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항아리 - 이태리작가 작품선 2
루이지 피란델로 지음, 장지연 옮김 / 예니 / 200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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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지 피란델로는 말년에 희곡을 쓰는 데 힘을 쏟았다고 한다. 우리나라에 번역된 책을 찾기는 쉽지 않지만 20세기 초반에는 희곡으로 굉장한 인기를 끌었고 노벨상도 받았다.

 

내가 구할 수 있었던 '바보'라는 제목의 희곡과 '항아리'라는 제목의 희곡은, 휘어진 코를 발견한 것 때문에 그렇게나 심오한 방황을 하는 모스카르다의 이야기만큼, 기발하고 재치 있다.


<바보>의 줄거리는 이렇다,

 

(애석하게도 지금 이름은 생각 안 난다, 이탈리아 이름 어렵다-_-)
A
라는 사람이 자살을 했다.

 한 출판사 뒷방에 누워서 이 출판사의 편집장을 죽이고 죽을 생각으로 거사를 치르기 전에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던 B가 편집장이 하는 말을 듣는다.

 "기왕 죽을 거였다면, A C를 죽였어야 했어. 가치 있는 일 하나는 하고 죽었어야지! A는 바보야!"
(C
는 거물급 정치인이고, 편집장과는 반대성향이다)

 이 말을 들은 B는 사실, C가 편집장을 죽이라고 시켜서 온 거였다. 그리고 편집장의 말을 듣고 자극을 받는다. 그래서, B는 마음을 살짝 바꾸는데, 편집장에게 이차저차 해서 내가 너를 죽이러 왔는데 너를 죽이지 않을 테니 시키는 대로 각서를 쓰라고 하는 것.

내용인 즉,

"B는 총을 들고, 정말 편집장을 죽이러 왔지만 죽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비록 아무도 죽이지 않고 자살을 했지만 B는 바보가 아니다."

결국, B는 스스로 바보가 된다. 그렇게 자살하고 나면 편집장은 그 각서를 찢어버릴 테고, 그리고 나서는 다시 ‘B A보다 몇 백배는 더 바보야하고 말할 테니까.
 

<항아리>의 줄거리는 이렇다.

 

굉장히 돈 많고 인색한 올리브유 농장 주인 돈 롤로(이름이 생각난다, 아이러니하게 이름에 ''자가 들어간다)는 올리브유를 담을 커다란 항아리를 산다.

하지만 가격에 비해서 크기가 작고 왠지 부실하다고 불만이 많다. 게다가 노새꾼은 약속시간에 늦어서 열 받았다. 싸우러 간다.

그 사이에 농장 일을 해주는 일꾼들이 돌아온다. 그리고 항아리가 있는 창고로 갔는데, 아무 이유 없이 항아리가 쩍! 하고 갈라진다.

돌아온 돈 롤로가 흥분하며 그 책임을 일꾼들에게 떠 넘기고, 가난한 일꾼들은 항아리를 땜질할 땜장이를 생각해낸다. 땜장이는 본드로 간단하게 붙일 수 있다고 말하지만, 불안한 돈 롤로는 못까지 여러 개 치라고 말한다. 항아리에-_-

땜장이는 할 수 없어서, 못을 치기 위해서 항아리 안 쪽으로 들어간 다음, 밖에서 본드를 바르게 한다. 근데, 항아리 주둥이가 유난히 좁아서 빠져 나오지 못하고 안에 갇힌다.

돈 롤로는 항아리를 깨고 나오려면 돈을 물라고 하지만, 땜장이는 절대 돈을 물 수 없다고 한다. 그리고 어쨌든 일한 값을 받는다. 돈 롤로는 화가 나서 마음대로 하라고 하고는 돌아가고, 땜장이는 그 돈으로 일꾼들과 함께 술과 음식을 산 뒤, 항아리를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음주가무를 즐긴다.

화가 난 돈 롤로가 자다가 뛰어나와서 항아리를 뻥 차고, 항아리는 깨지고, 땜장이는 빠져 나오고, 돈을 물어주지 않는다.

 

줄거리만 들어도 너무너무 흥미롭고, 뭔가 깊숙하지 않은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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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니오 크뢰거 / 트리스탄 / 베네치아에서의 죽음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
토마스 만 지음, 안삼환 외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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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하면 사람이란 상대를 완전히 판단치 못했을 때 상대를 사랑하고 존경하는 것이다. 그리움이란, 인식이 부족해서 생기는 소산인 것이다."

 

관계 맺기란 편견 만들기가 아닐까.

 

적어도 관계가 깊어지기 전에는 관계를 맺고 있는 대상에 대한 무한한 상상의 공간이 열린다. 내가 상상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의 모든 것이 그이고, 이 때에는 오히려 상상 밖 공간까지 열린다.

 

하지만 직접적인 관계 맺기를 통해서 우리는 이전의 상상항목들에 수정, 혹은 삭제만을 하기가 쉽다. 그 항목에 미처 넣지 못했던 것들은 미안하지만 탈락시킬 수밖에 없다. 억지로 받아들인 경우에도 그것은 그가 아닌 내게 맞춰진다.

 

그러면서 우리는 그 사람을 내게 맞는 옷으로 재단한다. 어느 신화에서처럼 침대에서 튀어나온 팔, 다리를 잘라내는 식으로 우리는, 끊임없이 움직이고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그것을 재단하다 보면, 그 재단이 끝나기도 전에 그것은 이미 내가 알고 있던 그가 아니잖아. 하고 내팽개쳐버리기도 한다.

 

자기에게 맞추어진 인물은 이미 스스로에게는 인식 불가능한 먼 대상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토마스 만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하기는 힘들다. 왜냐하면 상대를 완전히 판단하려는 것부터가 어딘가 불편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상대를 판단하지 않으면 인식은 저절로 따라온다. 정확하고 예측 가능한 인식이 아닌, 매 순간순간 부딪히는 그때그때의 인식이 진짜라고 믿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그 대상에 대한 굉장한 집중력을 필요로 한다.

 

대상에게, 그에게, 그녀에게 집중된 인식은 자연스럽게 그리움을 불러일으킨다.

 

베니스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아셴바흐는 끊임없이 이국의 것으로부터 유혹을 받는다. 모든 이국 취향은 이길 수 없는 욕망이고, 그래서 늘 죽음을 동반한다.

 

이국적인 게 뭐 어떤 건가.

 

인간은 자기에게 없는 것은 사랑할 수 없는 존재이므로, "이국적"이라는 바로 그 속성마저도 실제로는 자기 내부에서 늘 꿈틀거리고 있는 그런 것, 혼자 있을 때나 또렷하게 들려오는 소리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가장 깊숙이 숨겨진 무의식 같은 것이라고나 할까. .

 

아셴바흐를 베니스까지 끌고 갔고, 탓치오를 데려다 놓음으로써 발목을 붙잡고, 열에 시달리면서도 분리되지 않는 미친 환상들과 함께 하며, 결국은 이국의 병으로 죽고 말도록 하는 것이 바로 이국적인 모습을 하고 있는 자신, 스스로에 대한 취향, 무의식에 대한 지향성은 아닌가.

 

영화 베니스에서의 죽음은 토마스 만의 작품을 영화로 만든 건데, 1971년 작이고, 이탈리아 영화이고, 암튼 좀 지루했다. 소설 속, 바로 그 소년 탓치오를 연기할 배우를 골라낸 취향도 지금으로서는 조금 느끼하달 밖에 달리 표현하기가 힘들다, ,,,

 

하지만, 영상에 신경을 많이 썼다고 하는 만큼 화면이 아름답다. 그리고 요즘 영화에서는 보기 힘든, 영화 속에 풍성한 여백이 느껴지는 점도 좋았다.

 

+ 어쨌든, 토마스 만의 소설은 조금 지겹다-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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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형의 집 밀레니엄 북스 23
헨리 입센 지음, 곽복록 옮김 / 신원문화사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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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작품은 때로 그 작품이 탄생한 시대적 배경에 대한 이해 없이는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할 수도 있단 생각이 든다.

 

인형의 집이 당시 일으켰던 파문에 그 이유에 대해서 들어보지 못했다면 나는 <인형의 집>의 유명세에 동의하기 힘들었을 것 같다. 지금도 여전히 좀 그렇지만 암튼 노라의 변화는 너무, , 갑작스럽다.

 

노라의 남편이 위기의 상황에서 숨겨두었던 속물 근성을 너무 갑자기 폭발시키는 것이 노라를 자아 찾기의 길로 인도했지만 현대를 살고 있는 지금의 나로서는 그것만으로 노라의 과감한 선택을 100%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긴 힘들다.

 

한 인간존재의 인간조건에 대한 자각, 우리가 늘 숨기고 사는 진짜 우리라는 존재가 가진 정신의 피폐성 혹은 폭력성, 그리고 달라진 여성의 행동 정도가 이 작품의 쟁점일 듯 싶다.

 

부모님의 손에 인형으로 자라, 더 큰 인형이 되어 또 다른 작은 인형들을 키우고 있는 인형의 집과 한 인형의 (아무리 생각해도) 갑작스러운 깨달음, 그리고 탈출.

 

모든 깨달음이라는 것이 어떻게 보면 다른 사람의 눈에는 다 이렇게 갑작스러운 것처럼 보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그런 깨달음과 과감한 선택을 하기까지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수많은 발버둥 혹은 입질이 필요한 것임을 생각하면 노라의 경우는 암튼 갑작스럽다.

 

어쩌면 초기 사실주의 극에 대한 극히 개인적 취향 탓일까.

 

하지만 무슨 주의’, 무슨 사조라는 꼬리표가 안 붙어도 그 안에 들어있는 것이 진짜배기라면 그 꼬리표에 상관없이 그 속이 남는 것이 진짜 진짜배기 아닐까.

 

시대적 배경이나 정황은, 작품을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요소는 될 수 있겠지만 전체를 황금으로 바꾸어주는 무슨 마법은 아니다. 작품이 발표되는 당시는 물론, 지금 봐도 늘 새롭고 충격적인 작품들이 우리 주변에는 많이 있으니까 말이다.

 

(문학사조상 중요한 작품이 별것 아닌 한 개인의 취향으로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게 될까 봐 걱정된다. 아 소심하다. 단지 개인적 취향임을 밝히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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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의 노벨레 (구) 문지 스펙트럼 9
아르투어 슈니츨러 지음, 백종유 옮김 / 문학과지성사 / 199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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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투어 슈니쯜러 | 꿈의 노벨레

my bloody valentine = (when you wake) you're still in a dream

 

욕망을 까발리는 순간 우리는 환상으로 들어간다. 환상은 욕망을 강화시키는 정력제 같은 것이지만 그렇다고 환상의 파괴가 욕망의 부재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 두 가지는 결코 떨어지지 않지만 그 합이 일정한 것도 아니다. 서로 기생해 살아남는 방식만이 유효하다.

 

[꿈의 노벨레]에서 그가 겪은 현실이 꿈이라 해도 그녀가 꾼 꿈이 현실이라 해도 그들이 만난 건 그들의 다른또 다른 모습에 불과하다. 역설적이게도, 낯설다고 느낄수록 더 깊이 자기 자신과 관련되어 있다. 모든 것이 나다.

 

내가 나와 제일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던 것, 꿈이길 바라는 것, 그랬으면하고 바라는 것, 아니길 바라는 것까지 모든 게 나고, 나가 아닌 나고, 나가 아니었음 하는 나고, 나나 나였음 하는 결국 나다.

 

태엽 감긴 인형처럼 어떤 힘이나 원리에 의해 자동적으로 살아지고 있다면 태엽이 풀리는 짧은 순간도 불길하다. 그 찰나의 순간은 완전히 낯선 것이기도 하고 너무나 익숙한 것이기도 해서 그들은 이러나 저러나 영원히 벗어나지 못한다. 잠시 잊어버리려고 해볼 수는 있어도 버릴 수는 없다. 다시 결국은 돌아가게 돼 있고, 한 번 돌아가면 그 이전으로 되돌릴 수 없다.

 

+) 이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아이즈 와이드 샷>을 스탠리 큐브릭이 완성하지 못하고 죽었기 때문일까, 아무리 그래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한계를 벗어나기가 힘든 탓일까. 소설을 읽지 않고서야 아이즈 와이드 샷이 큰 의미를 가질 수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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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천에는 똥이 많다
이창동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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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동 | 녹천에는 똥이 많다

suede = stay together

영화 "오아시스"의 활약덕분에, 대형도서관에서나 발견되었을 이창동의 92년작 소설집이 2002년 10월 문학과 지성사에서 재발간 되었다. 그의 최근작인 "오아시스"로 이창동을 기억하고 있다면, 이 소설집의 재발간은 다소 거북한 일이 될지도 모르겠다. 이창동 스스로가 그의 최근작을 '경계에 관한 영화'로 규정짓고 있지만, 바로 전 작품까지만 하더라도 진흙탕 같은 질펀한 현실 속으로 우리를 자꾸만 끌어당기던 그가 아니었던가.

이창동은 아마도 선천적으로 꾸미거나 둘러대는 것에 몹시 약했거나, 병적이면서도 의식적인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그가 소위 예술이라는 것에 가치를 두기 시작하는 시기는 그야말로 극심한 사회적 병폐 속에 인간이라는 가치는 변두리로 밀려나 있던 7, 80년대였던 것이다.

이런 그의 표현방법을 사람들은 '비판적 리얼리즘'이라 이름 붙였다. 그의 등장인물들은 하나같이 사회에서 떠밀려 있거나, 스스로 현실에서 멀어지기를 선택하며, 그들은 전자에 비하면 오히려 용감한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이창동이 관심을 가지는 쪽은 후자 쪽이 아니다.

이창동의 관심사는 사회구조에 의해 노골적으로 밀려났던가, 밀려나지 않기 위해 그 속에 어정쩡하게 뒤섞여 끽 소리도 내지 않는 이들이었다. 그런 그들을 그는 철저하게 냉혹한 현실 속에 밀어 넣었고, 어느 순간에 그들로 하여금 정신적 무력감의 끔찍한 마지막 순간들을 경험하게 한다. 그래서 그의 소설은 영화보다 훨씬 잔인하며, 그 잔인성으로 무장된 내러티브로 읽는 이들을 수갑채운다.

이 소설집에는 5편의 중■단편 소설들이 실려있는데, 5가지 모두가 앞에서 언급한 범주를 벗어나지 않으며, 그 형식상 구조 또한 너무나 단순하다. 그가 현실을 꿈과 판타지(이 판타지라는 것은 영화 "오아시스"를 경계에 세우고, 앞으로 꾀하게 될 변화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것으로 예상된다.)로 포장할 수 없었던 것처럼, 그의 문장 역시도 너무나 메말라 있다. 그의 글을 읽고 있자면 마치 오래되어 지린 냄새를 풍기며 딱딱하게 굳어버린 오징어를 씹는 기분이면서도, 그 인물이나 이야기구조가 너무도 사실적이어서 끝까지 그를 따라가고야 마는 것이다.

여기 실린 길고 짧은 소설은 꼭 한 번쯤은, 어디에선가는 분명히 있었을 법한 이야기들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는 7, 80년대를 피끓는 젊음으로 살아온 세대이며, 조악한 현실이더라도 그것과 동떨어진 삶을 사는 것을 경계해온 작가이기 때문이다.

"진짜 사나이"나 "용천뱅이"는 소신을 지키며 사는 데에 우리 사회가 얼마나 인색한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며, "운명에 관하여"는 인생을 지나친 우연의 장단에 맡겼지만, 우리는 그것이 결코 억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안다. '똥구덩이에 엉덩이를 깔고 앉은 채 어린애처럼 소리내 울 수밖에' 없는 것이 인생이다("녹천에는 똥이 많다"). 우리는 그의 이야기에서 그토록 버리고 싶었던 나 자신과 주변의 모습을 다시 한번 더 절감하게 된다.

그리고 이창동은 마지막으로 실려 있는 "하늘燈"에서 지금은 우리가 역사의 터널 속에 있을 뿐이라는 수임의 말에 '터널 저쪽은 도대체 뭐가 있는 거지?'라는 반문을 던진 채 끝을 맺는다. 그러나 우리는 비극 속에 비극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듯이 우리는 역시 그를 통해 그래도 터널을 건너봐야겠다는 생각을 한 번 더 다지게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현실이 끔찍하게 두렵다면, 아직은 이창동을 피해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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