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들면 대부분 하는 생각...  "내 인생을 책으로 엮으면 열 권도 모자라.."... 그럴 지도 모른다. 나에겐 내 인생이 정말 온전하게 다가오니까. 그거 하나하나 펼치면, 그닥 기구한 인생을 살지 않아도 몇 권 정도는 대충 나올 수 있겠다 싶다. 그렇게 누구에게나 긴긴 장편소설일 수 있는 인생을, 단 몇 장에 요약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일테고.

 

그래서, 최윤필의 산문집, <가만한 당신>은 소중하다. 그냥 지나칠 수 있는 사람들의 인생을 참 멋지게 소개하고 있다, 그것이 부고라는 지면을 통해서라는 게 애석하지만. 애석하다는 것은, 나쁜 뜻이 아니다. 참으로 소중한 그들의 인생 하나하나가 살아 있을 때보다는 죽고 나서야 내게 크게 다가올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 아쉽다... 라는 마음이다.

 

 

되새김질하듯이 읽으니 손에 잡은 지는 꽤 되었는데 진도는 많이 못 나갔다. 괜찮다. 한 사람 한 사람 열심히 소중히 읽고 싶다. 여기 실린 사람들 중에 내가 아는 사람, 진정 한 명도 없었다.  서른 다섯명의 사람들 중에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니. 직위가 높고 폼나고 언론에 많이 노출되는 사람들만이 세상에 기여한다는 착각을 하기 쉽지만, 기실은 세상의 곳곳에서 '가만히' 자신의 역할을 충실하게 하지만 열정적으로 행하는 사람들이 있기에 세상은 유지되고 움직여진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유명인'이 되고자 하는 꿈은 참 부질없는 짓이다. 자신이 알고 있는 바를 진실되게 실천하고 당장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아도 그 변화를 위한 준비를 할 수 있는 자세가 필요하다... 라는 생각이, 나이들수록 많이 들고 있고, 그런 것을 이 책을 읽으며 다시한번 확인하고 있다.

 

성적 학대를 당한 여성, 장애를 가진 사람, 동성을 사랑하는 사람, 죽음을 존엄하게 자신의 선택으로 맞고 싶어하는 사람, 밝히기 어려운 진실을 당당하게 얘기하고 나서는 사람.... 이런 사람들의 이야기가 하나 하나 나를 흔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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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된 기소로 무고하게 사형선고를 받고 30년을 복역한 글렌 포드. 무죄라는 것을 알게 된 검사들은 그에게 재심의 기회를 주고 용서를 구한다. "나는 오만했고, 심판하는 일을 좋아했고, 스스로에게 도취돼 있었고, 또 자신만만했다. 나는 정의 그 자체보다 내가 이기는 것에 더 몰두했다." (p146) 라고 고백할 수 있는 검사. 그리고 용서를 구하러 간 방문에서 글렌 포드는 "미안합니다. 나는 당신을 용서할 수 없어요. 정말 못하겠어요, 정말." (p147) 라고 이야기한다. 이들의 악연을 보면, 마음이 저려왔다. 투명하게 자신의 과오를 인정한 검사를 인간적으로는 동정했으며, 그럼에도 사람의 실수로 하나밖에 없는 인생을 망쳐버린 글렌 포드에게 더 큰 슬픔을 느낀다.

 

메이저리그와 마이너리그를 통틀어 그다지 뛰어난 선수는 아니었으며 감독으로서도 그저 그랬던 에버렛 라마 브리지스. 잘했다고만 치켜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미국 야구 역사상 최고의 익살꾼" (p178)이라고 인정하며 "로키가 위대한 감독인 이유는 야구가 즐거워야 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p185) 라고 이야기되어질 수 있는 미국이라는 사회가 부럽기까지 하다. 야구란, 프로야구란, 그저 이기기 위해서 하는 게 아니라 즐겁기 위해서, 즐기기 위해서 한다는 기본적인 철학을 가지지 않고서는 어떻게 이 선수의 가치를 이리 평가할 수 있겠냔 말이다.

 

호주의 인종 분리정책. 백인 정부가 백인과 원주민 사이에 태어난 아이들을 강탈하여 수용하고 결혼과 교육과 노동으로 원주민으로서의 정체성을 탈색, 백인화시켰던 정책. (p197) 이들의 입에서 사과의 말이 나오기까지는 수십년이 흘러야 했다. 그 가운데에 자리한 여성, 몰리 켈리와 그 장녀 도리스 필킹턴 가리마라. 수용소에 끌려가자 도망쳐 장장 9주동안 1,600km를 걸어 자신의 집으로 갔던 몰리. 결국 다시 잡혀 들어가자 도리스를 남기고 둘째 애너벨을 데리고 도망쳤지만 아이를 뺏기고 만다. 그리고 그 장녀 도리스가 <토끼 울타리>라는 소설로 이 호주의 비인간적인 정책을 정면으로 기술하게 된다. 이 소설이 나온 후 절대 받아들이지 않으려던 호주 정부는, 2014년 케빈 러드 전 수상이 "우리는 우리 역사의 원주민성을 감추려 하기보다 더 확장된 국가적 정체성의 하나로 끌어 안아야 한다. 우리는 원주민과 비원주민 삶의 간극으로 하여 미래 세대로부터 비난받지 않아야 한다." (p205) 라고 연설하고 '국가사죄기금'을 발족하게 된다. 역사는, 이렇게 작은 항거로부터 큰 변화를 일구어내는 법.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이 아닌가 싶다. 지금의 우리가, 특히.

 

존엄사의 이야기는 <Me before you>라는 책을 봐서인지, 더욱 와닿았다. 존엄사를 인정하지 않던 영국이 결국 조력자살을 합법화하는 변화에는 데비 피디라는 여성의 기여가 있었다. 서른 한살에 불치병 진단을 받고 신경과 근육이 마비돼가는 마음으로 죽을 수 있는 권리를 위해 싸웠던 그녀. 그녀는 결국 곡기를 끊음으로써 자신의 죽음을 선택했고 이후 영국의회는 조력자살의 합법화를 추진하게 되었다... "퍼디의 남편은 의회에 의해 단식을 강요당한 채 고통 속에 숨진 아내를 도운 마리퀴리 호스피스 측에 감사했다. 만일 그가 자신의 아내와 같은 운명에 처한 다른 이들을 도울 수 있게 해준 의회에 감사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을 것인가" (p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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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러나지 않게 은은하고 가만하게 세상을 조용히 빛내는 많은 사람들을 생각하게 하는 책이다. 지금 우리 주변에도 많이 보인다. 목소리를 높이기도 하고 전면에 나서기도 하지만, 그렇게 표면화되지 않는 시간에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자신의 신념에 따라서 계속해서 노력하는 사람들. 이 책을 읽으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어쩌면, 지금 현재, 내 주변의 이런 사람들을 기억하고 그 변화에 동참해줘야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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