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해보면 스웨덴 사람의 쟝르소설은 헨닝 만켈에게서 시작했던 것 같다. 북유럽 사람들의 책이 많이 번역되어 나오지 않았던 시절부터 이 작가의 책은 계속 나왔던 듯. 아마 <좋은책만들기>라는 출판사에서 비슷비슷한 표지의 책들을 줄줄이 낼 때 였던 것 같다, 처음 봤을 때가. <다섯번째 여자>였던가. 그 때는 뭐 나쁘지 않네 하다가 그 후에 한 권 정도 더 읽고 그냥 접었던 기억이 있다.

 

이번에 우연한 기회에 헨닝 만켈의 책 <불안한 남자>를 구입해서 보게 되었다. 별다르게 흥미가 막 생겨서는 아니고 발렌데르 시리즈의 마지막 작품이라는 문구에 슬쩍 당겼던 듯 싶다. 대개 시리즈물은 마지막 권을 쓰는 게 어렵지 않을까 한다. 시리즈에 열광하는 독자들이 자꾸만 더 내라고 재촉하고 작가 자신도 어렵사리 창조한 캐릭터의 인물을 쉽게 놓지 못하는 면이 있을테다. 그런데 마지막 작품이라니. 용케도 발란데르를 놓을 수 있는 거구나 하는 마음에 구입 버튼을 꾸욱..

 

 

사실 내용은 무미건조한 편이다. 오래 전에 끝나서 있었는 지 없었는 지도 가물가물한 그넘의 냉전시대의 유물에 농락당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라고나 할까. 발란데르는 환갑이 되어 버렸고 (헐) 그 딸 린다는 30대 후반이 되어 남자친구와 딸까지 낳고 산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 (굳이 호칭을 붙이자면) 시아버지 시어머니가 차례로 사라져버렸다는 거다. 그들의 과거를 조금씩 아주 조금씩 파헤쳐가는 이야기이다. 말하자면, 제목인 <불안한 남자>는 시아버지격인 호칸 폰 엥케인 것이고 이 사람으로 인해 모든 일이 발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사실, 줄거리에는 큰 재미를 못 느끼고 있다. 대충 짐작이 간다고나 할까. 그거보다는 발란데르의 넋두리들이 더 재밌다고나 할까. 나이든 남자의 푸념이라든가 건망증이라든가 이런 게 어쩐지 옆에 사는 아저씨 같은 느낌이다.. 대부분 이런 류의 소설에 나오는 형사나 경찰은 나이를 아무리 먹어도 호색한에 매력이 좀 있어서 여자가 주위에 여럿 포진해 있기 일쑤인데, 발란데르는 그저 가끔 와서 주정부리는 전처 이외에는 여자가 붙지를 않는다. 심지어 괜히 한번 히치하이킹 '당해'줬던 여자는 부모를 죽인 살인자이기까지..

 

12월 초에는 동료 경찰관들을 불러 집들이를 했다. 심지어 그날 밤에도 정전이 되었지만 이제는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낡은 등유 램프 두 개와 더불어 촛불도 마련해두었다. 약 한 시간쯤 지나자 전기가 다시 들어왔다. 발란데르는 그날 저녁을 기억하겠노라 다짐했다. 아직은 다 때려치우고 인생 이모작을 시작할 만큼 늙은이는 아니었다. 여전히 친구도 있었고, 모종의 의심스러운 의무감 때문에 오는 동료만 있는 것도 아니었다. (p21~22)

 

나이들수록 도대체가 이 사람이 친구인가 아닌가 의심스러울 때가 있다. 역시나 회사에서 만난 사람들은 친구는 아니다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고. 발란데르는 그에 비하면 억쑤로 운이 좋은 듯. 나이들면 역시 친구가 있어야 하는데 말이다. 35세 이후에 만난 사람들을 친구라 할 수 있을까.

 

회의가 끝나고 모두들 문서와 서류철을 챙기던 바로 그때, 발란데르는 딸에게서 받은 깜짝 선물 얘기를 들려주고 싶어서 입이 근질근질했다. 하지만 왠지 자신과는 어울리지 않는 짓 같아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동료들을 그 정도로 자신의 사적 공간 깊숙이 들어오게 한 적이 없었다. (p31~32)

 

그러면 그렇지. 역시나 동료는 동료인 게지. 나의 기쁨을 함께 나누기에는 조금 멋적은 거다. 내가 할아버지가 됩니다.. 라는 얘기를 나누기에도 망설이게 되는. 그러니까 친구는 아니라는 거다.

 

"알츠하이머병인가요?" 진료를 거의 다 받았을 때쯤 물어보았다. 의사는 빙긋이 웃었다. 환자의 심정을 헤아린다기보다는 그저 몸에 밴 친절함이었다. "아니요, 그런 것 같지는 않아요. 하지만 인생이란 다음 모퉁이를 돌면 뭐가 튀어나올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죠." (p79)

 

자꾸만 뭔가를 잊어버리는 발란데르. 이게 치매인가 덜컥 겁이 나서 병원에 갔더니 의사가 그런다. 앞으로의 일은 아무도 모른다고. 기억 안나는 것도 서러운데, 위로는 없다. 아 이래서 병원은 가기가 싫다. 심정을 헤아리는 말 한마디 친절하게 던질만한 의사가 별로 없다. 나이들면 치매가 가장 걱정인데, 정말이지 이 대목에서 울컥한다.

 

'내 평생 누구보다 사랑한 여인이었는데...  오늘 또 하나의 사랑을 만나러 가기는 하지만, 내 삶에서 가장 소중한 여인이 모나라는 걸 부인할 순 없지. 내겐 절대 불변의 사실이니까. 사랑의 빈자리는 또 다른 사랑이 채울 수 있으나, 옛사랑은 항상 그 자리에 남는 법. 우리가 발을 디디고 있는 삶의 바닥은 두 겹이야. 그래야만 한 겹에 구멍이 생겨도 금방 푹 꺼지지 않으니까. (p238)

 

고주망태가 된 전처를 바라보면서 발란데르가 이렇게 쓸쓸한 생각을 한다. 더 이상 바라는 것도 기대하는 것도 없이. 그저 과거를 쳐다보고 있는 거다. 산다는 게 참 뭔지. 그 때는 정말 미쳐서 몰두했던 그 사람을 오랜 시간 지나 다시 바라보면 그 때의 감정은 간 데 없고 회한만이 남게 된다. 간혹 그런 날이 있었나 라는 의문감까지 생길 정도로 말끔히 정리된 감정에 놀라기도 하고. 아..

 

가끔 소설에 감정이입이 될 때가 있다. 내가 아직 그 나이는 안되었지만, 뭐랄까. 발란데르의 마지막 소설에서는 그의 나이듦이, 회한이, 쓸쓸함이 정말 절렬하게 느껴진다. 나이가 든다는 것에 대해서 간혹 생각해서일까. 유난히 발란데르의 이런 모습을 열심히 쳐다보게 된다. 이제 마지막 등장이니 노년은 편하게 즐겁게 지냈으면 좋겠다. 좋은 사람과 함께 하고... 손녀와 따뜻한 시간도 보내고. 시리즈물의 주인공이다보니 마치 나와 동시대에 사는 사람같은 이 느낌이라니.

 

마저 다 읽어야겠다. 이제 '불안한 남자'의 비밀이 벗겨지기 일보직전까지 왔다. 그의 불안이 무엇인지 이제야 조금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