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거리가 책읽기에 편중되었던, 지금처럼 인터넷이 활발하게 보급되지 않았던 시기에 부족하지 않은 양서(良書)와 함께 내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보낼 수 있었던 것에 부모님께 늘 감사하다.
나는 아직까지도 최고의 연애 소설은, 레프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라고 믿는다.
고백하자면 처음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 『전쟁과 평화』 『부활』을 읽었을 때, 내 가슴을 떨리게 하고 내 정서를 건드렸던 것은 제정러시아의 전후사를 관통하는 이념이나 휴머니즘, 시대적인 고찰 같은 심오한 것이 아니었다. 나를 미친듯이 사로잡았던 것은 바로 이국의 배경과 함께 펼쳐지는 불륜과 비극적인 사랑 그리고 삼각관계였다.
그러나 이들 소설이 그저 전쟁통에 귀족들이 연애하고, 불륜을 벌이고, 방탕한 귀족과 매춘부의 신분을 넘나드는 그렇고 그런 사랑이야
기에 지나지 않았다면 톨스토이 사후 1세기가 다 되어가는 시대를 살고 있는 지금의 우리들은 그의 소설을 읽어 볼 기회조차 갖지 못 했을 것이다.
이것이 시대와 세대를 아우르는 고전의 힘일까.
동시대를 살면서 자신의 시대를 통찰하고 관조하려고 노력했던 작가의 시선은 시대의 통속 안에 머무르지 않고 강한 생명력을 가지고 자생한다. 이러한 자생력이야말로 고전 문학의 힘이고 통속 소설과 고전 소설을 가르는 차이일 것이다. 그리하여 소설은 누구나 쓸 수 있지만 문학은 누구나 할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오늘의 시선으로 사물을 조명하면서 기나긴 숨결의 장편소설을 쓰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나는 그 속에 나 자신의 모든 구상들을 결합시킬 수 있다. - 레프 톨스토이, 『부활』집필 중
재미있는 사실은 이런 저런 이유로 톨스토이의 러시아는 내게 냉전 체제 역사 속 소련이라는 이미지보다는, 소설이 가져다 준 상상속에서 존재했던 한 세기 전의 설원으로 뒤덮인 광활하고 거대한 시베리아 대륙으로 성큼 다가왔다는 점이다. 또한 그때의 정서적 울림은 쇼스타코비치의 왈츠를 통해서 지금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영화 《Eyes wide shut》의 충격적인 마지막 장면이(내겐 그랬다) 숨 쉴 틈도 없이 곧장 까만 화면으로 바뀌고 크레딧이 올라가는 위로 흐르던 『Second Waltz』는 이후 국내 영화, 드라마 등에 삽입되면서 이제 우리나라에선 완전히 대중적인 레퍼토리가 되었다. 그런 점에서 국내에서 쇼스타코비치의 『Second Waltz』를 들을 수 있는 앨범중 가장 흔하게 접할 수 있는 앨범은 아마 Chailly와 Jansons가 지휘를 맡은 앨범이 아닐까 싶다.
Decca에서 발매된 Riccardo Chailly의 『Shostakovich The Jazz Album』은(개인적으로 중간 두 곡 정도 늘 스킵하는 곡이 있지만) Jazz suit 1, 2번 전곡이 들어있다. 전반적인 곡들이 모두 즐기기에 부담없고 무난한 레퍼토리로 구성되어 있으며 Second Waltz는 이 앨범의 13번 트랙에 있다.
Chailly가 가볍다면 Jansons는 진지하다. Second Waltz를 좀 더 제대로 감상하고 싶다면 개인적으로 EMI에서 발매된 Mariss Jansons의 『Symphony No.11, ‘1905’』를 추천한다. 이 앨범에는 11번 심포니말고도 Jazz suit 1번 전곡과, suit 2번 중 6번이 수록되어 있는데 Second Waltz(6번)는 8번 트랙에 있다. Chailly와 비교해서 들어보면 지휘자의 해석이 같은 곡을 어떻게 다르게 표현하는지 알 수 있다.
조심스럽지만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감상은 Chailly에 비해 Jansons의 지휘가 훨씬 응집력이 있고 웅장한 힘이 느껴진다. 톨스토이의 소설을 읽으면서 내가 상상했던 그 차갑고 서늘한 대륙처럼.
전혜린은 유고 에세이『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에서 쇼스타코비치의 심포니 5번을 즐겨듣는다고 했다.
그러나 내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을 때 틀어 놓은 판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의 심포니 제5번이다. 왜 그런지 그걸 듣고 있으면 생각이 정돈되어오는 것 같다. 특히 무언지 웅장하고 엄숙한 시작과 도중의 수많은 군화의 행진 같은 장조가 몹시 마음에 든다. 개인적인 사소한 것, 일상적인 것을 넘어서서 더 큰길로 눈을 돌리라고 이 음악은 말해주는 것만 같다(…). - pp.169-170,『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 대목을 읽고 언젠가 쇼스타코비치의 15개의 심포니를 꼭 다 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난다.
앨리스와 빌리, 쇼스타코비치, 전혜린... 이들이 자신의 삶에서 공통적으로 원한 것이 있다면 아마도 이런 순간이 아니었을까...
전에는 완벽한 순간을 여러 번 맛보았다.
그 순간 때문에 우리가 긴 생을 견딜 수 있는 그런 순간들을…….
- p.140,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