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과지성 시인선 294
김기택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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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두가 이렇게까지 고집을 부린 적은 없었다.


제 안에 무엇이 들어왔는지도 모르고
소가죽은 축축하고 차가운 발을 힘주어 감싼다.
-(소가죽 구두)쪽

물렁물렁한 힘이 조금씩 제 몸을 녹이며 건조한 곳들을 적셔 길을 냈던 자리, 얼룩
-(얼룩)쪽

한번도 떠보지 못한 눈과
한번도 뛰어보지 못한 심장과
물 한 모금 먹어본 적 없는 노란 부리와
똥 한번 싸본 적 없는 똥구머이
자유롭고 평등하게 뒤섞야 응고된
계란 프라이-(계란 프라이)쪽

소가 가진 말은 다 눈에 들어 있는 것 같다.


마음이 한 움큼씩 뽑혀나오도록 울어보짐만


수천만 년 말을 가두어 두고
그저 끔벅거리고만 있는
오, 저렇게도 순하고 동그란 감옥이여-(소)쪽

벙어리장갑처럼 뭉툭한 혀


그가 수박씨 다음으로 내뱉은 말들-(혀)쪽

휘어진 등뼈
-(직선과 원)쪽

등을 구부리고 엎드려-(황토색)쪽

비둘기들은 검은 먼지와 매연을 뒤집어쓰고
언제나 아스팔트를 보호색으로 입고 다녀서
상계역에 비둘기들이 사는지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상계동 비둘기)쪽

둘은 지휘봉처럼 떨리는 팔을 힘차게 휘둘렀고


그들은 때로 너무 격앙되어
상대방 손과 팔 사이의 말을 장풍으로 잘라내고
그 사이에다 제 말을 끼워 넣기도 하였다.
나는 그들의 논쟁에서 끓어 넘친 침들이
내 얼굴로 튈까 봐 자주 움찔하였다.-(수화)쪽

습관화된 적개심이 욕이 되어 튀어나왔다.


아무리 급해도 도저히 빨라지지 않는 걸음이었다.


속으로는 이미 오래전에 죽어본 걸음이었다.-(무단 횡단)쪽

눈물은 눈알을 밀어낼 듯 쏟아져나왔으며-(재채기 세 번)쪽

방바닥이 발바닥에 와 닿지 않는다.-(다리가 저리다)쪽

작살 같은 햇살을 꽂아본다. 액셀러레이터와 엘리베이터에 익숙한 발바닥으로 흙을 맛나게 핥아본다. -(주말 농장)쪽

갑자기 그 위에 엉뚱한 미래가 겹쳐보였다.
어린 토끼 한 마리를 가슴에 안아보니
뜻밖에도 따뜻하고 부드러운 털 속에서 떨고 있었다.
토끼의 두려움은 내가 쓸데없이 걱정한 미래와 상관없이
오로지 지금 내 팔에만 집중되어 있었다.-(토끼)쪽

피리 구멍 같은 코는 얼마나 정확하게 바람을 조절하던지
배는 큰북처럼 얼마나 탄력 있게 진동하던지


숨 쉴 겨를도 없이 말들이 쏟아져나왔으나
어느 발음도 이에 깨물리거나 혀에 걸려 넘어지지 않았다-(수다 예찬)쪽

상한 데 없는 맑고 어린 웃음이 경로당에서 나온다.-(전자레인지)쪽

그 나이테의 무늬 속에는 생명이 바삐 드나들던 맑은 소리와 함께


아랑곳하지 않는 저돌적인 생명,-(가로수)쪽

말린 명태들은 간신히 물고기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물고기보다는 막대기에 더 가까운 몸이 되어 있다
-(명태)쪽

막힘 없이 춤추는 물로 건축한
얼음의 결정체처럼


겨울 하늘에 검은 점으로 촘촘하게 박혔다.
-(교동도에서)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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