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지음, 박은정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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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들수록 가슴아픈 책, 영화.. 를 보지 않게 된다. 사는 것도 힘든데, 보는 것까지 그래가지고야 어디 살겠는가 싶은 마음이 들어서 가급적 머리를 비울 수 있는 이야기에 집중한다. 때문에 내가 가벼워지고 단순해지는 걸 알면서도 그냥 그렇게 한다. 내가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 일은 하지 말자 라는 욕구가, 진중하고 깊이있고 복잡하고자 하는 나의 바램을 이겨내는 횟수가 늘어나는 거다.

 

그래서 이 책은, 안 보고 싶었다. 노벨문학상이라는 상이 주는 스포트라이트에 혹해서 고른 건 아니었다. 제목이... 전쟁과 여자를 연결한 그 관점이, 아울러 소설도 르뽀도 아닌 '목소리소설'이라는 장르가 궁금해서 집어들었다. 장장 550페이지에 달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몇 번이나 후회했다. 읽지 말걸. 시작하지 말걸. 연휴이고, 바깥은 햇빛이 찬란히 빛나고 있는데, 나는 이 우울하고 참담하고 잔혹한 책에 묶여 어두움을 헤매고 있구나 라는 생각이 들어 후회가 막급이었다... 하지만, 한번 읽기 시작하니 도저히 그만둘 수가 없었다. 뭐랄까... 지금 그만두면 내가 이들을 배신한다는 느낌, 그들의 고통을 끝까지 읽어내지 못했다는 죄책감... 그런 것들이 남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글이 주는 흡인력도 컸다. 200여명의 전쟁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했던 여성들의 나레이션을 옮긴 것인데, 계속 그런 이야기들이 반복되고 있는데도 묘하게 나를 잡는 힘이 있었다.

 

나는 예전에, 고통은 사람을 자유롭게 한다고, 고통을 견뎌낸 사람이야말로 자기 삶의 온전한 주인일 거라고 생각했다. 고통의 기억이 자신을 보호한다고. 그런데 이제 언제나 그런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런 앎, 평범한 보통의 삶에는 있기 힘든 이런 특별한 앎은 손댈 수 없도록 따로 보관해놓은 비축물이나 겹겹이 층을 이룬 광석 등의 희미한 금가루처럼 별도의 공간에 존재한다. 한참을 속이 빈 암석을 공들여 벗겨내고, 함께 사소한 기억의 퇴적물을 헤집어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반짝반짝 모습을 드러낸다! 선물처럼 찾아온다! - p170

나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고통은 사람을 자유롭게 한다고. 겪어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인생의 참 맛이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고통은 그대로 속에 남아 침잠하고 헤집어 찾아 드러내지 않으면 그대로 남게 될 뿐이다. 책 속에 담긴 고통의 기록들은 하나하나 너무나 놀랍고 힘겨워서 다 옮기기 힘들다. 전쟁이란 막연한, 사실 지금도 도처에서 누군가에게는 현실이나 나에게는 개념으로밖에 다가오지 않는 전쟁이란 것을 몸으로 겪어낸 사람들의 몸과 마음에 남은 상흔들은, 그 기록들은, 내 속에 비수처럼 하나하나 꽂혀 들어고야 만다.

 

온 마을 사람들이 모였어. 그 자리에 형제의 아버지와 어머니도 있었어. 다들 입을 굳게 다물고 숨소리조차 내지 않았어. 세상에 어떤 어머니가 그 순간 울부짖지 않고 버틸 수 있을까. 어떤 심장을 가져야 몸부림치지 않을 수 있을까. 형제의 어머니는 알고 있었어. 만약 울음을 터뜨리면 온 마을이 불길에 휩싸이고 말리라는 사실을. 자기 혼자만 죽는 게 아니라 온 마을이 떼죽음을 당하리란 사실을. 독일군 병사 하나가 살해됐다고 온 마을을 태워 죽이는 놈들이었으니까. 어머니는 알고 있었어... 공적을 세우면 훈장을 주는 게 당연하지만 어떤 훈장도 심지어 최고의 영예인 '영웅별' 훈장도 그 어머니에겐 부족해... 어머니의 그 침묵에는... - p444

소름이 끼쳤다. 전쟁이 무엇인데, 자식을 잃은 어머니의 울음까지도 겉으로 내뱉지 못하게 만드는 것일까. 모두가 죽을 걸 알기에, 자식을 잃어 속이 갈갈이 찢어지는 그 심정을, 칼로 속을 도려내는 듯한 그 심정을, 꾸욱 안으로 밀어넣고 참을 수 있었던 그 어머니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그 침묵이 너무나 마음아파서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린다.

 

사람들은 죽어가는 그 순간에도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아. 믿질 않지. 하지만 머리카락 밑에 샛노란 색이 나타나고 얼굴을 따라 움직이던 그림자가 나중에 옷 밑으로 뚝 떨어지는 걸 보게 돼... 사람은 이미 죽었는데 표정은 마치 산 사람 같지. 깜짝 놀란 얼굴로 '내가 어떻게 죽을 수 있지? 정말 내가 죽은 거야? 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여. - p242

죽고 싶은 사람이 있을까. 봄 여름 가을 겨울이 흘러가고 그 속에 있는 찬란함과 처연함을 일생 느끼며 나이를 다해 죽는 것도 때로 억울하게 느껴지는 게 인간인데, 전쟁터에서 젊은 나이에 제대로 꽃도 피워보지 못한 채, 뭣 때문에 죽는 지도 모르면서 죽는 사람의 심정이야 오죽하겠는가. 이러한 죽음을 옆에서 계속 지켜보아야 했던 그 전쟁터의 '여자'들은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얘기한다. 힘들었다고. 가여웠다고. 그러나 전쟁이 끝날 때 살아있는 자신에게 너무 기뻤다고.

 

크고 위대한 것이 작고 평범해지는 그 순간을. 하늘이나 바다가 아무리 좋아도 내게는 현미경 렌즈 아래 놓인 모래 한 알이, 바닷물 한 방울의 세계가 더 소중하다. 그곳에서 내가 빗장을 열고 보게 될 위대하고도 놀라운 한 사람의 삶이. 만약 작은 것이나 큰 것이나 똑같이 무한하다면, 어떻게 작은 것을 작다고 하고 큰 것을 크다고 할 수 있을까? 나는 이미 오래전부터 그 둘을 구별짓지 않는다. 한 사람만으로도 벅차다. 한 사람 안에 모든 것이 있으므로. 그 안에서 길을 잃고 헤맬 만큼. - p272

한 사람 안에 우주가 깃들어 있다... 전쟁을 이야기하면 큰 것만을 말하는 세상. 영웅을 이야기하고 정치를 논하고 역사를 말하는 세상. 그래서 그 속에 점점으로 박혀 사력을 다해 노력했던 개개인의 삶은 금새 놓아버리는 세상. 그건 옳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아니, 그래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든다. 살아남은 개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그들 속에서 진정한 전쟁과 '인간'을 발견할 수 있다고, 이 책을 읽으면서 줄곧 느꼈다. 전쟁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큰 무엇인가 라기 보다 어쩌면 하나하나 소중한 생명들에게서 대의를 가장하여 가장 중요한 것들 빼앗고 작은 것마저 돌려주지 않는 미친 짓이 아닐까.

 

열예닐곱의 나이에 조국이라는 이름에 경도되어 자진해 전쟁에 참여한 많은 이 책 속의 '여성'들이 그 속에서 청춘을 잃고 '여성성'을 박탈당하고 존재의 허무함과 비참함으로 웃음을 빼앗기고.. 그리고 심지어 전쟁이 끝나고나서도 일생 그것에게 지배를 받아야 하는 인생을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전쟁이라는 것이 주는 가당치 않은 의미를 되새김질하게 된다.

 

매우 훌륭한 작품이고, 그 의미는 두말할 것도 없다. 사실, 이 봄날에 읽기에 어둡고 비참하다가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또하나의 시선을 내가 가지게 되었음에 기뻐할 수 있는 책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마지막 장을 덮었다. 강력추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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