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송병선 옮김 / 민음사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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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뜻 보면 참 엽기적인 소설이 아닐 수 없다. 아흔살의 노인이 생일을 맞이하여 풋풋한 처녀와의 하룻밤을 자신에게 선물하겠다는 마음을 먹으면서 시작되다니. 게다가 소개받은 처자는 열네 살 밖엔 안된 미성년자임에도 불구하고 주인공 '나'는 그 소녀와 단둘이 밤을 지내기를 결정하다니. 마치 '선데이 서울' 같은 삼류 잡지에나 나올 법한 가십 기사 종류이며 보면서도 혀를 끌끌 차게 될 황당무계한 설정이 아닌가 말이다. 하지만, 위대한 작가란 이러한 일상적이고 저열한 소재 속에서도 인생에 대한 빛나는 성찰과 회고를 담아내게 마련이다. 그리고 이 작품이 그런 류로, 위대하다는 말을 붙이기에 전혀 아깝지 않은 작품이다.

늙어간다는 것. 수많은 세월들을 뒤로 한 채 노쇠해진 몸과 마음을 지니며 살아간다는 것. 무엇보다 나를 그렇게 바라보는 타인의 시선이 나를 어느 새 규정한다는 것. 이 모든 것이 인생의 황혼녘에 누구나 감내해야 하는 쓰디쓴 경험인 지도 모르겠다. 아흔살. 거의 한 세기를 살아온 주인공 '나'는 기자이자 칼럼니스트이다. 그는 사창가에서 노니느라 결혼의 시기를 놓쳤고 돈을 주지 않고는 여자와 관계를 한 적도 없는 사람이다. 따라서 진정한 사랑에 대해 생각할 틈도, 진지한 인생이나 다른 사람에게 헌신하는 생활도 느껴보지 못했을 것이라 보여진다. 그에겐, 거래만이 있을 뿐 감정의 소통이나 시간의 더께 아래 묻혀진 속깊은 마음의 교감도 없었을 것이다. 과거는 그에게 회한을 안기고 늘 그런 상태일 듯했던 많은 것들이 사라지거나 혹은 잊혀졌다. 신문사 사장실에 걸려진 사진 속의 인물들 머리위에 수없이 새겨진 십자가들만이 남아있을 뿐.

그런 '나'가 그 어린 소녀를 만나면서 달라지게 된다. 약에 취해 쓰러져 자고 있는 벌거벗은 소녀를 보며 "욕망에 쫓기거나 부끄러움에 방해받지 않고 잠든 여자의 몸을 응시하는 것이 그 무엇과도 비할 바 없는 쾌락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스스로 델가디나라 마음대로 이름 붙이고는 소녀를 위해 하나씩 주변을 채워주고 마음을 위로해준다. 생전 처음으로 그는 강렬함과 행복감을 느끼며 소녀에 대한 사랑을 키워나간다.

사랑은 또한 그가 자신을 올바로 바라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준다. "그녀 덕택에 나는 구십 평생 처음으로 나의 타고난 성격을 알게 되었다. (...) 매일 규칙적으로 생활하는 것도 미덕이 아니라 게으름에 대한 반작용이었다. 야박한 심성을 숨기기 위해 인자한 척하고, 그릇된 판단을 숨기기 위해 신중한 척하고, 쌓인 분노가 폭발할까 봐 화해을 청하며, 타인의 시간에는 무관심하다는 걸 들키지 않으려고 시간을 엄수한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  낭만주의 문학에 빠져뜰고 음악 취향도 바뀌고 무엇보다 묵은 과거 세상을 넘나들던 칼럼은 사랑의 달콤한 연서로 바뀌게 된다.  이 모든 것이 바로, 사랑의 힘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것은 현실이었다.

나이가 조금만 들어도 사람들이 가장 먼저 포기하는 게 있다면 바로 '불타오르는 사랑'이라는 감정이 아닐까. 경험이 많다는 혹은 많이 들어서 안다는 교만을 무기로 내 마음에 무언가 다른 변화가 생기는 것에 지레 겁을 먹고 움츠려들어서는 방어벽을 겹겹이 싼 채 살아가는, 나를 비롯한 많은 이들을 떠올려본다.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그것에 정면으로 도전하며 아흔살이 되어도 새롭게 무언가를 찾을 수 있는 인간상을 제시한다. 열정과 도취와 사랑의 낭만은 언제나 가능한 것이며 나이에 상관없이 사람을 변화하게 한다고 그는 말하고 싶었는 지도 모른다. 감정 저변에 깔린 내 자신에게 충실하고 싶은 마음을 드러내라고 얘기하는 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과정을 결론을, 전혀 무리없이 천박하지 않게 그려내고 있다. 감히 대단한 작가라고 말해본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잊고 사는 무언가가 있는 듯한 허전함에 시달릴 때 이 책을 펼쳐들면 위안이 될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비단 '사랑'이 아니라도, 마음에 불타 오르기를 기다리고 있는 작은 불씨마저 사그러뜨리는 일 없이, 그렇게 언제라도 나를 생생하게 변화시킬 수 있는 대상 혹은 존재를 만날 수 있도록 나를 숨기거나 포기하는 일이 없어야 겠다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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