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마다 호불호가 있을 수 있지만, 개인적으로 줄리언 반스를 좋아한다. 맨부커상을 탔다는 건 전.혀. 중요하지 않고 그의 필체와 분위기를 좋아한다. 대단한 이야기를 담아내는 건 아닌데도 마음에 울림이 있다. 이 책도 그러하다.

 

쇼스타코비치의 이야기. 3장으로 구성되고, 윤년마다 찾아온 인생의 결정적인 순간 3회를 그린 책이다. 러시아라는 나라에서 지배체제에서 예술가가 살아남기 위해 해야 했던 일들이 긴장감을 주면서도 왠지 담담한 서사로 묘사된다. 예술에 대한 이해는 인생에 대한 이해로 통하며, 그래서 이 책이 나에게 마음으로 와닿는 건지도 모르겠다.

 

 

운명. 그것은 전혀 손쓸 수 없는 어떤 일에 대해 쓰는 거창한 단어일 뿐이었다. 삶이 당신에게 "그래서" 라고 말했을 때, 당신은 고개를 끄덕이고 그것을 운명이라고 불렀다.  (p22)

그보다는 인간의 환상에 무슨 일이 있어났는가 하면, 그 환상들은 무너져 내리고 말라죽어버렸다. 영혼 깊숙이 닿은 치통처럼, 길고도 지루한 과정이었다. 그러나 이라면 뽑아버리면 끝이다. 하지만 환상은 죽었을 때조차도 계속해서 우리 안에서 썩어가며 악취를 풍긴다. 그 맛과 냄새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다. 우리는 내내 그것을 끌고 다닌다. 그 역시 그러했다. (p129)

예술은 모두의 것이면서 누구의 것도 아니다. 예술은 모든 시대의 것이고 어느 시대의 것도 아니다. 예술은 귀족과 후원자의 것이 아니듯, 이제는 인민과 당의 것도 아니다. 예술은 시대의 소음 위로 들려오는 역사의 속삭임이다. 예술은 예술 자체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민을 위해 존재한다. (P135)

"삶은 들판을 산책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햄릿에 관한 파스테르나크의 시 마지막 줄이기도 했다. 그 앞줄은 이러했다. "나 혼자뿐이다. 내 주위 사람들 모두 어리석음 속에 익사했다." (p163)

어쩌면 용기는 아름다움과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아름다운 여인도 나이를 먹는다. 그녀에게는 사라져버린 것만 보인다. 다른 이들 눈에는 남은 것만 보인다. 어떤 이들은 그에게 잘 버텨냈다고, 굴복하지 않았다고, 신경절적인 겉모습 아래 굳은 심지가 있었다고 축하했다. 그에게는 사라진 것만 보였다. (p171)

좋은 음악은 언제나 좋은 음악이고, 위대한 음악은 아무도 망가뜨릴 수 없다는 것이었다. 바흐 서곡과 푸가를 어떤 박자, 어떤 세기로 연주하더라도 여전히 위대한 음악이었고 그것은 건반 악기에 전혀 재능이 없는 비열한 인간에게조차 맞설 수 있는 증거였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그런 음악을 냉소적으로 연주할 수는 없었다. (p180)

그가 무엇으로 시대의 소음과 맞설 수 있었을까? 우리 안에 있는 그 음악 - 우리 존재의 음악 - 누군가에 의해 진짜 음악으로 바뀌는 음악. 시대의 소음을 떠내려 보낼 수 있을 만큼 강하고 진실하고 순수하다면, 수십 년에 걸쳐 역사의 속삭임으로 바뀌는 그런 음악.

그가 고수했던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p181)

 

 

아직 다 읽어내기까지 60페이지 정도 남았다. 찬찬히 정제된 마음으로 끝까지 읽어내고 싶다. 비단 음악에만 빗대어 시대의 소음을 얘기한 것은 아닐 터. 우리가 살아가면서 부딪혀야 하는 그 수많은 '시대의 소음'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맞설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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