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미는 독서』는 일종의 베스트셀러 감상기인데 이 책을 읽기 전에 많이 망설였던 것은, 저자가 일본인인 이 책 목차의 거의 전부가 일본 작가가 쓴 일본내 베스트셀러로(1999-2001) 채워져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어디선가 주워 읽은 이 책의 서평이 워낙 재미있었기에 적절한 선에서 타협을 했다. 그러니까 구입하기 전에 도서관에서 대출해서 먼저 읽어 보는, 나름의 검증 시스템에 이 책을 포함시키는 것이다. 책을 읽은 소감은 "아, 정말 재미있다!"
책을 읽기 전에 망설였던 이유는 책을 읽고 나서 호기심으로 다가왔다. 적어도 그 동안 내가 읽은 일본인 작가 중에 이 작가만큼 글을 재미있게, 맛깔나게 쓰는 작가는 보지 못 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치사는 작가가 아니라 번역자에게 돌려야 할 것이지만 어쨌든 장마다 펼쳐지는 작가의 육성이 박장대소하게 재미있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며칠 전 시부야역 근처에서 야식을 먹고 있을 때 생긴 일이다. 옆자리에 대학생이나 전문대생쯤으로 보이는 남학생 둘이 앉았다. "셰익스피어가……"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허허, 요즘 시대에 보기 드문 젊은이들이군. 셰익스피어가 어쨌다고?
"……누구더라?"
셰익스피어가 누구더라! 라는 말만 들어도 콧구멍에서 밥알이 튀어나올 지경인데, 질문을 받은 학생이 놀라는 기색도 없이 대화가 이어졌다.
"글쎄. 들어본 이름인데.:"
"유명인이라는데, 영 이미지가 안 떠오른단 말이야."
"그러네. 사진을 본 적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야 그렇지. 누구인들 사진을 본 적이 있으랴.
아마도 그들은 개봉 중인 영화 <셰익스피어 인 러브>의 포스터를 본 게 아닐까(설마 영화를 보고나서 나누는 얘기는 아니겠지). - p.32,『취미는 독서』

이쯤에서 확인에 들어가지 않을 수 없다. 냉큼 M군에게 전화했다.
"셰익스피어(라고) 아나?"
"어."
그렇다. 도스토예프스키를 모르는 M군도 아는 '셰익스피어'인 것이다. 과연 저자의 콧구멍에서 밥알이 튀어나올만 하다.
저자와 나의 생각이 일치할수록 독서가 신이 나는 것은 당연하다. 우리나라는 물론이고 이웃나라 일본도 미국도 베스트셀러 기준이 백만 부라는 사실이 흥미롭지만, 하여간 베스트셀러에 대한 저자의 정의가 명쾌하다. 이를테면 100만 부 팔리는 책은 '평소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이 사는 책이다.(p.84) 처럼.

『취미는 독서』를 읽게 된 계기도 그렇지만 내 경우 누군가 서평에서 책을 인용한 한 줄 혹은 한 문장에 혹해서 그 책을 읽게 되는 일이 빈번한데, 이틀 전에 주문해서 바로 어제 받은 다니엘 글라타우어의『새벽 세 시, 바람이 부나요?』도 이 경우에 해당한다. 이 소설의 특이점은 처음부터 끝까지 두 남녀가 주고 받은 이메일로 채워져 있다는 것이다. 나로 하여금 구매 버튼을 누르게 한 문제의 문장은 이것이다.


10분 뒤 Re:
레오, 그만 끝내죠. 당신이야말로 결정적인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넘어갔어요. 그 질문을 다시 한번 하죠. 레오, 저를 만나고 싶어요? 그렇다면 만나세요! 아니라면 앞으로 어떻게 할지, 혹은 이 관계를 지속하기는 할 것인지, 당신 입장을 얘기해보세요.

20분 뒤 Aw:
어째서 지금까지 해온 것처럼 글로만 대화를 나눌 수는 없는 건가요?

2분 뒤 Re:
나의 메일 파트너가 나를 만나보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납득할 수가 없어요. 구제불능 레오, 어쩌면 제가 가슴 큰 금발 여자일 수도 있잖아요!!!

30초 뒤 Aw:
그렇다고 제가 뭘 어쩌겠습니까?

20초 뒤 Re:
뚫어지게 보시구랴.  - p.117-118,『새벽 세 시, 바람이 부나요?』
 

이 외에도 오랜만에 『장정일의 독서일기』를 읽었는데 2권과 3권이 그것이다. '독서일기' 시리즈 중 품절-절판으로 구입을 못했던 이 두 권이, 글쎄 그 사이 다시 출간되고 있는 게 아닌가. 얼른 주문, 소파 바로 옆 손을 뻗으면 가장 잘 닿는 책장에 꽂았다. 그리고 후루룩 맛있게 읽은 그의 독서일기는 역시 실망시키지 않는다. * 다만 3권은 시기가 그래서였겠지만 『내게 거짓말을 해 봐』에 관한 작가의 해제(라고 해야 할지)가 (좀) 지나치다 싶게 등장한다.
그 중 재미있어서 색인을 해두었던 문장을 옮긴다.

(전략)남성 에로시티즘의 분리적 성격과 여성 에로티시즘의 통합적 성격을 단적으로 나타내는 예를 들면 이렇다. 남자는 여자가 아름답기만 하다면 그녀의 직업이 화장실 청소부라 할지라도 상관치 않는다. 그러나 여자는 남자가 아무리 동하게(?) 생겼다 할지라도 그의 직업이 그렇다면 동침하지 않는다. 에로티시즘을 앞에 놓고 남자는 여자의 사회적 지위·계층·신망·명성에 신경 쓰지 않지만, 여자는 그 반대. 남자는 여자의 얼굴, 궁극적으로는 성기만을 향해 돌진하지만('돼지 얼굴 보고 잡아 먹나?'), 여자에게 에로티시즘은 최종적인 고려사항에 불과하다.
남자는 자신의 성행위를 순간적인 도취로 여기지만 여자는 성적도취와 연애를 혼동한다. 남자의 육체와 영혼은 분리되어 있지만 여자에게는 분리되지 않는다. 하므로 여자는 사랑하는 남자의 손을 잡고 광장으로 나가고자 하며, 남자는 그녀를 밀실에 감추어 두고자 한다. 여자는 자신의 사랑을 공적인 영역으로 끌고 나가 확인하고 싶어하며 남자는 자신의 사랑을 사적인 영역 가운데 보존하려 든다. 여자의 에로티시즘은 시간적/공간적 지속을 원하며 미래를 건설하려고 들지만, 남자는 오히려 현실과 미래를 망각하기 위해 에로티시즘은 사용한다.(중략)
  - p.122,『장정일의 독서일기 2』

'예쁘기만 하면 되는' 남자의 에로티시즘을 이보다 명쾌하게 설명할 수 있을까. 늘 생각하지만 그의 독서세계는 참 대단하다. 자신의 생각을 개념화하고 개념화한 그것과 부합되는 가장 적확한 단어를 골라내어 말과 글로 완성한다는 건 참으로 부러운 능력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