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접적인 결론 언급은 없지만, 내용을 유추할 수 있는 스포일성 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살인사건이 있었다 뿐이지, 사실 추리소설이라고 이름 붙일 필요는 없는 소설이다. 이스탄불에서 출발하여 파리로 가던 비행기가 1980년 겨울에 산속에 추락하면서 얘기는 시작된다. 전원 사망한 가운데, 기적적으로 신생아에 가까운 여자아이가 한 명 살아서 발견된다. 멀쩡하게. 그 한 아이를 두고 두 집안이 서로 자기 집 손녀라고 주장하기 시작한다. 한 집은 유서깊고 돈도 많은 명문가, 또 한 집은 트럭에서 음식을 파는 평범하기 그지 없는 집안. 돈으로 해결하려다가 언론에 공개되는 바람에 결국 그 여자아이는 명문가에 갔으면 리즈로즈가 되었을 것이나 평범한 가정에 들어가면서 에밀리가 된다. 그러고 나서 18년이 흘렀고. 여전히 여자아이의 정체성은 미심쩍은 상태로 남아있고, 이 아이의 성장과정을 지켜보라고 비밀을 파헤쳐보라고 다른 쪽 집에서 탐정을 돈으로 사게 된다.
그 길다면 길고 짧으면 짧은 시간동안 두 집안은 비극 속에 지내야 했다. 부잣집, 그러니까 카르빌 집안은 아이의 할아버지 격이 사람이 두 번이나 쓰러져서 결국 휠체어 신세가 되었고, 아이의 언니였을 수도 있는 말비나는 잃어버린 동생에 대한 부채의식으로 인해 괴상한 아이, 외롭고 삐뚤어지고 성질 더러운, 통제불능의 괴물로 자랐다. 에밀리가 들어간 집인 비트랄 집안도 할아버지는 가스 중독으로 사망하고, 오빠인 마르크와 에밀리는...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서로를 사랑하게 된다. 이 모든 과정을 탐정인 그랑둑은 지켜보면서 계속해서 조사를 하고 아이가 만으로 18살이 되었을 때 모든 것을 일기로 남겨둔 채 자살로 생을 마감하려고 하다가... 무엇인가를 발견한다. 사건의 진상을 밝힐 수 있는 그 무엇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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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으며 문득, 예전에 보았던 드라마가 생각났다. <생인손>이라는, 원래는 한무숙이 지은 동명 소설인 <생인손>을 드라마로 만든 것이었다. 아주 오래 전에 보았던 드라마인데도 묘하게 생생하다.
조선 말기, 어느 대가집에 아가씨와 몸종 처녀가 있었다. 아가씨는 착하고 주인어른들도 좋으시고... 그냥 평온한 일상 속에서 몸종처녀가 그집 하인이랑 좋아져서 결혼을 하게 된다. 그 즈음에 아가씨도 혼인을 했고. (이 아가씨가 서갑숙이었던 것 같다).. 그러다가 동학혁명(?)인가가 나서 하인은 거기 갔다가 죽게 되고 몸종 처녀와 아가씨는 거의 비슷한 시기에 딸을 낳는다. 몸종 처녀는 유모처럼 몸이 약한 아가씨 대신 두 딸아이를 다 돌보게 된다.
어느날, 주인어른과 아가씨 부부가 다 외출을 했는데, 간난이(몸종 처녀 이름)는 자신의 아이가 자지러지게 우는 것을 발견한다. 자세히 보니 아이가 생인손(손가락에 나는 종기)을 앓고 있었던 것이었다. 아이가 너무 가여워서 가여워서.. 어미는 마음이 찢어지고 순간 이걸 치료하는 동안만 아이를 바꿔치기 해두자, 그래야 치료를 제대로 받지.. 라는 마음에 아가씨의 딸과 자신의 딸을 바꿔치기해서 눕혀 둔다. 주인어른과 아가씨 부부는 전혀 모르고는 (직접 자주 보지 않았으니 몰랐을 수 있지.. 갓난아이이니) 아기가 생인손을 앓고 있는 것을 보고 화들짝 놀라 잘 치료한다.
간난이는, 죄책감을 안고 이제는 도로 돌려놓아야지 놓아야지 하다가 그만 시기를 놓치고. 자신의 친딸은 그냥 곱게 커서 대갓집에 시집을 가고 아가씨의 딸은 씩씩하고 당차게 커서 머리를 싹둑 자르고 들어와서는 선교사를 따라 서양으로 나가버린다. 격동시기의 대한민국... 아가씨의 딸은, 대학교수가 되어 당당히 들어왔고 어머니를 찾아 모시게 된다. 그리고 어느날, 자신의 집에 일하러 온 아줌마를 보고는 간난이는 화들짝 놀란다. 자신의 친딸이 몰락하여 찬모로 들어오게 된 것이다. 예전에 자기 집에서 하녀살던 집이란 걸 알고는, 친딸은 망나니 아들 손을 잡아 끌고 나가며 속닥거린다. "예전에 우리집 하인이었던 게 대학교수라고..." 드라마상으로는... 이젠 80 노인이 된 간난이가 신부에게 고해성사 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그 드라마를 보면서 참 많은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난다. 대갓집 마나님이든, 종살이 하는 간난이이든 어머니는 다 같은 어머니인데 신분이 낮으니 유모로서의 소임을 더 잘 해야 했고, 그래서 정작 자기 자식은 제대로 모유를 먹이지도 못하고 종종거리는 어미의 심정이 어땠을까. 얼마나 사무쳤으면 저런 일을 했을까. 그리고 평생.. 자기한테 참 잘해 주었던 주인집에 못할 짓을 했다는 죄책감에 가슴 졸이며 살았을 그녀의 인생이 너무나 마음 아팠었다. 역사의 질곡 속에서 엉켜가던 그들의 운명이 가슴에 묵직하게 다가 왔었고. 어머니라면, 자식을 위해 그럴 수 있을 것이다... 라는 걸 지금은 더 절실히 느낀다. 내가 어머니가 되어 보진 못했지만, 평생 딸자식을 위해서라면 늘 희생을 마다 안하시는 우리 엄마를 지켜봐와서 그런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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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그림자 소녀>도... 비슷한 느낌을 준다. 물론 <생인손>처럼 우리나라 역사와 개인의 인생이 잘 버무려진 그래서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더더욱 사무칠 내용 정도의 깊이는 아니지만 (직접 소설을 읽진 않았지만, 이런 스토리를 엮어낸 작가에 대해서 한참 찾아본 기억이 있다. 소설가 한말숙의 언니이기도 하다) 비밀이 밝혀지면 밝혀질수록 그렇게 진실에 다가갈수록 비슷하다 라는 느낌을 가졌었다. 사실 박진감 있고 짜임새 있는 구성이긴 했지만, 템포가 조금 느려서 찰지게 와닿는 소설은 아니었지만, 사람을 마구 죽여대는 이벤트 없이도 사람을 긴장하게 만드는 재주는 있는 소설가인 것 같다, 미셸 뷔시.
뱀꼬리) 아... <생인손>을 책으로도 읽어볼까 했더니 이게 그저 단편소설이었다는 걸 처음 알았고, 이젠 절판이 된 책임을 알았다. 아쉽. 다른 소설들도 좋아 보이는데 다시 나왔으면 싶다. 근데 출판사가 평민사...? 아직 남아 있나...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