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그대로 검은색, Black에 대한 책이다. 검은색 하나를 기반으로 여러 관점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다. 역사로, 문학으로, 패션으로, 예술로... 혹시 지겨우면 어쩌지? 도대체 색 하나 지고 이야기를 500페이지 넘게 쓴다는 것이 말이 되냐 이거다.. 라는 기우는 몇 장 넘기면서 깨끗이 사라졌다. 술술술 넘어가게 잘 썼고, 읽은 다음이 궁금해서 퇴근하자마자 아무리 졸려도 펼쳐보게 되었다. 이 방대한 서적을 번역하느라도 굉장히 힘들었을 듯... 가끔 보이는 오타들이 눈에 거슬리기는 했지만 (아 이 오타에 대한 민감성이라니) 힘들었을 번역자를 생각하면서 질끈, 눈을 감아 본다.

 

 

하얀 줄은 빛의 파장을 완전히 반사하기 때문에 검은 줄보다 두꺼워 보이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검은 줄이 훨씬 강렬한 존재감을 갖는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 인류가 검은 점판암에 백악으로 그림을 그리지 않고 밝은 암석 위에 목탄으로 그림을 그린 이유, 하얀 잉크 대신 검은 잉크를 사용하는 이유, 1980년대 컴퓨터화면이 검은 바탕에 하얀 글자를 입력하던 것에서 흰 바탕에 검은 글자를 입력하는 것으로 바뀐 이유다. (p13)

 

 

아. 책을 숱하게 보면서도, 하얀 종이에 검은 글자를 넣는 게 너무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검은 종이에 하얀 글자를 넣어도 되는 것을. 물론 프린터에 검은 색을 인쇄하느라 들 토너를 생각하면 그렇게 안 한 게 합리적일 거란 생각은 들지만.

 

 

피, 취기, 진홍색 간음, 이 삼박자 속에 존재하던 죄는 어떻게 검은색으로 바뀌었을까? 이는 기독교의 전파와 동시에 벌어진 사건으로, 기독교가 점점 죄를 죽음과 연관시키면서 일어난 일이다. 인류의 최초의 조상이 죄를 저지르는 바람에 모든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다. 죄가 죽음 또는 영혼의 죽음을 의미한다면, 죽음은 곧 죄의 결과물이며 따라서 죄는 마땅히 죽음의 색을 갖게 된다. 특히 신약성서는 죄와 죽음의 연관성을 끊임없이 강조한다. (p119)

 

 

어딜 가나 빠지지 않는 이 종교의 영향. 검은색이 뜻하는 바는 죄악, 죽음. 어쩌면 죄는 죽음.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죄악의 검은 특성' 이라는 말을 썼고, 성 히에로니무스는 '죄악의 다양성과 검은 특성' 이라 말했다. (p120) 죄는 색깔이 없지만, 뭔가 색깔로 대입함으로써 사람들에게 구체성을 지니게 한다.

 

당시 유행하던 까만 실크 모자와 검은색 옻칠을 한 포장마차로 상징되는 세련된 세상은, 더럽고 기름이 번들거리는 옷을 입고 살아가는 빈곤층과 오물이 넘실대는 검은 강물 곁 잿가루로 더러워진 테라스에서 살아가는 노동자들의 검은 세상과는 전혀 차원이 다른 것으로 보인다. 윌리엄 블레이크는 이러한 차이를 소름 끼칠 정도로 짧은 문구로 묘사한다. 

 

어떤 이는 달콤한 기쁨 속에서 태어나고

어떤 이는 무한한 어둠 속에서 태어난다.

 

제각각 다른 검은색을 가진 이 두 세상은 - 디즈레일리는 이를 두 개의 나라라고 불렀다 - 그리 멀지 않은 거리를 사이에 두고 살았다. (p420)

 

 

검은색이라고 다 같은 검은색은 아니다. 어떤 이에겐 풍요와 권위와 매력의 상징이며, 어떤 이에겐 궁핍과 좌절과 불행의 상징일 수 있다. 물리적 거리는 가까우나 정서적 거리는 한참이나 먼 이 관계. 같은 색깔을 바라볼 때 이 양편의 사람들이 같은 생각을 가질 수 있을까. 자신의 처지에 따라 검은색에 대해 느껴지는 바가 다르지 않을까. 

 

좋은 글귀들도 많고 예시로 나오는 그림들도 좋다. 하나하나 다 옮기자면 한도 끝도 없을 것이니 한번쯤 관심있으면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특히나 렘브란트에 이르러서는, 그가 그렇게 검은색을 절묘하게 사용했는 지 이번에 처음으로 느낀 것 같다. 뭔가 미켈란젤로 같은 사람들에 비해 렘브란트라는 화가는 부족함이 없었을 것 같고 탄탄대로를 걸었을 것 같은 느낌인데 말이다. '자신의 심정을 단순히 색조와 질감에만 반영한 것이 아니라, 때와 장소에 따라 선을 부드럽게 처리하기도 하고 투박하게 처리하기도 하면서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자신의 답답한 상황을 표현한 듯 하다 (p223-224)' 라고 말하고 있으니. 다시한번 그의 작품들을 찾아봐야 겠다는 동기가 유발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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