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전야
산도르 마라이 지음, 강혜경 옮김 / 솔출판사 / 2004년 3월
품절


이 '시민 계급의 집'의 제일 아래층부터 꼭대기 층까지 다양하게 살고 있는 청년들은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다! 크리스토프는 그들의 준비를 예감하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더 이상 그 무리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p. 34쪽

재판정에 선 두 사람은 대개 같은 이유로 서로를 비난했다. 둘 중 하나가 죄를 짊어지긴 했지만 재판관은 두 사람 모두에게 잘못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또는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다! 잘못은 어쩌면 엉뚱한 데 있을지도 모른다. -p. 73쪽

이 장애, 이 감전 같은 현상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까? 오늘 무슨 일이 있었던가, 아니면 어제는? 또는 일 분 전엔? 어쩌면 그렇게 대답해선 안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간혹 영혼 속에 들어 있는 확성기가 자기 성격에 근거한 한 가지 대답만을 강요해서 다른 대답이 불가능한 순간들이 있다. -p. 114쪽

누이는 놀라우리만큼 느긋했는데, 그녀의 그런 무심함은 정말이지 배울 만했다. 지글지글 타는 석탄 위에 눕는 무술인처럼 그녀에게도 특별한 비법이 있는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크리스토프는 곧 너무 지나친 비약이라고 스스로를 질타했다. 지글지글 타는 석탄이라니. 그러다가 문득 자기도 모르게 말이 튀어나오고 말았다.

"서로 좀 더 참았어야만 했어." -p. 122쪽

그라이너는 그 말을 입에 올리기가 민망한 것처럼 재빨리 말하곤 마치 변명하듯이 조금 비굴한 표정을 지었다. -p. 201쪽

"...그것의 정체를 전문적으로 해명해보려고 시도했다네. 그렇지만 정체가 밝혀졌다고 해서 현상의 본질이 바뀌는 건 아니었어..." -p. 203쪽

"...사랑은 더 이상 한가로운 유희가 아니라 일종의 경쟁이며 시합이 아닐까?..." -p. 204쪽

"...안나는 항상 멀리 떨어진 곳에서 실눈을 뜬 채 나를 지켜보았네. 그 거리는 잴 수가 없었어. 오로지 나 혼자만 그녀를 느낄 수 있었네..." -p. 205쪽

"...바로 그 순간...... 아아,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는 나도 모르겠네. 그저 그 순간이 어땠는지 말할 수밖에 없을 것 같군. 아마 믿어지지 않을거야. 갑자기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들었거든. 주위를 둘러보았지.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네.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었어. 바로 그 곳, 그 시간, 내 집에 말일세. 문에는 내 이름이 적힌 문패가 달려 있고 전화번호부엔 우리 집 전화번호와 주소가 나와 있고 눈앞엔 내가 산 가구들이 진열되어 있었어. 방에선 안나가 자고 있고...... 그런데 모든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거야. 그 상황을 말로 설명하기가 어렵군. 나도 모르겠어, 왜 그랬는지. 도대체 무슨 의미가 필요한 거지? 꼭 의미가 있어야만 하는 건가? 처음부터 어떤 목적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그저 이런 게 현실인데......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p. 225쪽

"...그렇지만 방금 전 또는 이미 오래전부터 뭔가 일어난 게 틀림없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네. 우주 속에서 이미 오래전에 사라져버린 별빛을 지구에서는 한참 후에야 알게 되는 것처럼. 그래, 그건 이미 옛날에 일어난 거야. 그렇지만 그게 언제였을까?..." -p. 227쪽

"자넨 아마 잘 모를 걸세. 건강하니까. 억압되어 있거나 우울한 일 따윈 없잖나."

그 말에 크리스토프는 얼굴이 창백해졌다. 이마에 식은 땀이 맺히자 손수건을 꺼내 이마를 닦았다.

"...결혼 구 년째가 되던 해에 우린 결국 이혼하기로 결심했네. 소문을 들은 친지와 동료들은 모두 충격을 받고 슬퍼했다네. 그때까지 우린 아주 모범적인 부부였거든. 이상적인 부부로 늘 우리를 꼽을 정도였으니까. 우린 서로를 단 한 번도 속인 적이 없다네. 싸운 적도 없어. 그저 부부가 비밀스럽게 간직해야 할 것들을 극복할 수 없었을 뿐이야. 자기만의 것, 아까 말한 바로 그것이지. 그리고 안나는 여행을 떠났네. 육 개월동안 그녀는 돌아오지 않았어." -p. 235쪽

"...결국 이런 방식으로도 살 수 있어......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우리와 비슷한 방식으로 살고 있고. 모든 사람이 완전한 것만을, 하나의 진정한 해결책만을 찾으려고 한다면 도대체 우리의 삶이 어떻게 되겠나!..." -p. 238쪽

"...그 다음엔? 신혼 초처럼 함께 가구를 고르는 건 어떨까? 모든 부부가 대개 그렇게 시작하는데 끝날 때도 그러지 말라는 법은 없지 않은가..." -p. 2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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