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로 산다는 것
카를 게바우어 지음, 심재만 옮김 / 예담 / 2004년 11월
평점 :
절판


지난 내 생일 때 우리 회사 사람이 선물로 준 책이다. 사실 받아들고 조금 황당하긴 했다. 나는 어머니가 되었으면 되었지 아버지가 되지는 못할 거니까. 선물한 사람이 두 아이의 아버지이고 그래서 아마도 자신의 고민의 화두 끝에서 읽은 책을 준 것이겠거니 하고 대충 구석에 두고 관심을 두지 않았었다. 그리고 지금에서 펴게 된 이유는 다름 아니라 우리 아빠가 편챦으셨기 때문이고 힘들어하시는 아빠를 보며 과연 아버지라는 이름은 무엇을 뜻하는 것이며 아버지로서의 삶을 무엇을 나타내는 걸까 하는 갑작스러운 궁금증이 생겼다는 데에 있다. 어쩌면 이 책은 이런 때를 대비하여 나를 기다리고 있는 듯 느껴졌었다.

독일 사람이 지은 이 책은 세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1부는 아이의 성장과정에 따른 아버지의 역할이고 2부는 열 여섯사람의 아버지에 대한 얘기, 마지막 3부는 좋은 아버지가 되기 위한 요건들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가장 핵심적인 부분은 아무래도 각기 다른 경험을 가진 열 여섯 사람의 남자들이 기억하는 아버지와 자신의 아버지로서의 모습을 인터뷰한 내용일 게다. 폭력적인 아버지, 권위적이고 강압적인 아버지도 있고 일찍 돌아가셔서 그다지 기억에 없는 아버지, 애정 표현에 서툴러 늘 멀리 느껴졌었던 아버지도 있다. 아버지의 태도에 의해 아들의 인생은 많은 부분이 달라졌고 제대로 된 아버지의 상을 그리지 못한 사람은 자신도 그런 아버지와 비슷한 모습이 되어 있기도 하며 또는 아버지 이외의 남자들로부터 정체성을 획득하여 자신이 원하는 아버지의 모습에 가까이 가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공통적인 것은, 누구나 어렸을 때 아버지가 자신에게 해주었던 섬세한 애정표현들, 자상한 보살핌, 친근감 등을 잊지 않고 기억한다는 것이고(자주이든 가끔이든 간에) 아버지와의 제대로 된 소통을 늘 간절히 원한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분석들은 비단 독일 사람에게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어느 나라 어느 세대에나 다 통하는 얘기들인 것 같다.

어머니이기 전에 한 사람의 여성으로서 자존을 가져야 올바른 어머니가 될 수 있는 것처럼 아버지도 한 사람의 남성으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해야만 자식에게 올바른 방법으로 접근할 수 있다. 요즘 명퇴가 밥먹듯이 일어나고 기러기 아빠라는 새로운 풍조가 대두되면서 남성이 아버지로서 살아가는 것에 대해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것은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솔직히 어머니와 아버지가 각자의 역할을 충실히 하고 서로에 대한 신뢰를 한없이 보여줌으로써 자식은 정서적으로 안정되고 풍요롭게 클 수 있다. 누구 하나의 역할이 비대해지거나 왜소해질 경우 아이에게 가는 영향은 지대할 것이다.

읽으면서 우리나라 아버지들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다. 나의 아버지 세대들은 6.25를 겪었거나 전후의 가난하고 헐벗었던 시절을 겪어내었고 잘 살자는 모토 아래 직장과 나라를 위해 물불 안 가리고 열심히 일했던 세대이다. 그래서 어쩌면 자식에게 주어야 할 애정을 제대로 표현하는 법도 잘 모르고 바깥에서 인정받기 위해 애썼던 시간동안 훌쩍 커 버린 자식과의 소통도 원활하지 못할 지도 모른다. 더군다나 우리나라 근대의 몇 십년 동안은 너무나 커다란 변화가 있었기 때문에 세대차라는 문제가 매우 커서 아버지와 자식 세대가 서로를 이해할래야 이해할 수 없는 상태에 빠지기도 하다. 이제 세월의 풍파 속에 늙어버린 아버지들은 덕분에 가족으로부터 심정적으로나 물리적으로 소외된 채 외롭게 지내게 되곤 한다. 이게 사회의 문제라고는 하지만 기실 어디서부터 어떻게 풀어가야 할 지 알 수 없이 시간은 자꾸만 가고 있는 듯 하다.

책을 덮고 아빠의 뒷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아빠의 지난 시간들을 상상해본다. 사진 속의 젊은 남자는 누군가를 몹시 사랑했던 적도 있었을 테고 직장에서 살아남고자 고민했던 시절도 있었을 것이다. 갓 태어난 딸과 아들을 보며 아버지로서의 뿌듯함과 책임감을 느꼈을 테고 커가는 자식의 모습에 뭐라 따뜻한 애정표현은 못해도 가슴 그득한 자애감을 가지기도 했을 것이다. 또는 지금의 나처럼 인생에 대해 고민하고 더 나아지기 위해 애쓰던 시간들도 있었겠고 한 줄 두 줄 늘어가는 주름에 시름섞인 표정을 지어보이기도 했을 테다...이런 생각들을 하니 아빠가 그냥 아버지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남성'으로서 살았을 인생을 보게 되고 그래서 애틋한 연민을 느끼게 되었다.

이 책은 각각의 사연들이 마음에 많이 와 닿지는 않았으나(반복되는 회상들과 특징없는 구술들이 이어지기도 한다) 나와 아버지의 관계, 내 아버지의 인생에 대해 한번 더 생각할 수 있는 모티브를 제공하는 데는 나무랄 데 없는 책이다. 아버지가 될 혹은 된 남성들과 그들을 남편으로 아버지로 가지고 있는 여성들이 모두 읽어도 좋을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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