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주말의 추리소설이라며 노리즈키 린타로의 <요리코를 위해>를 단숨에 읽고는 심정이 상해버렸다. 아버지의 수기로 시작해서 그걸 파헤쳐가는 린타로 탐정의 활약상(?)이 더해진 내용이었는데 첫 몇장을 읽으면서 아 반전이 이렇게 되겠구나 라고 생각했던 대로 전개되어 그닥 긴장감이랄까 궁금함이랄까도 없었다. 특히나 이런 류의 반전. 별로 좋아하질 않아서 찝찝함만 남더라는.

 

그래서 이걸 상쇄시키고자 조금은 아름다운(?) 이야기를 읽어야겠다 싶어 펼친 책이 <페티그루 소령의 마지막 사랑> 이라는 소설이다.

 

 

 

 

 

 

 

 

 

 

 

 

 

 

 

 


 

그러니까, 6년 전에 아내를 잃고 이젠 동생마저 잃은 68세의 페티그루 소령이라는 전형적인 영국인이 근처 가게를 운영하는 남편 잃은 58세 파키스탄 여자와 늘그막에 사랑이라는 걸 하게 된다..라는 게 주요한 내용이다. 그런 내용만 있다면 절대로 재미있을 수 없겠지만 그들의 사랑이 아주 서서히 진행되는 동안, 영국이라는 나라의 분위기, 작은 마을의 사람들 관계, 그 속에 묻혀 사는 이주민인 파키스탄 사람들과의 이질감, 조심스러움, 다른 문화, 다른 생각.. 이런 내용들이 함께 버무러져 꽤 재미있는 내용이 이어지고 있다. 괜챦은 선택이었다고 나름 만족하고 있는 중.

 

"운전을 좋아해요." 그녀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오로지 나와 엔진뿐이니까요. 내게 무엇을 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죠. 장부도 없고 물품 목록도 없고... 그저 열린 길이라는 수많은 가능성과 보이지 않는 수많은 목적지 뿐이에요."

 

 

나도 운전을 좋아하는데, 왜 좋아하는 지에 대해서 생각해본 적은 없었던 것 같다. 그냥 갇혀진 공간에 나만 있을 수 있다는 자유로움 정도. 주인공 미시즈 알리의 말이 마음에 와닿는 걸 보면 나도 이런 이유를 가지고 있었는 지도 모르겠다. 일대일 대면의 즐거움. 나와 차. 나와 엔진. 그래서 얻어지는 자유로움, 조용함, 격리감...

 

 

소령은 며칠 사이 비탄이 더욱 격해진 것에 놀랐다. 비탄이 수학책에 나오는 그래프처럼 직선으로 또는 완만한 곡선으로 줄어드는 것이 아님을 잊고 있었다. 그렇게 되는 대신, 몸이 묵직한 흙덩이와 뾰족한 가시덤불 - 그가 마음을 푹 놓고 있을 때 그를 찔러대곤 하는 - 이 가득한 커다란 정원의 쓰레기 더미가 된 것 같았다. 미시즈 알리가 들렀다면 - 그리고 그는 그녀가 들르지 않은 것이 다시 약간 얹쨚아졌다 - 그 사람은 이해했을 텐데. 미시즈 알리라면 자신에게 버티에 대해 이야기할 기회를 주었을 것이라고 소령은 확신했다. 땅속에서 이미 분해되어가는 죽은 몸뚱이가 아니라 예전의 버티에 대해.

 

 

나이가 들어가면서 사랑이라는 말의 의미가 조금씩 달리 느껴진다. 젊었을 때는 불타는 감정, 없으면 못 살 것 같고 보고 싶고 옆에 있고 싶은 심정으로 늘 휩싸여 있었던 것 같다. 근데 나이가 들어가면서 그런 감정들만으로는 사랑이라는 단어가 설명되지 않는 그 무엇인가가 되어간다. 지나온 세월이 길어서일까. 그 지아노 시간들에서 켜켜이 쌓인 감정들, 느낌들을 말하고 싶다는 게 사랑과 동치된다. 아 말하고 싶다기보다는 공유하고 싶고 이해받고 싶고 이해해주고 싶은 느낌이 더 적확하려나. 그리고 확 타오르는 감정은 없어졌지만, 은근히 조금씩 진전되는 느낌이 더 편안해졌다.

 

 

"친애하는 미시즈 알리, 나라면 당신보고 늙었다고 말하지 않겠어요. 당신 나이라야 여성의 성숙함이 한껏 피어난다고 나는 말하고 싶습니다." 너무 거창한 말이긴 했지만 소령은 그녀가 놀라서 얼굴을 붉히기를 바랐다. 그러는 대신 그녀는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무르익은 중년의 주름과 지방층 위로 그렇게 두꺼운 아첨을 바르시다니, 소령님. 들어본 적도 없는 아첨이시네요." 그녀가 말했다. "난 쉰여덟이고 전성기는 훌쩍 지났다고 생각하는데요. 이제는 그저 변치않는 부케로 건조되기만 바라는 처지죠."

"나는 당신보다 열 살이나 많아요." 그가 말했다. "그렇게 말씀하시면 난 진짜 화석이게요."

그녀는 다시 웃었다. 소령은 미시즈 알리를 웃게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고 값진 일은 없다고 느꼈다.

 

이런 게 사랑의 시작이란 걸까. 무엇보다 남자의 아첨 아닌 아첨에 얼굴을 붉힐 수 있는 것은 젊은 처자의 통통한 볼이 어울릴 터. 나이든 여자에게는 웃음으로 화답할 내용이라는 데 동감. 그러나 모든 사랑의 처음은, 상대가 웃어주는 것이 가장 가슴 두근거리는 일이로구나. 젊으나 늙으나. 상대가 나의 말에 웃는 얼굴을 보여주는 것, 그의 얼굴에 웃음이 만연하게 해주는 것. 이것이 세상의 전부인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 역시나 사랑이로구나.

 

 

소령은 버티의 유언을 엘릭에게 들려준 것을 후회했다. 부당하다는 생각에 다시금 억울한 마음이 든 소령은 백나인 어딘가에서 슬쩍 이야기를 흘렸다. 사람을 믿는 것은 좋은 생각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당신이 들려준 이야기를 항상 기억한다. 그래서 몇 년 후 거리에서 마주쳤을 때에도 그 이야기는 여전히 당신 얼굴에 단단히 붙어서, 당신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의 음성에도, 당신의 손을 잡는 손길에도 영향을 준다는 사실을 당신은 깨닫게 된다. 

 

 

그래서 나이가 들수록 사람들에게 나를 안 보여주게 된다. 하고 싶은 말을 속에 꽁꽁 넣어둔 채 들려주고 싶은 말만 골라서 얘기하고자 머리를 쉼없이 굴린다. 그래서 피곤하고 적막하다. 어쩌면 이 소설의 페티그루 소령도 그래서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그리고 자신과 관심사(책과 작가)가 비슷한 미시즈 알리에게 은근한 사랑을 느끼는 지도 모른다.

 

이제 한 1/3 정도 읽었는데 이 일요일을 하루 들여서 다 읽어내기에 부족함이 없는 소설이다. 작가인 헬렌 사이먼슨의 데뷔작이라는데, 노년의 섬세한 감정의 결을 잘 짚어서 무리없이 쓰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의 일요일을 무난하게 만든 헬렌, 땡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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