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루다의 우편배달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4
안토니오 스카르메타 지음, 우석균 옮김 / 민음사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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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인광고를 보고 왔습니다."

마리오가 버트 랭커스터 뺨치는 미소를 지으며 관리에게 말했다.

관리는 지루해하며 물었다.

"자전거 있나?"

마리오는 얼씨구나 싶었다.

"네."

관리는 안경을 닦으면서 말했다.

"좋아. 이슬라 네그라를 담당할 우체부 직이야."

"우연이네요. 제가 이슬라 네그라 옆 포구에 살거든요."

"그것 참 잘됐군. 하지만 문제는 수신인이 단 한 사람뿐이라는 거야."

"한 사람뿐이라고요?"

"그렇다니까. 포구 사람들은 모두 까막눈이야. 계산서조차 못 읽으니까."

"그 수신인이 누구죠?"

"파블로 네루다씨."

마리오는 한 사발은 족히 될 침을 삼켰다.

"하지만 그건 쌈박한 일이잖아요." -p. 17-18쪽

한없는 인내를 지닌 태평양도 못한 일을 산안토니오이 단출하고 정겨운 우체국이 이루어냈다. 마리오는 동이 트면 휘파람을 불며 일어났고 코도 막히는 법 없이 멀쩡했다. -p.21쪽

심지어 두어달 동안은 초인종으로 쓰는 종을 칠 때마다, 절묘한 시구를 빚어낼 찰나에 있는 시인의 영감을 살해하는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p.22쪽

두번째 월급봉투를 받았을 때 당연하다는 듯이 로사다 판 <신 일상송가>를 샀다. 꿈에 그리던 산티아고여행을 포기해야만 했을 땐 일말의 슬픔이 밀려왔다. 거기에다 약아빠진 서점 주인이 "다음 달에는 <제3송가>를 준비해놓습죠."라고 말했을 때는 공포가 엄습했다.-p. 23-24쪽

네루다는 지쳐서 말을 끝맺었다. 그리고 남은 힘으로 마리오에게 포구로 가는 길을 가리켰다. 하지만 마리오가 적절히 초를 쳤다.

"제기랄. 나도 시인이나 되었으면."

"허허! 칠레에서는 모두가 시인이야. 계속 우체부를 하는 게 더 독창적이라고. 자네는 적어도 많이는 걸으니 살은 안 찌잖아. 칠레 시인들은 다 배불뚝일세." -p. 28쪽

바다의 모든 것이 웅변적이었건만 마리오는 침묵만을 지켰다. 너무도 굳게 침묵을 지켰기에 자신과 비교하면 돌멩이들까지도 수다쟁이 같았다.-p. 35쪽

마리오는 소녀가 골을 넣어 쇠골대가 울렸을 때 그녀 쪽으로 시선을 들며 가능한 한 최고로 꼬리치는 미소를 지었다. -p. 36쪽

그 꼬락서니란.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위해 잔도 샴페인도 없이 건배를 제의하는 바로 그 모습이었다.
-p. 37쪽

마리오가 프롤레타리아적인 근성을 발휘하여 비틀스보다 더 덥수록한 머리를 하고 다녀도 참을 수 있었다. -p. 39쪽

마리오는 곁으로 갔고, 말을 다시 잇기 전에 십초간이 헐떡임을 네루다에게 선사했다. -p. 41쪽

"과부가 속담포병대를 이끌고 메타포 전쟁에 임하기로 한 것 같아 정말 두렵군." -p. 94쪽

청년 마리오는 과부가 자손만대에까지 기억될만큼 문을 쾅 닫으며 나가는 것을 보았다. -p. 96쪽

네루다가 덤덤한 표정을 말했다.

"자, 주점으로 가서 그 유명한 베아트리스에 대해 알아보자고."

"농담이시겠죠."

"진담일세. 주점에 가서 포도주 한 잔 하면서 자네 애인을 한 번 보자고."

"우리가 같이 있는 걸 보면 감동해 까무러칠 거예요. 파블로 네루다씨와 마리오 히메네스가 함께 주점에서 포도주를 마신다! 까무러치고말고요!"

"그건 너무 슬픈 일이군. 소녀에게 시 대신 비문을 써줘야 한다면."-p. 47쪽

"테이블 축구이 제왕이시여. 무엇을 드시겠나이까?"

마리오는 시선을 소녀의 눈에 고정시키고는 삼십초동안 '내가 누구지, 내가 지금 어디 있지, 숨은 어떻게 쉬지, 말은 어떻게 하지?' 등등 자신을 억누르는 치명적인 충격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정보를 떠올리려고 기를 썼다. -p. 50쪽

마리오는 트럭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떠나는 것을 보았다. 마리오는 그 흙먼지가 아예 자신을 생매장시켜 버렸으면 하는 심정이었다.

그러나 마리오는 목숨을 끊지는 않으리라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시인에 대한 충정이 우러나 삼천쪽에 달하는 작품전집을 한 쪽 한 쪽 다 읽을 때까지는 결코 죽을 수 없었다. 첫 오십쪽은 시인이 집 마당에 있는 종루 아래서 해치워버렸다. 그러는 사이 바다가 마리오를 산란하게 만들었다. 네루다에게는 절묘한 이미지를 숱하게 안겨준 바다이지만 마리오에게는 단조로운 대사를 읽어주는 사람같았다. 그저 '베아트리스, 베아트리스.'라는 후렴을 선사할 뿐이었다. -p. 52쪽

흰옷차람이 남자 두명이 그 시끌시끌한 차에서 내리더니 함박웃음을 지으며 사람들에게 다가왔다. 인근에서는 보기 드문 그런 웃음이었다. 이발 빠진 사람들이 많은 포구에서 함박웃음은 호사스러운 것이었기 때문이다. -p. 53쪽

마리오는 먼저 토레 상표 공책에 습작을 한 메타포들을 가다듬은 뒤, 앨범에는 그중 최고의 것만 가려서 비누로 손을 정결하게 씻고 시인처럼 초록색 볼펜을 쓸 작정이었다. -p. 57쪽

베아트리스는 나날이 아름다움의 극치를 향해 치달았지만 자신이 변화가 마리오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는 알지 못했다. -p. 58쪽

"손님 의견은 묻지 않았어요."

마리오는 가죽가방에 시선을 내리꽂았다. 가방 속으로 파고 들어가 포도주 병을 벗삼았으면 하는 심성이었다. -p. 59쪽

"이봐요, 따님. 정치와 시도 혼동할 정도로 똥오줌 못가리면 곧 미혼모가 되시고 말걸요. 마리오가 무슨 말을 했지?"

베아트리스는 혀끝에 맴도는 말을 몇초간 뜨거운 침으로 다듬었다.

"메타포요." -p. 61쪽

"'그대 머리카락을 낱낱이 세어 하나하나 예찬하자면 시간이 모자라겠구려.' 그러더라고요." -p. 63쪽

"엄마!"

"넌 지금 풀잎처럼 촉촉해. 후끈 달아올랐을 때에는 약이 딱 두가지밖에 없지. 교미나 여행"

어머니는 딸이 귓불을 놓고 침애 밑에서 가방을 꺼내 침대 위에 패대기쳤다.

"가방 싸!"

"싫어요! 여기 남을 거예요!"

"강물은 자갈을 휩쓸어 오지만 말은 임신을 몰고 오는 법이야. 가방 싸!"

"전 스스로를 지킬 줄 알아요."

"흥! 스스로를 지킬 줄 아신다고요! 제가 보기엔 손끝만 스쳐도 무너질 것 같은데요. 이 몸이 그대보다 훨씬 먼저 네루다 시를 읽었다는 것을 기억하시죠. 남정네들이 달아오르면 간덩이까지 시로 변하는 걸 모를 것 같으신가요?" -p. 65쪽

"기막혀! 남자애 하나가 내 미소가 얼굴에서 나비처럼 날갯짓한다 그랬다고 산티아고에 가야 되다니."

과부역시 열을 올렸다.

"닭대가리 같으니! 지금은 네 미소가 한마리 나비겠지. 하지만 내일은 네 젖통이 어루만지고 싶은 두마리 비둘기가 될 거고, 네 젖꼭지는 물오른 머루 두 알, 혀는 신들의 포근한 양탄자, 엉덩짝은 법선 돛, 그리고 지금 네 사타구니 사이에서 모락모락 연기를 피우는 고것은 사내들이 그 잘난 쇠몽둥이를 달구는 혹옥 화로가 될 걸! 퍼질러 잠이나 자!" -p. 67쪽

마리오는 목구멍에 온갖 메타포가 걸린 채로 일주일을 보냈다.-p. 69쪽

마리오는 혀끝으로 추켜올리고 싶은 그 미니스커트 주인공의 그림자라도 나타날까 하여, 오후마다 주점 바깥에서 비탄에 잠긴채 흘러나오는 <돛단배>를 들었다. -p. 69쪽

애교로 봐줄법한 낭만에 사로잡힌 마리오는 공들인 메타포 하나하나와 한숨 하나하나 그리고 장차 자신이 귓불과 사타구니엣 예고편처럼 노닐 소녀의 혀가, 정액을 영글게 하는 대우주의 기라고 상상했던 것이다. -p. 70쪽

"선생님, 오늘은 메타포를 생각할 기분이 아니에요. 제발 편지를."

네루다는 버터칼로 편지를 뜯었다. 일부러 굼뜨게 굴어서 일분 이상이나 걸렸다. 시인은 '복수는 신들이 즐거움이란 말이 맞군.'이라고 생각하면서 봉투에 붙어 있는 우표를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우표 속 위인의 생동감 있는 턱수염을 시시콜콜 뜯어보고, 산안토니오 우체국의 희미한 직인을 판독하는 척하고, 발송인 이름 위에 들러붙은 바삭거리는 빵 한조각을 떼어냈다. 어떠한 추리영화의 거장도 마리오를 그런 서스펜스로 몰아넣지 못했을 것이다. -p. 73쪽

"따님에게 무슨 말을 했는데요?"

과부가 침을 뱉듯 말했다.

"메타포요."

시인은 침을 꼴까닥 삼켰다.

"그런데요?"

"네루다씨. 메타포로 제 딸을 용광로보다 더 후끈 달아오르게 했다니까요!"

"지금은 겨울입니다, 부인."

"불쌍한 베아트리스는 그 우체부 때문에 완전히 맛이 가고 있단 말입니다. 가진 것이라곤 알량한 무좀균뿐인 작자때문에 말입니다. 발은 병균으로 득실거리는 주제에 주둥아리만 살아서 나불대죠. 주둥아리도 그냥 주둥아리가 아니라 칡넝쿨처럼 얽혀오죠. 가장 심각한 것은 뻔뻔스럽게도 제 딸을 꼬드기는 데 쓰는 메타포들이 당신 책에서 베낀 거라는 사실입니다."

"그럴리가요!"

"그렇다니까요! 처음엔 순수하게 나비 같은 미소 어쩌고 저쩌고 했죠. 하지만 다음번에는 벌써 딸에게 젖가슴이 두줄기 불꽃같다고 말했어요."

시인이 캐물었다.

"그가 사용한 이미지가 시각일까요, 아니면 촉각일까요?" -p. 80쪽

"과부이 협박이 빈말일수도 있지만 진짜라면 자네는 '삶이 칠흑처럼 어둡다'는 그 상투적인 어구를 평생 뇌까릴 수 있는 권리를 얻을거야." -p. 83쪽

"하지만 저는 젊고 건강한걸요. 아코디언보다 더 팽팽한 허파도 있고요."

"하지만 베이트리스 때문에 한숨쉬는 데만 허파를 사용하잖아. 벌써 유령선 뱃고동 같은 천식소리가 나는 걸." -p. 84쪽

나를 하얀도포를 입은 서글픈 왕으로 만들어버려. 벌써 입까지 차올라 입술을 덮어서 아무말도 할 수 없네. -p. 10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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