옮긴이도 그렇게 얘기했지만, 주제 사라마구는 2009년에 이 작품을 내고 2010년에 87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나이가 많이 들어 죽음이 늘 내 앞을 왔다갔다 하는 순간까지도 주제 사라마구의 '타협하지 않는' 글솜씨는 퇴색함이 없다. 이 작품을 읽으면서 신에 대해, 인간에 대해, 가지고 있던 의구심을 여한없이 풀어내며 탐구해나가는 그의 열정에 탄복할 수 밖에 없었다.
주제 사라마구가 좋은 이유는, 하나둘이 아니겠지만, 심각한 주제를 사라마구 특유의 유머를 가미하여 풀어나가는 것, 그러면서도 그 맥락을 놓치지 않는 것, 그 모든 것들이 현실인 듯 환상인 듯 모호한 경계를 넘나든다는 것... 등을 생각할 수 있겠다. 이 책의 주인공 격인 카인은, 성경에서는 아담과 사라의 큰 아들이자, 여호와의 사랑을 듬뿍 받던 동생 아벨을 손으로 쳐 죽인, 인류 최초의 살인자이지만 이 작품에서는 그 사건은 아주 간단히 다루어지고 그 이후 신이 행한 숱한 성경 속의 일들을 따라 다니며 인간의 관점에서 고민하고 의심하고 분노하는 사람으로 묘사된다. 여호와에게서 외면을 당했고 그래서 자신이 살인을 했으나 그 원인은 여호와이며, 이 세상의 모든 불합리의 원인도 여호와임을 통렬히 부르짖는.
불합리. 그렇다. 살면서 과연 신은 존재하는가. 라고 생각되는 일들에 얼마나 많이 마주치는 지. 인간의 정의가 신의 정의가 아니라고 억지로 믿으며 그 모든 환란에서 나와 나의 가족, 지인들은 비껴가길 이기적으로 기도하며 그렇게 힘겹게 살아가야 하는 것이 인간임을 받아들이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그 불합리와 부조리는, 결국 인간의 몫일 수는 없는 것이고 오로지 신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는 것인지. 카인의 행로를 좇으며 참 많은 생각들을 투영할 수 밖에 없었다.
네가 네 아우를 죽였구나. 네. 죽였습니다. 하지만 진짜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은 주이십니다. 주가 내 생명을 파괴하지 않았다면 나는 아우를 위해 내 생명이라도 주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너를 시험하는 문제였다. 주께서 직접 창조한 것을 왜 시험한단 말입니까. 나는 만물의 주권자인 여호와기 때문이다. 다른 모든 존재에 관해서 말씀하시는 것은 좋지만, 저와 내 자유에 관해서는 말씀하지 마십시오. 뭐, 죽이는 자유 말이냐. 주께서 내가 아벨을 죽이는 것을 막을 자유가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주께서 얼마든지 하실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p39)
아담과 사라가 에덴동산에 있을 때 선악과 나무 따위는 두지 않았으면 된다. 카인과 아벨이 제사를 지낼 때 둘다를 공평하게 받아들였으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은 자신이 창조한 피조물을 늘 시험하려 든다. 그래서 그들은 죄를 짓게 되고 그래서 신으로부터 버림을 받게 되고 응당한 벌을 짊어져야 한다. 왜.. 왜 그래야 하는가. 잘 모르겠다. 종교적으로 그것은 신의 섭리이며 그것을 인간의 머리로 이해하려 한다는 자체가 모순이라고 말한다면 할 말은 없어진다. 하지만 이성적으로 이해가 안된다는 것까지 부인하긴 어렵다. 왜. 난 인간이니까.
이떄 아브라함에게 논리적이고, 자연스럽고, 단순하게 인간적인 반응이라면 여호와에게 꺼지라고 말하는 것이었을 테지만, 실제로는 그런 말은 나오지 않았다. ... (중략) ... 간단히 말해, 아브라함은 여호와만큼이나 대단한 개자식일뿐 아니라 갈라진 혀로 누구라도 속일 준비가 되어 있는 유능한 거짓말쟁이였는데, 이 경우 이것은 이 이야기의 서술자가 가지고 있는 개인적인 사전에 따르면 불충하다, 불성실하다, 거짓되다, 의리 없다 등등과 기타 비슷하게 훌륭하기 짝이 없는 자질을 의미한다. (p94-95)
이 부분에서 주제 사라마구에게 경의를. 뒤늦게 낳은 귀하디 귀한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여호와의 명령에 아브라함은 그저 순종. 인간의 기본적인 정서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순종. 그걸 주제 사라마구는 가차없는 단어를 사용하여 일갈하고 있다. 개자식이라고. 그리고 그런 걸 시킨 여호와도 마찬가지라고. 세상에, 이런 표현이라니.
단지 황금 송아지를 만든 것에, 그런 경쟁자로 여겨지는 존재를 만든 것에 여호와가 분노했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한 삼천 명이 있었던 것이다. 나는 형제를 하나 죽였는데 여호와는 나를 벌했다. 정말 알고 싶은데, 이 모든 죽음에 대해 누가 여호와를 벌할 것인가. 카인은 생각했다. 루시퍼가 하나님에게 반역한 것은 정말 옳은 일이었다. 그가 질투 때문에 그리했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틀렸다. 그는 단지 하나님의 악한 본성을 인식했을 뿐이다. (p122)
정말 알고 싶은데.. 라는 말이 폐부를 찌른다. 나도 정말 알고 싶다. 신의 장난 혹은 신의 명령, 혹은 신의 계시 뭐 어쩌고저쩌고 다 갖다붙여 얘기하는 것들에 대한 벌은 누가 받을 것인가. 당한 인간이 받아야 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인간은 왜 창조되었는가. 끊임없이 시험당하기 위해서? test bed 역할로서? 여호와의 위대함을 가끔씩 확인당하는 존재로서? 다시, 모르겠다.
정말로 네가 본 게 미래에 그대로 일어날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릴리스가 물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반대로, 미래는 이미 적혀 있어요, 우리가 그것이 적힌 페이지를 읽는 법을 모를 뿐입니다. 카인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자신이 어디에서 이런 혁명적인 생각을 발견했는지 의아했다... (중략) ... 우리 하나님, 하늘과 땅의 창조자는 완전히 미쳤다는 것. 감히 여호와 하나님이 미쳤다고 말하는 거야. 오직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지 모르는 미친 자만이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이 자신의 직접적인 책임이라고 인정하고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할 겁니다. (p154)
하나님은 미쳤다. 소돔과 고모라에서 죄없는 아이들까지도 다 싹슬이 죽이시고, 인류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비로써 응징한 후 노아의 방주로 새로운 인류를 만들고자 하셨고, 금송아지 만들었다고 관련자들 피토해 죽게 만드시고,.... 그저 여호와만을 따르고 의지하던 욥에게 사탄과의 내기로 수많은 시련을 안기셨다.
고등학교 다닐 때 윤리 선생님이 하신 말씀이 아직도 기억난다. 성경에서는 여호와가 욥에게서 모든 재산과 모든 자식을 다 빼앗고 급기야는 몸에 욕창이 나게 하여 거렁뱅이로 지내게 했음에도 욥이 여호와에 대한 사랑이 불변함에 다시 모든 것을 되돌려 주셨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이냐 그러지만, 다른 건 몰라도 열 명의 자식을 빼앗았다가 다시 똑같은 숫자의 열 명의 자식을 돌려 준다고 그게 대체가 되는 것이냐. 자식을 잃은 심정이 되돌려 지는 것이냐... 그 때 상당히 공감했었던 기억이 있다. 되돌려 준다고 다 되돌려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만일 내가 들은 대로 욥이 그 모든 부에도 불구하고 선하고 정직한 사람이 맞고 또 신앙도 깊다면, 그 사람은 죄를 짓지 않았다는 것인데, 그런데 아무런 이유도 없이 돈과 소유를 모두 잃는 벌을 받을 참이라니, 다른 많은 사람들은 여호와가 의롭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나는 그렇다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중략) ... 하지만 하나님은 유리창처럼 맑고 투명해야지요. 항상적인 공포와 두려움의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에너지를 낭비하지 말아야 합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지 않아요. (p163)
여호와는 듣고 있지 않습니다, 귀머거리니까요, 도처에서 가난하고 불행하고 비참한 자들이 도와달라고 소리치고 있습니다, 세상이 그들에게 거부하는 어떤 구제를 하나님이 해달라고 애원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여호와는 그들에게 등을 돌리고 있습니다, 여호와는 우선 히브리인과 계약을 맺었고, 이젠 악마와 계약을 맺고 있습니다, 이러니 신이 있다는 게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p164)
이제 하늘나라로 간 주제 사라마구는... 그 곳에서 신을 만났을까. 근래에 가까운 사람을 잃은 나는, 며칠내내 그 질문을 했다. 저 세상이라는 곳에서 하나님을 만났을까. 그 곳이 있을까. 왜 고생만 하다 가게 만드셨을까. 하나님이 원했던 것은 무엇일까. 매일 밤 잠을 못 이루며 생각했었다. 하지만 답은 없었고, ... 이 책을 읽으며 주제 사라마구도 아마 같은 생각이 아니었을까.. 싶었다. 그 곳에 갔다면, 주제 사라마구는, 해답을 얻었을까. 신에게 물어봤을까. 당신 뭐냐고. 뭔데 이러느냐고. 대답을 하라고 얘기해봤을까... 많이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