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실격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3
다자이 오사무 지음, 김춘미 옮김 / 민음사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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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자이 오사무 | 인간실격 | quick space 2004/07/15 02:48

저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남이 저를 죽여줬으면 하고 바란 적은 여러 번 있었지만 남을 죽이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한번도 없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상대방을 행복하게 만드는 일일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p.32)

아름답다고 느낀 것을 아름답게만 표현하려고 노력하는 안이함과 어리석음. 대가들은 아무것도 아닌 것을 주관에 의해 아름답게 창조하고, 혹은 추악한 것에 구토를 느끼면서도 그에 대한 흥미를 감추지 않고 표현하는 희열에 잠겼던 것입니다. (p.41)

비합법. 저는 그것을 어렴풋하게나마 즐겼던 것입니다. 오히려 마음이 편했던 것입니다. 이 세상의 합법이라는 것이 오히려 두려웠고(그것에서는 한없는 강인함이 느껴졌습니다.) 그 구조가 불가해해서, 도저히 창문도 없고 뼛속까지 냉기가 스며드는 그 방에 앉아 있을 수가 없어서 바깥이 비합법의 바다라 해도 거기에 뛰어들어 헤엄치다 죽음에 이르는 편이 저한테는 오히려 마음이 편했던 것 같습니다. (p.51)

저는 쓰네코(라고 한 것으로 기억합니다만 기억이 희미해서 분명하지는 않습니다. 함께 정사(情死)를 기도한 상대방의 이름조차 잊어버리는 저입니다.)가 시키는 대로 긴자 뒷골목 어떤 초밥 노점상에서 정말로 맛없는 초밥을 먹으면서 그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의 이름은 잊었지만 그때 초밥이 맛이 없었다는 사실만은 어떻게 된 셈인지 확실하게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p.60)

아아, 인간은 서로를 전혀 모릅니다. 완전히 잘못 알고 있으면서도 둘도 없는 친구라고 평생 믿고 지내다가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상대방이 죽으면 울면서 조사 따위를 읽는 건 아닐까요. (p.92)

저희는 그때 희극 명사, 비극 명사 알아맞히기 놀이를 하였습니다. 이것은 제가 발명한 놀이로, 명사에는 모두 남성 명사, 여성 명사, 중성 명사 등의 구별이 있는데 그렇다면 희극 명사, 비극 명사의 구별도 있어야 마땅하다. 예컨대 증기선과 기차는 둘 다 비극 명사고 전철과 버스는 둘 다 희극 명사다. 왜 그런지를 이해 못하는 자는 예술을 논할 자격이 없다. 희극에 하나라도 비극 명사를 삽입하는 극작가는 이미 그것만으로도 낙제. 비극의 경우도 똑같다는 논법입니다. (p.109)

죄와 벌. 도스토예프스키. 언뜻 그 생각이 머리 한쪽 구석을 스치자 흠칫했습니다. 만일 저 도스토 씨가 죄와 벌을 유의어로 생각한 것이 아니라 반의어로 병렬한 것이었다면? 죄와 벌, 절대 서로 통할 수 없는 것. 얼음과 숯처럼 융화되지 않는 것. 죄와 벌을 반의어로 생각했던 도스토예프스키의 바닷말, 썩은 연못, 난마의 그 밑바닥...... 아아, 알 것 같다. 아냐, 아직...... 하며 머리에서 주마등이 빙글빙글 돌고 있을 때였습니다. (p.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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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자이 오사무(1909-1948)는 약이나 의사, 목사, 중은 희극명사, 담배, 삶, 만화가가 비극명사라고 생각했다. 그 중에서 삶이 비극명사인 이유는 삶이 희극명사이면 모든 명사가 희극명사가 되어버리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죄와 벌이 유의어가 아니듯이, 삶과 죽음도 반의어가 아니다.

그런데 이 희극 명사, 비극 명사 알아맞히기 놀이나, 반의어 맞히기 놀이는 너무나 모순 투성이다. 기면 기고 아니면 얼마든지 아닐 수 있다. 뭐든 삶에서 하나 깨달은 바가 있는 사람의 말은 언제나 이렇게 모순투성이일 수 밖에 없다고 하셨던 이성복 선생님의 말씀이 옳았다. 사는 것 자체가 그렇게 생겨먹었다.

죽음이 행복해지는 길이고, 마음편해지는 길이라고 생각하며 몇 번씩이나 애인과의 정사를 기도하고, 결국은 성공을 거두어 죽은 그는 더 자세히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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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성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문학동네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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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한 파묵 | 하얀 성 | quick space 2004/07/21 02:07

 

"이미 죽기로 정해져 있으면 기어코 죽음은 찾아오는 것이지 왜 무서워한단 말인가?

자네가 매일 적어놓은 자네의 죄에 대한 기록 때문인가?"

역병이 돌자 극도의 불안감을 나타내는 ''에게 호자가 이렇게 되묻는다.

 

''는 포로로 잡혀가서, 스스로도 착각할만큼 자신과 닮은 호자 밑에서 오랜 시간을 지낸다. 무서우리만치 자신과 닮은 호자의 포로가 된 '', 허황된 꿈을 꾸고 이룰 수 없는 꿈에 대한 망상에 젖어 사는 호자에게 거부감을 느낀다.

 

그래서 달아나려고 한다.

 

그에게서 달아날 수 있는 방법으로 그가 선택한 것이 '나는 누구일까'하는 물음을 호자로 하여금 자꾸 스스로 묻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것이 조금은 효과가 있어서, 획기적인 무기-결국 하얀 성을 무너뜨리기 위해 사용될 무기이지만 이들은 아직 그 정확한 무기의 목적이랄까, 그 대상을 알지 못한다-를 만드는 일에서 잠시 빠져 나와 호자는 그 질문에 골몰한다.

 

호자는 혼란스러워하며 두려워한다. 스스로에 대한 질문을 던지기 전에 먼저 ''가 스스로를 알아가는 과정을 지켜보고 싶어한다.


'
'는 있는 얘기, 없는 얘기 만들어가며 자신의 과거를 낱낱이 기록하고 자신의 추악한 단면을 과장하여 보여준다. 거기에 경멸을 느낀 호자는 자신의 노트를 만드는 것을 거부하지만, 결국 스스로에 대한 물음에 답하고자 하는 열망 때문에 노트를 만들게 된다. 그리고는 혼자서 찢기도 하고, 화를 내기도 하면서 자신에 대해 적어나가지만 결코 그것을 ''에게 보여주지는 않는다.


어떤 목적이 있어서 ''가 만든 과거에 대한 자신의 기록은 호자와 내가 서로 언제라도 뒤바뀐 인생을 살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하게 된다.

 

호자가 무기를 완성하며 술탄의 부대를 이끌고 결코 함락되지 않을 '하얀 성' 앞에서 패배를 인정해야 했을 때, 호자와 ''는 서로가 살기 위해 둘의 인생을 바꾼다. 아니, 이미 그들은 하나의 인생을 살고 있었으므로 바꿀 수 있는 것은 그들의 과거일 뿐이다.

호자로 살고 있는 ''는 끊임없이 그에게서 호자와 자신을 분리시키려고 하는 술탄처럼, 호자인지 나인지 모르는 여생을 살게 된다.

 

내가 나인지 아닌지 구별할 수 없는 상태. 과거만 공유한다면 미래는 얼마든지 뒤바꿀 수 있는 호자와 나와의 관계. 끊임없이 '나는 누구일까'하는 질문을 던지며 괴로워하는 호자.

 

보는 순간, 무너뜨릴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해주는 거대한 하얀 성과 그 하얀 성을 무너뜨릴 무기를 위해 그들이 지내온 세월.

 

그리고 내 안의 수많은 호자. 나를 포로로, 나를 누예로 부리는 나와 똑같이 생긴 호자.

 

한 객체 속에 들어있는 모든 사람들의 호자에 대한 이야기.

 

절대 함락시킬 수 없는 하얀 성에 대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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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테라
박민규 지음 / 문학동네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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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민규 | 카스테라

박민규의 소설은 굉장히 장난스럽다.
아니다, 이것은 잘못된 표현이다.
박민규의 태도는 굉장히 장난스럽다.
아니다, 말버릇이 장난스럽다고 해야하나.
암튼 무언가는 굉장히 장난스러운데, 웃을 수가 없다.
아니다, 웃을 수는 있는데 웃고 나면 죄책감이 느껴질 때가 있다.

박민규식으로 이야기를 시작해서,
카스테라.와
고마워, 과연 너구리야.와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와
몰라 몰라, 개복치라니.와
아, 하세요 펠리컨.과
야쿠르트 아줌마.와
코리언 스텐더즈.와
대왕오징어의 기습.과
헤드락.과
갑을고시원 체류기.로
박민규식 이야기를 매듭짓는 데에는
어쩌면 상당한 부담이 따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아니다, 그건 내 생각이고,
박민규에게는 그런 방식이 더 쉬울지도 모르겠다.

암튼 박민규의 이야기는 굉장한 희망을 주는 듯 하지만,
굉장히 서글프다.
우리는 이미, 그러한 상상력은 상상력일뿐이라고 믿고 사는
어른이 되었기 때문이다.

정말로 서글픈 것은,
말도 안돼는 이야기야.라는 말을 내뱉으면서도
서글프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고-
정말로 외로운 것은,
살가운 애인이 있는데도,
외롭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고-
정말로 슬픈 것은,
치. 웃기고 있네.라고 말하는 입꼬리가
아래로 처지는 것이다.

박민규의 소설이 단지
특출난 표현으로 가득찬 읽을거리.로 평가받는 것에도,
뭐 "대한민국 문학사를 통틀어 가장 신선하고 충격적인 사건" (이외수)으로 평가받는 것에도 동의하지는 않지만,
아무렇지 않은척 하면서, 마음 아파하는 인간들.
에 대한 관심과 탐구라는 점은
그에게 계속해서 관심을 가질 수 밖에 없게 만든다.
(그것이 어쩌면 스스로를 컴플렉스 덩어리라고 표현하는
박민규 자신에 대한 것일지도 모르지만)

이 소설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단편은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 였는데,
푸시맨인 아들의 손에 떠밀려,
터질것 같은 지하철을 타고 출근하는 아버지와
결국 기린으로 변해버린 아버지를 만나지만
끝끝내 그가 아버지라고 확신하지는 못하는 아들의 이야기를
어떤 사람이 쉬이 넘길 수 있을까.
순진하게,
실제로 누군가가 기린으로 변해,
어느 동물원, 혹은 숲 속,
그것도 아니면 지하철 역을 배회하고 있는 건 아닐까.
희망을 품게까지 만드는
박민규 붓 끝의 저력을 무시할 수 있을까.

1. 냉장고 속의 카스테라 한 조각을 맛보기 위해,
세계와 사람들과 갖가지 것들을 냉장고에 집어넣는 자취생-
2. 그리고, 직장에서 너구리 게임을 하다가
너구리로 변한 직장 상사, 그리고 그밖의 수많은 너구리들-
3. 아르바이트로 지하철 푸시맨을 하고 있는 아들의 손에 떠밀려
지하철에 몸을 실은 후, 기린으로 변해버린 아버지-
4. 호기심과 친구의 알선으로 어렵게 우주에 급파한 후
멀리서 바라보니, 개복치의 모양을 하고 있는 지구-
5. 손님없는 휴양지에서 일하다 만나는,
오리배를 타고 희망의 나라로 유랑하는 오리배 세계 시민 연합-
6. 오랫동안 똥을 못누고 있는 주인공에게
안색이 안좋다며 야쿠르트를 건네는 야쿠르트 아줌마-
7. 보이지 않는 손과 도도새가 혼존하는 스텐다즈를 가진 코리안-
8. 어렸을 소년 중앙이라는 잡지에 등장한 대왕오징어에게
기습을 받는 여러가지 직업의 소년-
9. 느닷없이 헐크에게 거센 헤드락을 당한 후
헤드락에 대한 강박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남자-
10. 방구도 마음대로 뀌지 못하는 좁은 고시원 방에 모로 누워
경직돼버린 고학생-

당신은, 상상이나 할 수 있는가.

+ 이 소설을 선물해준, 이지은 양에게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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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수수밭 (구) 문지 스펙트럼 6
모옌 지음, 심혜영 옮김 / 문학과지성사 / 199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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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옌 | 붉은수수밭

아버지는 너무나 흡사한 두 차례의 부서짐 사이에 어떤 필연적인 관계가 내재되어 있다는 것을 어렴풋하게 직감하고 있었다. 이 일과 그 일이 한데 연결되면서 또 하나의 장면이 나타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영웅은 단명인지라
.......그 브라우닝 총을 깨끗이 손질하다가 총이 불발되는 바람에 자기 총에 맞아죽었다.

벌써 자동차가 붕붕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버지는 무거운 브라우닝 총을 든 채로 위사령관의 곁에 엎드려 있었다. 팔목이 얼얼했고 손바닥에는 땀이 흥건했다. 엄지와 검지 사이의 살이 갑자기 툭하고 한번 튀더니 이어 계속해서 툭툭툭거리며 튀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살구씨만한 살 덩어리가 규칙적으로 튀는 모양을 신기한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 살 속에는 마치 껍질을 뚫고 나오려는 작은 새가 숨어 있는 것 같았다. 아버지는 그 꼴을 보고 싶지 않아서 손에 힘을 주었지만 그렇게 하자 이번에는 오히려 팔 전체가 후들거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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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 독도 문제가 시끄러울 때쯤 이 책을 읽었다.
소설을 읽는 동안, 내용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를 제쳐놓고
내내 나쁜 노무 섀끼들.만 외쳐댔던 것 같다.
물론, 우리 나라 사람들이 전쟁원조가서 한 짓이
더 잔인했다고 하는 얘기도 있긴 하지만,
전쟁때는 누구나 그렇게 될 수 있다고는 하지만,
정말 나쁜 노무 섀끼들이다.

그래서 이 소설을 읽고 지금 머릿속에 남는 건,
일본놈들의 잔인한 살인방법과,
수수수수거리며 지금도 서로 부딪치고 있을 수수밭의 이미지.
그리고 저 위의 문장들에서 보이는 섬세한 표현들.

소설 속 시점이 약간은 혼란스러웠는데,
그건 작가의 의도라기보다는 실수인 것 같다.
그 일들을 실제로 겪지 않은 말하는 이가
단지 들은 이야기를 다시 들려주는 방식은
이미지를 풍부하게는 하지만,
크게 와닿는 부분은 아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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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아닌, 동시에 십만 명인 어떤 사람 (구) 문지 스펙트럼 13
루이지 피란델로 지음, 김효정 옮김 / 문학과지성사 / 199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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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지 피란델로 | 아무도 아닌, 동시에 십만 명인 어떤 사람

재미있는 일은 바로 이것이었다: 그녀가 보기에 그녀의 젠제는 결점이 없는 존재가 결코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그 모든 것들을 관대하게 보았다! 그녀는 그에 대한 많은 점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의 모든 것이 그녀의 취향과 망상에 따라 그녀의 방식대로 만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누구의 방식대로 만들어졌단 말인가?
내 방식은 아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는 정말로 그녀가 그녀의 젠제에게 돌렸던 취향과 감정을 나의 사고를 통해 인식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녀가 그에게 그런 취향과 감정을 주었다는 건 확실하다. 왜냐하면 그녀의 견해에 따르자면, 젠제는 그런 취향을 가지고 있었고, 진정 그의 방식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의 방식대로, 다시 말해 명백히 나의 것이 아닌 그의 현실에 따라 생각하고 느꼈기 때문이다.
때때로, 나는 그가, 즉 젠제가 유발시킨 고통 때문에 울고 있는 아내를 보았다. 그래요, 선생님들! 그 사람 말입니다. 나는 그녀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왜 그래, 자기?"
그녀는 대답했다.
"아니, 나한테 그 이유를 묻는 거야? 당신이 조금 전 내게 한 말로 충분하지 않아?"
"내가?"
"그래, 당신이!"
나는 망연자실했다.
내가 내 말에 담았던 의미는 내게 어떤 의미가 되었음이 확실하다. 하지만, 그 말, 즉 젠제의 그 말이 그녀에게 주었던 의미는 전혀 별개의 것이었다. 나나 다른 사람이 한 말은 그녀에게 고통을 주지 않았을 터이지만, 젠제가 한 말은 그녀를 울게 만들었다. 왜냐하면 그 말이 젠제의 입에서 나오면, 그것이 다른 어떤 가치를 갖는지를 모르겠지만, 그녀를 울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랬습니다, 선생님들.
그러므로 나는 나를 위해 혼자 말하고 싶다. 그녀는 그녀의 젠제와 대화를 나눴다. 그는 내 입을 통해 내가 전혀 몰랐던 방식으로 그녀에게 대답했다. 내가 그녀에게 말하고 그녀가 내게 반복했던 그 모든 것들이 왜 무의미하게 거짓말이 되고 멍청한 것이 되는지 알 수 없다.
p.72~73


그녀는 정말 그를 사랑했던 것이다!
그리고 나는-마침내 모든 것이 명확해졌을 때-못 견딜 정도로 샘이 났다-내게 샘이 났던 것이 아니다. 믿어주시라. 당신들을 비웃고 싶군!-나 자신이 아니라, 내가 아닌 어떤 사람, 즉 나와 내 아내 사이에 숨어 있던 멍청이에게 질투가 났던 것이다. 그는 공허한 그림자 같은 존재가 아니었다-믿어주시라-왜냐하면 오히려 그는 그녀에게 사랑받기 위해 나의 육체를 이용하면서 나를 공허한 그림자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잘 생각해보시라. 아내가 나의 입술 위에서 내가 아닌 어떤 사람과 키스했던 것이 아니라고? 내 입술 위에서? 그렇지 않다. 말도 안돼! 그것이 내 것 이었기 때문에, 그녀가 키스했던 입술이 바로 내 것이라고? 하지만 그 육체가 실제로 내 것일 수 있었고 또 실제로 나에게 속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녀가 껴안고 사랑했던 그 사람이 내가 아니었다면?
잘 생각해보시라. 당신의 아내가 당신을 안고 당신의 육체를 통해 그녀가 가슴에 새기고 있던 다른 남자와의 사랑을 즐긴다는 걸 알게 된다면, 가장 고상한 거짓말로 당신의 아내가 당신을 속였다는 사실을 느끼지 못할까?
어쨌든 이 경우가 어떤 점에서 내 경우와 다른가? 내 경우가 더 심각하다! 그 경우, 당신의 아내는-죄송합니다-당신과 사랑을 나눌 때 타인과의 사랑만을 가장하기 대문이다. 그러나, 내 경우, 나의 아내는 내가 아닌 어떤 사람의 현실을 두 팔로 움켜쥐고 있었던 것이다!
이 사람은 진정 현실적인 존재였으므로, 마침내 화가 난 나는 그의 현실에 나의 현실, 즉 나의 아내를 강요하면서 그를 파괴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는 결코 내 아내였던 적이 없었다. 그의 아내였다. 그녀는 이방인의 품안에 있는 듯, 공포에 질려서 모르는 사람을 발견했다. 그녀는 더 이상 나를 사랑할 수 없고 잠시도 나와 살 수 없다며 떠나버렸다.
그렇습니다. 앞으로 보게 되겠지만 그녀는 떠나버렸습니다.
p. 76-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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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반부의 복잡하고 어렵고 약간은 지루할 수 있는 얘기를
그냥 참고 따라갈 수 있을만큼 도입부는 정말이지,
굉.장.히. 흥미롭다.

아내인 디다에게 젠제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모스카르다는 어느 날 거울을 보고 자신의 코가 한쪽으로 휘었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는 혼란에 빠진다. 그는 그의 코가 휘었다는 것을 몰랐으므로, 코가 휘지 않은 모스카르다로 자신을 알고 있었는데, 사실 그는 코가 휜 모스카르다였던 것이다.

모든 문제는 여기에서 출발한다. 그 때부터 그는, 아무도 아니면서 동시에 십만 명인 어떤 사람을 추적하기에 온 몸을 던진다. 처음에는 자신만이 그랬던 게 아니라는 사실 정도로 위안을 받고 싶어 한다. 하지만, 가는 곧곧마다 거울이 있고, 코가 휜 모스카르다와 그밖의 모스카르다를 만날 수밖에 없다. 원수는 외다리에서 만나듯이-

그는 그와 "가까운 사람들 안에 살고 있던 다른 모스카르다를 모두 발견하여, 그들을 하나씩 없애버리기 위해" "미친 짓"을 하기 시작한다.

그는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가업으로 이어온 '고리대금업자인 모스카르다'와 또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아내에게만 젠제인 모스카르다'를 제일 공들여서 분해한다. 결국은 고리대금업자로서 만들어온 관계에 변화를 가져오고, 아내와의 관계도 변하게 되니까 어떻게 보면, 그가 의도한 '미친 짓'은 성공한 거라고 볼 수 있겠다. 하지만, 그러면 뭘 하나. 그는 또 다시 다른 형식 속에 갇힌다. 어쨌든 사람이 살아있는 한, 육체가 썩지 않는 한, 사회 속에 있는 한, 형식은 없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형식은 그렇게 다채롭지도 않다. 하나를 취하면, 하나를 버려야하는 극단적인 존재방식이니까.

그래서 문제다. 왜냐면, 한 그릇 안에 들어갈 게 너무 많고, 어떻게 다 비집고 들어간다고 하더라도 그건 또 변하게 마련이니까.

그래, 이렇게 복잡한 문제다. 누군가가 아무도 아니면서, 동시에 십만명, 혹은 그 이상이라는 사실은.
그래서 루이지 피란델로도 이 책에서 다 쏟아붓는다. 그는 혼잣말도 했다가 객관적으로도 말했다가 윽박도 질러봤다가 무시도 했다가 왔다갔다한다. 때로는, 너무나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하지만, 때로는, 스스로가 미친 놈 정도로 여겨질까봐 겁내기도 하고.
 
초반에 휜 코를 발견하고 방황하는 장면이나, 고리대급업자와 젠제를 해체하는 구체적인 이야기를 빼면, 그렇게 혼란스러운 머릿속 생각을 계속해서 얘기하는 탓에, 이 책은 가끔은 철학서같기도 하고, 지겹기도 하다.

형식이 한 가지인데, 내용은 다양하고 유동적이라서 괴로운 것처럼,
할 말은 한 가지이지만, 말하는 방법은 수도 없이 많고, 변하니까 그렇게 계속해서 변태를 거듭한다. 한 권의 책 안에서, 피란델로의 고민이. 그리고, 그럴 수밖에는 없다는 점을 충분히 이해한다.

아무도 아닌, 동시에 십만 명인 어떤 사람이 쓰는 책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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