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그렇다. 평소에 읽어야지 읽어봐야지 했던 책들이 있다. 차일피일 미루다가, 문득 저자의 부고를 듣는다. 좋은 글을 쓴다는 말, 듣기만 했는데, 아주 드물게 컬럼이나 보곤 했는데, 더 이상의 책을 낼 수 없는 피안의 세계로 영면하셨다는 얘기를 듣고서야 아뿔싸. 하는 마음에 부랴부랴 책을 사든다. 그리고 왜 그 전에 좀더 일찍 알지 못했을까 후회하곤 한다. 지금 읽은 황현산의 책이 그러하다. 몇 달 전 돌아가셨고 나는 그 이후에야 이 책을 손에 들었다. 그리고 오늘 이 책을 덮으면서 우리가 정말 소중한 사람을 너무 일찍 보내야만 했구나 라는 생각이 든다. 안타까움과... 가슴 한귀퉁이 스치는 쓰라림이 있다.

 

언어는 사람만큼 섬세하고, 사람이 살아온 역사만큼 복잡하다. 언어를 다루는 일과 도구가 또한 그러해야 할 것이다. 한글날의 위세를 업고 이 사소한 부탁을 한다. 우리는 늘 사소한 것에서 실패한다. (p97)

 

한글날이다. 그리고 황현산의 이 책 제목인 <사소한 부탁>은 글 내용 중 <한글날에 쓴 사소한 부탁>에서 나왔다. 아이러니한 일이다. 언어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의 이 말. 사소한 것부터 고쳐달라고 하는 이 부탁. 그리고 우리가 잘못 된게 있다면 아마도 이러한 사소한 것에서 실패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동감, 또 동감.

 

사회적인 이슈에 대해서, 사회의 소외된 사람들에 대해서 쓸 때 그의 문체는 따뜻하다. 구구절절한 말을 쓰지 않고도 담백하게 그 마음을 전한다. 그래서 더 찡하다. 더 절감된다. 말을, 글을 정갈하게 쓰면서도 마음을 전할 줄 아는 분이었다.

 

모든 인간은 자기 안에 타자를 품고 산다. 자기이면서도 자기인 줄 모르는 자기, 자기라고 인정하기 싫은 자기가 자기 안에 있다는 말이다. 이 자기 안의 타자는 합리적인 것처럼 보이는 우리의 의지를 훼방하지만, 많은 창조자의 예에서 보듯이 때로는 의식과 의지가 이룰 수 없는 것을 이 타자가 이루어내기도 한다. 이 점은 국가와 같은 거대 집단에서도 마찬가지다. '명석한 독재'가 정연하고 잘 계산된 가능성의 기치를 내걸고 실패할 때, 반항하는 사회적 타자들의 들쑥날쑥한 정신은 명석한 정신의 계산 밖으로 밀려났던 무한대의 가능성을 여전히 끌어안고 있다. 미래의 희망이 사회적 주체보다 사회적 타자에게서 기대되는 이유도, 민주주의가 가장 훌륭한 정치체제인 이유도 여기 있다. (p173)

 

그러면서도 당신의 전공 분야인 평론에 들어가면 좀더 어려운 말을 구사하면서도 유연하고 명징하게 표현해준다. 문학을 공부한다는 게 무엇인 지, 그리고 그것을 우리나라 말로 번역해내는 일의 소중함은 무엇인 지, 차분히 이야기한다. 맞다. 차분하다. 그런 표현이 떠오른다, 이 분의 글을 읽으면. 크게 분노하지 않고 크게 역정내지도 않으며 장광스러운 이론을 이야기하지는 않지만, 어느 새 내 마음에 스미도록 하는 글을 쓰고 계셨다. 더 적절한 어휘로 전달하고자 고뇌하는 모습이 역력하지만, 그것이 또한 삶의 이유임을 말한다... 아, 좀더 이 땅에 계시면서 더 좋은 글들로 우리를 다독여주셨으면 좋았을텐데... 이 아침, 괜한 애통함에 젖게 된다.

 

한 인간의 내적 삶에는 그가 포함된 사회의 온갖 감정의 추이가 모두 압축되어 있다. 한 사회에는 거기 몸담은 한 인간의 감정이 옅지만 넓게 희석되어 있다. 한 인간의 마음속에 뿌리를 내린 슬픔은 이 세상의 역사에도 뿌리를 내리고 있다고 믿어야 할 일이다. 한 인간의 고뇌가 세상의 고통이며, 세상의 불행이 한 인간의 슬픔이다. 그 점에서도 인간은 역사적 동물이다. (p169)

 

다시한번 고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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