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리우의 불안한 치안'이라는 제목의 동영상을 봤는데 조금 보다가 화면을 껐다. 내 비위를 너무 과대평가했던 모양이다. 내 비위야 그렇다 치고 다음은 영상으로 인해 깨달은 몇 가지 사실들.
올해가 올림픽이 열리는 해라는 것,
올림픽 개최 도시가 브라질 리우라는 것,
리우 올림픽 개막식이 이번주 토요일이라는 것,
이 세 가지를 오늘 새벽에야 알았다. 그나마 잊고 있었던 걸 떠올린 것도 아니다. 불과 5분 여 본 것만으로도 끈적이는 타르가 정신에 들러붙은 것처럼 찜찜하고 불쾌하고 역겨운 동영상 아래 달린 댓글들을 보고서 알았다. 한마디로 나는 올림픽에 전혀 관심이 없었던 거다.
월드컵에 이어 올림픽까지. 왜 갑자기 브라질일까.
브라질은 내겐 개인적으로 두 가지 사건으로 기억되는 나라인데 첫 번째는 초5 때 단짝이 가족 이민을 간 나라로, 두 번째는 존 업다이크의 소설로 깊은 인상이 남은 나라다.
대개 이민이라 하면 미국이나 캐나다 등의 북미이거나 혹은 영국, 프랑스 등의 유럽이었기 때문에 '아마존' 밖에 안 떠오르는 브라질로 간다니 어린 마음에도 우리는 친구를 걱정했다. 구체적으로 뭘 걱정하는지도 모르면서 걱정했는데 초딩의 단순한 논리로 부유한 친구네가 왜 '하필' 브라질로 이민을 가는지 좀처럼 이해를 못했다. 브라질은 그만큼 내겐 오지였고, 지구 촌구석이었다. 나중에 머리가 조금 더 굵어진 후엔 내가 어지간히도 북미 중심의 사고를 했구나 싶기도 했지만 여튼 당시에는 그랬다.
그리고 존 업다이크의 소설『브라질』... 이 소설을 어떻게 얘기해야 할까.
![](http://image.aladin.co.kr/product/1525/92/cover150/0141188944_1.jpg)
'인식의 저변 확장'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내 이십대의 시작은 이 소설이 열었다고 봐도 무방한데 그때도 지금도 한결같이 하는 생각은 '이 소설을 읽다니 지지리 운도 없지'.
카프카의 문학론은 언제나 공감하고, 추천 백만개를 날리고 싶고, 자주 인용하지만 그것도 객관화가 가능할 때 얘기이지 도끼와 망치가 두드리는 게 내 머리통이 되면 사정이 달라진다. 내 감성은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보드랍고 연하고 깨어지기 쉬운 멘탈을 방패로 두르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1학년 여름방학 때 친구네 책장에 꽂혀 있던 낡은 책을 우연히 꺼냈다가 앉은 자리에서 다 읽고 나는 한동안 후유증을 겪었다.
업다이크의 대표작이 '토끼 시리즈'라고들 하지만 내겐 업다이크 하면 단연 '브라질'이고 이후 내 머릿속에서 업다이크의 인상은 이 소설과 함께 박제되었다.
절판된 장편소설『브라질』은 인종, 계층, 계급, 성(性), 종교... 유사 이래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차별이 등장한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주인공인 연인들의 배경부터가 그렇다.
(아마 외교관인가 정치가였던 걸로 기억하는)고위급 공무원의 딸이자 백인인 이사벨과 빈민가 하층민이자 부랑아인 흑인 트리스탕은 사랑에 빠진 연인이지만 그들이 넘어야 할 장애물은 너무나 많다. 결국 겪을 수 있는 모든 시련을 겪은 끝에 마지막으로 이사벨은 주술의 힘을 빌어 자신과 트리스탕의 피부색을 바꾼다. 그리하여 백인의 피부색을 갖게 된 트리스탕은 그가 모체의 자궁에 배태되는 순간부터 유산으로 물려받았던 그 모든 편견과 차별로부터 벗어나 비로소 주류사회에 편입된다. 여기에서 끝났더라면 아마 이 소설은 그렇고 그런 로맨스 판타지에 머물렀을 것이다. 그러나 소설은 기어코 엔딩에서 화룡점정을 찍는다.
트리스탕은 피부색을 바꾸고 이사벨의 배경을 획득함으로써 자신에게 쏟아지던 모든 차별과 편견의 속박에서 벗어나지만 단 하나 자신의 근간을 이루는 본질은 벗어던지지 못한다. 피부가 하얗게 변하고 돈과 권력을 쥐어도 그의 본질은 하층민 부랑아 흑인이다.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은, 본질을 규정하는 것은 형상이 아니며 형상은 말그대로 껍데기일 뿐이라는 것이다. 껍데기와 본질이 일치하지 않으니 트리스탕은 물리적으로는 모든 것을 다 가졌으나 정신적으로는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부초처럼 어딘가 불안하다. 그리고 트리스탕이 주류의 삶에 완전히 익숙해졌을 때 소설은 처음으로 되돌아간다. 처음 이사벨을 만났던 해변으로 간 트리스탕은 자신의 어린 시절과 닮은 흑인 부랑아의 칼에 찔려 죽어간다.
이사벨은 모든 남자의 아이를 가졌지만 단 한 사람, 사랑하는 트리스탕의 아이는 가질 수 없었다. 이는 끝내 합일을 이룰 수 없는 이사벨과 트리스탕의 본질을 매우 강박적으로 보여준 일종의 우화이기도 하다.
『브라질』의 엔딩은 오랫동안 나를 놓아주지 않았는데 책장을 덮을 당시엔 작가 때문에 불쾌했고, 시간이 좀 지나서는 이사벨 때문에 슬펐고, 시간이 더 많이 흐르고서야 비로소 트리스탕을 위한 해피엔딩이라고 수긍하게 되었다.
트리스탕을 찌른 건 과거의 자신이며, 찔린 건 거짓 껍데기였으며, 거짓 껍데기를 벗어던지며 트리스탕은 본질을 되찾는다. 결국 트리스탕은 스스로 자신의 껍데기를 찌르고 그것으로부터 해방되었던 것이다.
쉽진 않았지만 어쨌든 나는 작가와 화해한 것이다.
나는 오랫동안 업다이크가 브라질리언이라 철썩같이 믿었다. 그만큼 소설 속 브라질은 사실적이고 섬세하다. 존 업다이크가 미국인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잠깐이지만 인지부조화를 겪었는데, 그도 그럴 것이 94년에 출간되자마자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다는 얘기가 하나도 안 이상한 이 소설은 브라질을 정의하는 모든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 금기와 본능과 광기가 전복되고 해체되고 조롱당한 후의 카니발의 새벽을 훔쳐본 기분이 드는 이 소설은, 다시 생각해도 스무살 새내기가 읽기엔 무리였다는 생각이 든다.
BLACK is a shade of brown. So is white, if you look. On Copacabana, the most democratic, crowded, and dangerous of Rio de Janeiro's beaches, all colors merge in one joyous, sun-stunned flesh-color, coating the sand with a second, living skin.
- i. The Beach, 『Brazil』
발췌는 소설『브라질』의 모든 것을 함축하고 있는 첫 문단.
그리고 별 거 아닌 얘기_.
i. 한때 절판된 이 소설이 다시 읽고 싶어 아마존닷컴 장바구니에 담아놓고선 까맣게 잊었는데 새벽에 오랜만에 생각이 나서 아마존닷컴에 접속했다. 그리고 연관 카테고리 '이 책 구매자가 구매한 다른 책'에 한강의『Vegetarian』이 있어 리뷰를 잠깐 읽던 중에 나도 모르게 하하- 웃었다. 이유는 카테고리만큼이나 두 소설에 대한 리뷰어들의 호불호가 비슷해서인데 두 소설을 좋아하는 이유도 같고 싫어하는 이유도 같으니 재미있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고.
ii. 문동은 나머지 토끼들을 언제 출간해줄건지...?
iii. 토끼도 있고 역자 김진준도 있는데 혹 문동이 복간을 해주려나 기대하면 무리수인가.
iv. 테리 길리엄의 <여인의 음모>는 원제가 <브라질>이다. 아닌 줄 알면서도 소설과의 연관성을 찾으며 봤던 이 영화는 다 보고 나면 두 번 분노한다. 국내판 제목에 한 번, 테리 길리엄의 제목에 또 한 번.
v. 올초에 나온 츠바이크의 신간이 마침『미래의 나라, 브라질』이다. 신간 소식을 보고도 조금 시들했는데 역시 읽어봐야겠다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