소에서 사형 직전까지 만났던 간수들, 일본인 법관들, 동생들과의 회후 등의 일화가 『안응칠 역사』에 일일히 담겨 있다. 

 

특히 『안응칠 역사』 즉 안중근이 자서전을 쓴 시점이 무척 중요한 것 같다. 사형 선고를 받은 후라는 점이 보통 사람과는 다른 면이다. 짧은 32년의 자신의 역사를 구체적으로 기술하였으며 자신의 이토를 저격한 이유를 명확히 밝히고 있다. 영화 「영웅」에서도 미조부치 검찰관 앞에서 이토를 가해한 이유 15가지를 분명하게 말했다. 이 내용도 자서전에 실려 있다. 

 

안중근은 국내외 정세를 정확히 판단하는 전문가임을 자서전에서도 살펴 볼 수 있다. 

 

"더구나 일본은 불과 오 년안에 반드시 러시아와 청나라, 미국 등 세 나라와 전쟁을 하게 될 것이므로, 그것이 한국의 큰 기회가 될 것입니다" (212쪽)

 

먼 훗날의 일본의 패망을 이미 예견하고 있었다. 

 

안중근 의사는 한국 사람이 일본 법정에서 일본 사람들에 의해 자신의 죄목이 판결되는 점에 대해 조목조목 반박하며 만국공법으로 처리되어야 하는 이유를 자선전에서 밝히고 있다. 

 

"그때 김두성과 이범윤 등이 함께 의병을 일으켰는데 그 사람들은 전에 이미 총독과 대장으로 임명된 이들이다. 나는 참모중장으로 임명되었다." (214쪽)

"현재 만국 공법에 사로잡는 적병을 죽이는 법은 없소. 어딘가에 가두어 두었다가 뒷날 배상을 받고 송환하는 것이 법이오."(217쪽)

 

의병 활동을 하면서 풍찬노숙한 사연도 곳곳에 기록되어 있다. 

 

"더구나 산이 높고 골짜기가 깊어 인가도 전혀 없는데, 사오 일을 헤매면서 한 끼니도 먹지 못해 배가 고프고 발에는 신발조차 신지 못했다. 굶주림과 추위의 고통은 참으로 견디기 어려웠다. 풀뿌리를 캐어 먹고 담요를 찍어 발을 싸매고서 서로 위로하고 보호하며 무작정 걷노라니" (221쪽)

 

독립운동가의 말로 표현할 수 없을만큼 희생을 통해 이 나라가 지금껏 지켜 올 수 있었음에 숙연해질 수 밖에 없다. 

 

영화 「영웅」 시작과 동시에 안중근 역할을 맡은 정성화 배우가 하얗게 눈 덮힌 들판에서 동지 열 두사람과 함께 손가락을 끊어 함께 맹세하는 장면이 나온다. 안중근 자서전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마침내 열 두 사람이 각각 왼손 약지를 끊어 그 피로 태극기 앞면에 글자 넉 자를 쓰니 대한독립이었다." (227쪽)

 

영화 「영웅」 의 감동이 아직도 뇌리에 새겨 있다. 덕분에 안중근 관련 책을 찾게 되고 구제적으로 관련 내용들을 읽으니 마음 가짐이 새로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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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의 동양평화론 - 한.영.일.중 4개국어판
안중근 지음 / 서울셀렉션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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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가 1909년 10월 26일, 러시아 관할 하얼빈에서 이토를 저격한 후 1910년 2월 14일 뤼순 법원에서 사형 선고를 받는다. 그리고 1910년 3월 26일 사형 당한다. 사형 선고를 받고 사형 당하기 직전까지 안중근은 두 권의 책을 집필한다. 옥중에서. 하나는 1910년 3월 18일경 자서전 『안응칠 역사』이고 또 하나는 미완의 유고집인 「동양 평화론」이다. 

 

「동양 평화론」의 원본은 현재 그 소재가 불분명하다고 한다. 단 일본인에 의한 한문 필사본(1979년)이 남아 있어 이것을 토대로 번역하였다고 한다. 

 

「동양 평화론」에서 안중근은 본인이 왜 이토를 저격했는지 국제 정세와 일본의 야욕을 적나라하게 실체를 밝혀냈다. 러일 전쟁의 당위성에 대해 일본 천황은 동양의 평화와 조선의 독립을 명분으로 내세웠다고 말한다.

 

" 동양 평화를 유지하고 대한 독립을 공고히 한다"  일본 천황 선전포고 조서 中

 

청과 조선이 러일 전쟁 시 일본을 응원한 이유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이토는 러일 전쟁 승리 뒤에 만주를 비롯하여 조선까지 외교권을 박탈하였다. 

 

「동양 평화론」은 청, 조선, 일본 세 나라가 서구 세력에 맞서 동양 평화를 위해 힘을 모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심지어 중립지대를 만들어 함께 쓸 공용화폐를 상용화하자는 제안까지 한다. 지금으로 말하면 유럽경제공동체 EU를 연상케 한다. 100년 전의 생각이라고 하니 안중근은 앞선 간 선각자임에 틀림이 없다. 아쉬운 것은 일본의 강경파의 여론 때문에 안중근의 사형은 조기 집행된다. 만약 조금이나마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면 「동양 평화론」의 완성본이 탄생될 수 있었다. 

 

안중근의 사상과 주장에 대해 좀 더 알아볼 수 있는 자료 중에 하나가 「청취서」다.  「청취서」는 안중근 의사가 1910년 2월 17일에 히라이시 뤼순고등법원장과의 면담 내용을 서시가 기록한 내용이다. 「청취서」에서도 안중근은 자신이 이토를 저격한 이유는 개인의 자격이 아닌 대한민국 독립군 참모중장의 자격으로 하였으며, 동양 평화를 위해하는 이토의 욕심을 없애기 위한 마지막 방법이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일본이 해야 할 급선무로 재정 정리라고 주장한다. 

 

"재정 정리란, 귀순에 동양평화회를 조직해 회원을 모집하고 각 회원에게 1엔을 회비로 징수하는 것이다. 일본, 청, 한국 국민 수억이 이에 가입하리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은행을 설립해 각 나라가 공유하는 화폐를 발행하면 반드시 신용을 얻게 되니 금융은 자연스럽게 돌아갈 것이다. 이렇게 하면 일본의 금융은 비로소 원만해지고 재정도 완전해 질 것이다" 「청취서」 中

 

옥중에서 갑자기 생각해 낸 이론이라고 보기에는 세밀한 전략을 제시한다. 그만큼 오래 전부터 동북아시아 정세를 적확히 파악하고 있었으며 이론적 배경이 튼튼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은 한국어, 영어, 일본어, 중국어 등 4개 국어로 번역된 것을 모아 놓은 책이다.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한 번 쯤 읽어봐야 되지 않을까 싶다. 지난 12월 21일 개봉된 <영웅>을 관람한 뒤 읽어보면 더더욱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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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워드 동남아 - 30개의 주제로 읽는 동남아시아의 역사, 문화, 정치
강희정 외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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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는 일찍이 큰 화물선을 잘 짓는 것으로 유명했다" (108쪽)

 

누구나 선입견을 가지고 있다. 선입견을 가지고 바라보면 왠지 위험스럽고 꺼려진다. MZ세대에 대한, 어떤 대상에 대한.... 사람마다 고정적인 관념관점이 있는데 이것이 밖으로 표출될 때 다양한 문제가 생겨난다. 『소년을 읽다』의 저자 서현숙 교사는 소년원에 있다고 해서 학생이 학생이 아닌 것은 아니다, 학생은 학교 밖에 있다고 해서 학생이 아닌 것도 아니다라고 말한다. 정치적으로 봐도 그렇다. 『한반도 특강』의 저자들은 이구동성으로 북한의 미사일 실험 발사 자체를 시간 벌기용이라는 지적하는 이들을 향해 선입견을 깨야 한다고 주장한다. 국제 사회의 압박으로부터 김정은 정권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으로 봐야 한다는 식이다.

 

그렇다면 동남아시아에 대해 가지고 있는 선입견은 없을까? 동남아시아에 대한 공부를 시작할 때 다산 정약용의 마음을 가진다면 어떨까? 

 

선입견 없이 문제에 집중한다. 이것이 평생을 일관한 다산의 공부 방식이었다. 

 

동남아시에 대한 선입견들을 정리해 보면 이럴 것 같다. 낯설고 위험한 지역, 뒤떨어진 문화와 기술, 위생적이지 못한 음식, 열등한 외모 등등. 그러나 인도네시아를 소개하는 책 내용 중에서 대표하는 문장을 뽑아 놓았듯이 동남아시아는 전혀 그렇지 않다. 인도네시아 같은 경우는 일찍이 큰 화물선을 잘 짓는 것으로 유명했다고 한다. 대략 970년 경에 말이다. 

 

"다양한 금속괴들은 금속의 함양을 일정하게 맞추는 제련과 이 과정을 거쳐 얻어낸 금속을 일정한 크기의 괴로 만드는 주물 기술이 상당한 수준에 있었다는 것도 짐작하게 해 준다' (106쪽)

 

9세기에는 인도네시아에서 아프리카까지 항해가 이루어졌고, 역사적 자료에 의하면 곤륜박이라는 인도네시아에서 온 배가 원거리 항해 시 600명에서 700명까지 승선했다고 한다. 여기서 곤륜은 옛 인도네시아 국가명이다. 

 

캄보디아 크메르 제국은 14~15세기 아시아 최고의 대제국을 이뤄낼 정도로 문명이 발달했었다. 벼농사를 위한 관개 시설 건축은 수 많은 노동력과 기술이 있어야 가능했다. 캄보디아의 기술력이 어느 수준이었는지를 알 수 있는 분명한 근거가 된다. 필리핀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1970년대까지만 해도 필리핀은 우리의 국력보다 우위에 있었고 아시아에서도 앞서가는 국가였다. 

 

"1966년 박정희 정부는 필리핀 국제미작연구소와 공동으로 통일벼라는 새 품종을 개발했다" (113쪽)

 

박정희 정부 때는 우리가 식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종자 기술이 필요했었는데 손을 내밀었던 나라가 필리핀이었다는 사실을 보면 결코 필리핀을 위시한 동남아시아 국가들이 미개한 국가들이 아니었음을 역사가 증명해 주고 있다. 그럼에도 왜 많은 이들이 아직까지 동남아시아를 선입견으로 바라볼까?

 

역사적 사료를 보면 '조공'이라는 문구에 대한 선입견도 크게 작용하는 것 같다. 조공을 일방적인 헌납으로 오해하는 대중적 선입견이 인도차이나 반도에 있는 동남아시아 국가들이 중국보다 문명 수준이 뒤떨어져 있었던 것이 아니었느냐 생각을 가지게 한 것 같다. 유럽의 제국주의 열풍도 한 몫을 한 것 같다. 스페인, 포르투갈, 네덜란드의 중계무역은 동남아시아를 원료의 창구로만 인식하게끔 했다. 유럽인들의 식탁에 오르는 음식의 대부분이 향신료를 첨가한 식재료였는데 값비싼 향신료의 출처가 바로 동남아시아였던 것이다. 무력으로 식민 통치를 하며 원주민들의 고유한 문화와 생활 습관을 송두리째 바꾼 유럽 열강들의 폭력에 동남아시아는 고스란히 피해를 보아야했다. 이러한 아픔의 역사까지 담아낸 책이 『키워드 동남아』다. 

 

『키워드 동남아』를 통해 동남아를 단순히 관광을 즐길 목적의 여행지가 아닌 동남아 사람들이 살아가는 문화, 역사, 정치 등 배워야 할 동남아로 인식 전환이 이루어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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