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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과 게 - 제144회 나오키상 수상작
미치오 슈스케 지음, 김은모 옮김 / 북폴리오 / 2011년 3월
평점 :
절판
시간이 갈수록 감정이 단순해진다. 슬프다, 기쁘다, 행복하다, 짜증난다, 밉다, 좋다, 싫다. 더 이상 내 감정을 붙잡고 그것의 정체를 알기 위해 자세히 들여다볼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단순화하는 연습을 한 덕분일까, 정말로 감정이나 감각이 둔해져서일까, 잘 모르겠다. 아무튼, 그래서 나는 지금보다 좀 더 감정이 복잡다단했을 때 내가 되고 싶었던 것이 되었어야 했다.
덕분에 이 책을 덮고 난 후의 느낌도 한마디로 요약될 만큼 단순해서 조금은 당황스러웠다. 이런 말, 저런 말, 하고 싶은 말이 마구 떠올라야 리뷰를 쓰는데, 그냥 슬펐다. 이곳에서 내 실명이나 내 얼굴을 아는 이 없으니 좀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요즘 어디서든 울 핑계를 찾아 기회닿는 대로 울고 있는데, '달과 게'도 어느 정도 마음 편하게, 그것 때문이 아니라 이것 때문에 우는 거라고 말하며 그냥 마음 편하게, 하지만 얌전하게 울 수 있도록 해줬다.
결국 가장 최악의 상황은 일어나지 않지만(이미 가능한 최악의 상황들이 모두 일어나 버린 후의 이야기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래서 책을 다 읽고 난 후 오히려 '슬프다'는 감정만이 남았을 거다. 서로 추악하게 있는 그대로의 욕망을 다 드러내고 볼장 다 보자고 덤볐다면, 그래서 모든 것이 파국으로 치달았다면, 책에 줄 수 있는 별의 개수는 줄었겠지만 그래도 마음은 오히려 홀가분했을텐데.
하지만 미치오 슈스케는 나를 홀가분하게 만들어주지 않았다. 등장인물 중 누구의 나쁜 소원이 이뤄졌다한들 그를 대놓고 비난할 수 없을 그런 나약하고 상처 입은 존재들이 그래도 끝까지 독하게 버텨준 덕분에 그들 중 누구도 잠시나마 품었던 나쁜 소원을 이루지못하고 오히려 그런 마음을 품었다는 사실에 스스로 더욱 상처받고 만다는 것이, 그것이 참 슬펐다. 차라리 그냥 속시원하게 누구 하나 나쁜놈으로 만들어버리지.
그렇게 서로 고백할 수 없는 상처와 얽힌 소원들을 갖고 있는 존재들끼리는 아무리 서로 끌어안고 위로하려해도 오히려 상처를 만들고마는 가위손일 뿐이다. 서로 치고받고 뒹구는 치기어린 싸움은 끝나면 오히려 감정의 반전을 일으켜 더 단단하고 좋은 감정을 만들어주기도 하지만, 따뜻한 감정의 교류 사이사이로 흐르는 복잡미묘한 감정대립은 끝내 관계를 끝장내버리고 만다는 것을 한 번 더 확인하게 된 것 같아서, 그래서 슬프다.
"소라게는 빠른 멜로디를 치는 피아니스트의 손가락처럼 수많은 다리를 제각각 움직여, 콘크리트 위에서 희미하게 딱딱한 소리를 내며 맹렬하게 다가왔다."
빠른 멜로디를 치는 피아니스트의 손가락처럼, 그렇게 수많은 다리를 제각각 움직여, 마치 콘크리트 위에서 움직일 때처럼 딱딱한 소리를 내며 맹렬하게 다가오는 것, 소라게 같은 것, 그것이 바로 사람의 생각과 감정이 아니었던가, 그런 것 같다.
"실제로는 나른해서 어찌할 도리도 없는데, 어째서인지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달리거나 날거나 뛰어오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막상 그 소라게에 쫓기고 있을 때는, 악몽을 꿀 때처럼 팔다리도 말을 듣지 않고, 마음도 마음대로 되지 않아서 어찌할 도리도 없는데, 어째서인지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달리거나 날거나 뛰어오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신이치나 하루야, 그리고 나루미가 한 것처럼 나쁜 소원을 빌고, 나쁜 행동을 하고, 자신의 마음을 속여가며 어른인 척도 해보고, 이것저것 다 해본 것 아니었을까.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럴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일 뿐이어서, 미치오 슈스케가 정해준 결론 안에서 그렇게 잠시 동안은 갇혀있어야 할 거다.
+ 여기까지 쓰고 나니, 내가 위선자라는 생각이 든다. 하루나야 신이치 같은 인물을 소설 속에서 만날 때는 그들의 상처는 알지도 못하면서 그저 밀어내고 모른체하는 주변 인물을 비난하면서, 정작 현실에서 이런 인물을 만났을 때는, 소설 속 주변 인물들처럼 비겁자가 되고 마는 게 나라는 사실을 바로 오늘, 깨닫고 오는 길이기 때문이다.
바로 지금이 다가가 말 걸어줄 때인 것 같은데, 왠지 무섭고 겁이 나서, 그냥 안 봤으면, 더이상 어떤 내밀한 관계가 생기지 않았으면, 이쯤에서 모른척할 수 있으면 좋겠다. 비겁한 거 아는데, 정말이다. 하루하루 나 자신의 비겁함을 바라보며 멀쩡히 지낼 자신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