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영
김이설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무엇보다도 이 소설 때문에 나처럼 괴로웠을 남편에게 각별한 감사를 건넨다. '내가 쓰는 소설의 의미'와 '식구가 쓰는 소설의 의미'를 어떻게 구분해야 하는지, 이 소설을 쓰면서 비로소 깨달았다. 언제나 나에게 최선인 남편에게 진심으로 미안하다."

이 글은 책의 마지막에 있는 '작가의 말' 일부다. 

지독한 작가다. 책을 읽는 내내 그렇게 느꼈지만, 마지막 '작가의 말'을 보며 나는 한 번 더 이 생각을 곱씹었다. 정말 지독한 작가다. 

[환영]은 정말 소위 '남편 있는 여자'가 쓰기는 더더욱 쉽지 않은 소설인데 그녀는 썼고, 이렇게 출간해냈기 때문이다.

한때 싸이월드 BGM으로 '고독한 여자의 미소는 슬퍼'라는 곡을 깔아놓은 적이 있었다. 당시 나는 '남편' 아닌 '남친'이 있었고, 남친은 배경음악을 바꾸라고 종용했다. 자기가 옆에 있는데도 이런 곡을 걸어놓는 게 싫다고 했다. 그랬는데,

'여친'도 아니고 '아내'가 이런 글을 쓴다면 남편으로서는 지켜보기 쉽지 않았을 것 같다. 김이설 작가가 창작의 고통을 겪는 본인만큼 남편도 괴로웠을 거라고 이야기하고 '각별한 감사'와 '진심으로 미안'함을 표하는 것이 전혀 과장이 아니라고 느껴질 만큼, [환영]은 정말 지독한 소설이다.


소설 속에서 여자는 팔자를 관장하는 사나운 신이 사나운 곳에 버려놓은 것 같은 삶을 산다. 

오랫동안 왕백숙집을 들락거려 서로의 사정을 아는 이들이었다. p.23 

그 삶은 서로의 '사정'을 아는 사람끼리 모인 왕백숙집으로 여자를 밀어넣는다. 그녀를 고시원이라는 좁은 곳에 가둔 것으로는 모자랐던 걸까.

남편을 만난 건 고시원이었다. 저녁 한 끼 해결하던 고시원 주방에서 곧잘 마주치던 남자였다. 조심스럽게 비켜서다가, 목례를 하게 되고, 김치를 나눠 먹고, 계란 프라이를 두 개씩 하게 되었다. 고개를 맞대고 한 냄비에 라면을 끓여 먹고, 그 국물에 찬밥도 같이 말아 먹었다. p.28

그래도 그녀는 자기의 인생만큼이나 갑갑한 공간인 좁아터진 고시원에서 남편을 만나 그곳을 일단 벗어나긴 한다. 혼자가 아니라 함께.

후에 여자는 '남편과 살게 된 일'이 '살면서 내 뜻대로 되는 일이란 하나도 없었'던 인생에 '유일하게 이뤄진 것'이라고, '아무리 생각해도 그뿐(p. 116)'이라고 말하는데, 그런 남편과의 만남도 이렇게 별 감정 없이, 수식 없이, 간결하게 써내려갈 만큼 삶이 그저 살아남는 것만으로도 버거운 사람이다.

그래도 혼자가 아니라 함께이기에 살아보려고, 한번쯤 행복해보려고 여자는 다시 한 번 용기를 내는데, 하필 그곳은 '물가'다. 가뜩이나 힘든 그녀를 물에 젖은 솜처럼 더 무겁고 지치게 만드는 물가. 

계절이 바뀌는 걸 제일 먼저 알려주는 건, 공기나 나뭇잎의 색깔, 왕백숙집의 손님 수가 아니었다. 계절에 가장 민감한 건 물이었다. 물가의 냄새와 빛깔은 하루하루 달랐다. 날이 더워지면 물비린내가 짙어지고 색깔도 탁해졌다. 겨울로 갈수록 물은 고요해지고 맑아졌다. 근래 들어 비린내가 나기 시작했다. 여름이 오고 있었다. p.105 

치워도 치워도 끝도 없이 떨어져 방바닥을 더럽히는 머리카락은 그래도 방바닥에 얌전히 떨어져 있는 동안은 그렇게까지 더럽진 않다. 하지만 욕실에 떨어져 물에 젖고 습기에 불어 엉킨 머리카락은 지저분하기 짝이 없다.

남편을 만나기 전, 그래도 아직은 그냥 '방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 같았던 여자는 물가로 가서 욕실에 떨어져 물에 젖고 습기에 불어 엉킨 지저분한 머리카락이 된다. 물가에서, 닭국물을 떠먹고, 소주를 따르면서 그녀의 인생은 물기를 머금고 조금씩 젖고 눅눅해지고 너덜너덜해진다.

엄마, 아빠, 여동생, 남동생, 그 어떤 이름도 그녀에게 위안을 주지 못하는 가족의 범주는 그렇게 남편, 딸로 넓어져가며 여자를 더욱더 궁지로 몰아넣는다. 가족과는 하고 싶은 말들보다 하지 말아야 할 말들만 점점 더 쌓아간다.

엄마와 나는 입을 더욱 굳게 다물었다. 몇 년 만에 만난 모녀 사이인데, 할 말이 참 없었다. 하고 싶은 말들보다는 하지 말아야 할 말들만 자꾸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p.170 

가족들과 하지 말아야 할 말들이 더 쌓여가는 삶이란 대체 어떤 것일까. 상상해본다. 아마 [환영] 속 여자의 삶 같으리라고, 소설을 읽은 덕분에 어설프게 짐작해보지만 사실은 나는 잘 모른다. 그래서 여자가 잠깐 희망을 볼 때 나도 그 희미하고 짧은 순간의 그녀 희망을 잽싸게 낚아챘다. 희미한 빛이 점점 선명해져 그녀 안의 물기를 말려줄 수 있게 되기랄 바랐다.

하지만,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김이설은 지독한 작가다. 그래서 책을 덮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아주 느리게 걸을 수밖에 없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아무리 속도를 내려고 해도 발이 움직이지 않는 상태로 집에 돌아와 아무도 없는 방에 불을 켜고도 외롭다는 생각을 하는 대신 깊이 안도했다.


물에 젖은 채로 오래 방치돼 물때까지 머금은 욕실 배수구에 엉켜있는 머리카락을 눈 돌리지 않고 이마 찌푸리지 않고 맨손으로 용감하게 끄집어내는 김이설 작가의 용기가 놀랍다. 그리고 소설이 더 길게 쓰여지지 않아 다행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
최인호 지음 / 여백(여백미디어) / 2011년 5월
평점 :
절판


어느날 눈을 떴는데, 모든 게 수상하고 낯설다.  

어딘가 낯익은 상황이다. 어느날 자신의 아내가 자신의 아내가 아니라고 의심하며 진짜 아내를 찾아나서는 한 남자의 이야기를 그린 리브카 갈첸의 [대기 불안정과 그 밖의 슬픈 기상 현상들],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분명히 오랫동안 길러온 본인의 콧수염이 '원래 없었던 것'이라고 주장하기 시작하면서 혼란을 겪는 엠마뉘엘 카레르의 [콧수염]에서도 주인공이 '갑자기 모든 것이 달라졌음'을 본능적으로 느끼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K 역시 어느 토요일, 예기치 않게 눈을 떠 모든 것이 전과 달라진 상황을 목격하고 증거를 수집하기 시작한다. 

"아내와 딸은 사람이 되기를 꿈꾸는 만화 속 요괴인간들처럼 보였다." p.73  

"그러나 뭐가 감사한 것인지, 뭐를 축하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가면무도회에 던져진 느낌이어서 K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p.74 

"K는 자신이 구색을 맞추기 위해 잘 팔리지도 않으면서 매대에 진열된 유통기한이 지난 우유 같다고 생각하였다. 가족이라는 슈퍼마켓에 아내는 아내라는 이름의 상표로, 장인은 신부의 아버지라는 라벨로, 처제는 신부의 역할을 맡은 신상품의 견본으로 이렇게 함께 서 있는 것이다." p.86  

그의 눈에 "아내와 딸은 사람이 되기를 꿈꾸는 만화 속 요괴인간들처럼 보였"고 그런 요괴들이 함께 모여 손님을 맞고 식을 올리는 처제의 결혼식장에서는 "가면무도회에 던져진 느낌이어서" "마음이 편치 않았"고 스스로가 "매대에 진열된 유통기한이 지난 우유 같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 모든 일은 전날 밤 기억이 끊긴 1시간 30분 동안의 알 수 없는 시간에서 비롯됐다고 믿는 K는 그 비어버린 1시간 30분을 추적하기 시작한다. 그 와중에도 그는 계속해서 모습을 바꿔 자신을 감시하는 수상한 존재들을 만나고 끝없이 이상한 경험만 한다.  

어떤 계기에서든,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을 찾아나선 사람은 결국 한 가지 공통적으로 맞닥뜨리게 되는 게 있는데, 그건 바로 자신의 뿌리라고 믿는 어린 시절, 그 시절의 가족, 특히 부모님에 대한 기억이다. K 역시, 정신과 의사인 친구 H의 조언으로 가족을 통해 이 난관을 헤쳐나가보고자 한다. 그리고 모두가 의심스럽고 모든 상황이 불안한 상황에서도 어머니를 떠올리자 역시 순간적으로나마 '정상적'인 상태로 되돌아간다.

"생전의 모습은 전혀 떠오르지 않았지만 그 단어를 부르자 K의 눈꺼풀 뒤에 있는 눈물샘과 그 주위에 산재한 누선으로부터 결막낭 안으로 투명한 액체가 고여 들었다. 내안각의 눈물주머니 속에 모여 있던 약알칼리성의 눈물이 눈동자를 적시는 것을 K는 느꼈다. 그러나 그 양이 미미해, 액체는 흐를 수 있는 상태가 되지 못한 채 그저 촉촉하게 눈동자를 적시다가 서서히 말라갔다." p.116 

그럼에도 죽은 어머니를 제외한 현존하는 모든 것들은 여전히 의심스럽다. 

"그렇다면 실제의 아내는 어디 있는가. 실제의 자명종은 어디 있으며, 실제의 딸, 실제의 강아지는 어디 있는가." p.122 

K는 매일매일 함께 하던 너무나 익숙한 존재인 아내, 자명종, 딸, 강아지는 다 가짜라고 의심하면서, 돌아가신 어머니와 몇십년 만에 만난, 그것도 겉모습이 완전히 변해버린 누나는 진짜라고 느낀다. 뭔가 부조리하지 않은가. 그래서인가, 불안과 의심과 수성쩍음으로 가득찬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에서 가장, 아니 근래 읽은 많은 책들 가운데서도 가장 따뜻한 부분은 오랜만에 누나를 조우하는 장면에서 나온다.

"앉아라. 얼굴 좀 보자." 

누이는 소파에 K를 앉힌 채 두 손으로 배구 경기에서 리시브를 하듯 얼굴을 받쳐 들었다. p.218  

이 따뜻하면서도 죄스러운 누나와의 만남을 통해 결국 K는 주변 사람들에 대한 의심과 부정이 결국은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심과 부정이라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그래서 결론은...  

격렬한 사랑의 끝도, 진정한 자아찾기의 끝도, 결국은 한 길로 통한다. 그래서 인간은 격렬한 사랑도 어느 한 사람과 끝맺지 않고 다른 사람을 통해서라도 계속 이어나가고, 자아찾기도 아예 시도 자체를 하지 않거나 본격적으로 착수해 어느 순간 종결하는 게 아니라 인생을 통틀어 조금씩 천천히 해내가는 것 같다. 이 경우 결국은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고 계속 진행중인 상태에서 결국 마주하고 싶지 않던 죽음을 마주하게 되는데, 무엇이 더 용감한 일인지는 분명히 말할 수 있지만, 무엇이 더 옳은 방식인지는 대답을 보류하고 싶다. 

우리는 어쨌든 이렇게 살아가고 있으니까. 

----------------------------------------------------------------------------------------------------

너무 좋았던, 김연수 작가의 발문에서 일부 발췌한다.  

발문. 쓸 수밖에 없는 운명이 소설가 모두를 구원하리라 -소설가 김연수 中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별하는가? 일상적인 것들에서 멀어지면서. 연인들이라면 매주 토요일이면 서로 만나던 일을 하지 않거나, 밤늦게까지 통화하던 습관을 버리면서, 헤어지고 나서 언제 눈물이 제일 많이 났는지 생각하면, 이별의 본질이 무엇인지 알 것이다. 연인의 손을 더 이상 잡지 못하는 게, 그게 바로 이별이다. p.389 

평론가가 무슨 말을 하든, 또 독자들이 어떤 식으로 읽든, 글을 쓰는 행위는 그런 모든 일들과 무관하게 일어나는 것이리라. 그건 너무나 순수한 행위여서 어쩌면 선생 자신과도 무관할 수 있으리라. 우리가 이렇게 이 한 권의 소설을 손에 쥘 수 있었다는 것 자체가 그 사실을 반증한다. 그렇다면 선생은 소설을 계속 쓸 수밖에 없으리라. 이 계속 쓰고자 하는 힘이 아마도 우리 소설가 모두를 구원하리라. 해서 이제는 선생의 또 다른 소설을 우리는 기다릴 수밖에 없다. p.391 

 


댓글(0) 먼댓글(1)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 낯익은은타타인인들들과과낯낯선선자자신신이이뒤뒤엉엉켜켜사사는는이이도도시
    from 야구가 끝나는 그때부터가 진짜 겨울 2011-07-21 23:48 
    어느날 눈을 떴는데, 모든 게 수상하고 낯설다. 어딘가 낯익은 상황이다. 어느날 자신의 아내가 자신의 아내가 아니라고 의심하며 진짜 아내를 찾아나서는 한 남자의 이야기를 그린 리브카 갈첸의 [대기 불안정과 그 밖의 슬픈 기상 현상들],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분명히 오랫동안 길러온 본인의 콧수염이 '원래 없었던 것'이라고 주장하기 시작하면서 혼란을
 
 
 
[미칠 수 있겠니]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미칠 수 있겠니
김인숙 지음 / 한겨레출판 / 2011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한 사람이 겪은 사랑과 이별, 배신과 또다른 사랑은 어찌 보면 이 소설의 뒤를 떠받치고 있는 거대한 쓰나미에 비해 정말 별 것 아닌 일이다. 하지만 자연재해로 죽음을 목전에 둔 사람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가장 최후의 시간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전화해 사랑한다거나 미안하다고 이야기하는 데 쓰는 걸 보면, 사랑이란 감정과 경험은 쓰나미만큼이나 거대한 사건이고 사고이기도 하다. 

"진은 그를 만나기 전에 몇 번의 사소한 연애를 거쳤다. 사소한 연애였으나 이별까지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이별은 슬픔과 남겨진 고독 때문에 매번 통렬했고, 환멸과 후회가 비 그친 후에도 벗지 못한 비옷처럼 질척했다." p.13  

그래서 이별이란, 아무리 겪고 또 겪어도 언제나 '통렬'하고 '질척'한 것.  

최근 SBS '짝'이란 프로그램의 일명 '돌싱특집'을 보면서 한 가지 느껴지고, 또 궁금한 게 있었는데 그건 바로 '연애하다 헤어지는 것'과 '결혼해서 살다 헤어지는 것'이 분명히 다르다는 새삼스런 깨달음과 그 두가지가 왜 그렇게 다른 것일까 하는 의문이었다. 

'진'은 '유진'을 만나기 전에도 이미 '몇 번의 사소한 연애를 거쳤다.' 그 몇 번의 사소한 연애와 유진과의 연애가 다른 점은 유진과의 연애는 결혼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변화와 결심과 또 배신이 진에게는 더 통렬하고 질척하게 느껴졌던 것 같다. 

애인의 배신과 남편의 배신은 어떻게 다른 것일까. 말이나 눈빛으로 한 약속과 서류상 약속의 차이인가, 애인과 헤어지면 쉽게 또다른 사람을 만날 수 있지만 남편과 헤어지면 다른 사람 만나기가 힘들어서인가, 애인과 헤어졌다고 다른 눈으로 보는 사람은 없지만 남편과 헤어지면 사람들이 다른 눈으로 보기 때문인가. 헤어질 수도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사람과 헤어지는 것과 이제 헤어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사람과 헤어지는 일의 차이인가. 

잘 모르겠다. 겪어보지 않았고 겪어보고 싶지 않고 설사 겪어본다 하더라도 말로는 설명할 수 없을 것 같다. 한 가지 분명한 건, 결혼하고도 먼 나라로 떠나 따로 살고 있는 남편의 배신은 한 평범한 여자를 살인자로 만들 수도 있는 어마어마한 일이라는 것. 

7년이 흐르고, 여자는 매년 찾아간 그 섬을 다시 찾는다. 그리고 결혼을 목전에 두고 사랑을 잃은 또다른 한 남자, 드라이버 이야나를 만난다. 

"여자는 아마도 그 손의 주인이 걸어오는 전화를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아마도 파묻어버리고 싶었던 것은 정작 그 기다림이었을 것이다. 던져버리지 못하고 기껏해야 파묻었다가 다시 파내는 기다림이라니......" p. 65  

진은 유진을 기다리고, 이야나는 수니를 기다린다. 그러면서도 둘은 서로에게 끌린다.

"취하고 싶은 욕구와 취하고 싶지 않은 욕구가 동시에 여자의 붉은 얼굴을 스쳐지나갔다." p.74  

취하고 싶은 욕구와 취하고 싶지 않은 욕구, 되찾고 싶은 욕구와 벗어나고 싶은 욕구, 죽고 싶은 욕구와 살고 싶은 욕구, 삶은 이렇게 동시에 미칠 수 없는 두가지 혹은 그 이상의 욕구를 동시에 욕망하며 허비하기 쉽고 그래서 비극이다. 진과 이야나도 유진과 이야나, 수니와 진 사이에서 흔들리고 비틀댄다. 그러다 결국 서로를 통해서 과거를 극복하고 다음 단계의 삶을 준비하고 받아들이지만 나는 계속 그게 슬펐다.  

결국 돌아갈 수는 없다는 것. 앞으로 나아갈 수는 있어도 옛날로 되돌아갈 수는 절대로 없다는 것. 아름다운 섬을 덮친 쓰나미 피해를 복구하고 그곳에서 새로운 삶을 희망할 순 있어도 쓰나미가 덮치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고, 그 때의 죽은 사람들을 다시 만날 수 없다. 진과 유진이 어느 평범한 날 벤치에 앉아 옛날 이야기를 할 수 있을 만큼 시간이 흘러도 그 흐르는 시간은 내일을 향한 것이지 결코 어제를 향한 것은 아니다.  

"당신 나이 알아요. 그런데 왜 늙지도 못했어요?" 

"칭찬 아닌 거죠, 지금?" 

이야나가 다시 웃음소리를 내고, 어깨에 얹힌 진의 머리에 비로소 살짝 버티는 듯하던 힘이 느슨해진다. 

"봄이 오지 않아서요...... 늘 겨울이었거든요." 

"난 늘 여름이고요." p.208
 

진이 이렇게까지 늙지도 못한 채 어울리지 않는 젊은 얼굴을 하고 있었던 이유도 아직 아무것도 용서하거나 용서받거나 받아들이지도 못한채 그저 시간이 그만큼 흘렀다는 이유로 그만큼 변화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다른 모두에게는 7년이라는 시간이 저마다 흘렀지만 진에게는 멈추어있는 시간이었을 테니까. 

그래서 나는, 그 벤치에서의 만남이 너무 슬펐고, 더 슬펐고, 마음이 찢어지게 아팠다. 

"검색어에 지진을 입력하면, 수없이 많은 동영상들의 제목이 떴다. 진은 그 제목들을 클릭하지는 않았다. 제목만 봐도 마음속의 바닥이 흔들렸다." p.292 

직접 경험하지 않으면 모르는 것이다. 사랑도, 쓰나미도, 지진도, 그저 검색창에 입력하면 뜨는 몇 글자에 지나지 않는 법이다. 

그래서 진은 이렇게 묻지 않을 수 없었을 거다.

"내가 가장 예뻤던 시절에 널 사랑했다는 거, 그걸 너는 알고 있는 거지?" p. 297  


댓글(0) 먼댓글(1)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 "그걸 너는 알고 있는 거지?"
    from 야구가 끝나는 그때부터가 진짜 겨울 2011-07-21 23:51 
    한 사람이 겪은 사랑과 이별, 배신과 또다른 사랑은 어찌 보면 이 소설의 뒤를 떠받치고 있는 거대한 쓰나미에 비해 정말 별 것 아닌 일이다. 하지만 자연재해로 죽음을 목전에 둔사람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가장 최후의 시간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전화해 사랑한다거나 미안하다고 이야기하는 데 쓰는 걸 보면, 사랑이란 감정과 경험은 쓰나미만큼이나 거대한 사건이고 사고이
 
 
 
보광동 안개소년
박진규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는 오랫동안 서울사람이 아니었다. 그래서 ’보광동’이 어디쯤 붙어있는지, 또 그 동네이름이 많은 사람들에게 주는 이미지가 어떤지 잘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광동 안개소년’이라는 제목만 봤을 때, 희미하게 그려지는 이미지가 있었다. 문학에서 ’안개’라는 이미지는 워낙 강렬하고 지배적인 것이라,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려고 해도 그렇게 생각하게 되는 ’보광동’이라는 동네와 그곳에서 산다는 ’안개소년’이라는 캐릭터.

1부 밤의 거리

예상대로 ’소년’이 나옴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밝고 희망적인 명랑소설은 아니다. 주인공은 얼굴이 안개로 덮인, 할머니의 당부대로 "반지하방에 찹쌀떡처럼 붙어 있"다가 "밤에만 돌아다"니는 안개소년. 낯설지만, 그래서 뒷이야기를 기대하게 만드는 주인공이었다. 그리고 군데군데 눈에 띄는 발랄한 작가의 화법도 나의 기대를 부풀렸다. 

"립스틱을 바르면 입술이 탐스럽고 아이라인을 그리면 눈동자가 아련하게 초롱거렸죠." p.12 

"립스틱을 바르면" 입술이 탐스럽고 "아이라인을 그리면 눈동자가 아련하게 초롱거렸"다니. 이렇게 객관적인 표현을 통해 안개소년의 엄마는 타고난 미모가 있다기보다는 젊음 그 자체가 주는 아름다움을 가진 여자일 거라는 상상을 할 수 있게 됐고, 작가의 이런 예민한 표현이 좋았다.

그리고 동시에 이 표현은, 안개소년을 불쌍히 여기게 만드는 가장 결정적인 부분이기도 했다. 안개소년은 자기가 어리다고, 자기 엄마라고 다른 아이들처럼 엄마가 무조건 예쁘다고 하지 않는다. 이는 아마도 너무나 냉혹한 현실 속에서 어린아이다움을 잃어버린 데다, 자기를 버리고 도망간 엄마를 무조건 예쁘다고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일 거다.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 안개소년에게 밤나들이는 그야말로 유일한 낙이다. 안개소년은 밤마다 걸어서 혹은 파란버스 막차를 타고 신사동으로 간다. 예전보다 더 늦은 시각까지 다니게 된 파란버스는, 파란버스를 운전하시는 분들에게는 피곤한 근무시간 연장에 지나지 않겠지만, 안개소년에게는 좀 더 많은 시간 동안 신사동 거리를 걸어다닐 수 있게 해준 세상과의 연결통로다.

그리고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렇게 파란버스를 타고 나간 거리에서 모든 일은 시작된다.  

"고등학생은 다 불안해." p.28  

그곳에서 안개소년은 자기를 두려워하거나 싫어하지 않는 ’지나’라는 소녀를 만나게 되고, 지나는 그저 고등학생이라서 불안하다. 그 덕에 둘은 함께 걸으며 이야기를 나눈다. 그러다 불쑥 안개소년은 지나에게 고백한다.

"나 너 좋아해."
그녀는 화들짝 놀라 손을 떼고 자리에서 일어났어.
"그런 말은 이렇게 하는 거 아니야." p.34
 

참 짠한 대목이다. 안개소년은, 자기를 겁내지 않고 이렇게 같이 있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만난지 몇시간도 되지 않는 소녀에게 ’좋아한다’고 쉽게 고백한다. 한번도 가족 아닌 타인과 관계를 가져본 적이 없으니, 타인과의 관계와 그 속에서 흐르는 감정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 리도 없다.

그렇게 불안한 고등학생 소녀에게 빠져버린 안개소년은 오랫동안 밤마다 신사동 거리에서 소녀를 기다리고, 어느날 나타난 소녀는 성형외과 의사라는 사촌오빠를 소개해준다. 겁내진 않았지만, 소녀도 어쨌든 소년의 ’안개’를 일종의 ’질병’으로 보고 있다는 이야기다. 

안개소년은 그렇게 자신의 인생에 변화를 가져올 사건에 휘말린다. 

"형, 그게 만져져요?"
선배는 고개를 저었지.
"암내처럼 냄새나는 것도 아니죠?"
선배는 고개를 끄덕였어.
"그럼, 그건 못 없애요." p.53
 

신사동에서 만난 지나의 사촌오빠가 몸에 안개를 지닌 사람이 안개소년뿐만이 아님을 알려준다. 그리고 "재계에서 알아주는 기업가", 아마 "제일 유명한 안개남자일" 한 노인에게 안개소년을 데려간다.

2부 낮의 도시

그리고 일련의 사건 뒤에 안개소년은 낯선 낮의 도시에 내던져진다. 그곳에서 ’승냥이’ 윤덕호를 만나고 윤덕호를 통해 ’당나귀’ 강만호를 만나 또 한 번 사건에 휘말린다. 안개소년의 ’안개’를 이슈거리로 만들어 지하방에 숨어 나오지 못하던 안개소년을 인기인 ’안개소문’으로 만들어준다.

하지만 모든 일이 그렇듯, 그의 인기는 오래가지 못한다. 여기에는 물론 자기 몸의 안개를 인정하고 받아들이지 못해 괴로운 한 남자의 음모가 영향을 주지만 그가 아니었더라도 사람들은 곧 안개소문에 싫증을 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안개남자...... 남자... 다를 건 없지." p.197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진 않지만, 이 대목은 또다른 안개남자의 혜안이랄 만큼 놀라운 통찰력과 잔인함을 동시에 보여주는 중요한 부분이다. ’솥뚜껑보다 놀란 가슴 자라보고 놀란다’고, 이미 신비의 대상이 아니라 두려움의 대상이 된 안개는 실존 여부와 상관 없이 모두의 눈을 멀게 만든다. 그래서 ’안개남자’나 그냥 ’남자’나 다를바 없이 똑같은 파급력, 파괴력을 지니게 된다.

3부 안개로션

그리하여 ’안개소문’과 ’안개전염병’을 거쳐 원래의 자리로 돌아온 ’안개소년’은 다시 밤에만 돌아다니는 생활을 한다. 처음 ’안개로션’이라는 3부의 제목을 보고는 꽤 멋진 작명이라고 생각했다. 안개소년은 이제 더이상 ’안개’에 큰 의미를 두지 않고, 그저 ’안개로션’ 정도로,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한 단계 넘어 아픔을 일상으로 승화해낸다는 의미인가보다 생각했다. 물론 그런 의미도 담겨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개로션 개로션 개로션 개로...... 개로...... 개로...... 개로로로로 개로로로로 개로션." p.215 

그런데 안개소년이 일하게 된 나이트클럽에서 들려오는 음악소리를 묘사하는 바로 이 부분이라니. 이 글자만 읽어도 어떤 음악을 묘사하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작가의 재치가 돋보이는 대목.

하지만 ’보광동 안개소년’은 전체적으로는 조금 아쉬운 소설이다. 사회를 바라보는 날카로운 시각은 있지만 소설 한 권 안에서 너무많이 짚어내려고 욕심을 낸 걸까. 너무 많은 층위의 이야기가 조금은 단편적으로 그려져 있어서 공감을 하면서도, 이야기가 좀 더 여러겹으로 쌓여 있었다면 더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캐릭터 역시 너무 단순하고, 크게 변화가 없어 이야기가 다소 뻔하게 흘러가는 감이 없지 않다. ’이야기가 다소 뻔하다’는 지적은 사실 조심스럽다. 막상 나보고 쓰라면 이렇게 쓰지 못하고, 중간에 결말이 어떻게 될 것 같아 물어보면 틀렸을 지도 모르니까. 마치 현대미술작품을 보면서 ’저건 나도 그리겠다’ 하는 것 같아서. 하지만 독자의 입장에서는 아쉬운 게 사실이다.

그럼에도 박진규 작가가 쓰는 다음 소설은 궁금하다. 다음 작품에서는 또 어떤 독특한 캐릭터가 탄생될까, 이제 작가의 작품을 처음 접해본 독자로서, 기다리고 기대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소설> 파트의 주목 신간을 본 페이퍼에 먼 댓글로 달아주세요.

 

 

 

 

 

1. 스완 송_ 로버트 매캐먼  

사실 작가 이름을 처음 듣는다. 그런데 '세기말 소설의 최고작'이라니, 끌리지 않을 수 있나. 1500페이지라는 대작이라는 말이, 리뷰 마감기한을 생각하면 부담스럽기도 하지만, 마치 야구가 연장전에 들어가면 은근히 좋은 것처럼 그렇게 기쁨을 줄 수도 있지 않을까 기대가 되는 것도 사실이다. 지난 달 신간평가 소설 두 권이 제2차 세계대전과 무관하지 않았으니, 제3차 세계대전이 시작되는 걸로 시작하는 이 책이 흐름상 좋지 아니한가.

2. 불완전한 사람들_ 톰 래크먼 

내가 결점투성이인 인간 캐릭터 중 하나라는 사실을 깨달은 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래서 왠지 이 책은 내가 몰랐던 나를 알아볼 수 있는 책일 거라는 기대가 된다. '완전함'과 '불완전함' 사이의 간극, 그 간극에서 비롯되는 '결정적 순간'을 기막히게 잡아냈다고 하니, 이 아무리 출판사의 설명이라 해도 궁금해진다.  

3. 스틸라이프_ 루이즈 페니 

솔직히 처음에는 지아 장 커 감독의 영화 '스틸라이프'를 떠올리고 이 책에 관심을 가졌다. 하지만 알고 보니 다른 책? 그런데, 이력이 만만치 않다. 영국추리작가협회상, 캐나다추리작가협회상, 영미서점협회 딜리스상, 앤서니상, 배리상 5관왕에 빛나는 루이즈 페니의 데뷔작. 이라고 한다. 게다가 요즘 같은 때 읽기 좋은 스릴러. 

4. 두근두근 내 인생_ 김애란

사실 김애란 작가의 책은 한권도 읽지 않았다. 모르겠다. 약 15년을 작가지망생으로 살다보니 비슷한 또래의 여성작가에게는 특히 질투를 느낄 때가 많았다. 그런데, 이제는 더이상 못 버티겠다. 읽어봐야겠다. 읽고, 정말 좋으면, 쿨하게 그녀를 인정하고 좋아하련다. 그리고 왠지, 이 책은 내가 추천하지 않아도 다음 달 내가 받아볼 신간 중 한 권이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지만 어쨌든.  

5. 죽음본능_ 제드 러벤펠드

'정신분석학의 대가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마지막으로 완성시킨 학설 '죽음본능'을 바탕으로 월 가 폭탄 테러 사건과 그에 얽힌 정치적.과학적 수수께끼를 파헤치는 추리소설'이라니... 나는 이런 지적인 소설이 좋다. 인문사회학책보다 읽기 좋고 재미있으니까. 탐정은 언제나 매력적이고, 그들이 세상과 사건을 바라보는 시선은 언제나 자극적이다. 

아, 이번 달은 보고 싶은 책이 너무 많았다. ㅠㅠ 


0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0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