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m Docu 강정 - Jam Docu KANGJ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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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는 갖고 들어갈 수 없다고 했다. 광고가 없으니 영화는 정시에 시작할 거라고도 했다. 시간이 어중간했고 거리도 애매했고 그에 비해 밖은 너무도 분명하게 추웠지만 꼭 뜨거운 커피 한 모금을 마시고 싶었다. 먼 데까지 왔는데, 의외로 좀 빨리 와서 간단하게 요기는 할 수 있겠다 기대했는데 생각지 않게 길을 헤맨 데다 건물 출입구가 너무 복잡해서 약간 짜증이 나 있었다. 요기는 못해도 뜨거운 커피는 꼭 마시고 싶었다.

 

가깝지 않은 1층 출입구를 통해 건물을 돌아나가 건널목을 건넜다. 커피집은 바로 보이지 않았다. 일단은 뜨거운 어묵 국물이라도 먹고 싶어 어묵 2개를 먹었다. 어묵을 팔던 할머니는 다 먹고 나가면 길을 막고 이상한 이야기를 건네는 사람을 조심하라고 했다. 이 앞에 한 200명은 된다고 했다. 그들은 늘 짝을 지어 다닌다고 했다. 그리고 마침 할머니가 저것 보라며 손가락을 하는 멀지 않은 곳에는 남녀 한 쌍이 길 가는 남자를 붙잡고 남자는 화를 내며 가버리는 장면이 보였다. 어떤 이는 그들에게 5만원을 자기도 모르게 강탈 당하고 어떤 이는 그들과 함께 아주 먼 곳으로 택시를 타고 가 요금을 덤터기 쓰기도 했다고 했다.

 

어묵 2개를 먹고 국물을 완전히 마신 후 커피집을 찾아나섰다. 너무 맹렬히 걸어서인지 평소 내게도 곧잘 말을 걸어오던 그들 중 누구도 나를 막아서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다시 돌아갈 건널목 앞에 서서 커피 한 모금을 목구멍으로 넘기자 모든 것이 괜찮았다. 영화 상영까지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지만 그 전에 다 마실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러나 커피는 너무 뜨거웠고 5분은 너무 짧았다. 표를 주었던 분에게 커피를 맡기고 상영관으로 들어갔다.

 

다큐멘터리 영화를 크게 좋아하지 않는다. 가뜩이나 현실은 여기저기 잔뜩 널려 있는데 영화를 통해서만은 조금 다른 세상을 보고 싶다. 물론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을 너무 잘 은유해서 다큐인지 픽션인지 구별이 힘든 사실적인 영화도 있다. 하지만 그런 류의 영화는 어쨌든 다큐멘터리라는 타이틀을 걸고 있지 않으므로 부담이 덜하다. 다큐멘터리는 다르다. 아무리 편집을 통한 의도와 재해석의 여지와 요소가 있다 해도 어쨌든 사실은 사실이고 현실은 현실이라 부담스럽다.

 

[잼 다큐 강정]이 시작되고 영화가 진행될수록 나는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리고 불이 켜지고 GV를 위해 영화에 참여한 감독 2명과 트위터를 통해 나를 이곳에 초대해준 이송희일 감독이 앞에 나와 관객석을 향할 것을 생각하니 부담스러워졌다. 너는 무얼하고 있느냐고, 지금까지는 몰라서 그랬다 치고 앞으로는 어떻게 할 거냐고 따져 물을 것만 같았다.

 

지금은 바다에 던지면 순식간에 바닥으로 가라앉아 버릴 것처럼 무거운 이 마음도 영화관을 나서면, 지하철을 타면, 내일이 타면 서서히 희미해져 갈 것을 너무 잘 알았다. 지금은 강정마을을 위해 뭐라도 하고 싶은데 마음이 아프고 정부가 싫고 미래가 두려운데 아이팟 이어폰을 귀에 꽂고 리드미컬한 음악이 나오면 곧 몸을 흔들며 나도 모르게 리듬을 탈 것을 알았다. 그래서 부담스러웠다. 나는 이벤트로, 공짜로, 이 객석에 앉아서 이 영화를 보는 것 말고는 별 것 안 할 안일한 인간인데 저 앞에서는 감독들이 나를 향해 앉아 있으니 부담스러웠다. 도망가고 싶었다. 나는 이 영화를 보지 않았다고 그래서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었는지 몰랐다고 나중에 항변하고 싶은 치사한 마음이 들었다.

 

그런데 다행히도 잼 다큐에 참여한 감독들은 추운 날 와줘서 고맙다고 했다. 그저 알아주고 관심을 가져주는 것만으로 강정에 해군기지가 들어서는 것을 반대하며 힘겹게 투쟁하고 있는 많은 분들이 고마워 한다고 했다. 무언가를 더 하고 싶다면 다른 분들에게도 제주 강정에 이런 일이 있고, 이런 사람들이 있고, 이런 아픔이 있으며 그것을 찍은 영화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시면 된다고 했다.

 

활동가 송강호 씨가 들려줬던 경험이 생각난다. 인도네시아 바다에 폐형광등이 떠내려와서 봤더니 ‘번개표’라고 써 있었다는 거다. 이 바다가 저 바다고 우리 바다가 그들의 바다다.

 

성함은 기억나지 않지만 강정에 해군기지 건설로 주민 간 분열이 일어나기 오래 전부터 강정 바다 속을 보호하기 위한 활동을 해 온 한 주민은 육지처럼 바다도 4계절이 있다고 했다. 그런데 6개월만에 타당성조사를 끝내고 이 곳에 해군기지를 건설해도 환경에 악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판단한 것은 부당하다는 얘기다.

 

사실 나도 영화에서 본 것 이상은 잘 모른다. 지난 10월 두물머리에서 강정에서 오신 분들을 만나기도 했는데 사실 그 때는 그저 그 곳에 공연오는 밴드들에 더 관심이 있었고, 두물머리가 서울 근교라서 가보고 싶었다. 강정에서 오신 분들이 카페 한 번만 방문해달라고 하셨는데 그 후 그냥 잊어버렸다.

 

확실히 ‘거기 그런 일이 있다더라’ 정도로 듣고 넘기는 것과 ‘어디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구체적으로 보고 듣는 것’은 다르다. 그래서 그 후에 어떻게 하든,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봤으면 좋겠다.

 

[잼 다큐 강정]은 8명의 독립 다큐멘터리 영화 감독들이 최대한 빨리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봐주고 관심가져주기를 바라며 만든 제주 강정마을의 이야기다. 많이들 보셨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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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2-01-06 16: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karma님. 리뷰 정말 잘 읽었습니다. 저도 이 영화 봤었는데, GV가 있을 때 가셨던 모양이네요. 정말 이런 영화는 말씀하신대로 많은 분들이 좀 볼 필요가 있을텐데 아쉽다는 생각이 듭니다. 보시고 반대를 하시던, 찬성을 하시건 말이예요. 자꾸 일이 잘 알려져서 일종의 논쟁거리가 되도 좋을텐데하는 생각이 듭니다.
(KU시네마테크에서 보신 모양이네요. 거기 극장과 바로 통하는 지하층 출입구 쪽 공사완료되서 아마도 그쪽으로 나가실 수도 있을 겁니다. 제가 종종 가는 극장이기에, 담번에 혹 가실일있다면 괜히 돌아가시지 말라는 뜻에서 덧붙입니다.;;)

karma 2012-01-07 09: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같은 생각입니다. 알고 난 후 찬성이든, 반대든, 암튼 이 일에 대한 여론이라는 게 생겨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상영관도 많지 않고 상영횟수도 적고 안타까워요. 그리고 극장에 대한 정보는 앞으로 참고할게요. 감사합니다 :)
 
오래된 빛
전수찬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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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서나 종교서적을 보면 죽음은 별 것 아니다. 우리는 누구나 죽게 마련이고 태어나는 순간 죽음을 향해가고 있으며 살아가는 행위 자체가 산화라는 것이다. 종교적 관점에서 보아도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이고 불교에서는 이번 생에서의 인연이 다음 생에서의 인연으로 이어진다며 괜찮다고 말한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은 철학자도, 예수님도, 부처님도 아니다. 나이가 들수록 장례식장에 갈 일이 많아지고, 장례식장에 갈 때마다 음식을 먹으면서, 혹은 웃고 이야기하면서 난 여전히 죄책감을 느낀다. 많이 먹고, 웃고, 이야기하면서 상주의 슬픔을 잠시나마 잊게 해주는 거니까 먹어도 되고, 웃어도 되고, 이야기해도 된다고 들어서 어느 순간부터 할 수는 있게 됐지만 여전히 하면서 마음이 불편하고 죄책감도 든다.

 

또 어떤 사회는 죽음을 자연스레 받아들인다지만 난 그냥 평범한 한국사람이니까 죽음은 여전히 생경하고 불편하고 무엇보다 싫다’. 모르는 사람의 죽음도 싫지만 아는 사람의 죽음은 더 싫고 아는 사람의 죽음도 싫지만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은 정말 끔찍하다. 아직 나는 제대로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 중 가장 끔찍한 것은 바로 자식의 죽음이다.

 

내가 이 땅에 태어나게 만든 존재, 바로 나로 인해 탄생한 존재, 그리고 이제는 내가 존재하는 이유가 되는 존재가 바로 자식이므로 부모나 형제, 친구의 죽음과는 어떻게 보면 비교할 수 없는 아픔과 상실감을 안긴다.

 

[오래된 빛] 역시 자식의 죽음을 시작으로 필연적으로 얽힌 사람들을 찾아오는 불행에 대해 이야기한다. [오래된 빛]을 읽은 후 보게 된, 자식의 부고를 접하면서 시작되는 영화 [트리 오브 라이프]는 마치 소설로 읽은 [오래된 빛] 속 창호 가족의 모습을 영화로 다시 한 번 보는 기분이었다.

 

반 친구에게 괴롭힘을 당하다 밤 늦게 불려간 산 속에서 실족사한 창호의 부모와 형 창수의 삶은 그 이후 그야말로 보통의 삶에서완전히 멀어진 삶이었다. 그들은 여전히 직장을 다니고, 아이를 갖고, 학교를 다니지만 그렇게 겨우겨우 생존을 위한 활동만을 이어갈 뿐 이미 세상 속 보통의 삶과는 완벽하게 동떨어져 있다.

 

여름이면 쉽게 바다에 갔다 돌아오는 사람들을 생각했다. 우리는 저 보통의 삶에서 얼마나 멀어졌을까. p.94

 

그들은 죽어버린 창호에 대한 미안함 때문에 절대 바다나 가족 여행 등을 가지 않는 것으로 스스로에게 벌을 준다. 그렇게 스스로를 잠시도 쉬지 않고 벌하는 창호의 아버지는 가해 학생의 아버지에게도 벌을 주려 한다. 치밀하게 계획하고 실행에 옮기려는 창호 아버지와 달리 형 창수는 우연한 기회에 가해 학생을 벌 준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가해 학생인 기환은 이미 또 그의 아버지로부터, 슬픔에 젖어버린 어머니로부터,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 자신으로부터 끊임없이 벌을 받고 있었다. 그리고 스스로에 대한 처벌이 너무 가혹했던 나머지 끊임없이 일탈하며 자신을 내버린다.

 

그렇게 소리쳐라. 너는 불행했다고. 행복을 바라지 않았다고. 그것이야말로 네 삶의 자부심이라고. p.200

 

이는, 이 책에 등장하는 거의 모든 등장인물 중 누가 외쳐도 어색하지 않을 만큼, 이 책을 관통하는 메시지다. 누군가의 불행한 죽음이 야기한 남은 자들의 불행. ‘오래된 빛이 이미 너무 오래돼 빛으로서의 기능과 의미를 잃은 빛인 것처럼, 살아남은 자들의 삶 역시 살아도 사는 게 아닌 껍데기뿐인 삶이다. 마찬가지로 그들에겐 가족도 온전한 의미의 가족이 아니고 그래서 그 흔한 가족 여행은 애초에 갈 수 없는 것이다.

 

하나의 죽음으로 인해 삶과 가정이 파괴되는 것은 피해자 측만이 아니다. 가해자와 그의 가족 역시 그 죽음으로 인해 운명적으로 불행을 온 몸에 새기고 정상적인 가족의 범주를 벗어나 각자 삶에서 끊임없이 헤매고 또 헤맨다.

 

모두가 다 살아 있는 것 자체가 안쓰럽다. 그래서,

 

전수찬 [오래된 빛]의 미덕은 계획이 결코 실행되지 못했다는 데 있다. 그리고 실은, 실행하지 못했지만 이미 실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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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파탈 - 치명적 매혹과 논란의 미술사
이연식 지음 / 휴먼아트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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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나, 어디에서나 말하는 것에 대해 나도 말하려면 웬만큼 잘 하지 않고서야 아무 것도 아닌 일이 된다. 하지만 누구도, 어디서도 쉽사리 말하지 않는 것이라면 그것을 말하는 것만으로도 값어치가 생긴다.

 

그 옛날 입에 담는 것은 물론이요, 생각하는 것조차 금기시되었던 것이 있다. 지금은 그때만큼 심하진 않지만 여전히 공적인 영역에서보다는 사적인 영역에서 더 많이 이야기되고 있다. 그것은 바로 (sex)’이다.

 

입에 쉽게 담기 힘들지만 너무나 본능적이고 일상생활과 밀접해 무시할 수 없다면 그것을 이야기하는 또 다른 방법은 아마 그림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래서 춘화(春畵)’는 그 역사가 아주 깊다.

 

이연식의 [아트파탈]은 바로 은밀한 성()이 그림을 통해 어떻게 표현됐고 어떻게 유통됐으며 어떻게 받아들여졌는지에 대한 책이다.

 

공식적인 영역에서 통용되려면 앞서 확립된 예술의 형식을 따르는 단계가 필요하다. P.192

 

누드라는 상태가 누드화누드사진과 같은 작품의 영역으로 들어오기까지는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 많은 진통이 있었다. 저자는 그 배경에는 다양한 이유가 존재하지만 무엇보다 이라는 가장 사적인 영역공적인 영역으로 불러오면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진통으로 해석했다.

 

누드모델 아르바이트를 하는 여성이 나체로 미술학도들 앞에서 포즈를 취하다가 갑자기 소리를 지르며 몸을 가렸는데, 그 이유는 교실 밖에서 교실 안 그녀의 모습을 쳐다보는 시선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미술학도 앞에 몸을 드러내는 것은 합의된 공적인 영역이지만 그림을 그리지 않으면서 그 공간(교실) 밖에서 지켜보는 사람 앞에 알몸을 내놓는 것은 합의가 전제되지 않은 사적인 영역에 해당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예로부터 수많은 화가들이 나체를 그리고자 한 데에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알몸, 나체, 누드가 가진 아름다움과 마땅히 가려져 있어야 하는 것이어서 더해지는 신비함이나 흥미로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심지어 나체인 사람은 자신이 알몸이라는 것 자체만으로도 특유의 분위기를 풍긴다. 그것은 저자가 책에서 소개한 미셸 투르니에의 이야기에서 너무 잘 드러나며 그 덕에 미술의 새로운 영역이 개척되기도 했다.

 

어느 날 열아홉 살 소녀가 문학에 관한 자문을 구하러 투르니에를 찾아왔다. 그녀는 투르니에의 집에 있는 여러 카메라와 사진을 골똘히 들여다보았다. 투르니에는 그녀의 모습을 찍고 싶다고 했고 그녀는 승낙했다. 그리고 여기서 오해가 생겼다. 촬영을 준비하던 투르니에의 앞에 그녀가 알몸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투르니에는 잠깐 당황했지만 애초에 생각했던 대로 그녀의 어깨 위쪽만을 찍었다.

투르니에는 자신이 찍은 그녀의 사진들을 펼쳐놓고 보다가 나체 초상이라는 영역을 새로이 발견했다. 알몸을 찍지 않았음에도 화면 속 얼굴에는 화면 바깥에 있는 알몸의 광휘가 담겨 있었던 것이다. P.32

 

성문화는 말 그대로 문화의 영역이라서 다른 문화의 영역들처럼 과거와 현재가 다르고 또 지역마다 다르다. 태초에 ()’이라는 것에 특별한 의미가 없고 모두가 공평하게 누리던 시절에는 그것이 별스러운 것도 아니었지만, 숨겨야 할 것, 은밀한 것이라는 사회적 합의가 널리 퍼져나간 후에 이것은 가진 자혹은 높은 자리에 있는 자들의 전유물이기도 했다.

 

이러한 점은 중국 고대사회에서 아주 두드러지는 데 주인의 성생활을 하인들이 보조하기도 하고 넓디 넓은 집 안에서 자유로운 생활을 즐긴다. 부자라서 가능한 일이다.

 

반면 일본의 춘화에서는 좁은 장소에서 은밀하게 이루어지며 그 표현은 더욱 노골적이다. 그럼에도 일본에서도 나체화를 둘러싼 분란은 여느 문화권과 마찬가지로 똑같이 발생했다.

 

그런데 (일본에서) 나체화를 둘러싼 분란을 가라앉히고 결국 나체화를 예술계 안에서 수용하게 한 건 엉뚱한 쪽에서 작용한 힘이었다. 서구에서 고상한 예술 형식으로 취급되는 나체화를 일본이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이는 일본이 서구에 비해 문화적으로 뒤떨어졌다는 증거이고 서구인들을 대할 면목이 없다는 주장이었다. P.187

 

그리고 우리나라는 중국이나 일본에 비해 더욱 보수적인 시각이 나타나는데 직접적인 묘사보다는 과부의 시선이 닿는 곳에서 교미하는 개를 그려 넣는다든지 하는 방식으로 은유적으로 표현되는 일이 많았다. 또 유독 키스하는 그림이 적다는 것도 재미있는 특징이다.

 

중국, 일본의 춘화와 대별되는 한국 춘화의 결정적인 특징은 키스가 없다는 것이다. P.178

 

누드화와 그에 대한 인식은 그 시대, 그 사회의 성문화와도 직결된다. 하지만 아래 저자의 의견은 어느 시대, 어느 문화권에서도 똑같이 통용되어야 할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성문화를 건강한 것건강하지 않은 것’, ‘변태적인 것정상적인 것으로 나누어 설명하는 것부터가 심각한 패착이다. 이런 구분은 문화와 예술 영역에서 성적인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던 관료와 보수 세력이 가장 쉽게 휘두르던 구실이다. P.176

 

저자는 또한 다음과 같은 케네스 클라크의 관점을 인용하기도 했는데,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사진작가들이 누드 사진을 찍을 때 그들의 진짜 목적은, 벌거벗은 육체를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벌거벗은 육체는 어떻게 보여야 하는가 하는, 예술가의 견해를 모방하는 것이었다. –케네스 클라크, <누드의 미술사>에서 p.194

 

개인적으로는 시대에 따라 단순히 벌거벗은 육체를 재현하는 것또한 진짜 목적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 이후의 일은 재현된 육체를 보는 감상자의 몫이다. 그것에서 무엇을 보고 느끼든,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든 말이다.

 

이연식의 [아트파탈], 특별히 새로운 시각이나 독창적인 해석 없이 그저 내숭 부리지 않는 것만으로 이렇게 책이 되어 나올 수 있는 게 이 땅의 미술이자 에로티시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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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살
낸시 휴스턴 지음, 손영미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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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게 성공해서 유명해진 엄마를 둔 아이들은 엄마를 다른 사람들처럼, 팬의 입장이 돼 열렬히 짝사랑하거나 안티 팬이 돼 열렬히 미워하게 되는 것 같다. 페넬로피 라이블리의 [문타이거] 속 클라우디아 햄프턴의 딸이 그랬고, [여섯 살] 속 아이들도 대부분 그들이 여섯 살일 때까지만 해도 유명인 엄마의 열성 팬이지만 그 때 목격한 어떤 사건이나 그 때 시작된 감정의 변화를 계기로 안티 팬이 되고 만다.

 

반대로, 아이를 마치 최고 스타를 모시는 연예인 매니저의 자세로 대하는 엄마는 아이를 자기밖에 모르는 괴물로 만들기도 한다. 부모가 연예인인 것도, 아이가 연예인인 것도, 참으로 비극적이다. 그 누구보다 가까워야 할 부모가 그저 애태우며 좋아하고 기다려야 하는 연예인 같은 존재라는 것도, 그 누구보다 나에게 진심 어린 사랑과 따끔한 가르침을 함께 줘야 할 부모가 나를 마치 연예인 모시듯 한다는 것도.

 

[여섯 살] 4대에 걸친 여섯 살짜리 아이들의 시각을 통해 내 아빠에게, 아빠의 엄마에게, 내 할머니의 엄마에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우리 아빠와 아빠의 엄마와 아빠의 할머니는 왜 `그런 아빠` 혹은 `그런 엄마`일 수밖에 없었는지를 보여주는 적나라하고도 잔인한 책이다.

 

6살짜리 솔은 징그럽고, 솔의 아빠 6살짜리 랜돌은 사랑스럽고, 랜돌의 엄마 6살짜리 세이디는 안쓰럽고, 세이디의 엄마 6살짜리 크리스티나는 더욱 안쓰럽다. 그것이 그들이 타고난 어떠한 기질에 의한 것이라거나 그들이 스스로 선택한 것이라기보다는 역사가 묻지도 않고 마음대로 던져준 운명 같은 것이라 `안쓰럽다`라는 네 글자로는 도저히 어떻게 안 될 만큼 안쓰럽다.

 

그들에게 주어진 운명이 어떤 것이고 또 어떻게 결정지어졌느냐는 그들의 이름에서도 짐작이 가능하다.

 

세상에 단 하나뿐인 태양 은 정말 세상에 단 하나뿐인 태양보다 더 애지중지 그를 위해서만 사는 엄마가 아들에게 준 이름이고, 솔의 아빠 랜돌의 이름은 자기자신에 대한 지나친 강박에 시달리며 독일의 홀로코스트와 유대인의 비극을 연구하는 엄마가 유대인식 이름이 좋다며 지어준 이름이다.

 

랜돌의 엄마 세이디, 세이디 스스로가 이름에서 슬픔을 느끼지만 정작 그녀의 엄마는 그저 느낌이 좋아서 그렇게 지은 것이고, 세이디의 엄마 크리스티나는 후에 클라리사가 되고 에라가 되듯이 그 기원도 분명하지 않고 그 미래도 약속 받지 못하는 그런 불안정한 이름이다.

 

"그건 무엇이었을까?

그토록 뜨겁고, 그토록 놀랍고, 아무리 해도 미진하고, 그처럼 달콤하고, 그처럼 깊고, 그처럼 눈부시게 눈물이 솟아나는 그 느낌, 그건 대체 무엇이었을까?"

- R.M. 릴케

 

책은 이렇게 릴케의 문장을 맨 앞 장에 두고 시작한다. 책을 다 읽은 후에도 나는, 과연`그건 무엇이었는지를 정확히 말 할 수 없지만 그것이 이 책에서는 솔과 랜돌, 세이디와 크리스티나의 `여섯 살` 시절이 아닐까. 낸시 휴스턴은 그렇게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짐작해본다.

 

그토록 뜨겁고, 놀랍고, 미진하고, 달콤하고, 깊고, 눈부시게 눈물이 솟아나는 느낌이 이 책에, 이들의 여섯 살 시절에 고스란히 담겨 있으니까. 세대를 거슬러 올라가고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고 기억을 더듬을수록 더욱 뜨겁고, 놀랍고, 미진하고, 달콤하고, 깊고, 눈부시게 눈물이 솟아나는 느낌도 더욱 더 더해지니까.

 

1부 솔, 2004

 

아빠는 보통 때는 세이디 할머니와 그저 그런 사이지만, 지금은 다른 사람이 할머니를 공격하고 있기 때문에 재빨리 감싸고 나선다. p.64

 

솔은, 사실 그렇게 정이 안 간다. 너무 애 같지도 않고, 그렇다고 어른도 아니고, 한 마디로 징그럽다. 극성스러운 엄마와 일면 쿨해 보이지만 무심한 것에 가까운 아빠 사이에서, 또 전쟁과 폭력이 일상화되고 그것이 고스란히 인터넷을 통해 생중계되는 세상에서, 이런 괴물 같은 캐릭터가 탄생하는 것이 크게 이상할 것 없지만, ‘은 확실히 아이라고 하기에는 이상한 캐릭터인 것만은 분명하다.

 

이렇게 아이 같지 않은 아이 이 이야기의 출발점인 것은 낸시 휴스턴의 의도를 오히려 명확히 보여준다 하겠다. 솔을 통해, 가장 마지막 장에 등장하는 솔의 증조할머니 크리스티나의 상처의 근원을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다. 솔의 모습은 생명의 샘이라는 이름에 반하는 끔찍한 비극을 만들어낸 바로 그 독재자의 모습을 그대로 닮아 있다.

 

2부 랜돌, 1982

 

죽은 사람들이 의식을 되찾아 자기가 관에 갇힌 채로 땅속에 묻혀 있다는 걸 깨닫게 되는 일은 없겠지만, 롱아일랜드에서 거행된 장례식에 갔을 때 관 속에 누워 계셨던 할아버지 모습을 생각하면 정말 무섭다. 우리 아빠의 아버지가 정말로, 진짜로 그 관 속에 갇혀 있는데, 다들 그게 아무렇지도 않고, 원래 그런 거라고 생각하는 게 기가 막혔다. p.124

 

그렇게 보면 여자들의 가슴은 정말 묘한 존재다. 어릴 때는 하루에 몇 시간씩 거기 얼굴을 대고 젖을 빨아 먹는데, 점차 거기서 밀려나 결국은 볼 수조차 없게 되는 날이 온다. 하지만 TV나 영화를 보면 여자들은 젖꼭지만 빼고는 가슴을 늘 과시하고 있다. 젖꼭지에 무슨 신성한 비밀이라도 있는 것 같지만 실은 그렇지 않고, 그 안에 젖조차 들어 있지 않을 때가 많다. p.126

 

"저기, 바로 앞을 봐. 왼쪽에 튀어나와 있는 흰 땅 보이지? 그게 레바논이야. 바로 이 순간도 저기서 전쟁이 벌어지고 있어. 레이건과 베긴이 저 나라에 군대를 보냈지. 그 군대 이름이 평화유지군(peace-keeping forces)인데, 그건 모든 걸 산산조각 내기(keeps pieces) 때문이야." p.155

 

여섯 살 랜돌은, 여섯 살 난 아들을 둔 아빠일 때의 모습과 달리 너무나 사랑스럽다. 이 모든 네 명의 여섯 살들이 공통적으로 그렇듯 또래에 비해 다소 어른스럽기는 하지만 그것은 그들이 처한 상황에 기원한다. 그리고 솔의 경우처럼 그렇게 징그럽지 않다.

 

하지만 솔과 다른 결핍이 이 때 시작된다. 자기 자신에 대한 이상한 강박과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지나친 집착으로 똘똘 뭉친 엄마로 인해 랜돌은 늘 엄마에 대한 그리움을 느끼게 된다. 랜돌의 아빠는 너무나도 따뜻하고 자상하지만 200%의 아빠도 엄마를 대신할 수는 없다. 가끔 그 자리를 히브리어를 가르쳐주던 선생님이나 엄마 중심적 결정으로 가게 된 하이파에서 만난 소녀 누자가 채우지만 그것도 결국은 할머니가 생명의 샘에서 왔다는 바로 그 사실 때문에 찰나에 사라지고 만다.

 

어린 랜돌은 그것을 알 리가 없고 그것은 그를 그런 아빠로 만든다. 엄마를 어려워하고, 아내와 아들에게 무심하며 전쟁에 열광하는 보수적인 미국인으로.

 

3부 세이디, 1962

 

원래 그런 식이지만. "시간 맞춰 다니고 그런 시시한 일은 원래 신경 안 쓰는 애잖아." 할아버지가 비꼬는 어조로 말씀하신다. 할머니는 오븐의 온도를 낮춰놓았고, 빵은 약간 눅눅해진 상태다. 정확히 열두 시 반에 할머니가 지었던 미소도 점차 어두워지고 있다. p.212

 

"그럼!" 내가 두 번이나 같은 말을 해서 엄마가 나를 바보라고 생각할까? 하지만 나를 바라보는 엄마의 눈길은 따뜻하고 사랑이 넘친다. p.217

 

그런데 이때 피터가 "자 이제 내가 크리시-키스를 받을 차례!" 하면서 엄마를 자기 쪽으로 돌리더니 영화에서처럼 열린 입에 진하게 키스를 한다. 차이가 있다면 영화의 경우는 키스 장면이 나오자마자 할머니가 TV를 꺼버리는데 여기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다 볼 수 있다는 것이다. p.221

 

전에 다닌 그 형편없고 속물스러운 사립여학교에서는 전교생이 자가용으로 등교를 하고, 영혼에까지 교복을 입고 다녔다. p.256

 

세이디의 여섯 살 시절은, 여섯 살짜리 아들 랜돌의 눈에 비친 엄마의 모습과는 완전히 반대이다. 어떤 강박에 사로잡혀 자기 자신을 학대한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이 있지만 그것이 겉으로 드러나는 점에서는 전혀 다르다.

 

세이디는 스스로 뚱뚱하다고 생각하고 엉덩이의 반점은 더럽다고 여기며 자주 만날 수 없는 엄마에게 어떻게 보일까를 늘 고민하는 불쌍한 아이다. 할아버지는 그저 그 자리에 존재할 뿐이고 할머니는 지나치게 엄격하고 세이디의 우상인 세이디의 엄마를 늘 탐탁지 않아 한다.

 

여섯 살의 어느 날 세이디는 드디어 엄마와 정말 아빠 같은 엄마의 남편 피터와 새 삶을 시작하지만 그 새로운 삶도 엄마의 과거가 엄마를 찾아오면서 금세 끝나버린다. 오히려 엄격한 할머니 밑에서 스스로를 미워하고 부끄러워하던 때보다 더욱 큰 상처를 입는다.

 

이 때의 상처는 세이디가 엄마가 됐을 때 고스란히 드러난다.

 

4부 크리스티나, 1944~45

 

우리가 사는 도시의 길거리를 돌아다니는 사람들은 살아 있지만, 드레스덴의 조각품에 나오는 님프나 천사들에 비해 추악해 보인다. 현실 속의 사람들은 분주하고, 근심에 차 있고, 특히 굶주린 데다, 공공장소에서 옷을 벗을 수도 없고, 팔이나 다리가 절단된 사람이 많고, 어떤 경우는 양팔이나 양다리를 모두 잃은 이들도 있다. 팔이나 다리는 물론 다시 자라나지 않는다. p.282

 

할아버지는 선택의 여지없이 그저 죽이든지 죽든지 할 수밖에 없는 경우도 있다고 하신다. 할아버지는 식전 기도를 할 때면 아빠와 로타르 오빠를 적으로부터 보호해 달라고 하시는데, 그럴 때 러시아 사람들이 자기들의 아빠나 오빠를 보호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을 걸 생각하면 마음이 불편하다. 그들이 말하는 적은 바로 우리일 거고, 목사님이 교회에서 히틀러를 위해 기도하자고 하실 때, 러시아 교회에서도 사람들이 자기들의 지도자를 위해 기도할 텐데, 그럴 때 나는 가엾은 하나님이 구름 속에 앉아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쥔 채 모든 사람의 기도를 들어주려 하지만 불행히도 결코 그럴 수 없다는 걸 깨닫는 광경을 상상해본다. p.283

 

이 모든 게 우리가-아니지, 난 폴란드인이니까, 독일이- 전쟁에서 지고 있기 때문이다. 독일이 지금 그냥 패전을 받아들이고 이 모든 걸 끝내면 좋지 않을까? 대체 얼마나 더 져야 전쟁이 끝나는 걸까? p.326

 

사람이 울 때는 생각하는 모든 게 슬픔의 원인이 되는 것 같다. p.340

 

드디어 크리스티나이고 클라리사이고 에라이기도 한 솔의 증조할머니 G.G.의 여섯 살이다. 그녀 스스로는 절대 말하지 않으려 했으나 세이디의 인생을 뒤흔들고, 그로 인해 랜돌의 인생까지 뒤흔들어버린 비밀이 크리스티나의 여섯 살 무렵의 이야기를 통해서 하나 둘씩 드러난다.

 

그것은 모두 생명의 샘이라는 얼핏 아름답고 건강해 보이는 이름의, 추악하고 끔찍한 발상에서 시작됐음이 드러난다. 히틀러라는 인간이 인간이라는 수식을 받을 자격조차 없을 만큼 지독한 괴물이었음을 웬만큼 알고 있었더라도 생명의 샘의 정체를 알게 된다면 이야기는 또 달라진다.

 

그가 얼마나 오만한 냉혈한이었는지, 얼마나 세상과 미래를 자기 뜻대로 주무르려고 했는지, 그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고 상처 입고 그 상처들이 끈질기게 대물림 되고 있는지, 이렇게 글로 쓰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손이 떨리는지.

 

진심으로 대신해 울어주고 싶은 이 아이들, 그리고 이 아이들의 찬란했어야 할 여섯 살. 책 속에 꼭꼭 눌러 담아 이젠 덮어두고 다시 펼쳐볼 일이 없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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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50 - 50/50
영화
평점 :
현재상영


 

 

 

나는 아프면 아프다고 엄마한테 말한다. 서울-대구만큼 떨어져있어서 말 안 하면 모르시고, 모르시면 걱정도 안 하실텐데 왜 굳이 말하냐고 생각할 지도 모르지만 나는 말한다.

 

전화목소리라고 어설프게 연기를 해봤자 귀신 같은 엄마한테는 먹히지도 않고, 애초에 완벽한 연기를 선보일 마음이 없는 연약한 나 자신 탓일 수도 있다.

 

하지만 엄마와 나 사이엔 일종의 협정 같은 게 있다. 아플 땐 아프다고 말하기.

 

서울에 온 지 얼마나 지났을 때였던가 가물가물하지만 엄마가 일주일이나 아파놓고도 티를 안 내서 몰랐다가 뒤늦게 알게 됐는데 너무 마음이 아팠다. 사람들은 대개 너무 마음이 아프면 화를 내고 나도 그 땐 화를 냈다.

 

덕분에, 엄마도 내가 서울에서 아픈데 엄마한테 말도 안 하고 혼자 아팠다는 걸 뒤늦게 알게 되면 얼마나 마음이 아프실까 헤아려볼 수 있게 됐다.

 

안타깝게도 엄마는 내가 아프면 남들처럼 '쟨 원래 잔병치레가 많은 애니까'라고 생각하며 점점 걱정을 덜 하게 되는 면역력 같은 게 도무지 생겨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어쩔 수 없다. 당장 어떻게 해줄 수가 없어도 지금 아프면 지금 아프다고 말하는 게 낫다.

 

그래야 분명 목소리는 어디가 아픈 것 같은데도 자꾸 아니라고 할 때 진짜 아니라는 것을 믿을 수도 있다. 그리고 대개 우리는 금방 낫지 않는가.

 

영화 50/50은 치사율 50%(그러니까 생존률도 50%인)의 희귀암에 걸린 20대 남자 이야기다.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이야기할 때 너무 심각하지 않게, 유쾌하면서도 너무 가볍지 않게 그려냈다는 점을 장점으로 꼽지만 영화에서 내가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조셉 고든 레빗이 엄마한테 처음 암메 걸렸다는 사실을 말했을 때.

 

기억을 더듬어보면 "언제 그랬니?" "며칠 안 됐어요." "그 며칠 동안은 뭐했는데?" 대략 이런 내용이었는데, 엄마는 이러고서 암을 예방해준다는 녹차를 만들어주겠다며 주방에 가서 운다.

 

엄마는 그렇다. 단 며칠이라도 아들이 엄마한테 말 안 하고 혼자서 얼마나 무섭고 힘들었을까 생각하면 마음이 찢어지는 것. 아직 엄마가 돼보지 않았지만 우리 엄마 덕에 너무 잘 아는 이 점.

 

우리는 모두 살아 있어서 다행이고, 엄마가 있어서 다행이고, 어쨌든 다행이다.

 

+영화를 보고 나왔는데, 아이팟에서 임의재생으로 들려준 노래는 재미있게도 Rufus Wainwright의 '11:11'이었다.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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