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중국 출장을 다녀왔다. 출장 얘길 하자면 정말 이야기가 길다. 비행기의 연착으로 완전 미친 여자처럼 transfer를 위해 공항을 달렸고 헥헥 거리며 도착했더니 갈아탈 비행기가 무려 2시간 연착. 이건 뭐 안 온다는 얘기랑 같은 거 아냐? 라며 분개했으나 나 이외의 사람들은 표정변화조차 없더라는 이해불가의 스토리. 2시간 연착도 연착이지만 그 시간이 밤 12시였다는 게 함정. 서안에 도착하니 새벽 2시. 마중나온 동료에게 미안해 죽을 뻔 했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우여곡절 끝에 간 출장 결과는 나쁘지 않았고 잘 지내다가 돌아왔다. 갈 때 무슨 책을 싸들고 갈까 망설이다가 들고 간 책이 아이러니하게도 <파리는 깊다>.

 

 

사실은, 중국에 출장을 이리 다니니 중국 역사에 대한 책이나 하나 가져갈까 라며 찾았는데... 흠 중국에 관련된 책은 별로 없고 있다 해도 두껍거나 하드커버이거나 해서 포기. 그러니까 출장이나 여행이나 갈 때 가져갈 책의 조건은 심플하다. 내용이야 누가 보겠는가. 내가 읽는 책의 표지로 날 판단할 거라는 부담감 따위는 과감히 떨쳐 버리고 무조건 얇고 가벼운 소프트커버의 책을 선택한다. 내용도 가급적 가벼운 쪽으로. 여행이나 출장 오고가면서 혹은 그 장소에서 뭔가 심각한 책을 읽는다는 자체가 우습다는 게 내 생각인지라 최대한 재미있겠거나 가볍겠거나 하는 쪽의 책을 고른다.

 

책 고르는 걸로 사설이 길었으나... 어쨌든 중국 출장이라는 걸 가면서 왜 꽤나 오래 전에 사둔 이 책에 눈길이 갔는 지 모르겠다. 파리와 예술에 대한 이야기. 아. 파리 다시 가고 싶은 마음이 속에서 용솟음을 치게 만드는 책이다.

 

 

예정된 코스에서 조금만 벗어나 보자. 남들이 잘 찾지 않는 미술관에서 자기 마음에 드는 작품을 우연히 발견할 수 있다. 모로 미술관이나 달리 미술관은 물론이요, 포부르 생토노레나 보주 광장에는 작은 갤러리들이 많다. 한적한 골목에서 마음에 드는 작은 가게를 찾아낼 수도 있다. 벼룩시장 끄트머리에서 손때가 묻은 찻잔을 사게 되기도 한다. 사람들이 잘 모르는 허름한 식당에서 싸고 맛있는 식사를 할 수도 있다. 뒤팽 거리의 레피 뒤팽이나 생폴 거리의 '빨간 목구멍' (Rouge Gorge) 같은 집들이 있다. 그러려면 예정된 코스에서 약간씩 벗어나야 한다. - p8

 

 

백퍼센트 동감이다. 여행을 하면 할수록 여행책자에 적힌 관광지에 적힌 곳에 가는 게 지루하다. 그런 곳은 대부분 엽서로 봐도 괜챦을 만하다. 오히려 눈으로 보는 것보다 더 멋지기도 하다. 직접 가면 사람은 많고 그 속에서 인증샷 하나 건지려는 카메라 더미속을 헤쳐 나가야 한다. 뭐하나 여유롭게 감상할 정신적 시간적 여유를 부여받지 못한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것은, 그런 관광지는 그 나라 사람들의 진정한 삶의 모습을 반영하지 못한 데에 있다. 어쩌면 관광지는 그 나라가 아니라 전 세계인의 장소인 지도 모르겠다.

 

 

툴르즈-로트렉은 볼거리를 좋아했다. 극장이나 서커스는 그에게 또 다른 환상을 제공하는 공간이었다. 주변 사람들이 질려 해도 개의치 않고 같은 공연을 수차례 반복해서 보기도 했다. 구경거리를 앞에 둔 툴르즈-로트렉은 어린아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인지 툴르즈-로트렉만큼 극장을 잘 그려낸 화가는 없었다. 극장은 그에게 대리만족을 주었다. "공연이 어떻든 나는 전혀 개의치 않습니다. 설령 공연이 형편없더라도 극장은 즐거운 곳이지요." 그는 어둠 속에 숨어서 인공조명 아래 빛나는 배우들을 훔쳐보는 관찰자였다. 툴르즈-로트렉은 언제나 술집과 극장을 전전하며 밤의 화려한 무대를 탐닉하고 다녔다. -p33

 

 

엄마가 툴르즈-로트렉의 그림을 좋아해서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나도 이 사람의 그림을 좋아하게 되어 버렸다. 근데 이 구절에서 이 사람과 나의 공통점을 발견했다. 볼거리를 좋아한다는 것. 구경거리 앞에서 넋을 잃고 몰입한다는 것. 그 장소 자체를 사랑한다는 것. 이게 왜 이리 뿌듯한지. 잘 사는 명문집안에서 태어나 귀하디 귀하게 자랐으나 근친결혼의 영향으로 152cm의 왜소한 몸집에 큰 얼굴, 툭 튀어나온 입술 등을 가진 성인으로 성장한 툴르즈-로트렉에게는 볼거리 자체가 어쩌면 작은 마음 하나 위탁할 유일한 장소였는 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나도 그런 느낌으로 그렇게 좋아하는 지도. 사람은 자신의 불행이나 콤플렉스를 뭔가로 가리고 싶어하고 잊고 싶어하는데, 아마도 나에겐 '볼거리'가 그것인 모양이다. 일면 인정.

 

 

 

 

 

 

 

 

 

 

 

 

 

 

 

 

 

인상파에 대한 찬양 뒤에는 꼭 예술혼에 대한 숭고한 이미지가 따라붙었다. "예술가는 가난해야 해." 혹은 굶주림 속에서 위대한 예술이 나온다는 판에 박힌 얘기가 뒤따랐다. 살아생전에 그다지 빛을 보지 못한 화가들은 있었지만, 고흐처럼 작품 한 점 변변히 팔지 못하고 비참하게 산 경우는 없었다. 고흐가 상징이 되면서 인상파 전체가 굶주린 예술가들의 영혼으로 미화되었다. 다른 화가들의 생애에 대해서는 잘 알지도 못하고 정보도 없던 시절의 일이다. 이제는 그 신화에서 벗어나 가깝게 다가갈 필요가 있다. 예술이란 부담이 아니라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즐거움이므로. -p59

 

 

그러고보니 나도 그런 편견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예술가란 뭔가 궁핍하고 뭔가 부족하고 뭔가 처절해야만 진정한 예술가라는 편견. 그게 아마도 고흐 등의 몇몇 예술가들에게서 비롯된 것이겠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래서 예술이 어렵게 느껴지는 지도 모른다. 고뇌하지 않는 인간에게서 나오는 것은 예술이 아니고 따라서 나같은 凡人이 근접하기 어려운 영역의 것이다 라는 선입견이 있어서 말이다. 마지막 문장이 좋다. 예술은 그러니까, 이런 부담이나 고통이 아니라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즐거움이라는 말.

 

좋은 책이다. 반 정도 읽었는데, 읽는 내내 마음이 좋다. 다시 파리를 간다면 이 사람의 말대로 한번 해봐야겠다 싶은 대목들이 여럿 눈에 띈다.

 

 

이 분은 피렌체에도 이리 자주 가서 머무는가. 부러울 뿐이다. 파리와 피렌체라. 세상의 낭만을 다 가진 듯한 느낌의 저자다. 나도 이제는 여러 곳을 두서없이 마구 다니기보다 몇 몇 도시를, 마을을 오래도록 두고두고 관찰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면 싶다. 그 대상이 파리이고 피렌체라면 더욱 좋겠지... 아 다시 부러워짐.. 흑. 

 

내년에는 파리에 가서 며칠 머무르다 와야겠다. 가서 미술관 위주로 슬슬 걸어다니면서 마음을 다스리고 오면 한결 사는 게 좋아질 것 같은 느낌이 팍팍 든다. 이넘의 책이 나를 불지르고 있네..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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