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초반 읽을 때는 엄마 나이만한 여자를 사랑하게 된 대학생의 첫사랑 이야기와 그에 따른 좌절 뭐 그 정도로 생각했었는데, 역시 줄리언 반스는 그렇게 녹록한 작가가 아니었다. 따라서 이 책의 한국말 제목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영어 원제인 "The Only Story"가 더 적당하다. "하나뿐인 이야기?" 뭐 이렇게 제목을 걸면 밋밋해서였는 지는 모르겠지만 영어 원제가 이 책의 내용을 훨씬 잘 반영한다. 사랑으로 시작한 이야기였지만 인생에 대한 이야기였고 사랑을 이야기하지만 결국 사람의 마음과 본성에 관한 이야기였고... 그리고 기억의 이야기였고 그러면서도 사랑 이야기이기도 한 소설. 줄리언 반스 굿입니다.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지.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해. 어쨌든 절대 잊지 마세요, 폴 도련님. 모든 사람에게는 자기만의 사랑이야기가 있다는 걸. 모든 사람에게. 대실패로 끝났을 수도 있고, 흐지부지되었을 수도 있고, 아예 시작조차 못 했을 수도 있고, 다 마음속에만 있었을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게 진짜에서 멀어지는 건 아니야. 때로는, 그래서 더욱더 진짜가 되지. 때로는 어떤 쌍을 보면 서로 지독하게 따분해하는 것 같아. 그들에게 공통점이 있을 거라고는, 그들이 아직도 함께 사는 확실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는 상상할 수도 없어. 하지만 그들이 함께 사는 건 단지 습관이나 자기만족이나 관습이나 그런 것 때문이 아니야. 한때, 그들에게 사랑 이야기가 있었기 떄문이야. 모두에게 있어. 그게 단 하나의 이야기야."

나는 대답하지 않는다. 꾸지람을 들은 기분이다. 수전에게 꾸지람을 들었다는 게 아니다. 인생에게 꾸지람을 들었다는 거다. (p75-76)

 

 

이 대화가, 이 이야기가 아마 이 소설을 관통하는 주제가 아닌가.. 읽으면서 생각했었다. 마음에 왠지 많이 남겨지는 말이다. 한때, 라는 단어. 현재형이 아니라 과거형이며 동영상이 아니라 사진처럼 장면으로 떠오르게 하는, 그 단어. 한때 있었던 거다. 누구에게나. 어떤 형태든. 사랑 이야기가. 그들만의 사랑 이야기가.

 

둘의 사랑은 도주로 이어지고, 그렇게 둘이 십수 년을 살게 된다. 어찌 보면 참 천편일률적이며 진부하기 짝이 없는 스토리일 지도 모른다. 만약 우리나라 드라마같으면 이러다가 젊은 여자가 나타나고 그래서 남자는 한눈을 팔고 그래서 엄마 나이의 여자는 분노를 하고 복수를 다짐하고.. 뭐 그렇게 이어질 지도 모르겠다. 아마, 그게 정말 진부한 스토리겠구나. 여긴 그런 건 없다. 남자는 여전히 여자를 사랑하고 그녀에게서 영감을 얻고 그렇게 잘 살아갈 수 있었는데, 여자에게 문제가 생긴다. 복잡한 내면 속에서 견디다 못해 그렇게도 경멸하던 알콜에 탐닉하게 된 것. 그렇게 그들의 사랑은 조금씩 스러져 간다.

 

 

물론, 그의 공책에는 이런 내용도 적혀 있었다. "한 번도 사랑해본 적이 없는 것보다는 사랑하고 잃어본 것이 낫다." 그것은 그렇게 그 자리에 몇 년을 있었다. 그러다가 그가 줄을 그어 지워버렸다. 그랬다가 다시 적어 넣었다. 그 뒤에 다시 줄을 긋고 지웠다. 이제 그에게는 두 항목이 나란히 있다. 하나는 깨끗하게 진실로, 다른 하나는 줄이 그어진 거짓으로. (p297)

 

 

잘 모르겠다. 무엇이 진실인지는. 내가 생각할 때, 사랑은 기억이고 그러니 그 기억이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게 나을까. 글쎄. 없다고 뭐가 달라질까. 나빠질까. 있다고 뭐가 나아질까. 아니, 인생이라는 자체가 꼭 나아져야 하는 걸까. 나빠지면 안되는 걸까. 사랑을 이야기하면 마음이 혼돈스러워진다. 옳다 그르다 시시비비를 가리기 전에 내 마음에 혼란부터 일어난다.

 

주인공 폴은, 수전을 포기하고 딸들에게 '되돌려준다'. 그리고 이곳저곳을 다니며 나름대로 지낸다. 하지만 어느 곳에도 정착하지 않았고 어느 여자에게도 안착하지 않았다. 그렇게 나이를 먹는다. 수전에 대한 기억을 나름 정리하는 지금까지. 칠십대가 될 때까지. 수전의 마지막이 다가오고... 병원으로 찾아간 그는... 어쩌면 영화의 한순간같은 장면을 상상한다. 그녀의 볼에 입을 맞추며 눈물을 흘리며 사랑과 안녕을 고하고 일어나면 그녀는 없는 의식 속에서 아는 듯 모르는 듯 약간의 반응을 보이고... 그러나 실제는 그렇지 않다. 이 책의 마지막 장면만큼 인상깊은 장면이 있을까 싶다. 뭔가 속에서 쿵 내려앉는 듯한 느낌.

 

줄리언 반스는 감정의 섬세한 결을 참 기가 막히게 그려내는 작가이다. 숨기고 싶은 내 폐부의 이야기들. 상황에 대한 담담하면서도 찌르는 듯한 묘사. 욕과 농을 섞어 드러내는 진실들. 사람의 민낯을 꾸미지 않고 직설적으로 표현하는 능력. 읽으면서 왠지 이게 내 얘기인 것처럼 몰입하게 되는 것은, 다 이런 자질들 때문이 아닌가 싶다. 다른 책들도 마찬가지였지만 이 책도 한번 읽어보라고 추천하고 싶다. 물론 개인적인 호불호는 분명히 있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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